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음? 생각이 하루아침에 바뀌었네?]
“너도 널 희생하기 싫은 것처럼, 나도 저 빌어먹을 칼에 봉인당하고 싶지 않거든.”
[꽤 구미가 당겨 보였는데, 내 착각이었나?]
“얼굴에 드러날 정도였다면 착각은 아니었겠지.”
나는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덤덤히 말을 이었다. 굳이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왠지 모르게 말이 줄줄 나왔다. 이 작은 변화 역시 송여환이 가져다준 애정과 부드러움 덕이겠지.
“처음에는…… 네 말대로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 생각했어. 네가 싫어도 내가 하면 됐으니까. 하지만 누군가를 지키고 싶다는 나 혼자만의 생각으로 그렇게 마지막을 맞게 된다면, 남은 사람이 평생을 고통 속에 살 수도 있으니까.”
[경험담이야?]
자얀이 빈정거렸지만, 평소처럼 화가 나진 않았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선우 형이 나를 지키겠다는 생각으로 했던 희생은 도리어 나를 찔렀고, 나는 그 아픔을 송여환에게 똑같이 경험시켜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 뼈아픈 경험이었지.”
나는 순순히 수긍했다. 어째 자얀에게 이런 말을 하는 스스로가 웃겼지만 나는 내 변화를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이제는 지선우가 아닌 송여환을 위해 살아가겠다는 맹세를 했으니까. 그러니 이런 낯선 부드러움도 내 일부분이 맞았다. 송여환의 곁에 있으며 날카롭던, 나의 모난 부분이 점점 뭉툭해져 갔다.
[변했어.]
자얀이 나를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기분 나쁘게.]
“하.”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람은 누구나 변해.”
입 밖으로 내뱉고 보니 새삼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숨통이 트인다는 게 이런 걸까? 최악의 최악 같은 일만 반복해 일어났음에도 어째선지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이 차올랐다. 물론 그 옆에는 헤실헤실 웃고 있는 송여환이 있어야겠지.
[뭐가 좋다고 실실거려?]
“내가?”
[재수 없게 웃고 있잖아.]
“…….”
아, 이젠 떠올리기만 해도 이 지경인 건가? 나는 조금의 멋쩍음을 느끼며 손으로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 있는 게 느껴졌다. 빌어먹을, 어디까지 풀어진 거야? 나는 괜한 부끄러움에 투덜거렸다.
그러다 문득 불쾌하다는 티를 내고 있는 녀석에게로 시선이 흘러갔다. 굳이 따지자면 저 녀석도 나와 마찬가지로 피해자였다. 물론 서블에서 지선우를 건들고 나를 몇 번이나 죽이려 했던 전적이 있지만…… 끝끝내 버림받고 말았으니까. 그것도 열렬히 사랑했던 이에게.
[눈깔이 재수가 없는데?]
“동정 중이라 그래.”
[하! 벌레 새끼 처죽이기 전에 한 판 하자는 거지? 으응, 나도 싫지 않아. 서열 정리는 한 번 해야 하잖아.]
서열 정리는 무슨, 너나 실컷 해라. 오만하게 웃는 녀석을 한심하게 보며 어깨를 으쓱였다. 생각해 보면 이 녀석을 꺼낸 건 나니까, 백산이 죽고 나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방향 정도는 잡아 주는 게 맞는 것 같았다. 괜히 방치했다 제2의 백산이 되기 전에.
물론, 작은 변덕에서 비롯된 오지랖이었지만…… 이조차 송여환의 영향이기에 나쁘지 않았다.
“후우…… 자얀.”
내가 이름을 부르자 사나웠던 눈동자가 순간 동그랗게 변했다. 그러더니 바람 빠지듯 서서히 살기가 없어지며 언짢은 표정으로 변했다. 한마디로 의욕 상실한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그 공간에 갇혀 있을 때 나한테 이상한 취향이 생긴 거 같아. 하도 사람과 말을 안 섞어서 그런가, 누가 내 이름을 부르면 몸에서 힘이 죽 빠져.]
“외로웠나 보지.”
[그런 간단한 말로 정의하지 마. 난 오로지 아리아에 대한 복수만을 생각하면서-]
“사람은 외로움 때문에 죽기도 하니까.”
[…….]
“자꾸 날 세워서 좋을 거 하나 없어. 독기를 좀 빼란 말이야. 말했듯, 백산이 죽고 나서도 이곳에서 살아가려면 이곳의 규칙을 몸에 익혀야 하니까. 여긴 서블과 달라. 약육강식으로 살아가는 세상이 아니야.”
[도련님이 그런 말을 하니 우습군.]
“만약 네가 전에 살던 대로 이곳에서도 정해진 규칙을 어기고 많은 사람을 상처입히겠다면…… 난 너를 죽일 거야. 기억해, 넌 더 이상 한 무리의 우두머리가 아니야.”
[자신 있어? 혼자 벌레 새끼 하나 못 잡는 주제에 삐약삐약 말도 많군.]
“하지만.”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녀석에게 나는 꿋꿋이 뒷말을 해 주었다.
“잘 적응해서 살아가고 싶다면, 난 너를 응원할 거다. 너도 이 세계에 많은 흥미를 보였잖아. 그러니까…… 백산을 마지막으로 너도, 나도 더 이상 누구와도 싸우지 않는, 그런 세상을 살아갔으면 해.”
하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이었다. 물론 사람 마음이라는 게 전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걸 안다. 자얀이 못난 마음을 먹을 수도 있겠지. 즉, 이건 최대한 그러지 않기 위한 설득이었다. 나는 백산을 처치한 후 송여환과 보낼, 피비린내 나지 않는 따뜻한 하루하루를 원하니까.
