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6/11)

5.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혹시’라니? 그 물음의 의미를 알 수 없어서 재현은 잠시 신중해지기로 했다.

“그건 왜?”

“아뇨…… 자꾸 좋아한다는 말을 시키시길래. 혹시나 해서…….”

사실 안 좋아하는데 그저 시켜서 말한 거뿐이라고 못 박은 건가? 재현의 마음속이 덜커덕거렸다. 어떻게든 좋아한다는 말만 들으면 될 줄 알았는데, 이게 아니었던 것 같다. 유치하게도 자신이 원하던 것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고백이었나 보다. 이건 뭐 20세기 순정만화도 아니고. 소녀 같은 자신의 감성에 장탄식이 절로 터졌다.

“하…….”

재현은 머릿속으로 제 말에 따른 상우의 예상 답안을 그렸다.

예상 답안 1. 그래, 좋아해. → 저는 안 좋아하는데요?

예상 답안 2. 아니, 안 좋아해. → 다행이에요. 저도 안 좋아해서.

예상 답안 3. 그럼 왜 좋아한다고 말했어? → 사장님이 시키셨잖아요.

예상 답안 4. 좋아한다는 말이 그렇게 쉬워? → …….

음. 4번이 제일 대답하기 곤란하겠군. 시킨다고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니 이렇게 물어본다면 상우가 조금이라도 재현에 대한 마음을 다시 되짚어 볼 것이다.

“너는, 좋아한다는 말이 그렇게 쉬워?”

재현의 예상대로 상우의 눈이 동그래졌다. 재현도 저를 좋아하냐고 물어본 것뿐인데, 비난을 받을 줄은 몰랐다. 내심 재현이 저를 좋아하는 건가 싶어 기대했는데. 좋아한다고 하면 아무리 강요에 의해 한 말이라도 제가 좋다고 내뱉은 말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려고 했는데. 방금 막…… 엄마한테 그 계약이라는 건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어볼 생각까지 했는데!

역시 재현은 좋게 봐주려야 봐줄 수가 없었다. 재수가 없다 못해 마이너스를 기록하는 재현은, 진짜 재수 없게도 저에게 좋아한다는 말은 듣고 싶으면서 자신이 말을 하기는 싫어 보였다. 

보통 좋아한다는 건 마음이 있는 상대한테 듣고 싶어하는 말 아닌가? 자꾸 좋아한다 말하라고 강요하면 지나가던 멍멍이도 나한테 관심 있나 착각할 것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나 좋아요? 하고 물어보면 자존심 강한 재현이 제대로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아 일부러 ‘혹시’라는 단어까지 써 가면서 조심스레 물어본 건데, 오히려 좋아한다는 말이 쉽냐며 타박이나 당하고.

쉽게 좋아한다고 말한 자신을 비난하는 건지, 아니면 좋아하지도 않는 놈한테 어떻게 그런 말을 하냐고 정색을 하는 건지. 뭐가 됐든 상우는 서러웠다.

속상함에 울컥 올라오는 울음을 참는 상우의 눈매가 발갛게 물들어 갔다. 파르르 떨리는 상우의 긴 속눈썹을 본 재현의 찡그려진 얼굴이 조금 풀렸다. 뭐야. 왜 울려고 그래.

“사장님은…… 진짜 나쁜 놈이에요…….”

상우의 목소리도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재현이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상우가 인정한 또 하나의 생명체가 가라앉은 재현의 마음을 무시하고 꿈틀꿈틀하며 크기를 키워 나가고 있었다. 욕하면서 울음을 꾸역꾸역 참는 걸 보니 더 울리고 싶어졌다. 상우도 몸 안에 처박힌 채 부피를 키우는 흉기를 느끼고 몸을 흠칫, 떨었다. 조금 옅어졌던 단내가 다시 스멀스멀 풍기고 있었다. 이거 진짜 미친놈이네. 이 와중에 흥분이 되냐!

“빼요…….”

상우가 손바닥으로 눈을 꾹 눌렀다. 자꾸 눈물이 날 거 같아서 가만히 두기 힘들었다.

“박상우. 손 치워 봐.”

재현이 가만히 속삭였다.

내가 하라면 하란 대로 다 할 줄 알고! 상우는 손을 떼지 않고 열심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목 아래까지 빨갛게 달아올라서 반항하는 상우를 지켜보던 재현이 억지로 얼굴을 가린 손을 치워 버렸다. 뭐야. 진짜 울고 있네.

“왜 울어?”

재현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지금 울고 싶은 건 자신이었다. 왜 이 변태 새끼가 울고 있지? 쪽팔리게 고백하라고 채근하다 본전도 못 찾은 건 난데.

“이거…… 빼시라고요……!”

상우가 다리를 바동거렸다.

“왜?”

왜냐니. 진심인가 싶어 상우는 눈을 깜빡거리며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를 억지로 밝게 했다. 흉흉하게 저를 쳐다보는 눈빛이 무서워서 상우는 어깨를 움츠렸다.

“너, 내 자지 좋아한다며.”

재현은 상우의 안에 박혀 있는 좆을 잘게 흔들었다.

“나도 네 구멍 좋아. 존나 맛있어.”

“흐윽……!”

들으라는 듯이 상스러운 말을 하며 일부러 전립선을 꾹 누르자 상우가 우는 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한 번 더 하자. 아니, 두 번 더 하자.”

재현의 당황스러운 논리에 놀란 상우가 히끅, 딸꾹질했다. 멈춰 보려고 숨을 참아도 펄떡거리는 가슴팍을 억누르는 것까지는 되지 않았다.

“진짜 가지가지하네.”

한숨을 푹 내쉰 재현은 하는 수 없이 자지를 쭈욱 잡아뺐다. 그러는 중에도 상우가 정액 한 방울 흘리는 것조차 아까워하는 걸 기억하고는 손을 더듬거려 같이 딸려 나온 하얀 액체를 다시 구멍 속으로 꾸역꾸역 넣어 주었다. 나처럼 자상한 사람이 또 어디 있다고.

상우의 울음 섞인 딸꾹질 소리를 들으며 재현은 가만히 상우를 바라봤다. 달래 줘야 하는 건가.

“뭐가 문제야?”

사장님이요! 사장님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문제예요!

“……왜…… 왜 사장님은 좋아한다는 말 안 해요……?”

술 취해서 부리는 땡깡이야, 아니면 진심이야. 재현은 알 수가 없어져 입을 다물었다. 저를 좋아한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고, 그런데 또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좋아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말하면. 뭐 달라져?”

이미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재현의 목소리가 날카롭게 상우의 귓가에 파고들었다. 재현의 말도 맞았다. 이제 와서 좋아한다고 말해 준들 바뀌는 건 없었다.

“그래도…… 저는 말했잖아요.”

“내가 시켜서 한 말이잖아.”

상우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재현이 말하라고 채근하기 전까지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조차 없으니,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거 봐.”

쯧, 하고 혀를 차는 소리에 상우가 인상을 찡그렸다. 재현의 손가락이 꾹꾹 상우의 주름진 미간 사이를 눌러서 폈다. 아무리 짜증 나는 놈이더라도 예쁜 얼굴을 막 쓰는 건 아까우니까.

“……그럼 제가 진짜 좋아하게 만들면 되잖아요.”

상우가 적반하장인 소리를 조용히 소곤거렸다.

아예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포기한 건가. 지금 좋아한다는 소리를 못 들어서 울고불고 한 건 제가 아니라 상우였다. 그래 놓고 좋아하게 만들어 보라니. 어이가 없다 못해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래, 한번 들어나 보자.

“어떻게 하면 좋아할 건데.”

“음…….”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건지 상우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히끅, 하고 딸꾹질을 했다. 재현의 손이 상우의 가슴 위를 가볍게 쓸었다.

“오래도 하네, 딸꾹질.”

부드러운 손길에 상우는 몸을 가볍게 떨었다. 한번 재현이 자신을 좋아하는 것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자 작은 몸짓 하나가, 짧은 맞닿음 하나가 유난히 간지럽게 느껴졌다. 그 간지러움은 살갗에서 밀려 오는 게 아니라 가슴께 어딘가에서 퍼져 나오는 거라 긁어서 해결될 것도 아니었다.

“멈추게 해 줘?”

상우가 미처 끄덕거리기도 전에 재현의 말랑한 입술이 와 닿았다. 간간이 들썩거리는 숨결 사이로 따뜻한 혀가 파고들었다. 밉살맞은 말만 해 대는 혀는 달콤하고 부드러워서 상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혀의 돌기 하나하나를 핥아대듯이 꼼꼼하고 느릿하게 움직이던 살덩이는 뾰족하게 세워져 입천장을 간지럽히기도 하고 깊게 들어와 어금니를 쓰다듬기도 했다.

뺨에 따뜻한 숨이 규칙적으로 불어올 때마다 상우는 몸을 움찔거렸다. 더 이상 가슴팍이 펄떡거리지 않을 때까지 입을 맞추던 재현이 마침내 입술을 떨어뜨렸다.

“드디어 멈췄네.”

코끝을 맞닿으며 속삭이는 목소리조차 달콤해 상우는 질끈 감은 눈을 뜨지 못했다. 항상 이렇게 대해 줬으면 좋을 텐데.

“……다정하게 대해 주세요.”

쪽, 재현이 상우의 입술이 짧게 키스를 했다.

“박상우, 말고 상우야, 하고 불러 주세요.”

감겨 있던 상우의 눈이 깜빡깜빡 뜨이고 고동색 눈동자가 재현을 빤히 응시했다.

“……좋아한다고 말해 주세요.”

상우가 승부수를 던졌다. 안 해 주니 더 듣고 싶어졌다. 어쩐지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나면 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뭔지 알게 될 것 같았다.

이 요망한 변태 새끼를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재현은 좋아한다고 말해 달라는 상우의 작은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상우가 해 달라는 대로 다 해 주고 싶어져 몸이 달았다. 재현의 손가락이 조심스럽게 이마를 덮고 있던 상우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단정한 이마 위에 입술을 꾹 누르고, 아직도 물기가 남아 있는 눈가도 혀를 내어 핥았다. 올망졸망한 코끝을 아프지 않게 깨물자 매끄러웠던 콧잔등 위에 옅게 주름이 생겼다.

“상우야.”

낮게 들려오는 제 이름에 상우가 재현을 올려다보았다.

“상우야, 좋아해.”

애써 모른 척하던 말을 꺼내자 기분 좋은 심장 고동이 쿵쿵 울렸다. 어쩌면 자신은 이 말이 얼른 하고 싶어서 상우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해 달라고 졸랐던 걸지도 모른다.

“좋아해.”

재현은 한 번 더 속삭여 보았다. 무언가 반응할 줄 알았던 상우는 의외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잔뜩 굳어 버리더니 손을 위로 뻗어 무언가를 더듬더듬 찾았다. 그 손에 끌려 온 커다랗고 푹신한 베개는 순식간에 상우의 얼굴을 가려 버렸다. 베개 아래에 가려진 얼굴이 궁금해져 재현은 상우가 꽉 쥐고 있는 베개를 힘으로 끌어내렸다. 눈만 빼꼼히 보여 주는 상우의 얼굴은 웃음이 날 정도로 빨개져 있었다.

“이렇게?”

상우가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기다란 속눈썹이 팔랑팔랑 움직였다.

“……저도 지금 말해야 해요?”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됐는데.

“아니야. 넌 진짜 말하고 싶을 때 말하면 돼.”

어우. 낯간지러워. 상우는 다시 베개 밑으로 얼굴을 쏙 숨겨 버렸다. 두툼한 솜에 숨이 막혀 왔지만 당장 재현의 얼굴을 똑바로 마주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어쩌자고 좋아한다 말해 달라고 했던 걸까. 넘어서는 안 될 선을 훌쩍 뛰어넘은 것 같았다.

숨어 버린 상우가 나오기만을 하염없이 기다리기 힘들어 재현은 하얀 가슴 위에 도드라진 돌기를 툭 건드렸다.

“흣…….”

만족스러우리만큼 정직한 반응. 재현의 엄지손가락이 상우의 가슴을 동그랗게 문지르다가 꾹 눌렀다. 바들바들 떨면서도 고집스레 베개를 치우지 않는 게 귀여웠다. 어느새 바짝 곧추선 자지를 아직 축축하게 젖어 있는 구멍 위에 문지르자 상우의 허벅지가 슬그머니 벌어졌다.

베개로 얼굴을 가린 채 유혹이랍시고 다리를 벌리는 놈이나, 그 꼴을 보고 흥분해서 헐떡거리는 놈이나. 재현은 피식 웃으며 귀두 끝을 구멍 안으로 밀어 넣었다.

“상우야, 어떻게 하는 게 다정한 건지 알려 줘야지.”

물론 상우를 놀리는 말도 잊지 않고 내뱉었다.

“아흐윽―.”

상우가 울면서 엉금엉금 앞으로 기어 갔다. 하지만 그 도망은 몇 센티 가지 못해 재현의 손에 붙들려 다시 원래 자리로 돌아왔다. 동시에 콱 처박히는 자지에 상우는 눈물을 뚝뚝 떨어트렸다.

“많이 힘들어?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그만하시라고요. 재현은 다정의 의미를 잘못 해석한 것인지 말만 다정하게 하면서 상우를 한계까지 몰아갔다. 젤과 체액이 뒤엉킨 구멍에서 나는 찔걱찔걱 소리가 듣기조차 싫었다.

“흐윽, 아! 더, 더 안 나와요…… 제발…….”

상우가 울면서 애원하자 재현의 입술이 뒷목과 어깨에 꾹꾹 눌러졌다. 하얀 몸 위에 울긋불긋하게 남은 자국이 꽃잎처럼 예뻐 보였다. 그래서 재현은 느끼고 있는 생각을 그대로 내뱉었다.

“상우야, 너무 예쁘다 진짜.”

재현의 입에 발린 말은 밤새 들어서 더 이상 감흥도 없었다. 그런 말을 할 시간에 잠이나 재워 줬으면. 재현의 손가락이 탈탈 털려서 완전히 수그러든 상우의 자지를 움켜쥐었다.

“어떻게 좆도 이렇게 귀엽지?”

“흐윽…… 제발 그만…… 하으, 잘못했어요.”

상우의 흐릿한 시야 사이로 푸르게 터오르는 동이 보였다. 밤새 시달린 건가. 묽은 정액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을 만했다. 멍하게 딴생각을 한 것을 질책이라도 하듯이 재현의 성기가 콱 내벽을 짓눌렀다. 치사하게도 이미 상우의 몸 안 구석구석을 파악한 재현은 상우가 자지러지는 곳만 골라서 찍었다.

“네가 잘못한 게 뭐가 있어.”

말을 생각 없이 내뱉은 게 잘못이었다. 말을 함부로 하면 이렇게 되는구나. 상우는 제가 한 말의 무게를 온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재현은 상우야, 하고 부르면서, 다정한 말을 속삭이면서.

“좋아해, 상우야.”

그리고 좋아한다고 말하면서 끝없이 좆을 박아 댔다. 더 이상 발기할 힘조차 없는 성기 끝에서 주륵 물이 흘렀다. 쾌락에 단단해지고 사정하는 게 아니라 그저 물리적인 압박에 저절로 흐르는 것뿐이었다.

“이렇게 좋아서 질질 흘리는데 내가 어떻게 그만해.”

이 악마야. 그게 좋아서 싸는 거로 보이냐. 상우는 차마 마음속에 가득 찬 말을 하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아흑, 흣…… 다정하게…… 흑, 다정하게 대해 주신다면서요!”

상우의 말에도 재현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하얀 등에 쪽쪽 입을 맞추며 허리를 흔들었다.

“다정하게 하고 있잖아. 이거 아니야? 그럼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 줘.”

상우는 밤새 했던 말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천천히 해 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말려 죽일 것처럼 천천히 자지를 문질러 대서 결국 제대로 박아 달라고 애원하고 말았다. 그다음에는 제 기분을 먼저 배려해 달라고 했다. 그 말은 고문으로 되돌아왔다. 재현이 허리를 흔들지 않고 상우만 싸게 만드는 좋은 핑곗거리로 전락했으니까.

그다음부터는 무슨 말을 하는 게 무서워져서 상우는 그냥 울기만 했다.

“흑…… 그만할래요…… 자고 싶어…….”

상우의 안에 처박힌 자지가 아직 쌩쌩한 재현에게는 너무 아쉬운 말이었다. 그래도 할 수 없지. ‘상우가’ 자고 싶다는데. 아쉬움에 한 번 더 좆을 끝까지 밀어 넣은 재현은 천천히 허리를 뒤로 잡아뺐다. 구멍이 오물오물 좆을 씹어 대는 게 정말 그만하고 싶다는 건지 의문이 들긴 했지만, 일단 상우의 의견을 존중해 주기로 했다.

“아흐으―.”

