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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102화 (102/115)

102화

확실히 자얀이 있고 없고의 차이는 컸다. 오로지 공격과 공격. 방어라는 것이 없던 전의 전투와는 양상이 전혀 달랐다.

[생각보다 X밥인데? 아하핫! 어이, 도련님! 날려 버려!]

자얀이 백산의 앞을 막으면 나는 후방에서 공격을 퍼부었다. 심지어 자얀은 근접전에도 강했다. 아무리 살이 뚫리고 녹아도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재생했고, 그로 인해 백산의 경계 안으로 쉽게 침투해 몇 번이나 카운터를 날렸다.

[안녕, 비실아? 얼굴 좀 뭉개러 왔어.]

쌓인 게 많은지 집요하게 얼굴만 패는 모습이 썩 좋아 보이진 않았지만, 백산을 잡을 수만 있다면 뭐…… 상관없나.

“이…… 버러지 같은 것들이!”

물론 백산의 분노 역시 전과 달리 빠른 속도로 차올랐지만 말이다.

* * *

“뭐야! 완전 너덜너덜하잖아!”

송여환이 내 얼굴을 조심스레 감싸 들며 외쳤다. 전투 후에는 매번 이런 꼴인지라 이제 익숙해질 법도 하건만, 녀석은 늘 울적하고 아파했다. 나는 얌전히 얼굴을 맡긴 채 송여환의 손길을 즐겼다. 그러자 옆에서 빈정거림이 날아왔다.

[여전히 참 낯선 풍경이군. 작은 꼬마는 아예 잊어버린 건가? 난 또 세기의 사랑이라도 하는 줄 알았는데.]

“그러는 너도 아리아, 아리아 외치더니 뒤통수 한 번 처맞았다고 태세 전환이 너무 빠른 거 아냐?”

[아하……? 우리 도련님은 참 혀가 자유분방해.]

혓바닥을 칼로 쓰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먼저 죽이겠다 덤빈 건 저쪽 아닌가. 사람마다 건들면 안 되는 것이 있는 건데.

나와 자얀이 당장에라도 서로의 멱살을 잡아 들 것처럼 으르렁거리자 이번에는 김강민 대신 송여환이 중재를 해 왔다. 굳이 따지자면 자얀에게 눈을 흘기며 일방적인 화를 낸 것이지만.

[개 없는 사람 서러워 살겠나.]

“말조심해.”

[이젠 저 강아지를 과보호하는군.]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하, 헛웃음을 터뜨린 자얀이 혼자 무언가 구시렁거리더니 곧 비릿한 미소를 띠었다. 또 뭔 짓을 하려고 저러지? 약간의 불안함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놈이 어눌한 한국말로 송여환에게 폭탄 아닌 폭탄을 던지고야 말았다. 아니, 정확히는…… 내가 곤란한 폭탄이지.

“너 알아? 나 얘랑 놀았다. 데이트, 영화 봤다. 한강도 갔어.”

“……뭐?”

“너 몰래. 얘 완전 거짓말쟁이지?”

저 X발 새끼가! 나는 벌떡 일어나 자얀의 머리채를 콱 잡아 들었다.

[어때? 한국말 잘하지? 전부 선생이 훌륭해서야. 가르쳐 줘서 너무 고마워, 도련님.]

“이 씹……!”

[왜. 내가 거짓말이라도 한 거 있어?]

나는 작정하고 약 올리겠다는 놈을 한 번 노려봐 주곤 급히 몸을 틀었다. 이 새끼를 죽여 놓는 것보다 이 거지 같은 오해를 푸는 쪽이 더 가치 있다고 판단해서였다. 그런데…… 송여환은 의외로 평온해 보였다. 화가 났거나, 충격 먹었을 거라 생각했는데.

“저기, 그게…….”

“걱정 마. 화 안 났어. 설마 간첩이 하는 말을 믿을까.”

