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 나 다시는 안 볼 거야? (7/11)

6. 나 다시는 안 볼 거야?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온 상우에게 엄마가 식탁 위에 올려놓았던 김치볶음밥을 들이밀며 이 괴상한 음식은 뭐냐고 물었다.

“몰라…… 그냥 버려.”

재현이 만들어 준 거지 같은 김치볶음밥을 보니 또 울컥했다. 상우의 상상 속에서 각색된 재현은 악마같이 비웃음을 흘리며 김치볶음밥에 설탕을 쏟아붓고 있었다. 그래 놓고 잘 먹는다고 뿌듯해하던 얼굴도 이제 와 생각하니 남을 괴롭히며 만족하는 사악한 웃음으로 느껴졌다.

“이거 사람이 먹을 게 못되더라. 아들, 먹을 거로 장난치지 마라니까.”

“열심히 만들긴 했어.”

그거 하나 만드는 데 세 시간은 족히 걸리는 거 같더라. 시간과 정성을 쏟아 엿먹이다니. 변태 새끼는 제가 아니라 재현이었다. 엄마의 손에 들린 김치볶음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상우가 힘없이 프라이팬을 가져갔다. 버린다며? 하는 엄마의 물음에 대답도 하지 않고 부엌에서 숟가락까지 챙겨서 방으로 들어갔다.

김치볶음밥과 대치하고 앉아 있는 상우의 핸드폰이 끊임없이 울렸다. 누군지 안 봐도 뻔했다. 얘기를 들어 봐야 언제나 그렇듯 재현에게 말려들 게 분명해 상우는 잠깐 전화가 끊긴 사이 재현을 차단했다. 다시 차단을 풀더라도 당장 핸드폰 배터리는 소중하니까. 그 와중에 보이는 ♡사장님♡이라는 이름에 한 번 더 울컥했지만 고칠 기운도 없었다.

상우는 제가 가지고 있는 모든 이성을 끌어내 침착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중에라도 재현과 말싸움을 하려면 자신의 입장부터 정리하는 게 맞았다. 재현의 나이도 나이이고, 위치도 자신과 다르니 선 보라는 얘기가 나오는 건 인정해야만 했다. 화가 난 건 그동안 상우 몰래 선을 보러 다녔다는 사실과 앞으로도 선을 볼 계획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재미는 나랑 보고 결혼은 여자랑 할 거라는 건가? 그렇지. 결혼은 여자랑 해야지. 자신이 남자라 결혼해 줄 수 없으니 감당해야 하는 부분인가 싶었다. 그러다 문득 애써 재현을 변호하고 있는 자신을 질책하듯이 상우는 김치볶음밥을 한 숟가락 먹었다. 토 나오게 단 김치볶음밥을 입에 쑤셔넣고 나니 재현을 향한 이해심이 싹 사라졌다.

누가 나랑 당장 결혼하자고 했나? 상우도 먼 미래에 할 결혼은 재현이랑 하지 않을 것이다. 결혼하고 싶은 거면 자신과의 관계를 싹 정리하고 선 보러 다니는 게 상우에게도 상대방 여자분에게도 예의 아닌가? 정말 기본도 안 된 사람이었다. 재현이 이런 관계를 그만하자고 했으면 상우도 냉큼…… 냉큼 가서 빌었겠지. 제발 그것만은 안 된다고. 먹고 살 다른 길을 찾기 전까지만 보류해 달라고. 상우는 한숨을 폭 내쉬면서 김치볶음밥을 한 숟가락 또 입으로 밀어 넣었다.

그럼 왜 좋아한다고 말한 건데! 왜! 재현이 밥 먹듯 좋아한다고 말만 안 했어도 자신이 이렇게 실망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자기가 한 말마따나 좋아한다는 말이 그렇게 쉬운 건가? 나는 정말 아끼고 아껴서 진심으로 말해 주려고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계약을 어떻게 하는 건지도 알아봤는데! 숟가락을 쥐고 있던 상우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제는 김치볶음밥을 먹지 않아도 분노가 치솟았다. 당장에라도 차단을 풀고 재현에게 전화를 걸어 왜 좋아한다고 했냐 따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야. 잠시만 침착해. 상우는 후후 심호흡했다. 재현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모든 시나리오를 준비해도 이길까 말까 한 상대였다. 왜 좋아한다고 말했냐 물으면 재현은 뭐라고 답할까? 뻔하지 뭐. 그래서 너는 나 좋아해? 하고 물어볼 것이다. 좋아한다고 하든 아니라고 하든 상우가 재현을 좋아하는 줄 몰라서 선이라도 본 거라고 하면 끝이었다. 결국, 진작에 표현하지 않은 자신이 잘못인가. 상우는 김치볶음밥을 한 숟가락 퍼서 입안에 꾸역꾸역 쑤셔 넣었다.

