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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113화 (113/115)

113화

‘혀엉, 드디어…… 우리 둘이다.’

송여환의 수척해진 모습에 안타까움을 느꼈으나 위로해 주기엔 나 역시 시든 시금치가 되어 있었다.

‘이중, 아니, 삼중으로 잠금 걸어 놓자.’

‘누나랑 형도 못 오게 할 거야.’

‘그러자, 당분간은…….’

하지만 집을 구하는 과정이 알콩달콩했냐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으아아, 형…… 미안해. 오늘도 늦을 거 같아.’

자얀의 사회 적응을 돕기 위해 빠졌던 나날을 채우기 위해서인지, 다시 회사로 불려 들어간 송여환이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빴기 때문이다. 말 그대로 나 혼자 이사 준비를 해야 했다. 벽지부터 가구까지 없는 꼬리를 흔들어 가며 설레하던 송여환이 정작 준비할 때 옆에 없으니 내 의욕도 바닥을 쳤다.

물론 송여환은 없는 시간을 쪼개 간간이 나를 도우러 왔지만 잠깐만 엉덩이를 붙여도 꾸벅이며 조는 모습에 더 이상 불평을 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내심 서운함이 쌓여 종종 말이 심하게 나갈 때가 있었고, 그 때문에 몇 번을 다투기도 했다.

문제는 당장 열받아 죽겠는 나를 두고 이 멍청이는 뭐가 좋은지 배시시 웃고 있었다는 거다.

‘도대체 왜 웃냐?’

‘그치만…… 우리 꼭 신혼집 준비로 다투는 신혼부부 같잖아.’

답답함에 추궁해도 수줍어하며 정신 빠진 소리를 해 댔다.

‘그럼 신혼부부다운 일을 해 보든가.’

뭐…… 결국 나도 똑같은 새끼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거 좀 큰일이었다. 이젠 송여환의 얼굴만 봐도 화가 풀려 버리니. 스스로 애인 한정 호구 기가 있다는 걸 자각하고는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근데 귀여운 게 잘못 아닌가?

혼자 멍하게 생각을 하던 중 대뜸 억울함이 밀려왔다.

‘보고 싶은데, 왜 옆에 없는 거야?’

송여환이 없는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이젠 할 것도 없다. 바둑, 체스, 독서 같은 고상한 것들에는 취미가 없고. 그나마 하는 건 밀린 드라마 몰아보기인데 재탕에 삼탕까지 하니까 대사까지 외울 지경이다.

넓은 침대 위를 한 바퀴 구른 후 몸을 일으켰다. 행복에 겨운 게 이런 건가? 평화로운 일상에 영 적응을 못 하는 스스로가 웃겼다. 에스퍼일 때는 그토록 바라던 삶이었던 주제에…….

“음?”

핸드폰이 징- 울려 꺼내 들었다. 발신자는 다름 아닌 송여환이었다.

[동거인: 오늘도 늦을 거 같아ㅠㅠ 미안해 사랑해 뿅뿅♥ 밥꼭챙겨머꾸 03< 사랑해요ㅎ]

솔직히 최근 ‘이 녀석, 나에 대한 사랑이 식은 건가?’ 하는 의심을 잠깐 한 적도 있다. 하지만 매일 새벽마다 나를 물고 빠는 것과 점심시간, 저녁 시간, 이동 시간, 조금 부끄럽지만 화장실 가는 틈에도 전화나 문자를 해 대는 걸 미루어 그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그럼 뭐 하냐, 얼굴도 영 못 보는데.’

나는 주방으로 가 커피를 내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나, 예전에는 틈만 나면 자려고 하지 않았나?’

그때는 지금보다 더한 집돌이였을 텐데…… 역시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건가? 너무 조용하니 오히려 어디든 나가고 싶어진다. 강제로 외향인이 되어 버린 기분이다.

‘아니지. 솔직히 말하자면, 데이트…… 하고 싶은 거겠지.’

나는 괜히 후끈한 뺨을 손등으로 꾹 눌렀다. 사실 송여환만 옆에 있다면 하루 종일 침대 위를 뒹굴어도 재밌을 텐데 그게 아니니까.

“젠장.”

오늘은 또 뭘 하며 송여환을 기다려야 하나 고민을 하던 찰나, 핸드폰이 한 번 더 징징 울렸다. 여환인가 싶어 빠르게 확인을 하니 낯선 번호가 화면에 떠 있었다.

[안녕]

누구야? 잘못 보낸 건가 싶어 무시하려는데, 그다음 온 메시지에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짚압이야]

[나와]

[키스한거 소문내ㄴ기전에^^]

핸드폰이 익숙지 않은지 오타와 함께 온 심상치 않은 내용. 낯선 번호였지만 보낸 상대가 누구인지 바로 유추가 가능했다.

“미친 새끼.”

욕설이 절로 터져 나왔다. 뭘 소문내? 헛소리 말라는 경고를 전하기 위해 전화를 걸어 봤으나 상대는 받지 않고 끊은 후 또 다른 협박 메시지를 보냈다.

[3초안에 안 오면 강아지한테 간다?]

[1 ^^]

‘죽여 버릴 거야.’

안 그래도 저조한 기분이었는데 이 빌어먹을 자식이 제대로 불을 붙여 왔다. 오냐, 어디 한판 해 보자는 거지? 나는 이를 뿌드득 갈며 잰걸음으로 협박범을 찾아 현관문을 향해 달려갔다.

범인은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야!”

쩌렁하게 울리는 내 목소리에 차에 기대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자얀이 응? 하며 고개를 들어 올린다. 얼씨구, 이젠 서울 시민 다 됐네. 긴 코트를 깔끔히 소화해 낸 녀석을 보자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왜 찾아와서 지랄이야.”