마침내 밤새도록 몸 안에 박혀 있던 흉기가 몸에서 빠져나가자 상우는 그대로 털썩 침대 위에 쓰러졌다. 곱게 재워 줄 생각은 아니었는지 재현이 상우의 몸을 돌려 침대 끝으로 질질 끌고 왔다. 축 늘어진 상우는 재현이 뭘 하든 저지할 기력조차 없었다.

침대 끝까지 끌려 온 상우의 고개가 더 이상 받쳐 줄 것이 없어 저절로 뒤로 젖혀졌다. 그제야 뭐하는 거지, 하고 생각할 무렵 입가에 아직도 꺼떡거리는 재현의 자지가 와 닿았다.

“이거까지 도와주고 자.”

어휴, 정말 미친놈인가. 어쩔 수 없이 상우는 입을 작게 벌렸다.

“그 정도로는 안 들어가.”

재현의 손가락이 상우의 입안으로 파고들어 더 크게 벌리게 만들었다. 벌어지기 무섭게 처박힌 자지는 당연하다는 듯 여린 목젖을 툭툭 건드렸다.

“욱, 으욱.”

상우의 고통스러운 소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재현은 천천히 자지를 밀어 넣었다. 마른 목이 울퉁불퉁 솟아오르며 좆의 모양을 그려냈다. 생각보다 너무 야한 장면이라 재현은 마른 입술을 혀로 쓱 핥았다. 손가락으로 목 위를 지그시 누르자 상우가 컥, 숨이 막히는 소리를 냈다.

“시발. 안 되겠다.”

그 안에 몇 번 더 박아넣었다가는 도저히 아무것도 안 하고 상우를 재울 자신이 없어진 재현은 조심스럽게 허리를 뒤로 물렸다. 이건 나중에. 나중에 상우의 체력이 정상일 때 해 봐야지. 재현의 섹스 버킷리스트에 한 줄이 추가되었다.

재현은 가만히 널브러져 있는 상우를 내려다보며 자지를 흔들기 시작했다. 눈을 뜰 힘조차 없는지 속눈썹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얌전히 감은 채 누워 있는 얼굴이 처연하고, 야했다.

“후…….”

탁탁, 살이 쓸리는 소리에 재현의 짙은 숨소리가 섞여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구멍에 손가락이라도 박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또 펑펑 울겠지? 아쉬움을 한가득 안은 채 좆을 흔들던 재현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상우야, 입 벌려 봐.”

이제 먹이고 나발이고 더 먹고 싶은 생각도 안 들었지만 상우는 얼른 잠을 자기 위해 순순히 입을 벌렸다. 목구멍도 뒷구멍도 다 내준 판에 입 한 번 벌리는 게 뭐 대수라고. 동그랗게 벌려진 상우의 입술 사이로 무식하게 두꺼운 귀두가 파고들고 곧이어 울컥울컥 끈적한 체액이 쏟아졌다. 힘들어 죽겠는 와중에도 맛있다고 생각하는 혀가 괘씸했지만, 그보다 눈을 감으니 솔솔 쏟아지는 잠이 우선이었다.

“상우야.”

재현은 조심스럽게 상우를 불렀다. 사람이 죽지 않고서야 이렇게 하고 잠들 수 있나 싶었다. 고개를 완전히 뒤로 젖힌 채 자지를 입에 물고 미동조차 없는 게 오싹했다. 좆을 빼내자 벌려진 입술 끝에서 하얀 정액이 주륵 흘러내렸다. 조금 무리시켰나. 재현은 상우를 똑바로 눕히면서 눈곱만큼 반성했다. 그렇다고 앞으로는 이렇게까지 몰아붙이지 말아야지, 같은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온갖 체액으로 끈적끈적한 상우의 몸을 대충 수건으로 닦아 주고 나자 재현도 비로소 졸음이 밀려들었다. 상우를 이불로 꽁꽁 감싼 재현은 바디필로우처럼 딱 좋은 두께로 말린 상우를 끌어안고 잠이 들었다.

코를 간지럽히는 느낌에 상우는 설핏 잠에서 깨었다. 기분 좋게 꿀잠을 자고 있었는데. 완전히 일어나기에는 아쉬운 느낌이라 상우는 몸을 뒤척거렸다.

“으응…….”

일어나지 않기 위해 이불을 말며 바스락거리는 게 귀여워서 재현은 톡톡, 한 번 더 상우의 코끝을 건드렸다. 상우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싶었던 걸까. 같은 마음이었다고 생각하니 괜스레 벅차오르는 게 신기했다. 재현은 아직도 이불에 돌돌 말려 있는 상우를 끌어다 꼬옥 안았다. 좋아해. 마음속으로 다시 한 번 속삭이는 말은 너무 달콤해서 생소할 지경이었다.

“사장님…….”

눈도 뜨지 못하고 입맛을 음냐음냐 다시면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좆이 먼저 벌떡벌떡 반응했다.

“응.”

제정신으로 저를 부른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재현은 성실하게 대답을 해 주었다. 그 짧은 대답도 만족스러웠는지 상우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아, 뭘 믿고 이렇게 귀여운 거지. 재현은 상우의 통통한 뺨 위에 입술을 꾹꾹 눌렀다. 그건 귀찮았는지 상우가 고개를 휙 돌렸다.

“언제 일어날 거야.”

귀에다 대고 소곤소곤 속삭여 봤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요리조리 피하는 상우의 뺨을 실컷 조몰락거리던 재현은 그마저도 지겨워져서 룸서비스 책자를 들고 다시 상우의 옆에 누웠다.

“한식?”

재현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반응이 없는 걸 보니 이건 아니군.

“양식?”

여전히 상우는 색색 숨만 내쉬었다. 흠. 재현이 가만히 상우를 내려다보았다.

“중식?”

이번엔 입꼬리가 슬쩍 올라간 거 같기도 하고.

“설마…… 일식?”

풋, 상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잠든 사람 상대로 뭘 물어보는 거람. 재현이 얼굴 여기저기를 만지작댈 때부터 잠에서는 어느 정도 깨어 있긴 했는데, 이런 질문을 던져 올 줄은 몰랐다.

“일어나자마자 초밥을 먹겠다고? 대단하다.”

상우가 키득키득 웃으면서 눈을 떴다. 저를 빤히 내려다보는 재현의 등 뒤로 밝은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역광 때문에 흐릿한 재현은 웃고 있는 얼굴인 것 같았다. 눈뜨자마자 재현을 보는 게 꽤 나쁘지 않은 느낌이었다. 포근한 분위기에 기분이 좋아진 상우는 다시 눈을 감고 베개에 뺨을 문질렀다.

“초밥 먹으면 안 돼요?”

“안 될 건 없지.”

웅얼웅얼 물어보자 재현이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답했다. 상우가 원하면 랍스터라도 대령할 기세였다.

“농담이에요. 아침부터 초밥 먹을 생각은 없어요.”

아침? 이미 해가 중천이었다. 뭐, 그래. 네가 아침이라면 아침인 거지. 재현은 고개를 숙여 상우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에 입술을 꾹 눌렀다.

“프렌치 토스트랑 오믈렛 시킬까? 그거 맛있어.”

재현의 물음에 상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달달하고 폭신폭신한 빵을 떠올리자 입맛이 절로 다셔졌다. 눈도 제대로 뜨지 않고 오물거리는 입술이 귀여워서 재현은 손가락으로 슬쩍 건드렸다. 말랑말랑한 입술이 손가락에 눌리고 하얀 이가 슬쩍 보였다가 사라졌다. 재현의 손길이 닿았던 곳이 간질간질해 상우는 혀를 빼꼼 내밀어 핥았다.

익숙하게 달큰한 냄새가 훅 올라왔다. 사장님 또 흥분했네. 상우는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밤새 그렇게 정액을 빼내고도 흥분할 체력이 남아 있다니.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상우야, 좋아해.”

어젯밤 내내 들었던 말이 다시 한 번 속삭여졌다. 죽어도 말하지 않을 것처럼 굴더니만, 이제는 숨 쉬듯이 말하는 게 이상하기도 하고 들뜨기도 했다. 사장님은 정말 나를 좋아하는 걸까. 상우의 눈이 깜빡깜빡 뜨였다.

어우씨, 깜짝이야! 재현과 눈이 마주친 상우는 잠이 확 달아났다. 아까 그 다정하고 포근한 미소는 어디로 가고 재현이 흉흉한 눈빛으로 잡아먹을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한쪽 입술 끝이 슬쩍 올라간 게 또 악마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았다.

“더 맛있는 것도 있는데.”

설마 내가 생각한 그게 아니길. 상우는 간절히 바랐다. 제발. 사장님, 그 정도로 유치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뭐요?”

설마 하면서도 어쩐지 제가 생각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 물어보기 무서워졌다.

“소시지.”

소름 끼치도록 틀에 박힌 단어에 상우의 눈이 경악으로 번졌다. 제발 아니길 빌었던 건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상우의 반응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재현은 말을 이었다.

“길고 굵고 따끈따끈한 소시지.”

상우는 고개를 들어 베고 있던 베개를 잡아끌었다. 때려도 아프지 않을 푹신한 베개를 재현의 몸 위에 던지면서 생각했다. 밤새 그렇게 내 정기를 쪽쪽 빨아먹어 놓고! 역시 사장님의 ‘좋아해’라는 말에는 앞에 괄호가 붙어 생략된 단어가 있었다.

상우야, (네 몸을) 좋아해.

* * *

방학이라 하는 일도 없어 오후 늦게까지 자도 되건만. 상우는 요새 칼 같은 8시 반 기상을 하고 있었다. 이 강압적인 바른 생활은, 물론 재현의 작품이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8시 반에 모닝콜처럼 울리는 벨 소리에 상우는 짜증을 내며 일어났다.

“네, 사장님.”

[일어났어?]

안 일어날 수가 있겠습니까. 지난주에는 큰맘 먹고 한번 무시해 봤더니 받을 때까지 전화를 해 대 도저히 안 받을 수가 없었다.

“네…….”

[일찍 일어나고, 착하네.]

악마한테 착하다는 말은 욕 아닌가요. 일찍 일어나고 싶어서 일어난 게 아닌데 착하다는 말까지 들으니 비웃음당하는 느낌이었다.

“사장님, 설마 오늘도 할 말이 없으신 건 아니죠?”

그래. 백 번 양보해서 출근 시간에 전화를 하는 건 괜찮았다. 문제는 상우의 잠을 신나게 깨워 놓은 재현에게 할 말이 딱히 없다는 것이었다. 기상 체크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깨워 놓고 전화를 끊으니 상우 입장에서는 미쳐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아침부터 목소리 듣고 싶어서.]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 재현에게 다정하게 대해 달라는 말 따위는 하는 게 아니었다. 이 미친 사람은 ‘다정’이라는 단어의 뜻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차라리 다정 말고 배려해 달라고 할걸.

아니지, 그랬다가는 또 재현만의 이상한 방식으로 배려해 저를 말려 죽였을 것이다.

“출근 중이신 거예요?”

[응. 방금 도착했어.]

출퇴근 시간도 제멋대로일 것 같은데, 예상 외로 재현은 은근히 성실했다. 그 성실함이 상우에게는 고통이긴 했지만.

“그럼 오늘도 화이팅 하시고…….”

어차피 할 말도 없을 게 분명했다. 더 잠이 깨기 전에 얼른 전화를 끊으려는 심산으로 상우가 종료의 말을 건넸다.

[나 아직 할 말 남았는데.]

재현이 은근히 섭섭해하는 티를 냈다.

“아…… 죄송해요.”

상우는 습관적으로 사과했다. 지금 매일 아침 사과를 받아야 할 사람은 자신이라는 것을 잊고 말았다.

[괜찮아.]

마치 너그러이 용서해 준다는 듯한 말투에 상우는 짜증이 나 발을 팡팡 침대 위로 내려쳤지만, 이미 내뱉은 사과는 어쩔 수 없었다.

“하실 말씀이라는 게…….”

[응. 상우야, 좋아해.]

하. 상우는 통화가 종료된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며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업보라는 게 이런 걸까. 전생에 무슨 잘못을 했길래 좋아한다는 말로도 이렇게까지 고통받는 걸까. 상우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그 와중에도 핸드폰은 손에 꼭 쥐고 있었다. 재현이 점심시간에 전화할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12시가 되기 무섭게 핸드폰이 울렸다. 재현의 모닝콜 덕분에 아침형 게이머가 된 상우는 건성건성 전화를 받았다. 한참 중요한 순간에 온 전화라 받기 싫었는데.

“네.”

[점심 먹었어?]

“아직이요.”

[먹고 게임해.]

방에 CCTV라도 달아 놨나. 상우는 괜히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봤다.

“이번 판 끝나면 먹을게요.”

[라인전? 한타 중?]

“라인전이요.”

[너 뭔데?]

“박상우요.”

[아니, 어느 라인 갔냐고.]

“아, 봇, 봇, 원딜! 좀 끊어!”

재현과 통화하는 사이 상우의 게임 캐릭터가 상대방에게 두드려 맞고 있었다. 곧 죽을 것 같아서 다급한 마음에 상우의 말이 짧아졌다.

“하…… 아니에요. 끊지 마세요. 사장님 덕분에 죽었어요. 감사합니다.”

체념한 말투로 잔뜩 비꼬는 상우의 채팅방에 부모님의 안부를 묻는 글들이 올라왔다.

[전화 좀 한다고 죽고. 안 되겠네. 특강이라도 해 줘?]

자존심이 상한 상우가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게임은 하나도 못할 것같이 생겼으면서 재현은 의외로 저보다 한참 높은 티어에서 놀고 있었다. 일하고 운동하고 나랑 놀고 술 마시러 다니는데, 도대체 게임은 언제 하는 거람. 재현은 24시간을 참 알차게 쓰는 것 같았다.

[다음에 같이 게임해 줄게.]

봐줬다는 듯 말하는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어려 있었다.

“사장님도 피시방 가요?”

[응. 왜? 안 갈 거 같아?]

“네. 집에서 혼자 우아하게 게임하실 거 같은데.”

친구 없을 거 같다고 비꼬는 건데 핸드폰 너머로 재현의 웃음소리가 울렸다.

[원하면 방 하나 비워서 만들어 줄게.]

“어휴. 됐어요. 저 근데 진짜 끊을래요. 다시 살아남.”

다급해진 상우가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그래. 점심 챙겨 먹고, 뭐 먹었는지 알려 주고.]

내 점심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 건지. 상우는 적당히 네네, 하고 대답했다.

[상우야.]

“하, 네.”

제발 좀 끊어 줘라.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던 상우의 캐릭터가 몰래 숨어 있던 상대팀 캐릭터에게 걸렸다. 타닥타닥. 마우스와 키보드를 가열차게 누르는 소리가 재현에게까지 들려왔다. 우리 변태 새끼, 또 죽나 보네.

[좋아해, 알지?]

재현의 좋아해 소리에 맞춰서 막 살아난 상우의 캐릭터가 다시 한번 죽음을 맞이했다. 우리팀 정글 뭐하냐! 상우의 울부짖음을 들으며 재현은 조용히 전화를 끊었다. 게임할 때 방해하는 것만큼 신나는 일이 없다 생각하면서.

오늘만 세 번째 울리는 재현의 전화를 상우는 억지로, 간신히 받았다. 시간을 보아하니 퇴근 보고 전화인 것 같았다.

“여보세요.”

[어디야?]

다짜고짜 어디냐니.

“집이에요.”

[집 앞이야. 나와.]

“저 세수도 안 했는데요?”

[볼 거 못볼 거 다 본 사이에 무슨.]

그건 맞는 말이긴 했다. 그래도 나오란다고 쉽게 나가기 싫어서 상우는 괜히 말을 빙빙 돌렸다.

“밖에 춥기도 하고, 조금 귀찮은 거 같기도 하고…….”

[초밥 사 왔는데.]

아, 진작 그 얘기부터 하시지!

“네! 바로 나갑니다!”

전화를 끊은 상우는 후다닥 집에서 입고 있던 옷 위에 패딩만 걸쳤다. 어차피 집 앞에 나가는 건데 뭐 어때, 하는 마음으로. 수면 바지에 동동 그려진 노란색 스마일이 상우의 기분을 대변하듯 해맑게 웃고 있었다. 운동화를 대충 구겨 신던 상우는 문득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 좀 심하네, 하고 생각했다. 다시 방으로 돌아간 상우는 떡진 머리라도 감출 셈으로 비니를 쓰고 초밥을 보러 출발했다.

“와. 좀 심한데?”

만나자마자 재현이 뱉은 첫마디도 상우의 생각과 정확히 일치했다. 괜히 민망해진 상우가 비니 끝을 손으로 잡아당기며 더 깊게 눌러썼다.

동그란 머리통에 비니를 푹 눌러쓰고 있으니 밤톨 같아서 귀엽기는 했다. 아무리 그래도 밖에 나오는 건데 샛노란색 수면 바지는 좀.