상우는 그 많던 김치볶음밥을 다 먹고도 마음이 갈팡질팡했다. 분명히 자신이 화내야 하는 상황은 맞는데, 이상하게 마음껏 분노하기 찝찝했다. 이게 다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은 관계 때문이었다. 남자답게 사귀자! 나도 네가 좋다! 하고 말했어야 하는데, 어물쩍어물쩍 넘겨 버린 제 탓인 것 같았다. 아, 이제 먹을 김치볶음밥도 없는데. 어찌 됐든 재현은 새 삶을 찾아 나가기 시작한 것 같았다. 그러니 상우도 재현에 의존하지 않는 삶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가만히 앉아서 손가락만 쪽쪽 빨다가 재현이 안녕, 나 내일 결혼해, 하면 굶어 죽는 엔딩밖에 남는 게 없었다.

* * *

심기가 많이 불편하다는 티를 팍팍 내고 다니는 재현 때문에 가뜩이나 고통스러운 월요일 아침부터 직원들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오늘 데이오프인 직원들이 승자였다.

답답해서 미치고 팔짝 뛰겠다는 게 이런 느낌인가. 전화해서 변명이라도 하고 싶은데, 상우가 통 연락을 받지 않으니 상황 설명을 할 여지조차 없었다. 아무리 제가 잘못한 게 맞다지만 이렇게 단칼에 잘라낼 수가 있는 건가? 사람이 그렇게 매정해도 되는 건가? 어떻게 그 수많은 부재 중 전화를 보고도 연락 한 번 없을 수가 있지. 재현은 차마 상우가 저를 차단했다고 상상도 하지 못하고 차갑다, 차가워, 하며 혀를 찼다.

그래도 같이 보낸 시간이 있는데. 우리 사이가 이것밖에 안 됐나 싶어 슬펐다. 한참 동안 속으로 상우를 욕하던 재현은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 잘못한 건 상우가 아니라 나였지. 하마터면 상우만 천하의 매정한 변태 새끼로 만들 뻔했다.

받지도 않는 전화를 걸 때마다 ‘아는 동생’이라는 글자가 마음에 걸려 그것도 바꿔 주었다. 매정한 건 매정한 거고, 귀여운 건 귀여운 거니까. 귀여운 우리 변태 새끼. 무려 9글자나 됐다. 하는 김에 10글자를 채우려고 뒤에 하트도 하나 붙여 줬다. 귀여운 우리 변태 새끼♡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생각하자 그나마 조금 답답한 마음이 진정됐다. 우리 귀여운 변태 새끼♡가 전화 받기 싫으면 안 받을 수도 있지. 생각난 김에 재현은 상우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는 회사 전화로. 모르는 번호면 받겠지.

[여보세요?]

“상우야.”

[…….]

이어지는 침묵에 상관없이 재현이 말을 꺼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사장님 선 보는 거 아니에요?]

“그건 맞지.”

내가 생각한 거 맞고만 뭘!

[지금 사장님 얘기 안 들을래요.]

재현이 하는 변명을 들었다가는 이리저리 휘둘릴 테니.

“선은 맞는데, 네가 생각하는 상황은 아니라니까?”

[제가 생각하는 상황 뭐요.]

상우의 역습에 재현은 입을 다물었다. 바람은 아니라고 해야 하는데 사귄다고 못 땅땅 박은 것도 아니면서 괜히 불만 지피는 거 아닌가. 생각이 많아졌다.

[……됐어요. 금요일에 잘 다녀오시고 그다음에 연락하세요. 그때까지 더 연락하면 진짜 다시는 사장님 안 볼 거예요.]

무미건조한 통화가 끊어졌다. 더 연락하면 날 안 보겠다고? 분노에 가득 찬 재현은 사장실에서 혼자 다리까지 떨어 가며 안절부절못하다가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귀여운 변태 새끼가 아직 세상은 돈이면 다 된다는 걸 깨닫지 못했구나. 조금 꺼림칙하고 조금 찌질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상우가 어디서 뭘 하고 다니는지는 알아야 될 것 같았다.

“형.”

[누구세요?]

“장난치지 말고.”

[제 동생 백재현이는 절대 저에게 먼저 전화하지 않는데요.]

부탁할 상대를 잘못 고른 것 같았다. 그래도 이런 부탁을 들어 줄 수 있는 사람은 집안에 재우뿐이었다.

[혹시 납치하신 거라면 감사합니다. 잘 키워 주세요. 부족한 놈이지만 힘쓰는 건 잘해요.]

정말 잘못 고른 것 같았다.

“적당히 좀 해라.”

[왜 전화했냐? 곧 죽어? 아파? 죽을 병이래?]

“나 부탁 좀 하려고.”

[싫은데?]

들어 보지도 않고 거절부터 하는 재우의 말에 재현이 한숨을 폭폭 내쉬었다.

