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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65화 (65/115)

65화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도 좋다고? 또라이 새끼.’

차라리 벽이랑 얘기하지. 나는 답답함에 가슴을 몇 번 내려쳤다. 뭐가 됐든 나는 녀석을 받아 줄 수가 없다. 아니, 녀석만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나는 지선우를 제외한 타인을 사랑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 지금도, 아마 앞으로도.

입술을 깨물며 녀석을 쳐다봤다. 여전히 축 처진 채 내 눈치만 보고 있는 병신 새끼.

나는 어쩔 수 없이 저 녀석의 마음을 단념시킬 다른 방법을 고심했다. 그냥 연락을 차단하거나 경고를 어길 시 패 죽여도 좋을 텐데 굳이 그런 쉬운 길을 두고 멀리멀리 돌아 저 녀석이 자발적으로 포기할 방법을 찾으려 했다. 정말 굳이 말이다.

그러던 중 문득 아까의 사건이 떠올랐다.

‘「나는 브릭트스컴트 ‘송여환’ 에스퍼의 약혼자거든!」’

내 신경을 거슬렀던 아쿠벨의 꼬맹이. 아무런 상관도 없는 내게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주절대던 그 말. 생각해 보면 거기서부터 일이 꼬였다. 그 망할 꼬맹이만 아니었어도 정원에서 편히 시간을 보냈을 텐데. 그랬다면 송여환을 만나 이런 불편한 순간을 겪지 않아도 됐을 거다.

……아니, 애초에 약혼자가 있다는 놈이 왜 나한테 들러붙지 못해 안달인 거야. 이상하잖아.

‘아, 설마…… 위로랑 도움 몇 번 좀 받았다고 그새 내가 만만해진 건가? 아니면 무슨 내기라도 한 거 아냐? 짝을 잃은 낙유성이 몇 번 만에 넘어오나 그딴 거.’

그래, 원래 나를 싫어하던 놈이다. 갑자기 좋아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았다.

‘내가 너무 멍청했어. 내기인 거야. X발. 그런 거라고.’

좋지 않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몸집을 불려 갔다.

‘아니면 정말 동정심이라도 들었단 건가. 가이드를 잃은 머저리 에스퍼에 대한 측은지심 뭐 그런 거? 그래서 약혼자도 있는 새끼가 저따위 눈길을 아무렇지 않게 던지나? 나한테? 감히?’

내가 잘못 생각했다. 납득이고 나발이고 헤픈 새끼한테 무슨 배려? 하, 이제 알겠다. 저 새낀 그냥 내가 재밌는 거다. 똑똑한 척, 잘난 척 굴던 놈이 말 몇 번에 등신처럼 구니까 웃겨서, 갖고 놀기 좋아 보여서 건드리는 거란 말이다.

나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곤 여전히 모르쇠 잡는 송여환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야. 질척거리고 싶은 거라면 네 잘난 약혼자한테나 해. 괜히 나 붙잡고 지랄하지 말고.”

“어?”

“함부로 몸 굴리고 다니는 거야 네 취향이니까 상관 안 하지만 난잡스러운 관계에 나까지 끼워 넣을 생각은 집어치우란 소리야. 난 너 아니더라도 요새 미칠 거 같거든? 아니면 뭐 가이드, 에스퍼 골고루 하나씩은 골라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거냐?”

“뭐, 뭐?”

끝까지 모르는 척하는 걸 보니 이 새끼도 참 난놈이다 싶었다. 나는 참지 않고 계속해서 폭언과 비슷한 말을 퍼부어 댔다.

그러던 중 가만히 앉아 있던 송여환이 다급히 일어나 내 팔뚝을 잡아챘다.

화라도 내려고? 그럼 지지 않고 한 대 후려갈겨 주마. 그렇게 내가 막 더한 소리를 내지르려던 찰나였다. 놈은 맹한 얼굴로 스스로를 콕 짚어 가리키며 물었다.

“약혼자?”