“미리 연락이라도 해 주시지 그랬어요.”

재현이 건넨 초밥을 받아 든 상우가 작게 투덜거렸다.

“갑자기 초밥은 왜요?”

“전에 눈뜨자마자 먹고 싶다 한 게 생각나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 재현의 말에 상우가 감동한 얼굴로 재현을 보았다. 장난으로 했던 말인데. 역시 사장님은 나이답게 연애도 많이 해 봤나 보다. 저런 성격에 잘도 했네. 상우는 재현의 연애 경력에 대해 크나큰 오해를 하며 손에 들린 초밥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나올 때 보니 엄마가 저녁 준비를 하고 있긴 했지만, 역시 엄마 밥보다는 고급 호텔 초밥이지.

“감사합니다.”

초밥에서 눈을 떼지 못하며 입으로만 감사하다 말하는 상우가 잊은 사실이 있었다.

“그래. 얼른 빨고 가서 먹어.”

재현의 말투가 마치 맛있게 먹어, 하는 말 정도로 온화하고 다정해서 상우는 순간 제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얼른 빨리 가서 먹으라는 말을 잘못한 거겠지?

“네?”

그래서 멍청한 목소리로 되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얼른 빨고 가서 초밥 먹으라고.”

“뭘 빨아요? …… 제가 생각하는 그거 아니죠?”

“정액을 먹어야 초밥 맛을 알지.”

재현의 말에 상우가 손가락을 하나하나 구부려 가며 날짜를 세었다. 보자. 지난주에는 일요일까지 재현의 집에 있으면서 그때 마지막으로 먹었으니까. 월, 화, 수…….

“오늘 목요일이에요?”

요즘은 특별히 배도 안 고프고 맨날 집에만 처박혀 있어서 날짜 감각이 사라졌었다. 고개를 끄덕이는 재현의 눈이 가늘게 휘어져 있었고 입술 끝은 묘하게 호를 그리며 올라가 있었다. 이거 나 초밥 먹여 주려고 온 게 아니라 정액 빼내려고 온 거네. 초밥은 그냥 핑계였을 뿐.

“여기서 어떻게 빨아요.”

“그럼 차로 갈까?”

재현이 기다렸다는 듯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완전히 작정했네, 작정했어. 아파트 주차장 제일 안쪽 구석에 잘 주차된 재현의 포르세가 보였다. 상우의 대답도 듣지 않고 재현이 성큼성큼 차를 향해 움직여, 진하게 남은 달달한 냄새 자국을 따라 상우도 터덜터덜 갈 수밖에 없었다.

상우가 뒷좌석으로 올라타기 무섭게 재현의 손이 상우의 양 뺨을 감싸 쥐었다. 혹여나 초밥이 쏠려서 망가질까. 다급하게 초밥이 들어 있는 쇼핑백을 내려놓은 상우의 입술 위로 입맞춤이 정신없이 떨어졌다. 달콤함에 아득해진 것도 잠시, 상우가 파드득 놀라며 재현의 어깨를 밀었다. 상우의 동네인 만큼 지금 누군가가 이 장면을 본다면 곤란한 건 재현이 아니라 상우였다.

“잠깐, 읍! 잠깐요!”

상우가 말을 하는 도중에도 재현의 입술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뽀뽀 못해서 죽은 귀신이라도 들렸나.

“문, 흡, 문 좀 닫고―!”

상우가 팔을 뒤로 뻗어 잡히지 않을 거리의 차 문을 향해 손을 휘적였다. 그때까지도 상우의 뺨을 쥐고 있던 커다란 손이 뒤통수를 감싸 안는 게 느껴졌다. 어어, 뒤로 넘어간다! 재현에게 밀려 기울어지는 몸에 상우가 눈을 꽉 감았을 때 탁, 소리와 함께 등이 닫힌 문에 기대어졌다. 다행히 재현의 손에 가려진 뒤통수는 창문에 부딪치지 않았지만 울퉁불퉁한 차 문에 찍힌 등은 찌르르 통증이 느껴졌다.

“하으으…….”

하지만 그 아픔은 입안으로 밀려들어온 달콤한 살덩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재현의 뜨거운 혀가 결코 다정하다고 말하기 어려울 만큼 강하게 얽혔다. 뭐야. 처음 키스하던 날엔 마치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으로 따라 내리면 끝이니 뭐니 했으면서. 상우는 허겁지겁 달려드는 재현의 모습에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입을 더 크게 벌렸다. 맞닿은 입술 사이에서 타액이 질척하게 섞이는 소리가 울렸다.

입안 구석구석을 핥아 대던 평소와 달리 혀만 끊임없이 지분거리던 재현이 입술을 떼어 냈다. 상우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 숨을 크게 몰아쉬던 재현이 고개를 들고 다시 쪽, 가볍게 키스했다.

“이상한 옷 입고 나온 것도 귀엽고 난리야.”

재현의 미적 감각은 확실히 이상했다. 중학생 때 키가 훌쩍 큰 이후로는 어디 가서 귀엽다는 소리 들어 본 적 없는데. 맨날 귀엽다, 예쁘다 하고 말해 주니 상우는 진짜 자신이 귀여운 건지 아니면 놀리는 건지 알기 어려웠다.

“사장님은…… 정말 제가 귀여워요?”

커다란 눈을 깜빡깜빡하며 확인하듯 묻는 얼굴이 너무 귀여워서 심장 근처가 간질간질했다. 재현은 상우의 뺨 위에 입술을 꾹꾹 눌렀다.

“응. 초밥이고 나발이고 당장 집에 데려가서 처박고 싶을 정도로 귀여워.”

정도라는 게 없는 재현 식의 다정한 표현에 상우가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귀여운 건 귀여운 거고 초밥은 초밥이지! 얼른 정액이나 먹고 도망가야겠다. 상우는 꼬물꼬물 몸을 움직여 재현의 다리 사이로 기어 내려갔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으로 조수석 시트를 제일 앞까지 밀어 놓긴 했지만, 아무래도 커다란 성인 남성이 쭈그리고 있기엔 좁아 보였다. 재현의 다리 사이에 불편하게 앉아 좆을 빨고 있는 상우는 꼼짝달싹 못하고 고개만 간신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묶어 놓고 억지로 빨게 만드는 것 같아 잔뜩 흥분됐다. 재현은 금방 사정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섹시 바니, 딥쓰로우 그리고 구속플. 채우기만 하고 지워지지 않는 재현의 버킷리스트가 또 추가되고 말았다.

“후우…… 더 깊게 물어. 이래서 어느 세월에 초밥 먹으러 가려고.”

당장 정액을 쏟아 내고 싶은 걸 억지로 참는 중이면서 재현은 괜한 허세를 부렸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알 턱이 없는 상우는 재현의 분부대로 최선을 다해 자지를 깊게 물었다. 그도 모자라 꼼지락거리며 손까지 쓰려고 드니 재현의 허벅지 근육이 저절로 단단하게 뭉쳤다.

자세가 불편해서인지 빠는 건 평소보다 어설픈 주제에 눈까지 감고 열심히 냠냠거리는 얼굴은 더럽게 야했다. 상우가 움직일 때마다 슬쩍슬쩍 보이는 병아리색 수면 바지의 스마일 무늬가 재현을 변태 새끼라고 비웃는 것 같았다. 얼른 빨고 가서 먹으라고 할 때는 언제고, 재현은 쉽게 사정해 주기 싫어졌다.

“으아…….”

뺨이 저릴 정도로 최선을 다해 빨다가 지친 상우가 입에 가득 물고 있던 재현의 성기를 뱉어 냈다. 단단한 자지 끝이 툭툭 상우의 얼굴에 부딪혔다. 상우는 울상을 지으며 혀를 빼꼼 내밀어 기둥을 핥아 올렸다. 혀끝으로도 올록볼록한 혈관이 뜨겁게 맥박치는 게 느껴질 정도로 발기했으면서.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상우는 끙끙거리며 입술을 움직였다.

재현이 사정을 하지 않는 것도 힘들었지만, 그보다 상우를 신경 쓰이게 하는 건 단단하게 일어선 주니어였다. 처음 재현에게 먹이를 공급받을 때만 해도 혹시나 저를 진짜 변태로 볼까, 아니면 좆을 빠는 것만으로 정액을 질질 흘리는 조루로 볼까 걱정돼 꼭꼭 숨겼었다.

하지만, 요즘은 재현도 상우가 자기 자지를 빨면서 자위하는 걸 은근히 좋아하는 눈치라 숨기지 않고 만졌던 데다, 더 나아가서 재현이 만져 주기도 했다. 그렇다 보니 오늘은 방치된 주니어가 엉엉 울면서 저를 잊었냐고 항의하고 있었다.

“사장님…….”

상우의 발갛게 상기된 뺨이 재현의 안쪽 허벅지에 가볍게 기대어졌다. 재현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척 상우의 코끝을 손가락으로 간지럽혔다. 상우의 자지 끝에서 미끌거리는 액체가 주륵 흘렀다.

“응.”

“이러다 제가 먼저 싸겠어요…….”

한숨같이 작은 목소리에 차 안을 진동하던 단내가 훅 짙어졌다. 오. 이건가? 상우는 문득 깨달음을 얻었다. 지금 사장님에게 부족한 것은 촉각적 자극이 아니었구나! 하긴. 스마일 수면 바지에 비니를 푹 눌러쓴 남자가 좆을 핥는다고 상상하면 상우여도 있던 성욕마저 싹 식을 것 같았다. 시각적 자극은 이 상황에서 도저히 불가능해 보이니, 이 성욕 테러 급의 복장을 상쇄시킬 수 있는 건 청각적 자극뿐이리라.

“사장님, 저 지금 자지가 너무 발기해서 아파요.”

상우가 힐끔 재현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재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게 효과가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좀 더 해 볼까.

“구멍도 간질간질해요. 만지고 싶은데 자세가 불편해서…….”

순간 눈앞에 있는 재현의 자지가 크게 꺼떡거렸다. 효과가 있는 게 분명했다. 이거 잘하면 힘들게 빠는 게 아니라 말만 하고도 영양분을 섭취할 수 있겠는데? 이거나 저거나 입 아픈 건 똑같겠지만. 그래도 노동의 강도가 다른 건 확실했다. 상우가 재현의 좆에 제 뺨을 비비며 재현을 올려다보았다. 조금만 더 해 볼까.

“사장님 자지 뜨거워…….”

상우의 머릿속에 그동안 축적해 온 야한 망가의 대사들이 스쳐 지나갔다.

“단단한 자지로 찔러 줬으면 좋겠어요. 구멍 헐어 버릴 때까지 박히고 싶…… 읍!”

재현이 어정쩡하게 떠 있던 손으로 다급하게 상우의 입을 막았다. 이 미친 변태 새끼가 무슨 말을 지껄이는 거야. 재현은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상우가 말 한마디 내뱉을 때마다 사정감을 참아 내느라 엉덩이 근육까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색욕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장난기만 한가득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는 얼굴에 꿀밤을 콩콩 때려 주고 싶었다.

“박상우, 너…….”

“이제 상우야, 하고 불러 주기로 했잖아요.”

으응, 콧소리까지 내가면서 웅얼거린 상우가 제 입을 막고 있는 재현의 손바닥을 길게 핥아 올렸다.

“하…… 그래. 상우야, 너 진짜 초밥 먹기 싫어?”

그럴 리가. 지금 이 미친놈 같은 짓을 왜 하고 있는데! 다 초밥 맛 좀 보자고 하는 짓인데! 상우가 재빨리 고개를 저었다.

“금방 쌀게. 금방 쌀 테니까 그냥 물고 있어.”

진작 이렇게 나올 것이지. 상우는 재현의 손을 치우고 냉큼 두툼한 귀두를 물었다. 체온 높은 입안에 갇힌 자지에 더 힘이 들어가 입천장을 쿡쿡 찔렀다. 그에 지지 않고 상우의 말랑한 혀가 빨리 먹이를 내놓으라며 요도 구멍을 꾹꾹 눌렀다. 

재현은 상우가 내뱉은 말들을 떠올리며 자지를 움켜쥐고 손을 흔들었다. 뭐? 구멍이 간지러워? 헐어 버릴 때까지 박히고 싶어? 진짜 요망한 놈이었다.

치덕치덕하는 소리가 이어지다가 점점 빨라지던 무렵 결국 입에 물린 자지가 울컥울컥 달콤한 먹이를 쏟아 냈다. 꼴깍, 정액을 받아먹기 무섭게 상우는 초밥을 들고 차에서 내렸다. 더 남아 있다가는 재현이 계속 경고한 것처럼 재현의 집에 끌려가 밤새 울게 될지도 몰랐다. 히히, 웃는 얼굴로 입가를 쓱 문질러 닦은 상우가 아직 바지도 추스르지 못한 재현을 향해 꾸벅 인사를 했다.

“사장님, 감사합니다. 맛있게 먹을게요!”

그 말을 끝으로 쿵 문이 닫힌 차 안에서 재현은 허탈하게 생각했다. 상우에게 꼭 해 줘야 할 말이 있었는데 후다닥 도망가 버리는 바람에 말할 타이밍을 놓쳤다. 저 변태 새끼, 저거…… 수면 바지 입어서 발기한 거 다 티 나는데. 저러다 누구 만나기라도 하면 나만의 변태 새끼가 아니라 이 아파트 대표 변태 새끼가 될 텐데.

재현은 더듬더듬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상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왜 도망가.”

[도망 안 갔어요.]

“너 좆 대가리 발딱 선거 티나. 잘 가려.”

재현의 말에 상우는 슬쩍 아래를 내려다 보고는 얼른 쇼핑백으로 앞섬을 가렸다. 초밥에 정신이 팔려 알지도 못했다. 이거 말해 주려고 전화한 건가.

[…… 감사합니다.]

“됐어. 맛있게 먹고.”

상우가 아파트 대표 변태 새끼가 되는 참사는 막았으니 재현도 제가 할 일은 모두 했다.

[사장님, 근데 뭐 잊으신 거 없어요?]

“뭐.”

상우는 민망함에 괜히 엘리베이터 문을 발로 톡톡 찼다. 에이, 다 아시면서.

[왜…… 맨날 해 주시던 말 있잖아요…….]

맨날 하던 말?

“변태 새끼?”

재현의 머릿속에 가득 들어차 있는 단어가 툭 튀어나왔다.

[…….]

상우의 대답이 없는 걸 보니 오답인 것 같았다. 귀엽게 놀기는. 상우가 의도한 말이 뭔지 알아챈 재현은 피식 웃고 말았다.

“상우야, 좋아해.”

[……네.]

쇼핑백을 들고 있는 상우의 손가락이 꼼지락 꼼지락 움츠러들었다. 제가 해 달라고 조른 말인데도 막상 들으니 간지럽고 부끄러운 기분이었다. 초밥까지 대령하고 주니어 잘 가리라고 전화까지 해 준 게 고마워서 오늘은 저도요, 하고 말해 볼까 했는데. 막상 나온 말은 바보같이 네, 가 전부였다.

* * *

가야호텔 조리부는 비상이 걸렸다. 총주방장만 어깨를 으쓱하고 모른 척하고 있었다. 외국인이라서 누릴 수 있는 특혜에 전형적인 한국인 월급쟁이들은 이를 꽉 깨물었다.

“도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관심도 없던 주방에 오신대?”

“몰라. 셰프한테 볼일이 있다던데.”

“핑계 아니야? 셰프랑 얘기할 거면 방으로 부르지 왜 여기까지 내려와.”

재현의 뜬금없는 키친 방문에 대한 불만이 여기저기에서 터졌다. 그것도 본인의 퇴근 시간이 지난 후 행차라니. 재현은 호텔 대표직을 맡은 이후로 단 한 번도 행차한 적이 없어 다들 더 불안에 떨고 있었다. 이러쿵저러쿵 안 좋은 소문만 무성한 사장이라 더 긴장할 수밖에. 안 그래도 정신없는 주방인데 때 빼고 광내느라 더 정신이 없었다.

“안녕하세요.”

재현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자 시끌벅적하던 주방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꼴깍, 어디선가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볼일 있는 건 총주방장인데 왜 다들 멈췄지? 재현은 의아하게 생각하며 총주방장에게 다가갔다.

“Good evening, chef.”

“Good evening.”

서로 악수를 주고받는 모습을 직원들이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그래서 왜 왔는데. 총주방장이 직원들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So, what kind of dish you wanna learn?”

요리를 배우러 왔다고? 사장님이? 그 백재현이? 왜? 여기저기서 수군거림이 시작됐다. 어차피 남들이 해 주는 음식만 먹고 사는 사람 아닌가?

“김치볶음밥.”

당당한 목소리 뒤에 이어지는 침묵은 처음 재현이 주방에 발을 디뎠을 때보다 더 고요하고 길었다. 모든 직원들, 그리고 총주방장마저 할 말을 잃었다. 지금 김치볶음밥 배우겠다고 총주방장을 불러낸 거야? 외국인한테 김치볶음밥 알려 달라고 하는 거야? 미친 건가? 돌았나?