“사람 하나만 붙여 줘.”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이야? 그럼 더 싫은데?]

“아, 시발. 나 말고.”

[시발? 싫은데?]

재우가 눈앞에 있었다면 멱살이라도 잡고 짤짤 흔들었을 텐데.

“형. 나 뒤통수 맞았어.”

재현이 대놓고 재우가 반응할 만한 말을 꺼내자 아니나다를까, 재우가 벌컥 반응을 보였다.

[시발. 백재현은 나만 때려야 하는데, 어떤 새끼야!]

“새끼라니…… 그건 좀.”

평소에 변태 새끼, 변태 새끼, 노래를 불렀지만, 막상 상우가 다른 사람에게 욕을 들으니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흠. 자기만 재현을 때릴 수 있다고 말하는 재우가 이런 애정 어린 마음이라면 소름이 돋는데.

“아무튼, 걔 뭐 하는지 좀 따라다닐 사람이 필요한데.”

[그냥 따라만 다녀?]

“응. 뭐 하는지만 알면 돼.”

재우가 침묵을 흘려 냈다. 어디서 처맞고 왔는데 보복해 달라는 것도 아니고 그냥 따라다니다니. 누구한테 뒤통수를 맞은 건지 대충 짐작이 갔다.

[전에 말한 왕꼬추만 좋아하는 친구야?]

“아, 진짜.”

[바람 피웠어? 물증 잡아야 해?]

“그런 거 아니야. 도와줄 거야, 말 거야?”

재현이 짜증을 냈다.

[너 그거 스토킹이다.]

“……알아.”

그래도 자신과 연락하지 않는 동안 상우가 뭐 하고 살지 궁금하니까. 전화를 끊은 재현은 지갑을 뒤적거렸다. 신원보증이라는 핑계로 받아 낸 상우의 학생증을 이렇게 쓰게 될 줄은 몰랐는데. 다시 보니 맹하게 찍힌 증명사진도 귀여웠다. 하는 짓이라고는 얄밉기만 한 놈이 뭐 이렇게 귀엽대. 재현은 학생증 사진을 찍어 재우에게 보냈다.

상대가 열 살이나 어린 남자애란 걸 재우가 알면 두고두고 놀림 받을 줄도 모르고.

노력 없이 돈으로 시작한 재현의 스토킹은 그다지 소득이 없었다. 방학에는 어디 나가지도 말라는 게 법으로 제정된 건가 싶을 정도로 붙여 놓은 사람에게서 오는 보고는 날마다 똑같았다.

집에서 게임함. 편의점에서 맥주 구매. 집에서 게임함. 편의점 가서 맥주 사 옴. 오늘도 게임함. 게임, 맥주, 게임, 맥주…….

잘하지도 못하는 게임을 뭐 그렇게 열심히 하는지. 심지어 재현이 아침 일찍 출근하면서 모닝콜을 하지 않으니 상우의 생활 패턴도 완전히 망가졌다. 오후 2시에 일어나서 새벽 4시까지 게임만 하는 놈이었다니! 그렇게 하고도 게임을 못하다니! 게임의 전적 정보를 보여 주는 사이트에서 상우의 아이디를 검색한 재현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승리한 횟수보다 패배한 횟수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이 정도면 너는 게임에 재능이 없으니 그만두라고 말해 주는 게 상우의 인생에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상우의 어마어마한 생활에 재현은 여러 가지 의미로 충격을 받았다. 오죽하면 상우가 저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한 게 선보러 가서 삐친 게 아니라 그냥 마음껏 게임하려고 수작 부린 게 아닐까, 하는 생각조차 들었다. 편의점에 가는 것 외에 밖은 전혀 나가질 않고 게임만 해 대니 체력이 그 모양 그 꼴이지. 매번 섹스만 하고 나면 힘들다고 빌빌대는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재현은 다시 이 답답한 관계가 복구되면 상우의 생활 패턴을 더 철저하게 옭아매리라 다짐했다. 운동도 꼬박꼬박 시키고.

* * *

그렇게 금요일이 되었다. 오늘도 상우는 오후 늦게 일어나 게임을 했고, 재현은 감흥 없이 멀리서 찍힌 게임하는 상우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화질이 안 좋아도 상우의 머리가 까치집인 건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오늘 선 자리는 어떻게 미친 짓을 해야 소문이 잘 나려나. 부모님이 예약한 레스토랑에 앉아 고민하는 재현의 핸드폰이 지잉―, 울렸다.

[타깃 외출]

같이 날아온 사진 속 상우는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코트까지 챙겨입고 때 빼고 광을 낸 채 가고 있었다. 어휴. 귀여워라. 이런 거지 같은 약속만 아니었으면 당장 데리러 가는 건데. 마침 도착한 상대를 향해 재현은 까닥 고개만 끄덕여 인사했다. 바이올리니스트라고 여기저기 광고하고 다니나. 흰색 코트를 입은 상대는 등에 악기를 하나 메고 있었다.

