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아, 혀엉…….”
“이사 가는 것도 저 녀석이 적응해서 독립할 수 있을 때 나가자. 이 집에 남겨 두기에는 네 가족도 있고, 마음에 걸린다.”
“그럼, 자얀 씨까지 세, 셋이…… 살자는 거야?”
“정확히는 다 같이지. 형님, 누님도 있잖아.”
그냥 군식구 하나 늘었다고 생각해. 깔끔한 내 정리에 자얀은 박수를 쳤고, 송여환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면서도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다시 한번 생각해 보라고 애교 아닌 애교를 떨어 댔지만 별 효과는 없었다.
[그럼 잘 부탁해, 선생님들?]
셋 중 기분이 좋은 사람은 빌어먹을 은발 녀석뿐이었다.
* * *
“누나랑 형, 저주할 거야.”
송여환이 침대에 쓰러지듯 누우며 울상을 지었다.
“이미 벌어진 일인데 어쩔 수 없잖아.”
나는 송여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건성으로 대꾸했다. 어지러운 머릿속에선 어떤 방식으로 해야 최단 시간 내 은색 거머리를 떼어 놓을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한창이었다.
사실 사회 적응이라는 게 일일이 가르칠 수 없을 만큼 너무나 방대해서 어떤 걸 어떤 식으로 알려 줘야 하는지 어려웠다. 음, 일단 기본적인 규칙에 대해 말해야 하나.
“그래도 내가 신혼집을 얼마나 기대했는데!”
……응? 신혼? 고심하던 나는 옆에서 들려온 충격적인 한 단어에 하던 생각들을 그만 까맣게 잊어 먹고 말았다.
“뭐?”
“신혼! 신혼집 말이야! 으이씨, 하여간 주변에 유성이 형 빼고 마음에 드는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어떻게 동생이 신혼 생활 기대하는 거 뻔히 알면서 일을 이렇게 망치냐?”
“잠깐. 신, 뭐?”
“나중에 결혼식 올릴 때 축의금 두둑이 내라고 해야겠어.”
쟤 누구랑 결혼해? X발, 그 대상이 나인 거 같긴 한데, 왜 나만 전혀 모르지? 결혼이요? 나는 눈을 끔뻑거리며 송여환을 쳐다봤다.
녀석 혼자 성을 내며 씩씩거리는 꼴을 보자니 진심 같은데……. 우리가 언제 한 번이라도 결혼 얘기를 나눈 적이 있던가? 아니, 그전에 한국에서 동성혼이 가능했나? 그나마 비슷한 시스템이던 에스퍼·가이드 관련 법도 사라진 마당에…….
“야, 우리 결혼해?”
나는 마치 남 일 물어보듯 물었다. 반쯤 얼이 빠져 있었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멍청하다 비난해도 할 말 없을 만큼 멍했다. 그러자 송여환이 한껏 내던 화를 뚝 멈추곤 되레 놀란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그럼 안 해?”
보통은 안 하지…… 않나? 나는 대꾸를 하려다 무슨 쓰레기 보듯 쳐다보는 시선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왜 그렇게 쳐다봐.”
“형, 너 설마 나 엔조이였어?”
“약 처먹었니?”
“허!”
송여환이 몸을 일으켜 앉으며 손가락으로 본인과 나를 번갈아 콕콕 짚었다. 휙휙 바뀌는 손짓이 얼마나 새침한지 자동으로 시선이 따라갔다.
“와, 나, 지금, 와아.”
이마를 탁 짚더니 짤막한 코웃음까지 친다. 한편의 모노드라마를 보는 기분이었다. 지금 당황스러운 게 누군데. 아주 북 치고 장구 치고 혼자 다 하네.
“아니, X신아.”
“허억. X신……? 지금 나한테 X신이라고 한 거야?”
다급함에 거친 말을 툭 내뱉자 송여환이 팔짝 뛰며 울상을 지었다. 당근 빼앗긴 토끼 같았다.
예전에는 나한테 하도 욕을 먹어서 무디게 반응하던 놈이 요새는 예쁜 말만 듣고 이쁨만 받았다고 저렇게 티를 낸다. 본인을 향한 거친 언사에 새삼 충격받은 건지 사과하라며 진상을 부린다.
“네가 헛소리를 하니까.”
“결혼하자는 게 헛소리야?”
“허, 후우…….”
순간 열이 정수리까지 뻗쳤다 사라졌다. 나는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던 욕 덩어리들을 가까스로 삼켜 냈다.
얘는 나보다 어리다. 나보다 연약하다. 참자. 참아라, 낙유성.
“네가 엔조이니 뭐니 했잖아.”
어금니가 뿌드득 갈렸다. 다정한 목소리를 내지만 주먹은 부들거리고 있었다.
“형이 결혼 안 할 거라는 듯이 얘기하니까 그렇지! 나는 우리의 끝을 이미 상상했는데, 나 혼자만 그런 건가 서운해서!”
“한국에서 어떻게 결혼해.”
“외국으로 나가면 되잖아.”
……이 자식, 진심이구나. 나를 보는 눈동자에 서운함과 그에 비례하는 애정이 뚝뚝 묻어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좋은데, 한편으론 당황스러웠다. 결혼이라니……. 애초에 그런 쪽으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기에 너무나 갑작스러웠다.
물론 송여환이 전해 오는 뜻 자체는 기뻤다. 그 정도로 나와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했다는 게 놀라웠고. 막연하게 이 녀석과 오래오래 행복하겠지, 하는 상상에서 끝을 낸 나와 달리 송여환은 현실적으로 우리의 종점을 생각했단 거니까. 어떤 연인이 기뻐하지 않을까.