“어.”

“나?”

“어.”

“…….”

“…….”

“……제가요?”

끔뻑. 송여환이 모지리처럼 눈을 끔뻑거렸다.

* * *

한편 젠냐는 인생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은 참이었다. 이제껏 그 누구도 감히 자신을 이리 대하지 못했다. 젠냐 ‘아쿠벨’. 그 이름이 가져오는 권력과 부, 명예. 모든 게 젠냐를 지켜 주었으니까. 특히 그의 형인 자하르 아쿠벨의 그늘 안에 있다면 두려울 게 없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런 모욕을 당해?!’

젠냐의 두 눈에 독이 바짝 올랐다. 그는 옆에서 눈치를 보며 머리를 정리해 주는 예고르에게 괜히 소리를 질렀다.

「형님은 어디 계셔!」

버럭버럭하는 젠냐에게 예고르가 쩔쩔매며 위치를 알려 주었다. 젠냐는 이번 일을 그냥 넘길 생각이 없었다.

‘무조건! 되갚아 주고 말 테다!’

「자하르 형님! 형님! 젠냐예요!」

커다란 VIP 전용 귀빈실의 문을 걷어차며 들어간 젠냐는 곧장 제 형에게로 직진했다. 벨벳 재질로 이뤄진 체스터필드 소파에 앉아 신문을 읽고 있던 자하르는 늘 있는 일이라는 듯 우아하게 젠냐를 상대했다.

「젠냐, 노크를 해야지.」

「들어 보세요, 형님! 제가 큰 모욕을 당하고 왔다고요!」

젠냐는 흙이 묻은 제 옷을 보여 주며 아까 겪은 치욕에 대해 나불나불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런데, 자하르의 반응이 이상했다. 그는 젠냐가 뱉은 ‘낙유성’이란 이름에 크게 반응했다.

「젠냐. 다시.」

자하르가 신문을 내려놓으며 젠냐를 쳐다봤다. 일렁거리는 녹색 눈동자. 젠냐는 순간 주눅이 들었다.

‘형님이 왜 이러시지? 왜 내가 다친 것에 신경을 안 쓰시고 그놈에 대해 궁금해하시는 걸까? 평소라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바로 혼내 주겠노라 약조해 주셨을 텐데.’

바로 대답하지 않고 젠냐가 머뭇거리자 자하르가 손가락을 튕겼다.

「젠냐, 대답.」

「앗! 죄, 죄송해요.」

「그래서. 누구를 만났다고?」

젠냐가 다시 한번 낙유성의 이름을 거론하자 자하르가 벌떡 일어났다.

「형…… 님?」

자하르는 천천히 걸어 젠냐의 심복인 예고르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래, 그를 만났단 말이지.」

느긋하게 말을 뱉은 그가 순식간에 예고르의 뺨을 후려갈겼다.

짜악! 우당탕! 예고르는 일반인인 터라 에스퍼인 자하르의 힘을 이겨 내지 못하고 구석으로 날아갔다. 곰 같은 몸이 작은 종이처럼 구겨졌다.

「허억! 혀, 형니임!!」

갑작스러운 폭력에 깜짝 놀란 젠냐가 비명을 내지르며 종종걸음으로 예고르에게 달려갔다. 그 강하고 힘센 예고르가 단 한 방에 기절했다. 젠냐가 울먹이며 예고르의 뺨을 더듬었다.

「예고르으…….」

형님이 왜? 어째서? 젠냐가 원망 섞인 얼굴로 자하르를 올려다보다 흠칫 어깨를 좁혔다. 항상 상냥하기만 하던 자하르가 어느 때보다도 차가운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젠냐. 사랑스러운 내 동생.」

「……형니임.」

「그에게 다른 무례를 끼친 건 없는 거니. 솔직히 말하렴.」

「무, 무례요?」

젠냐는 당황스러웠다. 천박한 말을 한 것도 그놈이고, 폭력을 행사한 것도 그놈인데 왜 예고르를 때리고 본인을 문책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하나, 그런 의문을 품기엔 자하르의 기운이 너무나도 난폭했다. 젠냐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없어요…….」

자하르는 천천히 몸을 숙여 젠냐와 시선을 맞췄다. 호리호리하고 작은 젠냐와 달리 늘씬한 표범 같은 그가 큼지막한 손으로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손길은 퍽 다정했다. 마치 몹시 아끼는 물건을 다루듯이.