“연습 끝나고 바로 와서요.”

재현의 시선이 바이올린에 가닿은 걸 느꼈는지 수줍게 웃으며 답하는 게 아주 가식적이었다. 뭐? 참하고 예뻐? 진짜 예쁜 애를 어머니가 아직 못 보셔서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나중에 상우를 보시면 놀라서 까무러치시겠네.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재현이 비실비실 웃었다.

흰색 코트를 입고 온 게 오늘도 낙지집이나 가면 딱이었는데. 그날 이후 레스토랑은 아예 재현의 부모님이 예약해 주고 있었다. 분위기도 맛도 나쁘지 않은 게 다음에 상우를 데려와야겠다 생각하며 음식을 먹는 사이 두 번째 메시지가 도착했다.

[타깃 이태원역]

이태원역은 왜 간 거지. 재현은 잔뜩 굳은 얼굴로 역 앞에 서 있는 상우의 사진을 감상했다. 사진으로도 전해질 만큼 긴장한 게 단순히 친구들과 만나러 나간 거 같지는 않았다. 재현은 슬슬 불안해졌다. 이 새끼, 뭐 하고 다니는 거야.

재현의 불안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잠시 후 도착한 세 번째 메시지에 재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앞에서 조신하게 밥을 먹고 있던 상대도 놀랐는지 눈을 똥그랗게 떴다.

[타깃 게이바 헤븐 입장]

사진 속 상우는 전투가 임박한 소년 장수처럼 결연한 표정이었다.

“시발!”

재현이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었다. 게이바? 게이바―!? 이 미친 변태 새끼가 너 죽고 나 죽는 꼴을 보고 싶어서!

“재현 씨, 무슨 일 있으세요?”

마음이 급해 죽겠는데 평온하게 저를 잡는 목소리에 재현은 울컥 화가 났다. 무슨 일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인가!

“남자 친구가 바람나서 먼저 갑니다.”

“네, 네?”

“시발. 남자 친구가 바람났다니까. 나 게이라고.”

이보다 더 완벽한 깽판이 어디 있을까. 진작에 게이라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닐걸. 그랬으면 변태 새끼도 오늘 게이바 말고 우리 집에 얌전히 있었을 텐데. 아무튼, 재현이 내지른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다. 아, 상우가 아직 애인은 아니니까 반은 거짓말인가? 그럼 이제 가서 완벽한 진실로 만들면 된다.

재현은 더 왈가왈부할 여유가 없어 벙쪄있는 상대를 내버려 둔 채 밖으로 뛰쳐나갔다.

HEAVEN. 핑크색 네온 간판을 죽일 듯이 노려보던 재현은 마음을 굳힌 듯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밟았다. 헤븐은 무슨. 스스로 악마라고 소개했으면서 저랑 더럽게 안 어울리는 곳으로 오다니.

쿵쾅쿵쾅 울려 대는 음악 속에서 상우를 찾으려니 정신이 없었다. 이렇게 어둡고 음습한, 사내 새끼들밖에 없는 곳에서 상우라면 분명히 눈에 띄었을 텐데. 재현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이 변태 새끼 어디 있는 거지. 재현은 열심히 상우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받을 리가 없었다.

“씨발!”

안 그래도 폭발하기 직전인데 누군가 스치듯 지나가며 재현의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재현은 놓치지 않고 그 스쳐 지나가는 남자의 머리카락을 잡아챘다. 상우 엉덩이도 누가 이렇게 만진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참을 생각도 없긴 했지만.

“이 시발 놈아, 누가 내 엉덩이 만지래.”

“억! 아, 안 만졌는데요!”

“게이 새끼가 어디서 구라야.”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버릴 때가 아닌데. 재현은 정신을 차리고 호주머니를 뒤적거려 상우의 학생증을 꺼냈다.

“얘 본 적 있어?”

게이바 안에서 게이한테 게이 새끼라고 욕먹은 게이는 겁에 잔뜩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그래? 그럼 찾아내.”

이게 무슨 행패인가. 솔직히 딱 마음에 드는 엉덩이라 한 번쯤 만져 보고 싶어서 일부러 건드린 건 맞았다. 잘못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갑자기 들이밀어진 흐릿한 학생증 사진을 보고 사람을 찾으라니.

재현도 제 손에 붙잡힌 초면인 남자가 잔뜩 당황한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 사람 하나 닦달한다고 상우를 찾을 수 있을까. 괜한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 재현은 그때까지도 움켜쥐고 있던 남자의 머리채를 내동댕이쳤다.