거기다 사실…… 하든 말든 상관없다. 깜짝 놀란 거지 싫은 건 아니었으므로. 우리의 관계가 정의 내려지는 게 나쁘지 않았다. 그저 당황스러웠을 뿐. 아니, 더 자세히 말하자면 결혼을 하든 하지 않든 내게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나는 생의 마지막까지 이 녀석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까.
거기까지 생각을 끝낸 나는 시무룩해져 있는 녀석을 흘긋 보곤 픽, 가볍게 웃었다. 문득 내게도 진정한 평화가 찾아왔구나 싶어서. 이런 연인다운 주제로 감정이 상해 싸울 수 있는 날이 오다니 신기했다.
“삐지지 마.”
“삐진 거 아니거든!”
입이 댓 발 나온 송여환을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췄다.
“어차피 네 건데 뭘 그렇게 초조해해. 그래, 해. 전부 하자. 결혼이든 뭐든. 아니면 네가 내 양자로 들어와.”
“몇 살 차이도 안 나면서.”
새침하게 대꾸하는 녀석을 보며 나른히 미소 지었다.
“더 좋지 뭐.”
내 말에 송여환이 샐쭉했던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뺨을 확 붉혔다. 채 억누르지 못한 웃음으로 인해 광대가 씰룩이는 게 보였다. 새끼, 밝히기는.
“가만 보면 은근히 대담하다니까.”
나를 뒤로 넘어뜨린 송여환이 열에 달뜬 얼굴로 입술을 연신 붙였다 뗐다.
“대담한 게 누군데?”
“맞아, 나는 형한테 대담하지 않은 적이 없지.”
“왜 점점 티셔츠 안으로 손이 들어오냐?”
“내 거라며? 내 거 좀 만져 보자.”
문득 예전에 내가 삶을 포기하려 마음먹었을 적, 집으로 찾아와 자신은 절대 꺾이지 않을 테니 나보고 꺾이라며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소리치던 송여환이 떠올랐다. 그때는 뭐 이런 놈이 다 있나 싶었는데 지금 와서 생각하니 너무 고마웠다.
“진짜 네가 이겼네.”
“뭐?”
“아무것도 아니야. 그보다, 그만 핥아. 간지러워.”
“응응.”
대답은 잘만 하면서 행동은 멈추지 않는다.
“야. 간지럽다니까?”
녀석의 얼굴이 내 가슴을 지나 복부로 내려갔다. 보드라운 입술이 작은 자국을 남기며 움직이자 참았던 웃음이 터져 나왔다. 바로 그 순간, 벌컥 방문이 열렸다.
“…….”
“…….”
[이런…….]
상의를 탈의한 채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서 있는 자얀. 녀석이 삐딱한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청객의 등장으로 달달하던 방 안의 공기가 차게 식었다.
[교미 중이었구나?]
내 위에서 갖은 애교를 떨어 대던 송여환이 자얀의 등장에 우뚝 행동을 멈췄다. 사탕을 머금은 듯 달큼해 보이던 얼굴이 싸하게 굳었다. 녀석은 쇄골까지 올라간 내 셔츠를 내리며 몸을 일으켰다.
“하아, X발.”
참고로 저 욕설은 내가 뱉은 게 아니다. 송여환이 사나운 표정으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길 하나하나에 짜증이 서려 있었다. 기본적으로 매너를 두르고 있는 놈이 저러니 퍽 낯설었다. 종종 화를 내는 모습을 본 적 있지만 저렇게 ‘혐오’가 서린 태도를 드러낸 적은 별로 없었는데.
“남의 방에 들어올 땐 노크가 기본 예의라는 것부터 알려 줘야겠네.”
중얼거린 송여환이 자얀에게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우리, 서열 정리부터 합시다.”
[화 되게 많이 났네?]
“한국말 써요. 할 줄 알잖아요.”
“아아, 조금?”
송여환의 굳은 낯을 보고도 자얀은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키도 길쭉하고 덩치도 있는 놈들이 서로 마주 본 채 기 싸움을 하고 있으니 분위기가 살벌해졌다.
숨 막혀 죽겠네. 나는 심드렁히 생각하며 하품을 쩍 했다.
“몇 살입니까?”
“살?”
“나이.”
매일 형, 형 애교를 떨던 송여환이 타인에게 나이를 들먹이며 기선 제압하려 하는 모습이 귀여워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래, 싸움의 기본은 꼰대 짓이지.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둘 다 나보다 어리다는 걸 알고 있어서인지 애들 싸움으로밖에 안 보였다.
“으응, 너는?”
“근데 왜 반말이야?”
“요.”
……유치해 죽겠다. 정녕 저것이 성인 남성의 싸움이란 말인가. 가슴이 웅장해지는 말다툼에 왜인지 내 낯이 부끄러워졌다.
송여환이 제 나이를 밝히고 어깨를 주욱 펴자 자얀은 ‘너보다 한 살 더 많아’를 시전했다. 그러곤 앞으로 형이라 부르라며 억지를 부려 댔다.
“뻥치지 마! 네가 무슨 나보다 한 살이 많아!”
“뻥이 뭐야? 아, 빵? 빵은 배웠어.”
“죽빵도 알아?”
“어? 너 왜 반말해. 한국 사회, 모두 친구 아니야. 나이 많은 사람. 존중해야지.”
나는 어깨를 으쓱이는 자얀을 보며 눈썹을 들어 올렸다. 저 새끼, 놀리는 솜씨가 수준급이네. 멀리서 봐도 송여환 속만 뒤집히는 게 훤했다.
‘역시…… 내가 맡기로 한 게 잘한 일이야.’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