재현은 전혀 상관없다는 듯 싱긋 웃었다. 외국인이라도 김치볶음밥마저 총주방장이 제일 잘하겠지, 하는 1차원적인 사고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총주방장은 잠시간의 침묵 후에 밝게 웃으며 한식레스토랑 수석 셰프를 호출했다. 여기 정신 나간 사장한테 김치볶음밥을 알려 주라면서.

일개 호텔 조리부 직원들에게는 하늘 같은 수석 셰프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재현의 행동을 바라보았다. 김치로 조각이라도 하시는 걸까. 서걱, 서걱 하는 칼질 사이에 텀이 너무 길었다. 그렇다고 예쁘게 자르는 것도 아니었다. 어차피 잘게 자를 김치인데 왜 그렇게 고민을 하는 건지 궁금할 정도로 정성껏 자르는 김치는 뭉개졌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처참한 모양새였다.

“사장님…… 그냥 제가 가서 차려 드릴까요?”

조심스럽게 물어봤지만, 재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상우가 원하는 건 그냥 요리가 아니라, ‘재현이 만든’ 요리였다. 태어나서 한 번도 요리해 본 적 없는 재현이.

“그럼 재료를 다 준비해 드릴 테니 볶기만 하시는 건 어때요?”

재현은 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재현을 잘 알고 있는 상우는 자기가 재료 손질 하는 것부터 도와주겠다고 했다. 같이 먹을 음식을 만든다니. 신혼부부 같고 좋지 않은가. 재현은 다시 집중해서 김치를 뭉갰다.

김치가 끝나면 양파와 햄을 잘라야 하는데. 오늘 집에 갈 수는 있을까. 셰프의 작은 한숨이 주방 끝까지 울렸다.

* * *

상우가 재현을 보며 방긋 웃었다. 할 말이 너무나 많은데 뭐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사장님.”

스타카토같이 딱딱 끊어 불리자 재현의 넓은 어깨가 움찔했다.

“칼 쓰는데 말 걸면 위험해.”

짐짓 엄하게 말해 보았지만 돌아오는 건 픽 웃는 김새는 소리였다. 열심히 칼질하는 재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상우는 혼자 키득키득 웃었다. 요리 안 해 본 티가 이렇게 요란하게 날 줄이야.

“연습하신다면서요.”

“했어.”

“배워 오신다면서요.”

“배웠어.”

또각, 또각 천천히 도마 위에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치볶음밥 먹여 주신다면서요.”

“내가 언제 그런 소리를 했어.”

재현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이크. 그만 놀려야지. 상우는 혼자 빙글빙글 웃으며 다시 조용히 재현을 구경했다.

재현이 목요일에 사심 가득한 초밥을 배달해 준 덕분에 오늘까지 미각이 살아 있었다. 그래서 상우는 이번 주말에 뭐하고 싶냐는 재현의 물음에 당당히 요청해 봤다. 사장님이 만든 음식 먹고 싶어요! 하고. 만날 때마다 미각을 잃은 채로 만나니 뭔가 먹고 싶다고 말하는 게 정액을 먹겠다고 시위하는 것 같아서 그동안 눈치가 보였었는데. 이번만큼은 고개 똑바로 들고 요구할 수 있었다. 제 목적은 절대 정액이 아닙니다!

순간 재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아 거절당하나 싶었지만, 생각보다 순순히 알겠다는 답이 돌아왔다. 배워 오겠다면서 상우에게 주문까지 받았다. 음. 찌개류를 끓여 달라는 건 재현에게는 너무 어려울 것 같고, 고기나 구워달라고 하기엔 손이 별로 안 갈 거 같고. 잠시 고민하던 상우는 적당히 쉽고 적당히 손이 가는 메뉴를 생각해 냈다.

앞치마까지 두르고 본격적으로 요리하고 있는 재현을 구경하고 있자니 상우의 기분이 퐁퐁 좋아졌다. 재료 손질을 도와주겠다는 데도 필요 없다면서 앉아 있는 게 도와주는 거라고 말할 땐 언제고. 재현은 정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해 보였다.

곰같이 커다란 등을 말고 집중하는 뒷모습이 솔직히 귀여웠다. 자신이 귀엽다는 소리를 들을 땐 도무지 그 말이 이해 가지 않았는데, 끙끙거리며 노력하는 재현을 보니 그동안 재현이 무슨 느낌이었는지 조금 알 거 같았다. 귀엽기도 하고 기특하기도 하고. 상우는 살금살금 재현의 뒤로 걸어가 까치발을 들고 어깨 위로 빼꼼 도마 위를 훔쳐 봤다.

어휴, 이걸 어째. 상우의 마음속에서 저절로 한숨이 지어졌다. 엉성하다 못해 재현의 손에 파괴되고 있는 김치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지경이었다. 내가 그냥 볶음밥을 사 달라고 했으면 김치도 좋은 요리사를 만나서 예쁘게 썰어졌을 텐데. 그래도 뭔가 해 주려고 노력하시는 거니까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지.

“앉아 있으라니까.”

재현의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울렸다. 제가 보기에도 어설프기 짝이 없는 솜씨가 민망했다. 손에 칼이 들려 있는 걸 의식이라도 한 걸까. 상우는 색색 고른 숨소리만 내며 조용히 재현의 칼질을 지켜봤다. 도마 위에 부엌칼이 부딪치는 소리에 맞춰 상우의 따뜻한 숨결이 귓가를 간지럽혔다. 후두둑 솜털이 돋는 느낌에 옅은 흥분이 섞여들었다.

미미하게 올라오는 단내에 상우는 들고 있던 까치발을 내렸다. 너무 바짝 붙어 있었나. 칼이 아닌 다른 흉기가 고개를 쳐들까 봐 상우는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심심해?”

“아니요.”

가까이 있지 않으면 맡기 힘들 정도로 약한 냄새가 깃털처럼 살랑살랑 상우를 간지럽혔다. 보자마자 제 머리채를 휘어잡고 욕설을 내뱉던 무서운 모습은 이제 마음속에서 희미해졌다. 재현이 편해지는 날이 올 줄이야. 재현이 하는 말과 행동들이 저를 간지럽게 만드는 날이 올 줄이야. 재현에게…… 사랑스럽다는 기분을 느끼게 되는 날이 올 줄이야.

사랑스럽다는 단어를 떠올리자마자 상우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와, 나 미친 거 아니야. 사랑스럽다니. 제가 한 민망한 생각을 지우기 위해 상우는 눈앞에 있는 커다란 등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이건 먹이다. 이건 먹이다. 언제부터 재현이 공급하는 영양분보다 재현 자체가 반가워졌을까. 먹이라는 생각이 언제 이렇게 옅어졌을까. 상우는 다시 쿵쿵 머리를 박았다. 이건 먹이다. 먹이다.

“많이 심심해?”

칼을 내려놓은 재현이 뒤로 돌았다. 이렇게 저에게 관심을 가져 달라고 온몸으로 표현하는데 모른척하기 힘들었다. 김칫국물이 잔뜩 묻은 손으로 끌어안을 수는 없어 허리를 굽혀 상우의 뺨에 쪽, 입술을 비비는 것이 다긴 했지만.

이건 먹이다, 하고 속으로 중얼이던 상우는 그 짧은 맞닿음에 목을 움츠렸다. 정말 먹이일 뿐인 건가? 제 마음을 알기가 힘들어져 상우는 와락 재현을 끌어안았다.

“뭐야.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냥, 그냥 두고 마저 요리하셔도 돼요.”

아무것도 아니긴. 이 새끼 뭐 잘못한 거 있나? 돈으로 때울 수 있는 사고였으면 좋겠는데. 눈썹을 잔뜩 찌푸린 채 상우의 단정한 가마를 내려다보던 재현은 작게 한숨을 쉬고 다시 돌아섰다. 지금은 일분일초가 소중해서 상우의 이상한 짓에 어울려줄 시간이 없었다. 더 지체했다간 남들 야식 먹을 시간에 저녁을 먹게 될지도 몰랐다.

양파와 햄을 다지는 재현의 뒤에서 상우가 자꾸만 재현의 등이며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일부러 방해하는 건가 싶다가도 배에 둘러진 손이 야무지게 꼭 끌어안고 있는 건 기분이 좋아서 재현은 그냥 내버려 두기로 했다.

“상우야.”

그냥 내버려 두기로 한 건 맞지만, 이건 아니지. 재현의 낮은 목소리가 상우의 이름을 위협적으로 불렀다. 가만히 뒀더니 주제를 모르는 상우의 자지가 쿡쿡 엉덩이를 찔러 왔다. 그것도 애써 모른 척해 줬더니 이제는 아주 대놓고 발딱 일어선 좆 대가리를 엉덩이에 문지르고 있었다. 재료 손질을 끝낸 재현이 손을 닦았다.

싱크대로 걸음을 옮기는 동안에도 등 뒤에 딱 달라붙은 상우가 계속 자지를 들이밀고 있었다. 하. 작은 한숨을 내쉰 재현이 배를 꼬옥 안고 있는 상우의 손을 떼내었다.

“어디서 좆질이야.”

설마하니 이거 지금 나한테 박고 싶다고 어필하는 건가?

“사장님…….”

말끄러미 올려다보는 눈매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최근에는 제가 밀어붙이느라 상우가 안달 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는데.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발정을 숨기지 못하는 얼굴이 야하게 빛났다. 아, 사람한테 발정이라는 표현은 좀 너무한가? 엉덩이가 아니라 어디든 괜찮았는지 몸이 닿는 곳이면 아무데나 자지를 문지르는 꼴이 개새끼가 마운팅하는 거랑 별반 다를 바 없어 보이긴 한데.

물기가 묻은 재현의 손이 상우의 옷자락 안으로 파고들었다. 차갑게 닿아오는 손길도 좋은 건지 상우가 낑낑거리며 허리를 비비적댔다. 재현은 순간 고민했다. 눈앞에 잘 차려진 밥상이 있는데, 진짜 밥을 차리느라 안 먹는 게 옳은 선택인가. 하지만 그럴 거면 왜 여태까지 수고스럽게 재료를 손질했는가.

“사장님, 우리 저녁 조금만 늦게 먹으면 안 돼요……?”

에라, 모르겠다. 재현의 커다란 손이 상우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이렇게 대놓고 섹스부터 하자고 졸라 대는데 그걸 참으면 자지 떼야지. 허겁지겁 입술을 부딪쳐 오는 재현의 힘에 상우의 몸이 주춤주춤 뒤로 밀려났다. 단단한 대리석 홈바에 몸이 부딪혀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어지자 재현이 상우를 번쩍 안아 그 위로 올렸다. 정말 개처럼 발정이라도 났는지 상우는 다리까지 재현의 허리에 감아가며 아랫도리를 꾹꾹 눌러 왔다.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래?”

열심히 보채는 모양새에 재현이 웃음을 감추지 못하며 물었다. 평소에는 야한 생각만 해도 타박하던 놈이. 재현의 기다란 손가락이 상우의 바지 버클을 풀자 얼른 벗기라는 듯 상우가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진짜 뭐야. 왜 이래. 과하게 적극적인 상우의 모습에 기분이 좋아졌던 것도 잠시, 재현은 슬슬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이거 지금 내가 요리하는 꼴을 보고 도저히 먹을 자신이 없어서 수작 부리는 거 아니야? 괘씸한 마음이 솟구쳐 재현은 상우의 목덜미를 콱 깨물었다. 저녁도 먹지 않은 채 정액만 몇 번 먹고 나서 배부르다고 울던 상우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액 처먹고 배불러서 김치볶음밥은 못 먹겠다고 나오면 진짜 짜증 날 것 같았다.

“안 되겠다. 밥부터 먹고 해.”

상우의 목선을 따라 입술을 지분거리던 재현이 담백하게 말하며 기울여졌던 몸을 일으켰다. 간만에 먼저 꼴렸는데 무슨 섭섭한 소리를! 상우의 팔이 재현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싫어요…… 하고 싶어. 지금 하고 싶어요.”

절대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감겨 오는 몸뚱어리에 재현의 의심은 점점 확신이 되어 갔다.

“지금 해도 밖에다 쌀 거야.”

그러고도 못 먹겠다고 하면 쌀알 한 톨 남김없이 다 먹을 때까지 방에다 가둬 놓을 생각이었다. 아니면 주말 내내 자신이 만든 김치볶음밥만 먹이다 보내거나. 맛에 대한 자신도 없으면서 재현은 상우가 남기면 가만히 두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밖에다 쌀 거라는 재현의 으름장에 상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어차피 지금은 굶은 것도 아닌데 밖에다 싸든 안에다 싸든 무슨 상관인가.

“상관없어요.”

상우는 재현의 입술에 쪽쪽 입을 맞추며 대답했다. 굳게 닫힌 재현의 입술을 애타게 혀로 문질러 봤지만, 잔뜩 찌푸려진 재현의 미간이 펴질 줄을 몰랐다. 평소에는 별거 아닌 거로도 잘만 흥분해서 덤벼들더니, 왜 정작 제가 하고 싶은 순간에는 이렇게 목석 같은 건지. 상우는 입술이 닿는 곳마다 힘주어 누르며 열심히 항의했다.

“상우야. 솔직히 말해 봐.”

“……뭘요?”

“너 사고 쳤지.”

돌고 돌아간 재현의 결론은 상우가 뭔가 문제를 일으켰다는 거밖에 없었다. 재현은 생각해 낼 수 있는 최악의 가정을 떠올렸다. 최악을 생각하면서 마음의 준비를 하면 뭐가 됐든 덜 충격적이겠지. 마약에 손댔나? 불법으로 도박하다 돈을 다 날렸나? 아니면 누구 하나 쥐어패서 병신 만들었나? 주식 사기 같은 걸 할 정도로 상우가 똑똑하진 않을 텐데. 뭐가 됐든 돈으로 다 무마할 수 있는 사고들이었다.

“사고 쳤다는 게…… 임신?”

여자한테는 좆이 서지도 않는데 무슨 소리지? 멍하니 되묻는 상우의 목소리에 재현은 입을 떡 벌렸다. 자신이 생각한 최악보다 더 최악이 있었다니. 좆질 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어디서 좆질을 배웠나 했더니. 다른 놈도 아니고 다른 년이랑 붙어먹은 거였나! 박는 거에 맛들려서 하다 하다 내 엉덩이에도 박으려고!

“아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시는 거예요. 전 사장님이랑 해 본 게 전부인데!”

재현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던 상우의 다리가 억울함에 바동거렸다. 아, 아니구나. 다행이다. 그럼 뭐지? 경악에 가득 찼던 재현의 얼굴이 다시 심각해졌다.

“그럼 왜 오늘따라 안 하던 짓을 해? 왜 먼저 하자고 달려들어? 왜 교태부려? 왜 정액도 안 먹어도 된다 그래?”

물음표로 공격을 하는 재현의 진지한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상우가 빽 소리를 질렀다.

“아, 사장님이랑 섹스하고 싶다고요! 섹스! 섹스! 섹스하고 싶다고!”

섹스, 섹스, 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상우의 모습에 재현은 당황했다.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받은 게 억울했는지 얼굴까지 시뻘게져서 연신 섹스라는 단어를 외쳐 대는 게…… 진짜 발정 난 개새끼 같았다. SNS에서 본 것 같았다. 섹스하고 싶으면 짖는 개. 아무래도 제가 20대 초반 청년의 혈기왕성한 성욕을 우습게 생각했던 것 같다.

“알겠어. 알겠으니까 좀 닥쳐 봐.”

상우의 토끼 같은 앞니가 아랫입술을 꾸욱 즈려 물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말해야 해? 매주 하는 그 짓을 먼저 하겠다고 나선 게 이렇게 의심받을 일이야? 씨익 씨익, 상우의 거친 숨이 콧구멍 사이로 새어 나왔다.

“뭐가 그렇게 억울해.”

재현의 엄지손가락이 상우의 눈가를 꾸욱 쓰다듬었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날 뻔했나 보다. 상우는 얼른 눈을 깜빡깜빡하며 눈물을 말렸다.

“제가 사장님이랑만 하는 거 뻔히 아시면서…….”

말을 할수록 억울함에 복장이 터질 지경이었다. 눈 밑이 파르르 떨리는 게 진심으로 속상해 보여 재현은 얼른 상우의 뺨을 감싸 쥐었다. 더 터지기 전에 수습해야지.

“많이 서운했어?”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는 건지. 당연히 서운하고도 남을 오해였다. 상우의 고개가 살짝 끄덕이자 재현은 씩 웃으면서 쪽, 입을 맞췄다. 누가 이런 거로 풀릴 줄 알고?

“울 정도로 속상했어?”