재현은 스테이지 위에서 쿵쿵 울리는 시끄러운 음악에 맞춰 미친놈들 마냥 몸을 털어 대는 사람들 사이로 파고 들었다. 습한 열기와 끈적끈적 달라붙는 손길에 몸서리를 치며 돌아다녀도 상우는커녕 비슷하게 생긴 놈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 우리 변태 새끼가 어디서 쉽게 보기 힘든 얼굴이긴 하지.

여기는 엉덩이를 만지는 게 반갑다는 인사인가? 상우가 쉽게 보이지 않아 초조해진 재현은 아까처럼 머리채를 휘어잡고 짜증을 낼 정신조차 없었다. 엉덩이며 등을 쓸어내리는 징그러운 손들을 요리조리 피하며 게이바를 몇 바퀴나 돌았지만, 여전히 상우는 머리카락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하…….”

슬슬 안 좋은 생각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재현이 도착하기 전에 벌써 누가 채간 거 아닌가? 우리 변태 새끼가 어지간히 예뻐야지. 이 정도 수질에서 상우라면 입장하자마자 모든 게이들의 타겟이 됐을 법 했다.

상우가 연락도 하지 말아라, 안 만나겠다 개소리를 할 때 무작정 집에 쳐들어가서라도 오해를 풀걸. 아니, 그보다 애초에 어머니가 선을 보라고 채근을 하든 말든 무시할걸. 이상한 소문을 내서 선 얘기를 뚝 끊어 버리겠다는 한심한 계획 따위 세우지도 말걸. 온갖 종류의 후회가 재현의 마음속에 휘몰아쳤다.

안달이 난 재현의 시선 끝에 아직 뒤지지 않은 곳이 들어왔다. 안 그래도 어두운 바의 깊숙한 구석, 더 짙은 어둠이 깔린 통로 입구가 있었다. 딱 봐도 뭐 하라고 있는 공간인지 짐작이 갔다. DARK ROOM. 입구 위에 걸린 작은 네온 사인도 맛이 가 음침하게 깜빡깜빡거렸다. 설마. 불안감이 업습해 온 재현은 그곳을 향해 척척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앞에 거치적거리는 게 있을 때마다 옆으로 치워 가면서.

차락. 재현이 첫 번째 방의 커튼을 열어젖혔다. 희미하게 깜빡이는 전등 불빛에 얽혀 있는 두 명의 실루엣이 보였지만 정확히 얼굴까지 분간되지는 않았다.

“뭐야!”

재현은 저에게 하는 말을 무시하고 핸드폰 플래시를 켜 얼굴을 확인했다. 여긴 아니고. 재현은 재빨리 다음 방의 커튼을 쳤다. 이번엔 누군가 꿇어앉아 남의 좆을 쪽쪽 빨고 있었다. 재현이 플래시를 비추자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묘하게 웃음 짓는 얼굴은 상우가 아니었다.

세 번째 방에서 서서 떡 치는 놈들 얼굴도 확인하고, 네 번째 방에서 키스하는 놈들은 떨어뜨려 가면서까지 얼굴을 확인했다. 마지막 하나의 방이 남았다. 제발 없어라. 상우를 찾아야 하는 재현은 목적과 다른 바람을 마음속으로 빌었다. 상우가 다른 새끼랑 씹질하는 꼴을 보면 무슨 짓을 하게 될지 재현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마지막 방의 커튼을 붙든 재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저기요, 손님!”

그러나 재현이 커튼을 열어 재치기 전 누군가 재현의 팔을 붙잡았다. 그제야 주변을 돌아보니 다들 모여서 웅성웅성 재현을 구경하고 있었다. 역광이라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아 그 안에 상우가 있는지 찾기도 어려웠다.

“뭐 하는 짓입니까?”

재현의 팔을 붙잡은 남자의 목소리가 사무적으로 울렸다. 삐끼들이나 입을 법한 검정 베스트 정장에 나비 넥타이까지. 얼핏 봐도 직원이구나 싶었다. 재현은 신경질적으로 제 팔을 붙잡은 손을 뿌리쳤다.

“놔, 시발. 확인만 하면 돼.”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나가세요.”

“네가 뭔데.”

이런 허접한 바에서 일하는 주제에 어디다대고 나가라 마라 하는 건가. 안그래도 상우만 찾으면 뒤도 안돌아보고 나갈 생각이었다.

“여기 매니저입니다.”

“아…….”

매니저든 직원이든 누가 그걸 몰라서 물어봤을까. 재현이 와락 말귀를 못알아 처먹는 상대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네 사장 나오라 해. 내가 누군지 아냐? 나 백제…….”

“사장님―!”

재현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웅성거리던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재현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상우가 튀어나왔다.

재현에게 연락하지 말라고 한 날 이후, 상우는 재현을 잊기 위해 게임에 몰두했다. 게임 속에는 재현보다 더 쓰레기인 인간들이 많았으니까. 재현은 적어도 남의 부모 욕은 하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을 추슬러도 자꾸만 재현이 신경이 쓰여 게임 성적은 바닥을 기었다.

