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생각 외로 칼은 스르륵 빠졌다. 긴장했던 것에 비하면 싱거울 정도로 쉬웠다.
‘……뭐, 달라진 게 없는데?’
휘휘 고개를 돌려 보았으나 은발 녀석은 보이지 않았다. 마법처럼 짠, 하고 등장하리라 생각한 건 아니지만 아무리 그래도 뭔가의 액션이 있어야 했-
“하.”
……있네, 액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려 하늘을 쳐다봤다. 맑고 쨍하던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더니 해를 가릴 정도로 먹구름이 잔뜩 끼었다. 휘이잉- 스스스슷, 차가운 바람이 거세게 불어 주변 수풀이 음산한 소리를 만들었다.
곧 칼을 뽑아낸 자리로 새카만 안개가 모여들었다. 자세히 보면 개미처럼 작고 검은 무언가가 우글우글 움직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 않을 만큼 징그러운 광경에 인상을 찡그린 채 몇 발 물러서자 들려오는 옅은 웃음소리.
[안녕?]
화악, 검은 안개가 걷히고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이 눈앞에 나타났다. 정말 반갑지 않은 인사였다.
[오랜만이지, 도련님.]
녀석은 그때와 다르지 않은 속을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하…… 이번엔 내가 이방인인 건가?]
턱을 매만지며 눈썹을 까딱이던 녀석이 짧게 ‘아’ 소리를 내곤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래, 일단…… 그 라면이라는 걸 좀 먹어 볼까?]
3장 태풍의 눈
후루룩, 후루룩. 쉴 새 없이 면을 삼키는 녀석은 정말로 행복해 보였다. 몇 년, 혹은 몇백 년을 봉인 당했던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아, 맛있네. 이게 정말 그리웠다니까? 이 귀여운 꼬불꼬불…… 으응? 이런, 우리 도련님은 안 먹는 건가?]
장난스럽게 젓가락을 휙휙 돌리던 녀석은 대꾸하지 않자 ‘그럼 내가 먹는다?’ 하며 내 앞에 놓인 그릇을 가져갔다. 그리고 또 고개를 박고 열심히도 처먹는다.
“넌…….”
[우음? 음?]
“이런 상황에서 잘도 먹네.”
완전 무장을 갖춘 채 주위를 둘러싼 군인과 용병들. 모두 본부의 지령을 받은 사람이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냐 하면, 내가 은발을 본부로 데려왔기 때문이다.
막 봉인에서 풀려난 짐승 새끼 같은 녀석을 데리고 송여환의 집으로 향할 수는 없으니 당분간 위험을 떠맡아 줄 곳이 필요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난리를 칠 거면 본부에서 쳐 주길 바라는 마음도 없지 않아 있었다.
뭐…… 단순히 그런 이유만으로 본부로 끌고 온 건 아니지만. 애초에 은발 녀석은 나만큼이나 속이 시커머니 그냥 도와줄 리가 없다. 즉, 어떤 조건을 걸든 충족시켜 줄 힘을 가진 본부에 붙여 놓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 내린 결정이었다.
물론 본부도 눈을 까뒤집고 당장 데려오라며 난리 아닌 난리를 쳐 댔다. ‘자세한 설명은 해 줄 수 없지만 새로운 에스퍼를 구했다’는 성의 없는 설명뿐이었음에도 본부는 쉽게 낚였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토록 찾던 존재가 제 발로 넝쿨째 굴러들어 온 거니까.
“저, 낙유성 에스퍼.”
한참 눈치를 보던 김강민이 조심스레 다가왔다.
“언제까지 라면을……. 일단, 그, 힘을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만.”
일단 내 말이니 덥석 물긴 했으나 수상쩍은 외관으로 라면만 주야장천 처먹고 있으니 불안한가 보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근처에 서 있던 용병에게로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총 한 자루만 주시겠습니까.”
용병은 나를 흘긋 보다 조심스럽게 총 한 자루를 건넸다. 나는 그대로 안전장치를 풀고 장전한 채 은발에게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리고 뭐 하는 거냐고 의문을 담아 쳐다보는 김강민을 지나쳐, 후루룩 라면을 먹는 녀석을 향해 망설임 없이 방아쇠를 당겼다.
-탕!
“낙유성 에스퍼!”
“꺄악!”
“으아악!”
은발의 이마 정중앙이 뚫리고, 녀석의 얼굴이 라면 그릇으로 철퍽 엎어졌다. 주변 사람들은 비명과 함께 주저앉았다. 겨우 총질 한 번으로 놀라긴.
“무슨 짓입니까!”
“힘을 보고 싶다 하지 않았습니까.”
겨우 그런 일에 내 능력을 쓰는 건 가성비가 떨어지니 총으로 한 건데 왜들 그리 난리일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녀석을 보라는 의미로 턱짓했다.
[……이런, X발.]
“……!”
후드득, 얼굴에 붙은 면발을 신경질적으로 떼어 내며 녀석이 거친 욕설을 중얼거렸다.
[아하……? 도련님, 이게 무슨 개짓거리이실까. 제대로 대답 안 하면 나 여기서 완전 돌아 버리는 수가 있어.]
손가락 사이에 젓가락을 끼워 돌리며 녀석이 음산히 웃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바보처럼 서 있는 김강민쯤이야 젓가락 하나로 죽여 버릴 수도 있는 놈이니, 나는 썩 내키진 않지만 서둘러 상황에 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네 힘을 보고 싶다잖아. 여기가 뭔 자원봉사 단체인 줄 알아? 네가 처먹고 있는 라면부터 시작해서 앞으로 받을 모든 혜택에 대한 값은 지불해야 할 거 아냐, 멍청한 새끼야.”