울진 않았는데. 속상한 건 맞고. 상우가 고개를 끄덕이지도 젓지도 못하고 있자 다시 재현의 입술이 가볍게 닿았다 떨어졌다.

“많이 삐쳤나 보네. 애기야 아주.”

이번에 다가온 입술은 방금 전 맞닿음과는 달리 조금 길었다. 입술을 살짝 벌려 상우의 아랫입술을 슬그머니 문지르고 떠난 온기에 아쉬움이 밀려 왔다. 숨소리마저 들릴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서 재현이 낮게 속삭였다.

“애기여도 섹스는 하고 싶고. 발랑 까졌어.”

이렇게 건장한 아기가 어디 있나요.

“애기 아니에요.”

불퉁한 대답에 재현이 작게 소리 내서 웃었다. 지금 중요한 게 그 부분인 거야?

“그럼. 섹스는 하고 싶고?”

콩, 부딪치는 이마에 상우가 이리저리 흔들리던 눈동자를 재현에게 고정했다. 아까는 너무 억울하고 섭섭해서 절대 안 풀릴 거라고 생각했는데. 벌써 마음이 몽실몽실해져 버렸다.

“네…… 하고 싶어요.”

상우가 뺨을 감싸 준 손 위에 가볍게 고개를 기대자 재현은 쿵, 심장이 멈추는 것 같았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팔랑팔랑 움직이는 속눈썹도 예쁘고, 그 안에 들어 있는 갈색 눈동자도 예쁘고, 곧은 콧날과 통통한 입술도 예쁘고. 처음 봤을 때는 제 취향인 얼굴이라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상우의 얼굴이 재현의 취향이 되었다.

“좋아해.”

난데없는 고백에 상우가 씨익 웃었다. 맨날 좋아한대. 할 말 없을 때마다 그냥 대충 던지는 거면서. 이렇게 자주 좋아한다고 하면 진심이라고 믿고 싶어지는데. 재현의 ‘좋아해’가 깊은 마음이 담기지 않은 표현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너는 언제쯤 좋아한다고 말해 줄 건데.”

“곧?”

헤헤, 웃는 모습이 얄미워 재현은 상우의 얼굴을 양손으로 꾸욱 눌러 찌그러뜨렸다. 못난이같이 찌그러진 것도 귀엽네. 재현은 상우에게 화해의 말을 건넸다.

“빨아 줄까?”

이 분위기에 빨아 줄까가 뭡니까. 무드없게. 재현의 직설적인 언어 선택에 인상을 쓰면서도 상우는 냉큼 손을 내려 반 정도 벗겨져 있던 바지를 완전히 벗었다.

“대신 정액 가지고 배부르다고 하면 안 돼. 김치볶음밥 남기지 말고 다 먹어.”

“이제는 제가 정액으로 배 채우는 거 믿으세요?”

상우의 다리 사이로 고개를 숙이던 재현이 멈칫했다. 믿기 싫어도 믿으라고 그 난리를 쳤는데 어떡하겠는가. 안 믿는다고 했다가 울릴 뻔한 적도 있고, 믿음을 빌미로 좋아한다는 말을 강요한 적도 있는데. 원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져 주는 법이었다.

“네 말이면 마리오가 사실 10대 여자애라고 해도 믿어야지.”

작은 한숨이 섞인, 거의 포기한 듯한 재현의 말투에 상우는 웃음이 터졌다. 내가 인큐버스라는 게 콧수염 난 마리오가 여자인 급이야? 전혀 안 믿고 있는 티를 팍팍 내면서도 믿는다 말해 주는 게 괜히 고마웠다. 사실 이제는 안 믿어도 괜찮았다. 믿어 달라고 계속 말했던 건 재현이 어느 날 갑자기 정액을 안줄까 봐, 정액 달라고 울고불고했던 저를 미친 변태로 볼까 봐 불안했던 거니까. 상우의 마음속에서 그런 불안감들은 어느새 희미해졌다. 자신이 변태인 것도 사실인 거 같고.

“정액 먹고 부르는 배랑 그냥 음식 먹는 배랑은 달라요.”

컨셉 유지가 확실한 것도 귀여워서 재현은 빙글빙글 웃으며 상우의 자지를 움켜쥐었다. 딴소리를 길게 하느라 어느새 흐물흐물해진 자지가 한 손 안에 들어왔다. 말랑한 살덩이에 혀끝이 닿자 작게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입안에 넣고 깊게 빨아 주자 언제 기가 죽었었냐는 듯 상우의 주니어가 빠르게 일어났다. 저도 사내새끼라고 목젖을 툭툭 건드려 오는 바람에 재현은 물고 있던 자지를 뱉었다.

“흐읏…….”

끝 부분을 동그랗게 덧그리며 손을 흔들자 상우의 조그마한 신음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기둥을 혀로 쓸어내리면 하트 모양의 주머니가 흠칫흠칫 움츠러들었다. 우리 변태 새끼는 불알도 귀엽게 생겼네. 재현의 따뜻한 혀가 부드럽게 그 위를 쓰다듬었다.

“아…… 기분 좋아요…….”

제 좆을 빨 때마다 상우가 자위하는 게 신기했었는데 지금 재현의 자지도 벌떡 일어섰다. 솔직하게 표현하는 야한 목소리를 계속 들으려면 혀를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슬그머니 올라오는 달콤한 냄새가 상우의 코끝에 닿아왔다. 사장님도 자지를 빨면서 흥분하는구나. 재현의 것을 빨 때마다 같이 기분 좋았던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구나. 상우의 손가락이 재현의 머리카락 위로 다가갔다. 평일엔 왁스로 넘겨서 딱딱하던 머리카락이 오늘은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로 감겨 왔다.

상우의 자지를 쓸어내리던 손이 올라와 배를 꾸욱 눌렀다. 그 힘에 상우가 천천히 뒤로 누웠다. 등에 닿는 대리석이 너무 딱딱하고 차가워 몸이 부르르 떨렸다. 재현이 상우의 허벅지를 힘주어 눌러 벌렸다. 잠시 후 자지를 물게 될 구멍이 조신하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아직 풀어 주지 않아서인지 오밀조밀 꽉 닫힌 게 정말 좁아 보였다. 그동안 여기로 내 좆을 물었다고? 눈으로 확인하니 넣을 때마다 고생했던 게 이해가 갔다.

“사장님…….”

재현의 시선이 닿는 곳이 어딘지 알 것 같아 상우는 부끄러움에 몸을 뒤척거렸다. 빨아 주겠다더니만 멀뚱히 구경만 하고 있었다. 불러도 대답조차 안 할 정도로 집중해서. 상우는 민망함에 손으로 제 구멍을 덮어 가렸다.

“그만 봐요.”

“왜?”

한참 잘 구경하고 있었는데 아쉽게. 그만 보라면서도 여전히 다리는 잘 올리고 있는 게 참 설득력 있는 모양새였다.

“부끄럽잖아요.”

“좆 대가리 보여 주는 건 괜찮고 구멍 보여 주는 건 부끄럽고?”

재현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훤히 보여 주는 것보다 이렇게 가리고 있는 게 더 꼴리는 걸 알긴 하나. 재현은 몸을 다시 숙여 꼼꼼히도 가리고 있는 상우의 손가락을 핥았다. 혀에 힘을 주어 손가락 사이로 밀어 넣자 상우가 파드득 놀라는 게 느껴졌다.

“아, 안 돼요! 사장님―!”

슬쩍 벌어졌던 손가락 사이가 다시 꼬옥 틈 없이 붙어 버렸다.

“계속 잘 가리고 있어.”

잘 가리고 있으라는 말과 달리 재현의 손이 상우의 손가락을 억지로 벌렸다. 바들바들 떨어 대며 버티는 손가락 사이로 구멍이 빼꼼히 모습을 드러냈다. 기대감에 움찔거리는 게 보기 좋았다.

“힉―!”

재현의 말캉한 혀가 닿는 순간 상우의 입에서 경악이 가득 찬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읏, 거길…… 거기를 왜―!”

넓게 문지르는 축축한 감촉에 상우가 말까지 더듬어 가며 고개를 저었다. 살다가 남의 뒷구멍을 빨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생각보다 나쁜 기분은 아니라 재현은 본격적으로 혀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므라든 구멍 위를 살살 간지럽히기도 하고 길게 핥아 올리기도 하던 재현의 혀가 뾰족하게 세워졌다.

“하으윽!”

파고들 것처럼 쿡쿡 찔러 오는 감각에 상우가 진저리를 치며 고개를 젖혔다. 싫은가 싶어 힐끗 상우의 상태를 곁눈질하던 재현은 안심하고 다시 구멍에 집중했다. 완전히 빳빳해진 상우의 자지 끝에서 투명한 액체가 방울방울 올라오고 있었다. 벌려진 틈새를 메우려고 힘주고 있던 손가락에도 힘이 빠졌다. 꼭 다물고 있던 구멍도 자꾸만 풀어지는지 천천히 벌어지다가 다시 후다닥 닫히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재현은 혀를 밀어 넣었다.

“아, 안 돼요……! 읏! 아앗―!”

너무 부끄러워서 기분이 어떤지도 모르겠는데 입만 열면 신음이 터져 더 민망했다. 내장이 핥아지는 느낌이 분명 이상한데 신경 쓰지 않으면 구멍이 자꾸만 벌어졌다.

혀를 꽉 조여 오는 입구에 재현의 손바닥이 찰싹, 하얀 엉덩이를 때렸다. 힘 좀 풀어 봐, 인마. 좋아서 질질 싸고 있으면서. 혀가 자유롭지 않으니 때리는 것 말고 타박할 방법이 없었다.

“아흐윽…….”

상우가 울음에 가까운 소리를 내며 힘을 풀었다. 소용도 없이 구멍을 가리고 있던 손은 어느새 자지 위로 올라왔다. 애가 타서 어쩔 줄 몰라하며 상우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방해물이 사라지자 재현의 얼굴이 더 깊숙이 묻혔다. 코끝에 닿는 말랑한 감촉도 기분이 좋았다. 혀가 들어왔다가 빠져나갈 때마다, 구멍 위를 진득하게 핥아 올릴 때마다 상우의 허리가 들썩거렸다.

“흑…… 사장님…… 사장님.”

그만하라는 말을 하려고? 재현은 깔끔하게 상우의 부름을 무시했다. 문지르고 눌러 주면 좋다고 빠끔거리는 구멍을 더 맛보고 싶었다.

“이제 그만…….”

아니나 다를까. 그만하라는 목소리가 들려와 재현은 입을 벌리고 이를 세웠다.

“아흑! 그만, 흣…… 그만 넣어 주세요…….”

“아.”

들은 척 만 척 하던 재현이 상우의 넣어 달라는 말에 혀를 멈췄다. 그 말이면 또 얘기가 달라지지. 재현이 몸을 일으키며 침으로 번들번들해진 입가를 쓱 문질렀다. 홈바 위에 길게 누운 상우가 흐트러진 눈빛으로 저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아직 안 풀렸을 텐데.”

“흐으…… 괜찮아요.”

“찢어질 텐데.”

“괜찮아요…….”

이거 완전히 맛이 갔네. 찢어진다는데 괜찮다니. 재현이 난폭하게 발기한 자지를 꺼냈다. 불룩 솟아오른 앞치마를 위로 들어 올리자 만져 주지 않아도 기특하게 벌떡 일어선 좆이 모습을 보였다. 한 손으로는 자지를 잡고 다른 손으로는 앞치마를 잡고 있으니 상우의 다리를 벌릴 손이 없어졌다.

“상우야. 다리 벌려 봐.”

재현의 단내에 푹 절여진 상우가 다리를 벌리는 거로 모자라 제 몸쪽으로 끌어올려 안았다. 보면 부끄럽다고 할 때는 언제고. 완전히 벌어져서 빨간 속살까지 언뜻언뜻 비치는 구멍이 훤히 드러났다.

타액으로 축축해진 구멍 위를 문지르던 자지가 천천히 파고들기 시작했다. 여전히 꽉 조이기는 해도 핥아진 게 정말 기분 좋았는지 평소보다는 덜 힘들게 들어갔다. 두툼한 귀두를 먹어치운 구멍을 빤히 보던 재현이 감상평을 중얼거렸다.

“와…… 존나 야하네. 앞치마 입고 하니까 새색시가 신랑한테 박는 기분이다.”

새색시가 신랑한테? 재현의 말을 멍하게 곱씹어 보던 상우가 콧잔등을 찡그렸다. 본인을 새색시라고 칭하다니. 양심 없기는.

“사장님처럼, 흣, 커다란 새색시가 어디 있어요.”

재현이 천천히 허리를 들이밀며 웃었다. 아래가 찢어져도 괜찮다길래 정신 놓은 줄 알았더니만. 이런 말은 또 따박따박 대꾸하는 게 웃겼다. 그것도 제 다리를 꼭 끌어안아 벌린 모습으로 핀잔을 주다니. 진짜 웃기는 놈이었다.

“너 그거 성차별 발언이야. 후…… 힘 좀 풀어 봐.”

“하읏…….”

아무리 상우가 힘을 풀려고 노력해도 젤이 없어서 그런지 살이 쓸리는 느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두리번거리던 재현이 긴 팔을 쭈욱 뻗어 검은색 병을 잡았다. 밥을 볶을 때 쓰려고 꺼내 놓고 상우가 섹스부터 하자고 보채는 통에 아직 열어 보지도 못한 올리브 오일을 이 타이밍에 열게 될 줄이야. 뚜껑을 여느라 스르르 내려간 앞치마를 다시 들어 올리고 재현은 오일을 결합부에 주륵 부었다.

젤과 달리 점성 없는 오일이 상우의 엉덩이 사이를 타고 흐르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쑤욱. 재현이 다시 허리를 움직이고 미끄러운 구멍 사이로 자지가 빨려 들어갔다. 그래도 몇 번이나 먹어 본 거라고 상우의 안이 금방 재현의 좆 모양대로 길을 내주었다. 귀두 끝이 걸리는 느낌이 들어 고개를 내리자 어느새 자지를 거의 끝까지 삼켜 낸 곳이 눈에 들어왔다. 몇 번을 보아도 제 좆을 감당하는 구멍이 신기해서 재현은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상우야, 이거 보여?”

재현이 허리를 뒤로 빼며 상우에게 물었다. 배 속이 꽉찬 느낌에 숨만 할딱거리고 있던 상우가 고개를 들어 재현이 더듬고 있는 부분을 바라보았다.

“아으…… 무서워요…….”

눈으로 보니 재현의 크기가 더 생생하게 실감이 났다. 저렇게 무식하게 큰 자지가 몸 안에 들어와 있다니. 반쯤 빠져나간 그것은 오일 때문에 번들번들 빛나고 있어 더 무서웠다.

“무섭기는. 이렇게 잘 받아먹으면서.”

“흐아…….”

재현의 자지가 내벽을 쿡 찔러 올렸다. 무섭다면서도 상우는 한번 보기 시작한 곳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들락날락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야동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한 기분에 어쩐지 철벅 철벅 박히고 있는 제 몸뚱어리가 섹시해 보였다. 상우가 은근슬쩍 재현이 박아 오는 타이밍에 맞춰 허리를 들썩였다.

“아윽―!”

“이제 허리도 잘 돌리네. 너 그냥 신랑 말고 색시 해라.”

웃음기를 가득 품은 재현의 목소리에 상우가 갑자기 부들부들 몸을 떨었다. 좆을 물고 있던 입구에도 힘이 꽉 들어갔다.

“하…… 갑자기 왜…….”

왜 이렇게 조여 대, 하고 말하기 위해 연결된 곳에서 시선을 뗀 재현이 말을 멈췄다. 끈적하게 떨어진 희뿌연 정액 몇 방울도 이해가 안 됐고, 목부터 시작해 점점 빨개지는 상우의 얼굴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후드티를 입고 있어서 확인하기 힘들지만 분명 가슴팍도 붉게 물들어 있을 것이다.

“뭐야. 왜 그래?”

아무리 상우가 조루이긴 해도 아직 갈 타이밍이 아니었다. 빠르고 거칠게 전립선만 노려서 박힐 때 앞을 만지지 않고 간 적은 있어도, 이렇게 천천히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사정한 건 처음이었다.

“하으, 그게…… 아…….”

상우도 민망해져 고개를 휙 돌렸다. 아, 미쳤나 봐. 스스로가 섹시하다고 자아도취 중이었는데 재현이 비슷한 발음을 해서 이 사달이 났다. 그 섹시와 이 색시가 전혀 다르다는 걸 알고 있는데. 재현은 그냥 놀리는 말이라는 걸 아는데. 제 마음이 읽힌 줄 알고 깜짝 놀랐다. 도저히 제가 섹시해서 재현이 감탄한 줄 알았다고 말할 수가 없어 상우는 고개를 저었다.

“어떤 게 기분 좋았는지 알려 줘야 또 해 주지.”