[님. 아가리가 백 개여도 할 말 없는 거 아님?]

제가 보기에도 쓰레기 같은 플레이를 하자마자 게임 채팅방에 욕설이 올라왔다. 하. 그래. 나 무슨 말을 하지? 일단 재현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어 도망치듯 금요일에 연락하라고는 했는데. 막상 얼굴을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쪽팔리게 나 가지고 논거냐고 엉엉 울면서 매달릴 수도 없고.

[원딜 선픽이요. 수고.]

‘선’이라는 글자만 봐도 상우는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었다. 진짜 금요일에 선 보러 가나? 통화한 내용 들으면 재현은 선을 보러 가고도 남을 것 같았다.

[아. 너 도대체 뭐냐. 겜 접어라.]

그래. 나는 사장님한테 도대체 뭐였을까. 상우는 저를 향해 날아오는 온갖 채팅들을 보며 자문자답을 했다.

재현을 보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재현이 정말 선을 보고 결혼을 하는 건지, 재현에게 제가 무슨 존재인지. 아무런 답을 찾지 못한 채로 상우의 일주일이 흘렀다.

금요일의 게임 성적은 더 처참했다. 오늘 재현이 저를 두고 선을 보러 간다고 생각하니 한없이 우울해졌다. 마우스와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데도 눈앞에 보이는 글자는 ‘패배’밖에 없었다. 상우는 제 인생이 패배자 같다는 생각마저 들어 암담했다.

재현에게 의존하지 않는 삶을 찾겠다고 했지만, 그게 어디 쉬운가. 정액이라고는 재현의 것밖에 못 먹는데. 그러다 재현이 미래를 준비하는 동안 자신은 한심하게 게임만 했다는 생각이 들자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싶었다. 어쩌면 처음과 달리 이제는 다른 사람의 정기를 섭취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상우는 벌떡 일어나 근 일주일 만에 처음 머리를 감았다.

이태원역에 내려서도 상우는 한참을 고민했다. 이거 혹시라도 재현이 알면 난리 날 텐데. 아니지. 자기는 맞선도 보면서 나한테 게이바 간다고 뭐라고 하면 양심이 없는 거지. 선을 보러 간 재현이 분명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게이바로 가는 발걸음이 이상하게 마음에 걸렸다. 상우가 생각하는 그런 상황이 아니라고 했다. 재현이 말한 ‘그런 상황’이 정확히 뭔지 들지 못해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 건가.

하지만 선을 보러 다니면서 결혼 외에 무슨 목적이 있다고? 아무리 상상력을 총동원해 봐도 영화 같은 내용만 떠올랐다. 알고 보면 재현이 산업 스파이여서 백제그룹을 위해 다른 회사의 정보를 캐내려 인맥을 만들고 있다던가 하는.

상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사장님이 아쉬울 게 뭐가 있어서 그런 귀찮은 짓을 하겠어. 상우가 아는 재현은 절대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캐릭터처럼 똑똑하고 멋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상우가 가지고 있던 재벌에 대한 환상을 와장창 깨지게 한 장본인이었지.

오늘 상우는 딱 확인만 하기로 결심했다. 처음 쫄쫄 굶고 게이바에 갔을 때 재현의 정기만큼 군침이 도는 건 아니어도 음식 냄새가 난다고 느꼈다.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면 재현에게서 독립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다. 언젠가는 재현만큼 맛있는 먹이를 찾게 되겠지. 나중에 재현이 알고 추궁해도 떳떳하게 확인만 했다고 말할 수 있게 행동하자! 상우는 굳게 다짐하고 헤븐으로 들어갔다.

처음 왔을 때는 굶주림에 제정신이 아니라 제대로 보지 못했던 게이바의 전경이 눈에 들어왔다. 배가 고프지 않아서인지 그날에 느꼈던 음식 냄새는 이것저것 섞여 오히려 역한 느낌이었다. 그 어디에도 재현과 같이 달콤한 냄새는 맡아지지 않았다. 상우는 한숨을 쉬며 바 테이블에 앉았다. 미각을 잃었어도 단 게 땡기는 밤이었다.

“피나콜라다 주세요.”

가야호텔 바에서 단 거 좋아하는 상우의 입맛에 딱이라며 꼭 이름 외워 두라고 재현이 추천했던 칵테일이었다. 여기까지 와서도 백재현, 백재현. 무슨 생각을 해도 재현이 상우의 머릿속을 잠식했다. 달콤하고 상큼했던 맛을 상상하며 상우는 아무 맛도 나지 않는 파스텔톤의 노란색 액체를 빨아들였다.

“혼자 왔어요?”

