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화
‘젠장, 완전 열받아 보이는데.’
역시나, 저 멀리 주차장에 서 있는 송여환은 한눈에도 잔뜩 골이 나 보였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설렁설렁 다가갔다.
“가는 길에 뭐 포장이라도 할까?”
“…….”
“운전, 내가 할까?”
“타.”
말투는 뾰족한데 차 문을 열어 주는 배려는 여전했다. 아…… 여기서 웃으면 진짜 싸움 나겠지? 나는 억지로 표정을 굳힌 뒤 고개를 끄덕이고 조수석에 얌전히 올라탔다.
“뭐 먹고 싶은데. 하아…… 그, 자주 가던 중국집 오늘 휴문데.”
X발, 위험했다. 정색한 채로 저런 물음까지 하다니. 일단 열은 받았지만 챙길 건 챙겨 주고 싶다는 건지, 아니면 원체 다정해서 저러는 건지. 어느 쪽이든 웃기고 귀여운 건 맞았다.
나는 송여환 쪽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혼자 분위기를 잡고는 있지만 축 처진 입꼬리와 서운함이 덕지덕지 붙은 눈매가 기어코 내 웃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나도 모르게 소리 내 웃자 송여환이 때마침 빨간불이 돼 충격받은 표정으로 나를 돌아봤다.
“형 지금 웃…… 겨?”
“미안. 반성.”
“하!”
“……진심이야.”
“다른 남자랑 DVD방이나 가 놓고, 웃음이 나온다 이거지?”
사실 DVD방이 뭐가 나쁜 건지 잘 모르겠다. 아니, 누군가랑 몰래 갔다는 게 잘했다는 행동이라는 건 아니고. 그냥…… DVD방 자체를 말하는 거다. 어디서 무슨 미디어를 접해 이미지가 별로인지는 어렴풋이 알겠는데, 사실 말 그대로 영화 보려고 가는 곳이잖아. DVD방이라는 거.
……물론 그렇게 얘기하면 안 되겠지만.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다.
“거기 간 데 내 의지는 단 1%도 없었어.”
“…….”
“정말이야, 여환아.”
“……치.”
송여환이 발그스레한 뺨으로 입을 삐죽 내밀었다. 반 정도는 풀린 거 같은데 나머지는 어떻게 풀어 줘야 하지? 나는 눈을 굴리다 녀석에게 말했다.
“그럼 우리도 가든가…… DVD방.”
“…….”
“…….”
“……큼, 어, 어디?”
아, 먹혔다.
* * *
“평소랑 똑같잖아.”
나는 팝콘과 콜라 두 잔을 들고 들어오는 송여환을 보며 이해 못 하겠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현재 우리가 있는 곳은 송여환의 집이었다. 뭐, 조금 다른 점을 얘기하자면 저택 꼭대기에 있는 다락방이라는 것?
“으음, 다르지! 여기는 우리만의 DVD방이야.”
“그냥 편하게 방에서 보면 될 걸 가지고…….”
“안 돼! 그러면 분위기가 안 살잖아.”
“그럼 가자니까?”
“에헤이. 내가 설마 피곤한 형 끌고 시내까지 나가겠어? 머리에 총 맞지 않은 이상 그런 짓 하겠냐고. 난 걔랑 다르거든? 완전 배려심 넘치는 남자 친구야.”
녀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내 옆자리로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더니 부산스럽게 이것저것 만지기 시작했다. 일단 빔 프로젝터를 켜서 한쪽 벽면에 작은 화면을 띄우고, 부드러운 담요를 두른 다음, 편의점에서 파는 저렴한 팝콘을 뜯었다.
“그래도 질투가 안 나는 건 아니니까…… 이 정도는 봐줘.”
다시 생각해도 내가 자얀과 DVD방에 간 것이 불쾌한지 고운 미간이 와락 찌푸려졌다. 나는 입꼬리를 올리곤 녀석의 뺨을 손등으로 살살 쓸어 냈다.
“그래서 뭐가 그렇게 다른데?”
“분위기?”
“어…… 난 잘 모르겠다.”
“으음…….”
내 질문에 배시시 웃은 송여환이 슬며시 깍지를 껴 왔다. 맞닿은 손의 온기가 매우 뜨거웠다. 녀석의 손은 딱딱하고 매우 컸으나……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녀석의 듬직한 손이 이상한 안정을 가져왔다.
언제부터 녀석에게 이 정도로 마음을 주었던 걸까? 나는 나른히 몰려오는 기분 좋은 설렘에 그대로 손을 마주 잡았다.
“음…….”
옆에서 만족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아까까진 뚱하더니 참 쉽게도 풀리는 기분이다. 나는 팝콘 하나를 주워 녀석의 입에 넣어 주며 물었다.
“그렇게 좋냐?”
그러자 녀석이 아기 새처럼 냠냠거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응.”
“하여간 특이해.”
“연인이라면 다 좋아할 분위기일걸? 어둡고 좁고…….”
은근슬쩍 몸을 더욱 붙여 오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알면서도 모른 척했다.
“어둡고 좁으면 왜 좋은데.”
“그야 감각이 더 예민해지니까?”
이미 내 감각이 네 열 배는 될걸? 말없이 시선을 맞추자 녀석도 오롯이 내게 집중했다. 팔랑거리는 긴 속눈썹이 특히나 예뻤다. 나는 녀석의 얼굴을 꼼꼼히 훑었다.
‘……왜 달지?’