가까이 다가가 성질을 부리자 특유의 능글맞은 미소를 짓는다.

“인사 한번 격하네. 우리 도련님은 욕을 안 하면 말을 못 해?”

“네가 욕을 하게 만들지 마.”

“이상하네? 나는 항상 매너 있게 굴었는데.”

자얀이 내 뺨을 한손으로 콱 잡아 들었다. 뺨이 꾹 눌려지며 입술이 툭 내밀어졌다. ……이게, 어디다 함부로 손을 대?

“치워!”

“하하, 금붕어.”

“정신 나갔냐?”

기분이 상해 거칠게 손을 쳐 내도 녀석은 싱글벙글 웃기만 했다.

“꼴에 차도 외제네.”

모든 표창과 보상을 거부한 나와 달리 녀석은 바닥까지 탈탈 털어 전부 받아 먹었다고 했다. 그걸로 뽕이란 뽕은 다 뽑고 있는 모양이다. 하긴, 브릭트스컴트의 뮤즈가 되기도 한 놈인데 뭐가 부족할까. 앞으로 인생 탄탄대로겠지.

"나 곧 광고도 찍는다?"

자얀이 차에 기댄 그대로 윙크를 했다.

‘눈 버렸네, X발.’

사실 놈이 싫은 건 오로지 내 취향 때문이고, 객관적으로 따져 보자면…… 인정하기 싫지만 저 면상으로 인해 꽤 돈맛 좀 볼 수 있을 거다. 물론 우리 여환이가 더 잘생기고 귀엽지만.

“그래서? 왜 바쁜 몸이 한가한 백수한테 협박질이야. 뒈질라고.”

“으응, 나 여기 친구 없잖아.”

“넌 원래 친구 없었어.”

서블에는 뭐 있었어? 뒤이은 내 말에 녀석이 눈썹을 슥 들어 올린다.

“혹시 사이코패스야?”

“누구 한정으로는.”

“자꾸 그러면 확 절친 해 버린다? 라디오, 예능 할 거 없이 도련님 이름 팔고 다닐 거야.”

“야.”

“그러니까 혀에 세운 가시 좀 빼. 안 아파?”

“전혀.”

“애초에 친구 없는 건 도련님도 마찬가지잖아.”

“난 여환이 있거든.”

하, 백 명의 친구보단 한 명의 애인이지. 뭘 모르는 놈이네. 속으로 구시렁거리고 있으려니 녀석이 실실 웃으며 놀려 대기 시작했다.

“이젠 여환이네? 송여환이 아니라.”

“남의 애인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왜? 난 아까도 만나고 왔는데.”

“네가 왜.”

“광고 건으로.”

백수인 누구랑 다르게 바쁘다며 얄밉게 웃는 얼굴을 무심코 한 대 쳐 버릴 뻔했다.

“그래서 왜 왔는데. 설마 자랑하러 왔냐?”

“음…… 곧 바빠질 거 같아서.”

자랑질 맞네. 나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녀석을 노려봤다.

“그러니까, 네가 바쁜 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고.”

“그전에 좀 놀아 보게. 오늘 내 가이드나 좀 해. 아, 그 가이드 말고. 알지?”

눈을 찡긋거리는 녀석에게 코웃음을 치며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따지려 했지만 순식간에 팔이 잡혀 차에 덜렁 태워졌다.

“내리기만 해. 아쉬운 건 도련님이니까.”

“…….”

“키스 말고 X스했다고 강아지한테 구라칠 거야.”

“돌았냐?”

“응. 오늘 못 놀면 돌아 버릴 거 같아.”

유쾌하지 않은 협박 때문에 억지로 채워진 안전밸트조차 풀지 못했다.

“하, 머리 아파.”

나는 인상을 찡그리며 마른세수를 했다. 그렇다고 얌전히 하자는 대로 하면 앞으로도 이럴 거 같은데…… 젠장, 그럴 순 없다. 마지막이라는 확답을 제대로 받아 내야 했다.

“야.”

“응?”

침을 한 번 꼴깍 삼킨 후 꽤나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

“오늘 하자는 거 군말 없이 해 줄 테니까, 너도 이 지랄 하는 거 오늘로 끝내. 두 번은 없어. 그때는…… X발, 너 죽고 나 사는 거야.”

“으응…… 지겨워라, 난 도대체 몇 번을 죽어야 하니.”

“대답해.”

끌려다니는 건 취향이 아니니 당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다. 진지한 내 말에 퍽 자연스레 운전을 하던 자얀이 와하하학, 웃음을 터뜨렸다.

“뭔……. 전쟁 나가? 그냥 친구끼리 놀자는 거잖아.”

“전제부터 틀려 먹었어. 너랑 내가 왜 친구야.”

“성격 안 좋고, 세상에 둘밖에 없는 능력도 있고, 앞으로도 그런 외로움은 서로밖에 이해를 못 할 테니까?”

핸들 위를 톡톡 두드리며 말하는 녀석에게 자꾸 엮지 말라며 톡 쏘아붙였으나 어느 정도는 이해하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이해가 갔다. 더 이상 싸울 일은 없어야 하고, 없겠지만…… 그럼에도 ‘에스퍼’라는 작은 의무감은 항상 가슴속에 머물러 있을 테니까. 그걸 이해할 수 있는 건 나를 제외하고는 능력을 지닌 자얀뿐이리라.

‘여환이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문득 아쉬움이 들었다. 백산과 전투를 벌일 때는 그가 다칠까 봐 능력을 잃어 다행이라는 생각까지 했던 주제에 말이다. 역시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다.

가이드 없는 세계의 이물질 에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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