[그럼 다 먹고 해도 되잖아. 아, 젠장. 내 피가 들어간 라면 따위 먹고 싶지 않아. 분명 비릴 거야. 다시 가져오라 해.]
녀석이 라면 그릇을 손으로 가볍게 쳐 내 떨궜다. 주변에서 그를 두고 쑥덕대고 있는데도 기 하나 죽지 않고 퍽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에 나는 질린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또라이 새끼.”
[하하, 말이 나와서 하는 소린데, 도련님은 운이 아주 좋은 거야.]
“뭔 헛소리야.”
은발은 젓가락을 물고 씩 웃음 지었다.
[나도 여기에 나타난 빌어먹을 새끼한테 원한이 아~ 주 많거든. 기운만 느껴서 모습은 아직 모르는데…… 그거, 아리아가 소중하게 생각하던 녀석 맞지? 아, 빨리 만나고 싶어 미치겠네? 봉인된 후로 난 그 녀석 생각만 했거든. 어떻게 갈기갈기 찢어 놔야 아리아가 죽어서도 피눈물을 흘릴까, 하고.]
노래를 흥얼거리듯 말한 녀석이 즐거워 미치겠다는 표정으로 나머지 말을 이었다.
[되갚아 줘야지. 나를 버린 거.]
그러며 한쪽 눈을 찡긋거리는 게, 제대로 미친놈 같았다. 지선우를 잃고 방황하던 나와는 너무 달랐다. 아, 하긴……. 사람 뒤통수 치는 게 습관인 가짜와 달리 선우 형은 완벽한 피해자일 뿐이었으니까.
조금 침울해진 내가 무어라 더 말을 꺼내기도 전, 잔뜩 흥분한 목소리가 갑작스레 껴들었다.
“대단합니다!!”
김강민이었다.
“대, 대단하다는 말로…… 설명이 안 됩니다. 그간 존재했던 모든 에스퍼 중 이분처럼 완벽한 재생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었잖아요? 거의 불사라 봐도 무방할…… 아, 좋아요. 좋습니다. 완벽해요!”
박수까지 치며 기뻐하는 김강민. 그가 날 향해 반짝반짝 눈을 빛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언어는, 어디 나라 사람입니까? 통역을 구해야 하니 말해 주세요.”
이 녀석이 오랫동안 봉인 당한, 먼 미래의 인간이란 말을 하지 않았기에 나는 잠시 고민을 해야 했다. 러시아인이라고 할까? X발, 어떡하지.
[이봐, 저 촉새처럼 생긴 게 자꾸 뭐라고 떠드는 거지?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아 시끄러워 거슬리는데…… 죽여도 돼?]
“아, 좀 닥쳐 봐.”
“예?”
“아뇨. 그쪽 말고 이 새끼한테 말한 겁니다.”
[새끼? 도와주려는 사람한테 말본새가 참 재밌네, 우리 도련님은.]
나는 은발을 간단히 무시했다.
“국적을 알아봤자 통…… 역을 구하긴 어려울 겁니다. 완전, 그, 소수민족이라……. 저도 우연히 알게 된, X발…… 아무튼 말이 통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다고 생각하면 되고. 이름은…….”
히죽거리고만 있는 은발을 한번 흘긋거리곤 입에 담기 아주 어색한 이름을 불렀다.
“자얀.”
덜컹! 테이블에 턱을 괴고 있던 녀석이 삐끗하며 두 눈을 크게 뜬 채 나를 쳐다봤다. 녀석은 답지 않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 저래?
[도련님. 내 이름 알고 있었네?]
“우연찮게 기억난 것뿐이야.”
나는 흐음, 목을 울리며 실실 웃는 녀석을 불쾌하게 쳐다봤다. 왜 자꾸 사람 얼굴을 보고 쪼개는 거야.
[이름을 불리는 게 참 오랜만이라 설레잖아? 감사의 의미로 예전처럼 엉덩이라도 한 번 빨아 줄까?]
“머리 한 번 더 터지고 싶다면 마음대로.”
심드렁하게 대꾸한 뒤 김강민에게 저놈도 사정이 있어 이번 일에 협력하겠지만 생각보다 위험하니 절대 자극하지 말고, 멋대로 다가가지도 말라는 말을 전했다. 뒤에서 듣고 있던 은발은 코웃음을 치며 자신이 무슨 사나운 짐승 새끼냐며 투덜거렸다.
양심도 없는 새끼. 짐승들에게 사과나 해라. 나는 똑같이 코웃음을 쳤다.
“야. 평생 맛있는 거 먹고, 따뜻한 물에 목욕하며 살고 싶다면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 여기선 네 목줄 내가 잡-”
인상을 쓰고 녀석에게 경고를 한창 날리던 중이었다.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웅웅 진동했다.
나는 하던 말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화면에 떠 있는 이름을 보자마자 식은땀이 흘렀다. 은발 녀석을 신경 쓰느라 잠시 잊고 있었다.
‘송여환…….’
녀석의 전화가 이토록 무섭게 느껴진 적이 있던가? 평소와 똑같은 진동일 뿐인데 어째서 스산한 기운이 전해져 오는 거지? 나는 김강민에게 잠시 통화하겠다는 제스처를 취하며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
-응. 형, 여본데. 내가 말이야. 잠을…… 잤네?
“그, 러게……. 너, 요새, 큼, 피곤해했는데 잘-”
-왤까?
그러게, 왤까. 나는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녀석의 말투는 분명 다정한데 알 수 없는 분노가 느껴졌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