재현이 몸을 숙여 벌겋게 달아오른 상우의 뺨에 쪽쪽 입술을 눌렀다. 빠르게 사정하고 부끄러움에 덜덜 떠는 게 마음에 들었는지 단내가 짙어졌다. 하여간 성격 이상해. 상우는 속으로 재현을 욕하며 입을 꾹 다물었다. 제가 ‘색시’를 잘못 들어 흥분한 것을 재현이 알면 수치심에 차라리 죽는 게 나을 때까지 놀릴 것이 분명했다.

말해 줄 생각이 없어 보이는 상우를 빤히 바라보던 재현은 대답을 듣기 포기한 듯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읏, 흐…… 사장님…….”

끙끙대며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재현이 더 몸을 숙였다. 이제 상우가 조금만 바스락거려도 뭘 바라고 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막 기분이 좋아지기 시작할 때 상우는 재현의 몸에 찰싹 매달리고 싶어 했다. 정답이었는지 목을 감싸고 둘러진 팔에 꼬옥 힘이 들어갔다.

“아아―! 좋아요…… 하아, 기분…… 좋아요.”

안을 빠듯하게 채우고 있는 두꺼운 재현의 성기가 움직이는 것도, 앞치마의 두꺼운 천에 자지가 문질러지는 것도, 재현의 단단한 손이 어깨를 꽉 움켜지고 있는 것도, 귓가에 내려앉는 낮은 숨소리도. 모두 기분 좋았다. 정액을 먹기 위해 급급하던 마음이 없어서 그런가. 몸에 닿아 오는 모든 감각이 날카로워져 견디기 어려웠다.

“아……! 사장님, 흑, 사장님 어떡해요…….”

상우가 재현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애달픈 목소리를 냈다.

“뭘 어떡해?”

“흐아―! 이상해…… 으응! 오늘 이상해요……!”

이상한 게 하루 이틀 일인가. 그래도 상우가 이상하다니 재현은 양심껏 잘게 흔들던 허리를 멈추고 몸을 일으켰다.

“자꾸…… 흐윽, 자꾸 갈 거 같아서…….”

울음 섞인 목소리를 내며 상우가 손을 꼬물꼬물 내려 자지를 움켜쥐었다. 끝까지 사정하지 못해서 아직 안에 남아 있던 정액이 요도 밖으로 주륵 밀려 나왔다. 자꾸만 앞치마가 흘러내려 뽀얀 좆을 가리는 게 못마땅해진 재현은 그제야 주섬주섬 벗어서 아무데나 내동댕이쳤다. 툭툭 떨어진 정액은 앞치마뿐만 아니라 상우의 카키색 후드티에도 하얀 얼룩을 남겨 놨었다. 급하게 하느라 옷도 안 벗기고 했네.

재현의 처박는 힘에 시작할 때는 모서리에 걸터져 있던 상우의 엉덩이가 어느새 한참 위로 올라가 있었다. 아무리 일반 남성보다 큰 키라지만 홈바가 꽤 높은 편이라 재현 역시 불편하게 까치발을 들고 있었다. 옷을 벗길 정신은커녕, 자세가 불편한 줄도 모르고 있었다니. 재현은 웃으며 옷 위에 남은 체액을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끈적하게 묻어나는 타인의 정액 감촉이 더럽고 불쾌하다기보다는 소름 돋게 꼴렸다.

“……그러네. 이상하네.”

평소보다 확실히 페이스가 빨랐다. 뭐가 너를 이렇게 달아오르게 만들었을까. 아무래도 그 답은 아까 상우가 끝까지 해 주지 않았던 말에 있을 것 같았다. 자지를 쭈욱 빼낸 재현은 홈바 위로 폴짝 올라왔다.

“하으으…… 이거…… 안 무너져요?”

갑자기 내벽이 딸려 나가는 느낌에 바들바들 떨면서 상우가 물었다. 차라리 저를 내려 주지. 아무도 안 보는 집이라 다행이었다. 다 큰 성인 남성 둘이 부엌에 이렇게 누워 있는 꼴을 누가 보기라도 했다면 미친놈들이라고 욕했을 것이다.

“몰라. 올라가도 되냐고 물어본 적이 없어서.”

“아.”

상우가 멍청한 목소리를 내었다. 하긴. 어떤 사람이 홈바를 설치하면서 섹스할 목적으로 사람 두 명의 무게를 버틸 수 있냐고 물어볼까. 깨달음을 얻은 표정을 짓는 상우를 내려다보던 재현은 하얀 발목을 움켜쥐었다. 발등까지만 올라오는 흰색 양말에 덮인 발이 손에 잡혀 쓰윽 따라올라왔다. 재현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며 거추장스러운 양말을 벗겨 냈다.

이 정도면 265에서 270 사이쯤 되려나. 상우가 같은 거 달린 사내새끼라는 사실을 크게 신경 쓰지 않다가도 이런 작은 부분들에서 새삼 깨닫곤 했다. 그래도 재현은 괜찮았다. 상우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다는, 영화에서나 볼 법한 눈물 나게 헌신적인 사랑의 감정은 아니었다. 그냥. 그냥 상우를 보면 꼴렸다.

꼴려서 망가질 정도로 좆을 처박고 싶다가도, 갑자기 돌변해 마냥 잘해 주고 싶어졌다. 예쁜 얼굴도 좋았고 하는 짓이 귀여운 것도 좋았다. 그러니까, 상우에게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순전히 재현의 욕구이자 욕심이었다. 그동안 하고 싶은 거, 사고 싶은 거 마음껏 누리며 살아온 환경 탓에 재현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당장 바라는 바를 충족시키는 데 익숙했다. 그리고 정액으로 양기를 섭취하는 인큐버스인 것도 믿어 줘야 하는데 그에 비하면 남자라는 사실은 양반이기도 했고.

재현은 얼굴 앞으로 다가온 발바닥을 혀로 길게 핥아 올렸다. 오늘 더럽다는 곳이란 곳은 다 핥아 보네.

“흣…….”

상우의 발가락이 간지러움에 움츠러드는 게 귀여워 이로 살살 깨물어 보기도 했다. 쾌감과 부끄러움과 기대감이 잔뜩 뒤섞인 이상한 표정마저 귀여웠다. 상우의 다리를 어깨에 걸친 재현이 구멍 위에 자지를 문질렀다. 천천히 미끄러지는 살갗으로 움찔거리는 떨림이 전해졌다.

“무너지면 책임지고 그 회사 망하게 해 줄게.”

그것참 안심되는 말이었다. 당당하게 허세를 부리는 게 딱 재현다워서 상우의 입꼬리가 씰룩씰룩 올라갔다. 일개 호텔 사장이 어떻게 회사 하나를 망하게 하나.

“심각한 얘기인데 웃기는.”

조그마한 타박과 함께 고개를 돌린 재현이 상우의 종아리와 발목에 꾹꾹 입술을 눌렀다.

“하으…… 사장님한테 그럴 힘이 어디 있어요.”

“이게 백제그룹을 뭐로 보고.”

재현이 입술을 비비던 발목을 콱 깨물었다.

“아앗! ……네? 백제요……?”

자지에 힘을 주어 귀두를 구멍 안으로 꾸욱 누르고 있던 재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모르고 있었나? 상우가 아직 세상사에 관심 없는 어린애라는 걸 잊고 있었다. 뭐. 상관없겠지. 상우의 허벅지를 고쳐 안은 재현이 좆을 콱 찍어 눌렀다.

“으하앗!”

딱딱한 상판 위에서 들썩거리던 허리가 붕 뜨고 상우의 고개가 한껏 뒤로 젖혀졌다. 거칠게 파고든 자지는 머릿속에 남아 있던 잡다한 생각들이 순식간에 날아갔다.

“아으, 아! 앗, 거기……! 흐으…….”

빈틈없이 들어찬 자지의 부피가 전립선 위를 누르며 스쳤다. 쿵쿵 안을 울려 대는 자극에 잡을 곳 없이 미끄러지던 상우의 손이 재현을 향해 뻗어졌다.

“아아아―!”

안아 달라는 건 줄 알면서도 재현은 뻗어 온 팔뚝을 잡아끌어 더 깊게 자지를 박아 댔다. 상우가 몸을 움츠리며 차마 끝까지 나오지 못하는 신음을 헐떡헐떡 흘려 댔다.

“후, 그보다. 아까 왜 질질 쌌는지 이제 말해 봐.”

“으흑, 흣―! 안 돼…… 학, 너무 빨라요……!”

이지를 잃은 채 재현을 바라보던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리다 꽉 감겼다. 생각을 해야 하는데 퍽퍽 박혀 오는 자지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얼른.”

“흐으윽! 아, 으응! 세…… 섹시……!”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며 재현이 되물었다.

“색시?”

“아니, 으아! 섹시, 흑, 섹시하다는 줄 알고…….”

푸핫. 재현의 입에서 참지 못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이고. 이 착각쟁이를 어쩐담. 재현은 잡고 있던 상우의 팔을 확 잡아당겨 제 위에 앉혔다. 등을 꽉 끌어안자 손에 닿은 가죽 너머로 쿵쾅쿵쾅 울려 대는 심장 고동이 느껴졌다. 눈앞의 쇄골에 입을 쪽쪽 맞추며 재현이 말했다.

“맞아. 너 섹시해. 존나 섹시해서 죄다 씹어먹고 싶어.”

이번에는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재현의 입술 사이에서 나온 섹시하다는 표현에 놀림당할 준비를 하느라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노곤하게 풀어졌다. 상우는 팔을 들어 재현의 머리를 꼭 끌어안으며 품 안에서 울리는 낮은 웃음소리의 진동을 음미했다.

재현의 허리가 들썩거릴 때마다 흔들리는 몸이 감당하기 힘들어 상우는 재현의 몸에 매달린 채 가쁜 신음만 내뱉었다. 움직이는 건 분명 재현인데 위에 있어서 그런지 평소보다 숨이 빠르게 차올라 어깨가 들썩거렸다. 마치 100m를 전력 질주한 것처럼.

“하악, 읏―! 힘들어…… 흑, 힘들어요.”

“벌써?”

벌써라고 되묻는 재현의 목소리도 딱히 안정적이지는 않았다. 상우가 재현의 옷을 꽉 움켜쥐었다. 두 몸 사이에 갇혀 있는 자지에 오는 자극이 너무 강해서 또 사정감이 몰려 왔다. 어쩌다가 재현의 니트 끝자락을 젖히고 그 안으로 들어간 건지. 자지의 한쪽은 울퉁불퉁한 재현의 배에, 다른 한쪽은 부드러운 캐시미어 천에 잔뜩 쓸리고 있었다.

“아윽, 또…… 갈 거 같아요……!”

조금이라도 움직임을 멈춰 보기 위해 상우는 지칠 줄 모르고 움직이는 재현의 허리를 다리로 감싸 안았다. 그러나 멈추기는커녕 자지가 더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와 우는 소리밖에 낼 수 없었다. 오늘따라 유난히 적극적인 상우의 태도 때문인지 재현도 한계였다.

“하, 나도 쌀 거 같아.”

“으응, 흑…… 안에, 아흐…… 싸 주세요.”

아, 맞다. 시작하기 전에 밖에다 싸겠다고 으름장을 놨었지. 남아일언 중천금이라고. 사내대장부가 어찌한 입으로 두말을 하겠는가. 퍽퍽 쳐올리던 재현의 자지가 거칠게 뽑혀 나갔다.

“흐앗―!”

상우의 짧은 비명을 들으며 재현은 제 좆과 상우의 것을 동시에 손에 쥐었다. 빠르게 철벅철벅 소리를 내며 손을 흔들자 상우가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허벅지 위에 놓인 엉덩이 근육에 힘이 들어가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아으흐…….”

꼬리가 길게 늘어지는 신음과 함께 손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후으…… 싼다…….”

여전히 상우의 자지를 놓아주지 않고 손을 움직이던 재현의 좆이 크게 꺼떡거렸다. 사정으로 예민해진 귀두가 계속 자극받아 정신없는 상우는 재현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는지 잔 신음만 헐떡였다. 오늘 처음 사정하는 재현의 정액이 쭈욱 쏘아 올려졌다. 손을 흔들 때마다 솟구치는 정액이 상우의 옷을 더럽혔다. 재현의 손가락을 타고 두 명의 체액이 섞여 진득하게 흘러내렸다.

툭. 상우가 지쳤음을 온몸으로 표현하며 재현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안에…… 싸 달라니까요.”

“아쉬워?”

정액이 잔뜩 묻은 손가락이 상우의 입가로 다가왔다. 고개를 숙인 탓에 어디가 입인지 정확히 찾지 못해 입 근처에 미끌한 것이 치덕치덕 묻었다. 마침내 입술을 비집고 들어온 손가락이 상우의 말랑한 혀에 닿았다. 불순물이 섞여서 그런가. 평소보다 밍밍한 단맛이 혀끝을 맴돌았다. 그래도 소중한 재현의 정액이기에 상우는 입안으로 들어온 긴 손가락을 쪽 빨았다.

일분일초가 아니라 꽤 오랜 시간을 허비한 요리는 재현의 예상대로 남들은 야식을 먹을 시간에 완성됐다. 재현이 준비하는 동안 뽀득뽀득 씻고 재현이 건네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서도 상우는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재현은 이제 당연한 듯이 상우의 사이즈에 맞는 옷을 구비해 놓고 있었다.

밥을 볶는 것도 어찌나 어설픈지 상우는 불안에 떨며 지켜봐야 했다. 마침내 상우의 앞에 놓인 김치볶음밥은 계란 후라이까지 예쁘게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 앉은 재현이 상우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사장님은 안 드세요?”

하나밖에 놓이지 않은 그릇에 상우가 의아해하며 물었다.

“요즘 식단 관리해서.”

재현이 제 손에 들린 닭가슴살 봉지를 흔들었다. 아까 전자레인지 돌리던 게 저거였나. 닭가슴살도 식재료부터 눈앞에서 요리된 걸 먹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소박하게 냉동제품을 돌려먹다니 신기했다. 아니, 근데 지난번 늦은 밤에 저와 같이 피자를 먹었던 건 재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나. 그냥 자신이 만든 김치볶음밥보다 냉동 닭가슴살이 더 믿을 만한 거 아니야? 어쩐지 실험체가 된 기분으로 상우는 숟가락을 들었다.

“맛있게 먹어.”

“네. 감사해요, 사장님.”

상우가 싱긋 웃으며 인사했다. 실험체면 뭐 어떠하리. 자신은 지금 재현이 태어나 처음 손수 만든 요리를 먹는 사람인데. 무조건 맛있다고 해 주고, 무조건 싹싹 긁어먹어야지. 상우는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숟가락을 쏙 입 안에 넣었다.

“어때?”

아직 씹기도 전인데 재현이 은근히 기대하는 눈빛을 보냈다. 상우도 씹기도 전에, 음식이 혀에 닿을 때부터 알았다. 아. 좆됐다. 상우의 이가 천천히 음식물을 으깨기 시작했다. 이걸…… 음식이라고 불러도 되나? 이 세상 모든 김치볶음밥에게 미안해지는 맛이었다.

“음…… 맛있어요.”

“그게 다야?”

아니요, 사장님. 김치볶음밥이…… 달아요…… 상우가 애써 웃었다.

“너무 맛있어요.”

“간은 맞아?”

너무 달아서 간이 어떤지도 모르겠어요. 마음속 외침을 꾹꾹 누르며 상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금이랑 설탕이랑 헷갈렸나? 김치볶음밥에 소금이 들어간다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그래도 상우는 꿋꿋이 한 숟가락 더 퍼서 입 안에 넣었다. 그것도 왕창. 처음 보는 재현의 기대 가득한, 칭찬을 기다리는 표정도 무시하기 어려웠고 차라리 빨리 먹어치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잘 먹네. 다행이다.”

재현이 그제야 안심한 듯 닭가슴살 봉지를 쭈욱 뜯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분명히 아무런 간도 되어 있지 않을 게 뻔한 닭가슴살이 더 맛있어 보일 줄이야. 상우는 아직 산더미처럼 쌓인 김치볶음밥을 와구와구 입안으로 밀어 넣었다. 차라리 미각을 잃었어야 했는데. 판단미스였다.

“진짜 괜찮은가 보네. 역시…….”

재현의 흐려진 말끝 뒤에 나올 말이 궁금해 상우가 고개를 들고 바라보았다. 그러는 중에도 입은 열심히 의무를 다하고 있었다.

“아, 알려 준 직원이 설탕은 신맛 잡게 조금만 넣으라고 하더라고.”

그 조금의 기준이 얼마였나요. 꿀꺽. 상우는 반쯤 씹다가 만 김치볶음밥을 삼켰다. 식도에는 미뢰가 없어서 다행이었다.

“근데 너 단 거 좋아하잖아.”

상우는 재현의 뿌듯하게 웃는 얼굴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집어던지고 싶었다. 와, 이 사람은 악의 없이도 남을 괴롭힐 수가 있네.