옆자리에 앉은 근육질의 남자가 상우에게 말을 걸었다. 이 추운 날 민소매라니. 근육은 사장님 정도는 되어야 여기저기 자랑하고 드러낼 만한 거 아닌가. 또 재현이 떠올라 상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지금쯤 어떤 참하고 예쁜 여자랑 같이 하하 호호 웃으며 밥 먹고 있을 사람이 뭐가 좋다고 자꾸 생각나는 건지. 상우가 고개만 젓고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옆에 있던 남자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으. 기름에 잔뜩 절여졌다가 식어 빠진 프렌치프라이 냄새에 상우가 인상을 찡그렸다. 굶어 죽기 전에는 절대 맛보고 싶지 않은 냄새였다. 상우는 말없이 옆으로 한 칸 옮겨 앉았다.

음. 역시 재현의 대체재는 쉽게 찾아질 것 같지 않았다. 상우도 알고 있었다. 그건 재현의 냄새가 특별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조금 다른 이유도 있다는 것을. 그래도 맛없게 느껴지든 뭐하든 다른 사람도 상우를 향해 성적 흥분을 하면 음식 냄새가 나는 건 확인했다. 재현에게 버림받고 정말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이라 선택의 여지가 없으면 재현의 것이 아닌 좆도 물 수 있겠지. 상우는 인수나 불러서 술이나 마셔야겠다 생각하며 남은 칵테일을 쪼록 마셨다.

지금 뭐 하냐는 상우의 메시지에 인수는 미친놈이라고 욕을 하면서도 어디로 가면 되냐고 답장을 보냈다. 오늘은 제가 다 쏠 거니까 몸만 나오라는 말에 혹한 거 같긴 하지만.

바에서 나서기 전 화장실에 들렀다가 손을 씻고 탈탈 물기를 털면서 나온 상우는 미묘하게 웅성거리는 게이바의 공기에 고개를 휘휘 둘러보았다. 상우가 처음 왔을 때 낯선 남자에게 끌려들어간 곳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왜. 뭔데. 왜 그러는데? 호기심이 고양이를 죽인다고. 괜히 궁금해져 기웃기웃하던 상우의 눈이 커다래졌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어! 제일 처음 든 생각은 걸리면 끝장이라는 것이었다. 이걸 핑계로 재현이 무슨 악마 같은 짓을 벌일지 몰랐다. 살금살금 도망가던 상우의 귀에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네가 뭔데.”

“여기 매니저입니다.”

“아…….”

아. 저 목소리. 심기가 매우 불편하실 때 나오는 목소리인데. 힐끔 숨어서 보니 아니나 다를까, 재현의 입술이 한쪽만 삐뚜름하게 올라가 있었다.

“너네 사장 나오라 해. 내가 누군지 아냐? 나 백제…….”

상우는 더는 재현을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사장님―!”

미쳤나 봐! 백제그룹 아들내미가 게이바 들락날락하는 거 소문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상우는 재현이 자기 자식이었으면 눈물 쏙 빠지게 등짝을 팡팡 때려 주고 싶었다.

상우를 발견한 재현이 꽉 틀어쥐고 있던 멱살을 풀었다. 으악. 눈빛 봐. 처음 만났을 때 상우가 벌벌 떨었던 재현의 얼굴도 저 수준으로 분노 가득하진 않았다. 이제 멱살은 내가 잡히는 건가? 재현이 확성기를 대고 백제그룹 백재현은 게이라고 외치든 말든 그냥 도망갈걸. 상우는 곧 다가올 폭력에 눈을 꽉 감았다.

와락. 하지만 다가온 것은 주먹이나 멱살이 아니라 익숙한 온기였다. 아플 정도로 끌어안겨 있으니 일종의 폭력이긴 한가? 그나저나 선 자리에서 우아하게 식사하고 있을 시간에 왜 여기 있는 거지? 날 따라온 거면 내가 여기 있는 줄 어떻게 알고?

“사장님. 왜…… 여기에…….”

“시발. 어디서 서방질이야. 구멍에 좆 못 박힐 거 생각하니까 그렇게 억울하고 아쉬워?”

애틋한 몸짓과 달리 재현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은 들어 주기 힘들었다. 서방질은 무슨 개소리인가. 그리고 왜 고작 끌어안은 거로 달콤한 냄새가 솔솔 나기 시작하는 건가. 역한 냄새들 사이에서 재현의 단내가 톡톡 튀어다녔다. 이 상황에서 흥분하는 건 진짜 아니지!

“무슨 말을 그따위로 해요!”

상우가 발칵 소리를 질렀다. 딴 여자 찾아 떠난 건 재현이면서.

“여기가 어디라고 와. 내가 미쳐 날뛰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

여전히 말투는 스산했지만, 상우를 끌어안은 팔에 더 꾸욱 힘이 들어가고 머리카락 위에 재현의 입술이 꾹꾹 눌러졌다. 뭐하는 거야, 진짜.