「그래, 실수가 없어야지. 네 남편이 될 사람인데.」

「네?」

젠냐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언제나 자랑스러운 형님이었으나 지금만큼은 그의 말을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자하르는 젠냐의 반응이 귀여운지 눈을 곱게 접어 웃었고, 젠냐는 불안한 얼굴로 자하르에게 물었다.

「형님, 제 약혼자는 ‘송여환’이라는 자라고…….」

「그럴 예정이었으나 방금 바뀌었어. 낙유성. 그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굳이 급 낮은 놈과 엮일 필요는 없지. 젠냐, 넌 내게 아주 소중한 존재야. 그러니 당연히 이 나라, 아니…… 세계에서 제일 높고 강하고 귀한 물건과 혼사를 치러야 하지 않겠니?」

「…….」

「그가 짝을 잃고 망가졌다 들었는데 네 얘기를 들어 보니 전부 헛소문이었던 모양이야. 브릭스트컴트라는 연줄을 얻지 못하는 건 아쉽다만, 그보다 더한 인류의 ‘최종병기’를 가질 수 있다면…… 뭔들 못 할까.」

「혀, 형님. 하지만 저는 그놈이 싫- 읍!」

자하르가 젠냐의 뺨을 한 손으로 잡아 들었다.

「젠냐, 나의 젠냐.」

「……으…….」

「네가 가이드로 발현돼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 아니? 난 널 위해 모든 걸 해 왔어. 네 어리광을 평생토록 받아 주었지. 네가 부족함 없이 귀족답게 살 수 있도록, 네 소원을 전부 들어주었단 말이다. 그러니 이젠 내게 보답해야지? 젠냐.」

이런 강압적인 모습은 처음이었으나 젠냐는 이 이상의 의문을 제기할 수 없었다. 그에게 있어 자하르는 언제나 하늘이었고, 옳은 정답이었으니까.

「의상을 갈아입어. 내 눈으로 확인도 할 겸, 네 부군이 될 분에게 제대로 된 예를 갖추러 가야겠다.」

자하르는 이후 곧장 비서를 불러들였다. 그러곤 젠냐를 다시 씻기고 꾸미라 지시했다. 심지어 그의 예쁘장한 금빛 머리카락을 검게 물들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젠냐는 찍소리 하나 못 하고 그대로 따라야 했다. 동시에 도대체 ‘낙유성’이 무엇이길래 형님이 이토록 변한 건지 궁금해졌다. 분명 전날까지만 해도 브릭트스컴트에서 얻을 이익에 대해 설명하며 ‘송여환’이란 자의 기분을 거스르지 말라고 당부했는데.

젠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새롭게 세팅이 된 채 자하르를 따랐다. 귀빈실을 나서자마자 붙어 오는 이국의 비서, 그의 안내를 받아 ‘남편’이 있을 방으로 걸어갔다. 걷는 동안 젠냐는 주변을 휘휘 둘러봤다.

‘한국이랬나? 아무리 봐도 조그만 곳이네.’

그가 보기엔 자하르가 관리하는 협회 반의반, 그 반도 안 되는 크기의 건물이 그다지 대단해 보이지 않았다. 고로 낙유성에게 큰 반응을 보이는 자하르 역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소문을 듣긴 했다. 유일무이의 SS급, 낙유성. 유럽 연합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이름이다. 싸워 보고 싶다는 놈이 강을 이룰 만큼 많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본 젠냐의 평가는 혹독했다.

‘그냥 양아치였는데.’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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