그러기 위해 녀석도 협조해 주었으면 했다. 그가 적이 된다면 백산보다 골치 아파질 터다.
[징그러워.]
한참을 침묵하던 놈이 툭 말을 던져 왔다.
[이봐, 도련님.]
“……?”
[강아지가 널 그렇게 만든 건가?]
송여환이 날 그렇게 만든 거냐고? 나는 자얀의 질문에 당연하다는 듯 웃었다. 뭘 그런 걸 묻고 앉아 있어? 입 아프게.
“부럽냐?”
[퍽이나.]
“너도 만날 거야. 아리아가 아닌 다른 사람을.”
[아하? 난 도련님처럼 가벼운 남자가 아닌데? 애정도 증오도 모두 그녀에게만 줄 거야. 그러니 그 벌레를 찢어발겨 주겠다는 거잖아. 아리아의 고통을 위해.]
“복수도 좋지만, 그다음도 생각해야지.”
[멋대로 파고들려 하지 마. 내 감정은 내가 정해.]
“두고 보지.”
[내기해도 좋아.]
“너 같은 사기꾼이랑?”
[제대로 사기 한번 쳐 줘? 자꾸 건들지 마.]
자얀이 한쪽 눈가를 찡그리며 말했다. 여전히 놈과 내 사이는 어떠한 ‘정’도 없이 삭막했다. 그저 적의 적은 아군이라는, 함께 이겨 내야 할 공통의 적만 있을 뿐인 그런 관계. 보이지 않는 얼음이 겹겹이 쌓인 듯 냉랭하고 서먹했지만…… 어째선지 근래 작은 구멍 하나 정도는 뚫렸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꽁꽁 언 얼음벽이 미약한 열로나마 녹아, 같은 전장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에스퍼’라는 공감대를 만들어 낼 거라는 믿음. 나와 녀석 사이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지만 그냥 모른 척 써 보기로 했다.
‘진짜 송여환을 닮아 가나…….’
싸움이 끝난 후 녀석도 이 세계에 잘 적응해서 아리아가 아닌 새로운 사람을 곁에 두고 사람답게 잘 살아가길.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녀석을 위한 기도를 올렸다.
* * *
“어? 형? 유성이 형!”
흐느적흐느적 종이 인간처럼 집으로 들어오던 송여환이 나를 보자마자 눈을 빛내며 잃어버렸던 생기를 되찾았다.
“웬일로 일찍 퇴근했어? 나올 때 연락하지, 데리러 갔을 텐데.”
“너 피곤하게 굳이.”
“형 데리러 가는 게 뭐가 피곤해!”
“요새 일도 많잖아.”
“또, 또 쓸데없는 말 한다. 우리 자기 얼굴만 보면 쌓였던 피로가 싹 날아가지용~”
송여환이 내 뺨을 감싸 쥐곤 쪽쪽 버드 키스를 하며 여전히 낯부끄러운 주접을 떨어 댔다. 애정을 받는 데 꽤나 익숙해져 있었지만, 이런 애교에 익숙해지기까진 아직도…… 음,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싫다는 건 아니다. 그저 어떻게 반응을 돌려주어야 하는지 모를 뿐. 망설이던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녀석의 뺨을 살짝 꼬집어 줬다.
“씻고 와. 밥해 놨어.”
“……엥?”
헤실헤실 웃으며 엉기던 송여환이 우뚝 행동을 멈추었다.
“왜.”
“형, 형이 밥을 했다고?”
송여환의 눈이 평소보다 배로 뜨였다.
“왜. 나는 하면 안 되냐?”
“아니. 그건 아닌데…….”
낮에 자얀과 대화하는 내내 송여환을 언급해서인지 온종일 녀석의 생각만 났다. 그래서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돌아왔고, 딱히 할 일이 없기도 하고…… 송여환을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간질간질한 듯도 해 뭔가를 좀 해 주고 싶은 마음에 식사라도 준비해 봤다.
그런데 반응이 영…… 시원찮았다. 녀석이라면 온갖 오두방정을 떨 거라 생각했는데.
‘씨X, 뭐지?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기에 시큰둥한 거지? 젠장, 나름의 서프라이즈였는데.’
약간 섭섭한 마음이 들었지만, 괜히 아무렇지 않은 척 무심한 태도를 유지했다.
“으음, 나 그, 그럼 씻고 올게. 그러고 먹자.”
“어.”
“빨리 올게.”
“어어, 그래.”
송여환이 넥타이를 풀며 욕실로 들어가는 걸 보곤 재빠르게 주방으로 향했다. 식탁에 고이 놓인 볶음밥과 계란탕. 분명 처음에는 꽤 괜찮아 보이던 것들이 이상하리만치 구려 보였다.
하긴 그동안 내가 요리하는 모습을 보인 적도 없으니까 녀석이 못 미더워할 만하지. 일 끝나고 왔으니 맛있는 걸 먹고 싶을 테고. 나는 머리를 긁적이다 내가 만든 요리를 한쪽으로 치워 버리곤 이모님들이 만들어 두었던 갈비찜과 오이냉국을 꺼내 들었다.
‘역시 퀄리티가 다르구나.’
조금 짜증이 난 손길로 음식을 덜고 데우며 식탁 위를 가득 채우던 중 스스로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싸움 말곤 잘하는 게 없잖아. ……어?’
순간 송여환이 씻고 있을 저 먼 욕실 쪽을 향해 고개가 돌아갔다.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던 물음이 떠오르자 모든 사고가 멈추어 버리고 말았다.
“뭐야. 왜…… 날 좋아하는 거지?”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