“역시 네 입맛은 내가 더 잘 아는구나 싶어서.”

“아하…….”

상우가 어설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렇게 만족스러워하는데 정색을 할 수도 없었다.

“먹고 부족하면 더 먹어. 양 조절 실패해서 엄청 많아.”

왜 양 조절도 실패하셨나요! 상우는 울컥 올라오는 화를 간신히 참아 냈다. 요리 못하는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들이 떠올랐다. 불 조절 실패, 기름 조절 실패, 양 조절 실패. 그리고 내 맘대로 레시피.

“얼…… 마나 많아요?”

상우가 더듬더듬 물었다. 한 끼 이상은 못 버틸 거 같은데.

“내일까지 내리먹을 수 있을 거 같아.”

상우의 표정이 싸악 굳었다.

“저…… 사장님. 아무리 맛있어도 삼시 세 끼 김치볶음밥만 먹는 건 좀…….”

“그래? 그럼 싸 가. 어차피 여긴 먹을 사람도 없어.”

차라리 집으로 가져가는 게 나을 것 같아 상우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에게는 조금 미안하지만, 집에 가면 눈치 안 보고 버릴 수라도 있지. 고통받던 미각이 마비라도 됐는지 이제 아무 표정 없이 씹어 넘길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왔다.

“아, 사장님. 아까 말한 백제 얘기는 뭐예요?”

그래서 상우는 정신이 없어 물어보지 못한 말을 꺼냈다. 재현이 픽 웃었다. 사람들은 보통 재벌 2세까지는 관심이 지대하지만, 3세부터는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상 크게 관심 두지 않는 것 같았다. 관심 있는 사람들도 실질적 후계자인 큰 형이나 스포트라이트 하지 별거 없는 삼남은 쳐다도 안 봤고. 그래도 제가 계열사에서 쫓겨나 호텔 사장으로 왔을 때 기사도 나고 했는데.

“궁금하면 찾아 봐.”

밥을 안 먹을 수 있는 감사한 기회에 상우는 쪼르르 달려가 핸드폰을 들고 왔다. 뭐라고 써야 하나. 가야호텔 백재현 치면 나오려나. 초록색 검색창에 토도독 타이핑한 상우의 눈이 스크롤을 따라 바쁘게 움직이더니.

“헉. 미친.”

욕을 했다. 재현은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닭가슴살을 씹으며 상우의 반응을 계속 지켜봤다. 재현이 만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백제그룹과 재현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었고, 몰랐어도 하루 이틀 지나면 알 수밖에 없었다. 워낙 주변에서 쑥덕거리니까. 그래서 재현은 상우의 반응이 궁금했다. 이렇게 오랫동안 제 정체를 모르고 친분을 유지한 상대는 처음이었다.

“이거…… 이거 진짜예요?”

상우가 핸드폰 기사 속 사진과 재현의 얼굴을 비교하듯 번갈아 보며 더듬더듬 물었다.

“글쎄. 진짜일까, 가짜일까?”

자신이 인큐버스인 것보다 재현이 재벌 3세인 게 더 못 믿을 일 아닌가? 상우는 어안이 벙벙해 김치볶음밥을 마저 끝내야 한다는 의무도 잊어버렸다.

“설마 제가 인큐버스라 그래서 가짜 뉴스 내고 저 놀리는 거 아니죠?”

“생각하는 수준 하고는.”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재현은 혀를 쯧, 하고 찼다.

“근데 사장님은 왜 이런 데에…….”

상우가 재현의 집을 휘휘 둘러봤다. 물론 남자 혼자 살기에는 턱없이 비싸고 좋은 집이었다. 그래도 재벌이면 성처럼 으리으리 한 집에서 집사 같은 사람이랑 같이 사는 거 아닌가? 아니지. 지분을 조금이라도 더 얻어 내기 위해 부모님과 같이 살며 혹독한 스파르타 교육을 받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밥도 저런 냉동 닭가슴살 쪼가리를 뜯는 게 아니라 우아하게 시중받으면서 매 끼니 스테이크를 썰고.

“무슨 생각을 하든 다 틀렸으니까 밥이나 먹어.”

재현의 말에 상우가 물끄러미 지옥에서 올라온 듯한 김치볶음밥을 내려다보았다. 지옥에서 올라온 건지 저를 지옥으로 끌고 가는지는 다시 고민해야겠지만, 상우는 지금 감히 맛 투정을 할 상황이 아니었다. 제 앞에 놓인 김치볶음밥은 그냥 김치볶음밥이 아니었다. 이건…… 이건 무려 재벌 3세가 저를 위해 직접 차려 준…….

“아, 거참. 나한테 콩고물 떨어지는 거 없으니까 그냥 먹으라고.”

이미 백제그룹의 콩고물을 묻힐 대로 다 묻힌 재현이 웃으며 상우를 타박했다. 갑자기 김치볶음밥을 향해 감격스러운 표정을 짓는 상우가 웃기고 귀여웠다. 재벌가 막내라 나쁜 점은 전혀 없었지만, 딱히 좋다고 느낀 적도 없는데. 상우의 태도가 재벌이라는 단어에 변하는 걸 보고 지금만큼은 그 타이틀이 마음에 들었다.

“사장님…… 밥 차려 주셔서 감사해요.”

“새삼.”

“근데 보통 재벌 3세면 막 회사에서 후계 구도 싸움하거나, 아니면 인정받으려고 자기 회사 차려서 엄청 잘나가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이건 또 어디서 본 드라마일까. 재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런 욕심 안 부려도 평생 놀면서 유유자적 먹고 살 수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이 뭐야.”

“기사 댓글 보니까…… 사장님 망나니라고…….”

상우가 가만히 재현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쓸데없이 재현의 화만 돋울 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일부러 물어봤다. 지옥 같은 맛을 선사해 준 것에 대한 소소한 앙갚음이었다.

“박상우. 빨리 다 안 먹어? 시발. 너 그거 남기기만 해 봐. 저기 있는 거 다 먹을 때까지 가둬 놓을 거야.”

벌컥 짜증을 내는 재현의 목소리에 상우가 다시 놀고 있던 숟가락을 움직였다.

“사장님.”

“왜!”

“아무리 짜증 나도 박상우, 말고 상우야, 요.”

하. 급격히 피곤해진 재현이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 * *

뭐가 얼마나 만족스러웠던 건지 집으로 데려다주는 길에 상우가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불러 댔다. 상우의 무릎 위에는 너무 많아서 감당할 용기가 없을 정도로 많아 프라이팬째로 들고온 김치볶음밥이 올려져 있었다.

상우가 맛있게 먹어서 다행이었다. 솔직히 상우가 안 볼 때 재현도 살짝 맛을 봤는데 사람이 먹을 맛이 아니었다. 인큐버스니 서큐버스니 하더니만 입맛도 제정신이 아닌 건지. 재현은 도저히 먹을 자신이 없어서 상우에게만 퍼 주고 닭가슴살을 씹었는데 아주 옳은 선택이었던 것 같았다. 단 걸 좋아하는 상우가 남은 음식을 싸 가겠다고 해서 천만다행이었다.

“뭐가 그렇게 기분 좋아.”

“음…….”

상우는 뭐 하나 딱 집어 낼 수 없어 고민하는 소리를 냈다. 맛은 더럽게 없었지만, 재현이 저를 위해 요리해 줬다는 사실도 좋았고, 뜻밖에 재현이 어마무시한 부자라는 사실도 알아냈다. 적절한 임기응변으로 일요일 점심까지 재현이 만든 김치볶음밥을 먹지 않았던 것도 좋았다. 김치볶음밥 대신 먹은 피자는 언제 먹어도 맛있었고, 재현더러 식단관리 하지 않느냐며 단 한 조각을 나눠 주지 않은 것도 통쾌했다. 그리고 가장 좋았던 건 역시. 두 번밖에 하지 않은 섹스였다.

상우는 어제 재현을 앉혀 놓은 채 각을 잡고 통보했다. 통보라기보다 애원에 가깝던 그 내용은 자신은 하루에 네 번까지만 사정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재현의 횟수에 맞추면 무한정으로 늘어나니, 자신의 횟수를 제한 두겠다는 건 옳은 선택이었다.

이미 밥 먹기 전에 두 번이나 쌌는데, 그럼 남은 게 두 번밖에 안 되냐고 항의하는 재현을 휙 무시했다. 싫으면 하지 마세요. 그 말에 번들번들 흉흉하게 빛나는 재현의 눈동자를 마주치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상우는 모기만 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저 못 싸게 하는 것도 금지.

 덕분에 재현은 박아 넣을 때마다 안달복달했다. 기분 좋게 해 주고는 싶은데, 그렇다고 사정하면 안 되니. 상우가 갈 거 같다고 귓가에 속삭이면 저절로 애처로운 말이 튀어나왔다. 상우야, 제발 좀 더 참아 봐.

“다 좋았는데, 제일 좋았던 건 사장님이 밥해 주신 거요.”

상우가 방긋 웃으며 답했다. 이 정도의 립서비스는 기본이지.

“다음에 또 다른 거 만들어 줄게.”

상우의 동공이 부산스럽게 흔들렸다. 립서비스의 효과가 너무 좋다 못해 역효과가 날 줄이야. 이걸 어떻게 대처하지. 상우는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재현의 심기를 상하게 하지 않고 이 난관을 헤쳐 나갈 방법이 뭘까. 시험 기간 이후 머리가 굳어 버렸는지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제발. 제발 뭐라도 생각해 내라, 뇌야!

“다음엔 제가 해 드릴게요!”

상우가 다급하게 외쳤다. 순간 재현의 눈썹이 꿈틀 올라가 상우는 재빨리 다음 말을 이어 갔다.

“이…… 이렇게 맛있는 걸 먹었는데 보답해야죠.”

“맛있었어?”

단순하긴. 상우가 생글생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현은 의외로 칭찬에 약했다. 토독토독. 표정은 숨길 수 있었지만, 손가락은 숨길 수 없었는지 핸들을 잡고 있는 무표정한 재현의 손가락이 기쁨의 춤을 췄다. 상우가 창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재현이 너무 귀여워서 자꾸 올라가는 광대를 주체하기 힘들었다.

“뭐 해 달라고 하지.”

태연한 척 내뱉는 말에도 즐거움이 잔뜩 섞여 있었다.

“어려운 건 안 돼요.”

상우는 문득 재벌 3세의 입맛이 두려워졌다.

“요리가 다 거기서 거기지.”

아. 기를 너무 살려 줬나 보다. 상우는 제 무릎에 놓인 지옥에서 온 김치볶음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요리가 다 거기서 거기면 재현의 호텔은 진작 망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어째 귀엽다는 생각이 채 1분을 못 갔다.

쓸데없는 얘기를 주고받는 사이 재현의 차가 상우의 집 앞에 도착했다. 매일 꿀 발라 놓은 것처럼 뛰어들어갔던 집인데 괜히 오늘은 들어가기 아쉬웠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운동화 안에 갇힌 상우의 발가락이 꼼지락거렸다. 재현도 마찬가지였는지 내리라는 말 없이 빈자리를 찾아 주차했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상우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재밌었어?”

피식 웃으며 묻는 재현의 말에 상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데이트 같고 좋았어요.”

평범한 데이트. 그 말이 재현의 심장을 쿵 때렸다. 그래, 우리가 보낸 시간이 데이트였구나. 상우에게 직접 좋아한다는 말을 듣지 않아도 재현은 알 것 같았다. 상우와 재현이 쌓아 온 시간은 연애였다.

야한 콘텐츠를 쉽게 구하기 어렵던 사춘기 시절, 재현은 공부하는 척하며 두꺼운 국어사전을 괜히 뒤적거렸었다. 성기, 자지, 성행위, 성관계. 그런 단어들이 뭐가 그렇게 꼴렸는지 몰래 찾아보면서 키득거렸다. 그때 분명 연애라는 단어도 찾아봤었다.

연애(戀愛): 「명사」 성적인 매력에 이끌려 서로 좋아하여 사귐.

어리고 순진했던 재현은 좋아해야 성적으로 끌리는 거 아닌가? 이거 앞뒤 관계가 틀린 거 아닌가? 하고 의아해했다. 서른 살의 재현은 이제 그 풀이가 이해됐다.

“상우야.”

재현의 부름에 상우는 주인의 명령을 기다리는 개새끼처럼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좋아해.”

히히, 상우의 작은 웃음이 터졌다. 재현의 좋아한다는 말이 작은 의미여도 괜찮았다. 이 콧대 높은 사람이 언제 이렇게 마음껏 좋아한다고 말하겠는가. 오늘은 들어가서 엄마에게 물어볼 것이다. 계약은 어떻게 하는 거냐고. 그리고 재현에게도 물어봐야지. 저와 계약하겠느냐고.

혼자 다른 생각에 빠진 상우가 못마땅했는지 재현의 커다란 손이 불쑥 다가와 뺨을 감싸 쥐었다. 가볍게 입술 위로 문질러지는 말랑한 온기는 더 깊어지지 않고 금방 떨어졌다. 상우가 이럴 리 없는데, 하는 표정으로 재현을 빤히 바라봤다.

“더 하면 진짜 못 보낼 거 같아서.”

어우―, 닭살. 상우가 푸스스 웃으며 몸을 과장해서 떨었다. 재현을 만나고 나서 자신도 많이 바뀌긴 했지만, 더 많이 변한 쪽을 고르라면 단연 재현이었다. 맨날 눈을 무섭게 치켜뜨고 윽박지르기만 했는데. 거의 무표정한 얼굴로 아랫것 내려다보듯 바라보고 어쩌다 한번 웃으면 그건 99% 비웃음이었는데. 이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받아 온 천대에 서러움이 퐁퐁 솟아났다. 오늘도 상우는 재현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해 주지 않기로 했다.

대신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한 번은 아쉬워요.”

상우의 속삭임이 끝나기 무섭게 재현의 입술이 꾸욱 눌러졌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부엌으로 간 상우가 김치볶음밥이 든 프라이팬을 식탁 위에 대충 올려놓았다. 그러더니 바로 거실에 있는 엄마에게 달려가 물었다.

“엄마! 계약 어떻게 해?”

드라마를 보고 있던 상우의 엄마가 미친놈 보듯 아들을 바라봤다.

“아들. 집에 오면?”

“인사하고 손 씻고. 아니, 근데 계약 어떻게 하는지부터 알려 줘.”

“인사.”

“……다녀왔습니다.”

상우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마지못해 인사를 했다.

“그래. 이제 주말마다 외박이 당연해진 아들. 계약은 왜?”

엄마의 말에 가시가 잔뜩 돋아 있어 상우는 찔끔 눈치를 봤다. 너무 매주 자고 왔나? 생존을 위한 사냥이라 다행이었지, 아니었으면 진작에 쫓겨났을 것 같았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계약하고 싶어질 수도 있잖아. 근데 너무 모르는 거 같아서.”

우물쭈물 답하는 상우의 말에 엄마가 리모컨을 들어 텔레비전을 껐다. 아, 대충 어떻게 하는지만 알려 줘도 되는데. 엄마의 표정을 보니 이건 잔소리 각이었다.

“갑자기? 상우야. 계약은 너와 상대의 이해관계가 딱 맞았을 때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해야 하는 건데 그걸 갑자기 하고 싶다고 해?”

“지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지금이든 나중이든! 너 계약하면 먹이한테 최선을 다해야 해. 지금 가볍게 만나는 거랑은 달라. 계약 기간에는 그 먹이만 먹어야 한다고.”

어차피 계약 안 해도 상우는 재현의 정액밖에 못 먹고 있었다.

“그건 상관없을 거 같은데…… 계약 중에 다른 먹이 먹으면 죽어?”

“죽는 건 아닌데…….”

상우가 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고 엄마 옆에 앉았다. 잔소리에서 다른 주제로 잘 회유한 것 같았다. 상우는 엄마가 다시 잔소리 모드로 돌아가기 전에 냉큼 물었다.

“근데 왜 계약한 먹이만 먹어야 해?”

“도덕적인 문제지. 계약한 먹이한테도 실례고. 가끔 다중계약했다가 걸려서 난리 난 동족 얘기도 들려.”

“……연애 같은 건가.”

정답이었는지 엄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먹이 먹는 건 바람 피우는 거랑 비슷하고.”

“그럼 먹이가 다른 사람이랑 하는 것도 바람이지?”

상우의 물음에 엄마는 생각해 본 적도 없다는 듯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설마 일방적으로 수절해야 하는 건가? 상우도 덩달아 긴장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다른 사람한테 줄 정기가 남을 수가 없는데…….”

아, 엄마. 있어. 그런 비정상적인 인간.

“소원은? 소원은 어디까지 가능해?”

상우는 재현이 무슨 소원을 빌지도 걱정되었다. 이상한 소원이면 어쩌지. 재현이라면 충분히 과한 것을 바라고도 남을 텐데.