아, X발. 웃으면 안 되는 상황인데.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간첩’이 뭐야?]

뒤에서 의아하다는 듯 묻는 소리는 깔끔히 무시하며 송여환의 팔뚝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간 건 사실인데, 한강은 안 갔어. 또 영화관도 아냐. 그냥 DVD방이고-”

“뭐라고?”

“어?”

“……저 X발 새끼가…….”

송여환의 목에 핏대가 바짝 섰다. 칼이 있었더라면 당장에라도 자얀의 목을 따 버렸을 만큼의 사나운 살기가 일었다. 아니, 방금 화 안 났다고 하지 않았나?

“형은…… 집에 가서 얘기해.”

쟤가 저렇게 무서웠나.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까지 자얀을 죽일 듯 노려본 송여환은 정색한 채 차 키를 들고 방을 나갔다. 왠지 백산과의 전투보다 더 크고 힘든 전장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거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한숨을 한 번 내쉬고는 옆에서 낄낄거리고 있는 자얀을 노려봤다.

“또 한 번 나대 봐, 그땐 아주 찢어발길 테니까.”

[도련님은 누구랑 만나든 잡혀 사는 게 운명인가 봐.]

“됐다. 너랑 무슨 말을 하냐.”

나도 어서 송여환을 따라가려는데 빙글빙글하고 있던 녀석이 갑작스레 무언가를 휙 내밀었다. 곳곳이 낡고 부식된 물건이었다.

‘……칼?’

순간 이게 뭔가 싶어 생각하다 곧 정체를 알아챘다.

“네 봉인을 풀 때 꺼낸 칼이잖아.”

[내가 한 가지 재밌는 생각이 났는데 말이야.]

자얀이 칼을 빙빙 돌리며 말했다.

[싸워 보니까 알겠어. 그 벌레, 인정하긴 싫지만 강하더군. 무엇보다 까다로워. 인간 쪽 모습이 무너지면 고치 쪽으로 의식이 옮겨지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후자가 되면 더 성가셔. 완전 폭격기던데.]

“그런데.”

[이쪽 무능아들이 원하는 건 저 벌레가 사라지는 거잖아. 하지만 도련님 혼자선 힘드니 나를 깨운 거고. 물론 나랑 도련님이 마음 놓고 다 뒈져라는 식으로 싸운다면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그게 안 되잖아? 이곳 무능아들에게 피해가 없어야 한다며.]

녀석이 ‘무능아들’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나도 모르게 속으로 공감해 버렸다. 물론 그 집단 안에 송여환은 포함되지 않았다.

다른 이들은 몰라도 송여환만큼은 무능하지 않았다. 회의를 주도하여 이끈 것도 녀석이었고, 흔들려 무너지던 내 멘탈을 케어해 준 것도 녀석이었다. 송여환이 없었더라면 현재의 나도 존재하지 않았을 거다.

[그래서 말인데…….]

자얀이 빙긋 웃음 지었다.

[아예 봉인해 버리는 건 어때?]

“봉인?”

[그래. 내가 그랬던 것처럼 알타타, 그 무간지옥에 가둬 버리는 거지. 아, 걱정은 마. 나는 도련님 의식에 닿아 가까스로 봉인을 푼 거지, 아니었다면 영원히 거기 머물렀어야 하니까.]

“…….”

[그 벌레도 스스로 봉인을 풀 방법은 없어. 혹시 의식에 닿는다 해도 연이 있는 너 아니면 나, 그리고 해 봤자 송여환이 다겠지. 근데 풀어 주지 않을 거잖아?]

녀석의 제안은 나쁘지 않았다. 실제로 자얀이 필요했던 건 시민을 보호하려는 목적이었으니까. 즉, 나와 같이 전력을 다해 전투에 임할 수 없는 입장이란 소리다.

