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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92화 (92/115)

92화

저 녀석이 좀 사람같이 생기고 사람처럼 행동한다고 해서 진짜 사람이 되는 건 아니다. 겨우 외형으로 그게 가능하다면 가차 없이 죽어 간 그 덩어리들이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애초에 그 실험체를 왜 네가 데리고 있는 거야. 따로 격리해야 하는 거 아냐?”

“김강민이 직접 맡긴 거야.”

까칠한 내 말에 송여환이 꿋꿋이 대꾸했으나 괜히 트집만 잡고 싶었다. ……송여환 멍청이. 실험체한테 정을 줘서 뭐 하려고. 나중에 후회나 하지. 그렇게 속으로 불만스레 투덜거리고 있을 때였다.

“우…….”

손에 따뜻하고 보드라운 무언가가 닿았다. 뭔가 싶어 쳐다보니,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꼬맹이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저번에 나를 올려다보던 그 덩어리처럼 아무 조건 없이 기뻐하고 반기는 눈동자가 내 모든 사고를 멈추었기 때문이다.

“이힛.”

배시시 웃는 꼬맹이를 보자 몸에서 힘이 주욱 빠졌다. 조금 과장을 더해 보자면, 오랜만에 평화를 마주한 기분까지 들었다.

“귀엽지?”

송여환이 히죽거리며 물었고, 이번엔 부정하지 않았다.

“근데 아기 때 모습은 짧을 거래.”

그렇다고 긍정도 하지 않고 침묵하자 머리를 긁적인 송여환이 내게로 다가왔다.

“성인……. 그러니까, 성체가 될 때까지 약 한 달에서 두 달이 걸린다더라.”

역시 진짜 사람과는 성장 속도부터 다르구나.

“아이를 우리에게 맡긴 건 아무래도 유제 역시 능력을 타고났으니 일반 사람들이 통제하기 어려워서일 거야. 특별한 경우 제압이 필요할 테고……. 또 힘을 올바르게 사용하게끔 가르쳐 줄 스승이 필요해서도 있겠지.”

성체가 되면 바로 실전에 내보낸다더라. 뒷말은 어째 씁쓸하게 들려왔다.

병원에서 며칠을 더 보낸 후, 나는 퇴원을 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보인 누에고치는 평소보다 더 견고한 태세를 취하고 있었는데, 김강민의 말에 따르자면 내가 기절한 동안 본체는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저번 전투의 후유증이 큰지 아직까지 휴식기에 들어가 있는 것 같다고.

그 외 다른 잔소리를 하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지만 그는 한숨을 몇 번 쉬는 것으로 대화를 끝내고 돌아갔다.

“하아…….”

나는 침대에 드러누우며 김강민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휴식기가 끝난 놈이 다시금 모습을 나타내기 전까지 88번, 아니, 유제의 성장을 최대한 촉진해야 합니다. 능력 사용에 대한 이해도도 물론이고요.’

졸지에 아들…… 비슷한 것이자 제자인 놈이 생겨 버린 꼴이다. 하지만 말이야.

“비, 행- 기이, 푸슈!”

저걸 어떻게 가르쳐? 현재 아는 거라곤 비행기랑 맘마밖에 없는데. 나는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혼자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아이를 불렀다.

“야.”

“오옹?”

“이리 와 봐.”

“오옹오오.”

이상한 소리를 내며 아이가 내게로 도도도 다가왔다. 새까만 머리카락과 살짝 처진 눈매. ……닮았나? 나는 고개를 기울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아이가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배시시 웃었다.

“부모님!”

“뭐?”

“부모오님.”

“허……. 너 그거 뜻은 아냐?”

“오오옹?”

나는 방실거리는 아이를 안아 들었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아이는 작고, 따뜻하고, 가녀렸다. 조금만 힘을 줘도 뼈가 부러질 것 같아 다루는 손길이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애가 나를 도와 전투를 해야 한다고? 말이 안 되잖아. 이렇게 작은데…….

“아기 냄새.”

나는 중얼거리며 아이의 뺨에 코를 비볐다. 그러자 까르르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너무 평화로워서 픽 웃음이 새어 나왔다.

너 말이야, 네 미래는 알고 웃는 거냐? 바보야.

* * *

“형, 저녁 뭘…….”

달칵, 문을 열고 들어온 송여환은 침대에서 아이와 함께 잠든 낙유성을 보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무방비한 표정으로 깊게 잠이 든 두 사람은 현재의 복잡하고 어지러운 세상과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듯 평화로워 보였다.

‘아이…… 랑 자고 있어. 내 집에서.’

알 수 없는 벅참이 가슴속에 차올랐다. 비록 두 사람이 낳은 아이는 아니지만 낙유성을 사랑하고, 그와 함께하기로 다짐했던 때부터 포기했던 존재가 바로 아이였다. 근데 이런 식으로 마주하게 되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아, 이러면 안 되는데…….’

송여환이 곤란함을 담아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병실에서 눈을 뜬 유성이 거부감을 보일까 봐 부러 더 아이를 예뻐하고 챙기는 척을 했다. 그래야 유성이 조금이라도 아이를 챙기고, 빠르게 교육시켜 쓸모 있는 존재로 만들 거라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정말로 아이가 예뻐 보이기 시작하니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정을 주어선 안 된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기에 적당한 선을 그으려 했는데…….

“꼭 가족 같다, 우리.”

송여환은 두 사람이 누운 침대 아래, 자리를 잡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속절없이 낙유성을 쏙 빼닮은 사랑스러운 아이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 * *

“으악, 유제야 안 돼!”

“꺄아아아아!”