입을 맞춘 것도 아닌데, 입안에 달큼한 맛이 느껴지는 착각도 들었다. 입가에 절로 미소가 그려지고 숨소리 역시 가까워졌다. 환한 빛을 뿜어내는 뮤지컬 형식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가 시작되었지만, 둘 다 신경 쓰지 않았다. 그보다 가까운 곳에 우리만의 로맨스가 존재했으니까.
결국 영화는 핑계였다. 엔딩 크레딧이 나올 때까지 우리는 화면으로 눈길 한 번을 주지 않았다. 열중하는 건 서로의 몸뿐이었다. 중간중간 간지럽다며 키득거려도 행동을 멈추진 않았다. 그렇게 좁고 습한 다락방은 어느새 나와 송여환의 열기로 후끈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으음…….”
만족스러운 얼굴로 침대에 누워 헤실헤실하는 녀석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렇게 좋냐?”
작게 물으며 뺨을 꼬집었다.
“좋냐, 안 좋냐의 수준이 아니야. 나한테 저 다락방은 완전 유토피아야. 시간 날 때마다 형이랑 저기 콕 박혀 있고 싶다.”
“이사 갈 때 완전 좁은 집으로 가야겠네.”
“방 두 개 안 돼. 무조건 원룸. 그래야 싸워도 각방을 안 쓰지.”
“진심이냐?”
“반 정도는?”
“어째 갈수록 능글맞아져 가냐.”
“그래서 싫어?”
“…….”
“어? 뭐야! 왜 대답을 안 해!”
기세 좋게 덤빌 때는 언제고 대답 한 번 안 했다고 바로 불안해하는 녀석이 귀여웠다. 나는 부러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송여환이 울상을 지으며 내게 매미처럼 답삭 달라붙어 왔다.
“뭐야, 싫냐고!”
“음…… 글쎄?”
한 번 더 약을 올리자, 녀석이 울상을 짓고서 유성이 혀엉, 하며 징징거렸다. 나는 어떻게 싫을 수가 있겠냐는 속마음을 숨기며 말없이 미소 지었다. 이렇게 애교가 많은데 본인이 사랑스럽다는 걸 모르다니, 어지간히도 눈치가 없는 놈이다.
“혀엉…… 나 싫어? 응?”
나는 여전히 칭얼거리는 송여환을 빤히 보며 자얀이 제안했던 ‘봉인’에 대해 떠올렸다. 솔직히 말하자면…… 받아들이려 했다. 송여환의 안전을 고려했을 때, 그를 지킬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므로.
운이 나쁘면 같이 봉인 당할 수 있다는 경고를 들었지만, 그건 정말로 ‘운이 나쁠 경우’다. 아닐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50대50의 운에 생사를 걸어 소중한 이를 지킬 수 있다면 썩 나쁜 조건은 아니었다.
그래, 분명 그랬는데……. 오늘 또 한 번 송여환과 하루를 보내고 나니 도저히 그 각오가 다져지지 않았다. 미련이 없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내가 지키고 싶은 건 송여환의 삶과 안전이었으나 그의 행복이기도 했다.
그리고 건방지게도, 그 행복이 유지되려면 그의 곁에는 내가 있어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형, 잘자.”
“응…… 너도.”
내게 인사하며 예쁘게 웃는 녀석을 보니 마음 한구석이 찌르르했다. 차마 입 밖으로 나가지 않은 말이 마음속에서 뱅뱅 맴돌았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질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조심조심 손을 뻗어 송여환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좋은 꿈 꿔.”
다음 날, 해가 밝고 나를 자얀과 둘이 두고 싶지 않다며 울상 짓는 송여환의 엉덩이를 두드려 출근시킨 후 본부로 향했다.
[자주 보네?]
지하로 내려가자마자 녀석이 시선도 주지 않고 인사를 건넸다. 그 건방짐에 익숙해진 건지, 아니면 애초에 기대가 없어서인지 딱히 기분 나쁘진 않았다. 나는 책장을 넘기는 자얀의 앞으로 다가가 반대편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요새 녀석은 볼 때마다 독서를 하고 있었다. 게임에서 독서로 취미를 바꾼 건가? 아직 모르는 단어가 많을 텐데 놈은 별 어려움 없이 슥슥 잘도 읽었다.
[생각은 해 봤나?]
녀석이 시큰둥이 물었다. 성의 없는 태도에 나도 성의 없이 받아쳤다.
“뭘.”
자얀이 읽던 책을 내려놓으며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한쪽 눈썹을 슥 들어 올리곤 어이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강아지랑 재미 보느라 내 말은 전부 잊었나 봐?]
왜 자꾸 송여환을 들먹이며 빈정거리는 걸까? 하여간 재수 없는 새끼.
“전혀 상관없는 말을 매번 해 대더라, 너는.”
[그럼 멍청한 대답을 하지 말든가, 도련님.]
“넌 나한테 이름으로 불리긴 평생 어렵겠군.”
[그거 진심이었어?]
“누가 애타게 이름 좀 불러 달래서 방법을 알려 줬던 건데, 영 어렵겠어. 대가리가 금붕어라 그런가? 알려 줘도 하지를 못하네.”
엉덩이 붙인 지 몇 분 만에 분위기가 싸해졌다. 나도 자얀도 말없이 상대를 노려봤다. 하긴 저 녀석과 내가 하하 호호 웃음꽃 피우는 건 어울리지 않지.
‘됐다……. 저거랑 싸워서 뭐 하냐.’
나는 마른세수를 한 번 하고는 울컥했던 감정을 다스렸다. 아무런 가치 없는 말씨름 따위 이어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여전히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에게 생각해 왔던 답을 들려주었다.
“봉인 건은 없던 걸로 진행한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