“우리는 정기를 먹고 사는 존재잖니. 서로의 애정이랑 관련된 소원이면 뭐든 가능하단다.”

로맨틱한 말이었지만 상우의 귀에는 하등 쓸모없는 존재라는 소리로 들렸다. 그런 건 인큐버스나 서큐버스가 아니어도 들어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게다가 ‘서로의’는 또 뭐야. 그럼 다른 사람의 애정으로 인간관계를 조종해서 이득을 취하는 것도 못해? 이건 쓸모가 없다 못해 먹이에 빌붙는 기생충 급이었다. 이 정도라면 재현에게 먹이라고 부르는 것도 양심 없는 거 아닌가.

“로또 당첨 이런 건 안 돼?”

“되면 우리가 여기 살고 있겠니?”

와. 나 진짜 하급 쪼렙 악마구나. 인간이 빌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소원이 부와 관련된 걸 텐데. 내가 기본도 안 되는 악마였다니.

“뭐야. 완전 쓸모없어.”

상우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자 엄마의 표정이 싹 변했다. 이크. 상우는 얼른 다른 질문을 던졌다. 여기서 엄마의 사랑학개론이 시작되면 큰일이었다.

“아빠 소원은 뭐였는데?”

“아들. 소원이 뭔지 다른 사람한테 알려 주는 게 계약 파기 방법이란다.”

계약 체결보다 파기 방법을 먼저 알게 되다니.

“아, 그래서 계약 어떻게 하는 거냐고요―.”

“Osculum infame.”

갑작스럽게 들려온 영어에 상우가 딱딱하게 얼었다.

“오스…… 오스 뭐?”

“중세 시대부터 이어지던 행위인데. 악마를 만난 마녀가 숭배를 표하는 거야.”

중세시대 악마와 마녀의 얘기가 나오니 악마 소환 진을 그리고 흑마법이라도 부리게 될 것 같은 기분이라 상우는 꼴딱 침을 삼켰다.

“엉덩이 사이에 키스.”

“악!”

상우가 꽥 소리를 질렀다. 일단 재현이 어젯밤 제 구멍을 핥았던 게 떠올랐고, 뒤이어 그럼 아빠도 엄마의!? 하는 알고 싶지 않은 상상이 떠올랐다. 이건 마치 섹스를 통해 아기가 생기는 걸 알았을 때 그럼 우리 엄마 아빠도? 하고 경악했던 때와 같았다.

“악!”

상우가 다시 한 번 소리를 질렀다. 그런 상우를 향해 엄마가 싱긋 웃었다.

“요즘은 그냥 계약서 작성하고 지장 찍는 거로 대신하고 있어. 아무래도 세상이 바뀌었잖니.”

그런 걸 먼저 말해 주라고―! 상우는 머릿속에 떠오른 상상을 열심히 흐트러뜨렸다.

어……? 그런데, 나 그럼 이미 사장님이랑 계약한 건가? 상우는 괜히 나불거렸다간 성급히 계약했다고 혼날 것 같아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재현과 계약이 성립된 거라면 소원을 들어 줘야 하는데. 소원을 들어 주기는커녕 귀로 들을 용기조차 아직 나지 않았다.

“엄마…… 계약하고 소원 안 들어 주면 어떻게 돼?”

“큰일 나. 그럼 천국 간다.”

천국 가면 좋은 거 아닌가? 어찌 됐든 나쁜 짓 하면 지옥 간다는 수준의 답변이라 상우는 안심했다. 교회에 나가지 않은 뒤로 상우는 무신론자의 길을 걷고 있었다. 이 세상에 천국 지옥이 어디 있어. 인큐버스는 있어도 그건 없지.

상우는 양심껏 재현에게 소원을 들어 보기로 했다. 터무니없는 내용이면 무시하고 천국 가면 될 일이었다.

“고마워, 엄마.”

“아들. 이 세상 모든 계약은 신중히. 무조건 검토하고 또 검토해!”

“아, 알았어.”

상우는 재빨리 엄마의 잔소리를 피해 방으로 들어왔다. 얼른 재현에게 전화해서 소원이나 물어봐야지. 상우가 뒷주머니를 더듬거렸다. 어라. 재현에게 받은 백팩도 열어 손으로 휘적거렸다. 어라! 핸드폰이 없었다. 언제 마지막으로 썼더라. 재현의 차에서 엄마한테 이제 집 간다고 연락하고 나서 대충 아무데나 뒀던 것 같았다.

고도로 발달한 문명은 모든 디바이스를 연결하고 있지. 상우는 재빨리 컴퓨터를 켜고 PC 버전 메신저로 ‘사장님!’ 하고 후다다닥 보냈다. 읽음 표시가 생기지 않는 걸 보니 운전 중인 것 같았다. 상우는 재차 재현을 불렀다. 사장님, 사장님, 사장님, 사장님! 아마 재현의 핸드폰이 미친 듯이 진동하고 있을 것이다. 상우는 재현이 읽을 때까지 쉬지 않고 ‘사장님’을 쳐 댔다. 주행 중이면 몰라도 신호에 걸리면 답장하겠지 싶어서.

[미쳤어? 아직 운전 중이야.]

역시. 1분도 되지 않아 답장이 왔다. 텍스트에도 재현의 짜증이 가득 묻어났다.

[사장님 저 차에 폰 두고 내렸어요.]

상우의 메시지를 읽은 재현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진상 변태 새끼.

[알겠어. 돌아갈게. 메시지 보내면 내려와.]

재현이 차를 돌리기 위해 왼쪽 깜빡이를 켰다. 저를 이렇게 마구 부려 먹을 놈이 나타날 줄이야. 하지만 상우에게 핸드폰이 없어 연락이 잘 안 되면 답답한 건 재현이니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상우의 집 앞에 도착한 재현은 내려오라고 메시지를 보낸 뒤 핸드폰을 찾았다. 도대체 어디다 던져 두고 간 건지 상우가 앉아 있던 보조석에는 아무것도 놓여 있지 않았다. 전화를 걸자 어디선가 진동음이 들렸다. 하여간 흘리고 다니는 것도 꼭 저같이 희한한 데다가 흘렸다. 고개를 숙인 재현은 의자 아래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핸드폰을 발견했다. 손을 더듬어 주인에게 버림받은 핸드폰을 구해 낸 재현은 인상을 찡그렸다.

가야호텔 백재현 사장님. 이게 뭐야. 정없게. 재현은 아파트 입구에서 팔랑팔랑 뛰어오는 상우를 보며 한마디 해 줘야겠다고 생각했다.

“타 봐.”

재현의 표정을 살피던 상우가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본능이 말해 주고 있었다. 지금 재현의 기분이 나쁘다고. 설마 핸드폰 가져다달라고 땡깡부려서 화가 난 건가? 그냥 직접 찾으러 갈걸. 집을 모르는 것도 아닌데. 재현이 조금 잘해 준다고 분수를 잊고 나댄 게 후회됐다.

“타 보라니까?”

재현의 심기가 더 불편해지기 전에 상우는 냉큼 차에 올라탔다.

“사장님…… 제가 너무 무례했죠……? 죄송해요.”

갑자기 잔뜩 꼬리를 말고 눈치를 살살 보는 상우의 모습에 재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본론도 말하지 않았는데 뭘 이렇게 열심히 사과하는 건지.

“그냥 제가 찾으러 갔어야 하는데…….”

재현의 입꼬리가 씰룩 움직였다. 지레 겁먹고 사과부터 하는 버릇은 평생이 가도 안 고쳐질 것 같았다. 재현이 상우에게 핸드폰을 건넸다. 상우가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가려던 차에 핸드폰이 휙 다시 뺏어졌다.

“상우야. 너, 나 뭐라고 저장해 놨어.”

이름만 불러달라는 건 다정하게 말해 달라는 거였지 이렇게 음산하게 하는 협박조에 갖다 붙이라고 부탁한 게 아니었다. 상우가 슬금슬금 다시 재현의 눈치를 봤다.

“가야호텔 백재현 사장님이요…….”

사장실에 놓여 있던 명패를 보고 잘 받아 적었는데. 뭐가 문제지.

“우리 사이에 너무 정없는 거 아니야?”

“그럼 바꿀까요……?”

바꾸겠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내밀어 진 상우의 양손 위에 핸드폰이 툭 떨어졌다.

“애정 좀 담아 봐.”

상우는 얼른 토독토독 재현의 저장된 이름을 바꿨다. 백재현 사장님. 힐끔 눈치를 보니 이것도 맘에 안 드는 얼굴이었다. 그래서 상우는 슬그머니 사장님이라는 글자를 지웠다. 백재현.

“내가 네 친구냐?”

상우는 냉큼 지우고 사장님을 타이핑하면서 재현을 곁눈질했다. 우리 사이가 대체 뭐라고. 악마랑 계약된 줄도 모르는 인간 나부랭이 주제에. 삐죽 나오려는 입술을 들키지 않기 위해 상우는 재빨리 입안으로 말아 넣고 꾹 깨물었다.

“하트.”

“네?”

“하트 붙이라고.”

허억. 상우가 그건 좀 아니지 않냐는 항의를 가득 담아 바라보았지만, 재현의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이 인간 진심이네, 진심이야. 사장님 뒤에 하트를 붙이며 상우는 생각했다. 하트 붙이기 전에 소원이냐고 한번 물어보기라도 할걸.

“앞뒤로 붙여.”

“네.”

상우는 말 잘 듣는 강아지처럼 ♡사장님♡이라는 기괴한 문구를 완성했다. 세상에나. 재현과 너무 안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자기는 뭐 얼마나 대단한 이름으로 저장해 놨길래.

“사장님은 저 뭐라고 저장하셨는데요?”

만족감이 한가득 서려 있던 재현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처음 저장한 이후로 너무 어울려서 바꿀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들키면 난리 칠 텐데.

“뭐라고 저장하셨는데요.”

눈치만 늘어난 상우가 재현을 닦달했다. 쓰윽 눈길을 피하는 것을 보니 이름으로 저장하지 않은 게 확실했다.

“박상우라고 저장했어. 나도 하트 붙일게. 됐지?”

되긴 뭐가 됐다고. 상우는 편집이 완료된 ♡사장님♡의 연락처에서 통화 버튼을 꾸욱 눌렀다. 그 모습에 재현은 냉큼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이거 봐, 박상우는 무슨. 상우가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렸다. 자기 차면서 전화가 오면 이 좋은 차 디스플레이에 이름이 뜨는 것도 몰랐나 보다.

[변태 새끼]

블루투스로 연결된 차 안에 시끄러운 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상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느라, 재현은 할 말이 없어서 벨소리만 정적 속에서 끊임없이 울리다가 마침내 뚝 끊겼다. 고요함에 숨이 막혀 와 재현이 사과하려고 입술을 달싹일 때 상우가 먼저 선수를 쳤다.

“……내놔요.”

“응?”

“핸드폰 내놓으세요.”

상우의 싸늘하다 못해 한파가 휘몰아치는 목소리에 재현은 고분고분 핸드폰을 건넸다. 아. 진작 바꿀걸. 그래도 아쉽다. 변태 새끼가 딱 어울리고 좋았는데.

“잠금 풀고 주셔야죠.”

재현은 군말 없이 다시 핸드폰을 회수해 잠금을 풀어 주었다. 물론 처음 만났을 때 제가 좀 변태같이 굴긴 했다. 정액 달라고 울고불고 난리 치고. 아무리 그래도 변태 새끼가 뭔가. 그래 놓고 저에게 정없다고 타박한 게 어이가 없었다. 변태 새끼는 뭐 정이 줄줄 흘러넘치나. 상우가 씩씩거리며 연락처 편집 화면으로 들어갔다. 변태 새끼라는 단어가 보면 볼수록 짜증이 나 얼른 지워 버렸다.

뭐로 바꾸지? 뭐로 바꿔야 제가 전화했을 때 재현이 수치심에 몸을 벌벌 떨며 받을까? 상우는 빈칸으로 남겨진 이름 칸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간간이 액정이 꺼지지 않게 터치도 해 주면서. 재현은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어 조용히 상우를 기다려 주었다.

그때 다시 전화가 울렸다. 유정희? 여자 이름!?

“이건 누구예요?”

“우리 어머니.”

세상에 자기 엄마를 이름으로 등록해 놓는 사람이 어디 있나!

“거짓말하지 마요!”

“진짜야. 받지 마.”

“누군데요!”

호오. 재현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거 질투하는 건가?

“어머니라니까.”

거짓말을 하다 하다 엄마를 팔다니. 진짜 천하의 불효자식이었다. 엄마까지 팔아서 지켜 주려는 여자 목소리나 좀 듣자 싶어 상우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네. 어머니.”

재현이 보란 듯 전화를 받자마자 어머니, 하고 불렀다.

[재현아. 요즘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니?]

차 안에 울리는 중년 여성의 목소리에 상우가 움찔했다. 진짜 엄마였네.

“바빴어요.”

부모님에게도 여지없이 짧은 재현의 대답에 상우는 절레절레 저으며 통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그동안 저장할 이름이나 생각하면서.

[하는 것도 없으면서 허구한 날 바쁘다지. 너 금요일 약속 안 잊어버렸지?]

“네. 기억해요.”

[이번엔 마음에 들 거야. 사진 봤지? 참하고 예쁘더라. 바이올리니스트래. 나이도 딱 너랑 맞아. 궁합도 안 본다는 4살 차이야.]

상우가 휙 재현을 쳐다봤다. 언제나 무표정에 가깝던 재현도 지금만큼은 난감한 기색을 숨기기 힘들었다. 뭐야. 지금 나 두고 소개팅하는 거야? 아니지, 사장님 나이도 있고 부모님 주선이면 이건 소개팅이 아니라 맞선인데? 재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네.”

그러나 그 입에서 나온 말은 행동과 정반대였다. ‘네’라고? 제가 옆에 앉아 있는데 선을 보러 가겠다고 당당히 대답하는 재현의 모습에 상우는 충격을 받았다.

[재현아, 그리고. 지난번처럼 마음에 안 든다고 티 팍팍 내지 마라. 엄마가 나중에 듣고 얼마나 미안했는지…….]

심지어 지난번도 있었다니. 상우가 이를 꽉 깨물었다. 앞에서는 그렇게 좋아하네 마네 해 놓고 뒤에서 선을 보고 다닐 줄은 몰랐다. 역시 재현의 좋아해는 한없이 가벼운 말이었다. 재현의 집안이 집안인 만큼 선 얘기가 들어올 만은 하다고 생각하지만. 저 모르게 여러 번 선보러 다녔다는 것도, 순순히 선보러 가겠다고 답하는 것도 모두 섭섭했다. 하긴. 우리 사이가 뭐라고.

“어머니. 제가 지금 아는 동생이랑 있어서요. 나중에 다시 전화드릴게요.”

아, 그래. 우리 사이는 그냥 아는 형 동생 정도구나. 재현은 급격히 어두워지는 상우의 얼굴을 보며 얼른 끊고 수습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멍하게 재현의 핸드폰을 내려다보던 상우가 무언가 토독토독 치기 시작했다.

[엄마 아직 할 말 남았어, 얘! 그동안 어찌나 연락이 안 됐는지 해야 될 얘기가 산더미다.]

“그럼 제가 10분 후에 다시 전화드릴게요.”

재현이 다급하게 말했지만, 상우는 이미 차에서 내리고 있었다. 보조석에는 재현의 핸드폰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전화 꼭 다시 해!]

재현은 대답도 하지 않고 통화를 끊었지만, 이미 상우는 집으로 쏙 들어간 뒤였다. 아. 이거 어떻게 수습하지. 분명히 선 보는 얘기가 나올 것 같아서 받지 말라고 한 건데. 상우가 질투하는 모습이 귀여워 더 적극적으로 말리지 못했다.

이상하게 재현이 선 자리를 아예 거절하면 거절할수록 몸값이 높아져서 부모님이 행복한 비명을 질렀다. 얼마나 잘났길래 소개도 안 받느냐며 제발 한 번만 만나 보라는 얘기가 쏟아졌다. 그래서 재현이 선택한 방법은 이상한 소문이 나도록 만드는 거였는데.

요즘 재현은 들어오는 선 자리마다 거절하지 않고 나가서 또라이 짓을 하고 있었다. 상대가 흰색 블라우스를 입고 오면 말도 안 되게 허름한 낙지집으로 데려간다든가. 중간에 말 안 하고 계산만 하고 집에 가 버린다든가. 하는 말마다 꼬투리를 잡아서 시비조로 대꾸한다든가. 그것마저 신경 쓰일까 봐 상우에게는 절대 티도 내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 모든 상황을 상우에게 설명할 시간조차 없었다. 핸드폰을 바라보며 재현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건 초밥을 갖다 바치며 빈다고 풀릴 것 같지 않았다. 재현의 핸드폰 액정 위에 상우가 저장하고 간 이름이 크게 떠 있었다.

아는 동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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