“유제야! 감기 걸려! 아빠한테 오세요!”

“꺄아아아아!”

쟤가 안 된다고 하면 넙죽 네, 알겠습니다 하고 가만히 있겠냐. 나는 우당탕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여유롭게 제로 콜라를 홀짝였다. 그러고 있자니 수건으로 아랫도리만 간신히 가린 송여환이 나를 샐쭉 노려본다.

“거기, 유유자적한 형씨.”

“왜.”

“좀 돕지요?”

“그러니까 뭘.”

“뭐얼? 지금 상황이 눈에 안 보여?”

상황? 상황이라……. 거품 범벅이 돼서 사방을 휘젓고 다니는 꼬맹이 둘밖에 안 보이는데. 도대체 내가 뭘 도와야 한다는 걸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픽 입꼬리를 올렸다.

“우르르 까꿍, 이라도 해 줘?”

비꼬는 의미로 건넨 말인데 송여환은 옳다구나 하고 뚱한 표정을 싹 지워 버리며 수줍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미친놈 아냐, 저거.

“대신 까꿍은 꼭 나 보고 해 주기…….”

“너 그럴 때마다 정 털리는 거 알아?”

“너무해!”

송여환이 입술을 쭉 내밀고 투덜거렸다. 저 녀석 가끔 보면 유제보다 응석이 더 심하다니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유제를 쏙 빼앗아 들었다.

“나 배고파. 애는 내가 씻길 테니까 넌 가서 점심이나 만들어.”

“엉? 아냐. 내가 유제 씻기고 다 해 줄게. 형은 더 쉬고 있어.”

“됐어. 너는 너무 물러서 애 씻기는 것도 오래 걸리잖아.”

유제는 나를 올려다보며 오이잉 소리를 냈다. 그러다 우, 하고 시무룩해졌는데 아마 더 이상 장난을 치며 도망갈 수 없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일 거다. 송여환과 달리 나는 이런 부분에서 엄했으니까.

“유제. 말썽부리면 샴푸 두 번 할 거야.”

“허억.”

울상을 한 채 축 늘어진 유제를 옆구리에 끼고서 욕실로 들어갔다. 뒤에서 형, 멋있어…… 하며 송여환이 주책을 부리는 소리는 못 들은 체 무시했다.

‘멋있긴……. 유제한테만 관심 주면서.’

생각하다 보니 괜히 울컥해 욕실 문밖을 샐쭉 노려봤다.

‘아까부터 배고프다고 했는데.’

짜증이 난 속마음과 달리 유제를 씻기는 손길엔 최대한 힘을 빼냈다. 유제는 쪼그만 손으로 얼굴을 꼬옥 가린 채 싫다는 듯 우으으으 칭얼거렸다. 하얗고 포동포동한 몸을 보니 작은 눈사람 같았다. 원래 애들은 이등신인가……. 뭔가 웃겨서 언짢았던 기분이 스르륵 풀렸다.

“쥐콩만 한 게.”

“오옹?”

“물 붓는다.”

“우으으으으!”

그렇게 유제의 목욕을 끝내고, 아이를 챙기느라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를 정신없는 점심 식사까지 마친 후였다.

낮잠에 빠진 유제에게 바람 빠진 풍선처럼 흐느적흐느적 다가간 송여환이 핸드폰을 꺼내 들고 사진을 찍어 댔다. 새근새근 잠든 모습 또한 천사라며 쉴 새 없이 주접을 떠는데, 가만히 보고 있으면 참 질리는 거 없이 재밌는 놈이다.

“너 애 좋아했냐?”

“안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

나는 슬쩍 손을 들려다 말았다. 그러다 문득 송여환도 자식을 갖고 싶어 하진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어울리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적당한 시기에 아이를 갖고, 그렇게 남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송여환.

내가 없는 세계에서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녀석의 꼴을 생각하자니 속이 뒤틀렸다. X발, 내가 누굴 위해 개고생하고 있는데. 아무리 상상이라지만 애까지 낳고 실실거려? 절대 안 되지.

괜히 열받아 녀석을 한번 걷어차 줄까 하고 마음먹었으나 유제의 뺨을 쿡 찌르며 생글거리는 송여환의 모습을 눈에 담자 마법처럼 분노가 사그라들었다.

“그대로.”

“어?”

내 시선을 읽었는지 서둘러 몸을 일으키려던 녀석을 말렸다. 왜 그랬는지 자세한 이유 따위 모르겠다. 궁금하지도 않고. 그냥, 꼬맹이를 보며 환하게 웃는 녀석이 너무 예뻐서 조금 더 보고 싶었을 뿐이다.

* * *

-실험체…… 아니, 유제는 어떻습니까?

전화 너머에서 김강민의 진중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는 송여환과 함께 그림 그리기에 푹 빠져 있는 유제를 흘끔 보곤 부러 목소리를 낮췄다.

“어쩌고 자시고 할 것 없어. 뭘 가르치라는 거야. 쑥쑥 큰다더니 아직도 애잖아.”

-받아 가신 지 얼마 안 되셨잖습니까. 곧 성장할 겁니다.

“물건처럼 말하지 마, 기분 더러우니까.”

-……낙유성 에스퍼. 그 아이에게 너무 정을 주진 마세요.

정을 주긴 누가 줘? 그냥 네 말투가 띠꺼우니까 그런 거지. 나는 속마음을 삼키며 다음 말을 이었다.

“……됐고. 그보다 애한테 이능력이 있는 건 확실한 거야? 무슨 능력인데? 그걸 알아야 가르치든 말든 할 거 아냐.”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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