뭐, 그 X같던 인조 에스퍼 연구가 나쁘지 않은 방향으로 성공해 시민을 지킬 수 있는 수많은 병력을 만들어 충원했다면 말이 달라지겠지만…… 현실은 녀석과 나, 달랑 둘뿐이었다. 그런 와중 피를 덜 볼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생각을 잇던 나는 문득 아리아의 최후가 떠올랐다. 물론 그땐 백산의 부활을 위한 거였지만, 별개로 자얀의 심장에 칼을 꽂아 넣을 때는 특별한 주술을 한 것 같지 않았는데.

“방법은 알아?”

[간단해. 심장에 칼을 꽂아 넣으면 돼. 겉보기엔 그저 골동품 같지만, 이거 살아 있는 거거든. 아주 끔찍하게 저주받은 물건이지. 심장에 꽂혀 그 사람의 영혼을 지옥으로 끌고 가는…… 우웩.]

두 번은 당하기 싫다며 녀석이 고개를 흔들었다.

[뭐, 한 가지 조건이 있긴 한데, 딱히 걱정할 건 아닌 거 같고.]

“뭔데.”

[말했잖아. 살아 있는 거라고. 배를 채워야 해. 그 깜찍한 아리아가 나와 모든 세계의 괴물을 한데 엮어 봉인했던 거, 괜히 그런 게 아니야. 이 칼이 만족할 만큼의 에너지를 넣어 줘야 봉인술이 발동되거든.]

간단하면서도 복잡했다. 그 에너지의 크기가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니까. 자얀은 어깨를 으쓱이며 나머지 말을 이었다.

[으응, 내 생각에 저 벌레 하나만으로 충분할 거 같아서 별걱정은 안 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면…… 칼을 꽂아 넣은 너나 나, 둘 중 하나도 같이 빨려 들어가겠지. 아직 배가 고픈 이 칼 속으로?]

나는 눈을 깜빡거리며 물끄러미 칼을 쳐다봤다. ……빨려 들어가면 영원히 갇힌다고 하지 않았나.

[내 의견은 여기서 끝. 그리고 미리 말하자면, 난 칼을 꽂아 넣을 생각 없어. 그러니 할 거면 도련님이 해야 해.]

“…….”

[저 벌레 녀석의 에너지가 부족해서 같이 끌려 들어갈 수도 있는 거잖아? 으음, 난 사양이야. 그럴 바에 이 세계가 망가지는 쪽을 택하겠어.]

녀석은 당당하게 X될 거면 네가 X되어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딱히 뭐라 할 수는 없었다. 자얀에게 이 세계는 황홀한 꿈과도 같지만 본인을 희생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곳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지켜야 할 것이 있다.

“고민해 보지.”

간단히 대답하고 문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또 한 번 녀석의 부름이 들려왔다. 뭐야? 귀찮다는 티를 숨기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왜.”

[흐음…….]

자얀은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잠시 뜸을 들이다 황당한 요구를 했다.

[내 이름 불러 봐.]

“뭐?”

뜬금없는 말이었다. 갑자기 이름은 왜? 의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쳐다보자 녀석은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가볍게 웃었다. 별거 아니라니 그냥 무시하고 가면 되는데…… 녀석의 꼴이 하도 얄미워서인지 나는 그만 충동적으로 태클을 걸고 말았다.

“태도가 글러 먹었잖아, 너.”

[음?]

“너야말로 호칭 똑바로 한 적 있냐? 따지고 보면 이제 이곳은 서블이 아니잖아. 그렇다면 내가 연상일 텐데.”

[아하……?]

“먼저 예의 지켜. 그렇다면 나도 널 똑바로 불러 주지, 자얀이라고.”

[…….]

“낙유성 선배님, 이야. 잊지 마.”

괜히 말 섞었다고 후회했는데 어벙한 놈의 표정을 보니 썩 나쁘진 않다는 감상이 들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 녀석을 그대로 두고 미련 없이 걸음을 옮겼다. 더 지체했다간 송여환의 삐짐이 얼마나 갈지 모른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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