“제가 어딜 가든 말든 사장님이 무슨 상관이에요. 저도 딴사람 찾을 거예요!”

“시발. 네가 딴 새끼를 왜 찾아!”

울컥 올라온 재현의 큰소리에 상우가 힘을 주어 재현의 어깨를 밀었다.

“제가 게이바 온 거랑 사장님이 선 보고 다니는 거랑 뭐가 달라요!”

할 말을 잃은 재현이 잔뜩 굳어졌다. 또 잊고 있었다. 이 모든 상황의 원인이 된 건 자신이라는 것을. 보자마자 상황 설명부터 하겠다고 그렇게 생각해 놓고는 상우가 게이바로 들어갔다는 얘기에 헤까닥 돌아 버렸다. 화가 잔뜩 난 걸음으로 나가 버리는 상우의 뒤를 재현이 얼른 쫓아갔다.

그 장면을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저에 대해 수군거리는 것도 알아채지 못했다. 들었어? 남친 두고 선봤대. 이래서 스트레이트는 만나면 안 된다니까. 무슨 염치로 와서 깽판을 친 거래. 에고. 저 애기 불쌍해서 어떡하냐. 딱 봐도 한참 어려 보이던데.

입구 계단을 거의 다 올라가고 나서야 상우를 따라잡은 재현이 상우의 팔을 낚아챘다.

“상우야, 얘기 좀 해. 다 설명할게.”

상우가 가만히 재현을 노려봤다. 항상 저보다 큰 재현을 올려다봐서 노려본다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는데 지금은 두 계단이나 아래 있는 재현을 마음껏 노려볼 수 있었다.

“설명하고 말고 할 게 있어요? 선 본 거 거짓말이에요?”

“일부러 보러 간 거야.”

“일부러―!?”

상우가 재현의 팔을 뿌리쳤다.

“일단 차에 타. 타서 얘기해 줄게.”

“지하철 타고 갈 거예요.”

“하. 고집부리지 말고.”

지금 한숨 쉴 사람이 누군데!

“사장님이랑 제가 무슨 사이라고 데려다줘요?”

그 말에 재현의 눈썹이 꿈틀 올라갔다. 계단 덕분에 저보다 키가 작아져서 그런지 재현이 화를 내도 무섭지 않았다.

“무슨 사이? 너 말 다 했어? 우리가 아무런 사이도 아니야!?”

“사장님 말씀대로 아는 형 동생 정도는 되겠네요.”

상우는 재현에게 잔뜩 빈정거려 보았다. 갑자기 어디서 생겨난 용기인지는 몰라도 그 아는 동생이라는 말이 얼마나 제 마음을 후벼팠는지 꼭 알려 주고 싶었다.

“너…… 진짜 나 안 좋아해?”

상우가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저절로 콧김이 씨익씨익 새어 나왔다. 이 상황에서도 재현은 상우에게서 좋아한다는 말을 끄집어 내고 싶은가 보다. 속상함이 지나쳐 눈물이 고일 것 같았다.

“그놈의 좋아한다는 말! 그 말에 왜 이렇게 집착해요! 좋아해요! 아주 좋아서 사장님이 죽으라면 한강 물에 뛰어들 수도 있겠어요! 이제 속 시원하세요!?”

악에 받쳐 바락바락 질러 대는 상우의 말에 재현이 성큼성큼 계단 위로 올라왔다. 재현이 아래쪽 칸에 있을 때는 퐁퐁 샘솟았던 용기가 다시 재현을 올려다보게 되자 쑤욱 가라앉았다. 상우를 벽으로 몰아넣고 위협적으로 가까이 다가온 재현의 얼굴에 상우는 고개를 푹 숙였다.

“내가…….”

재현이 말을 삼켰다. 언제나 낮고 올곧았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던 건 상우의 착각이었을까.

“내가 너한테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려고 얼마나…….”

재현은 또다시 말을 끝까지 잇지 못했다. 이런 식으로 마구잡이로 내뱉는 ‘좋아한다’를 들으려고 그동안 상우를 예뻐하고 아낀 게 아니었다. 다음에 상우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들을 땐 정말 마음이 가득한 표현을 듣고 싶었을 뿐이다. 더 말을 이어 봤자 상우를 질책하는 말만 튀어나올 것 같아서 재현은 탈출하려고 발버둥 치는 모든 말들을 꾸역꾸역 삼켰다.

상우가 고개를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재현을 말끄러미 바라보았다. 깊게 음영을 드리우는 짙은 속눈썹이 깜빡거렸다. 미운데 너무 예뻐서…… 재현은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이중적인 생각에 숨을 들이마셨다. 정말 너무 짜증 나는데, 못 견디게 예쁜 얼굴이었다.

재현의 커다란 손이 상우의 뺨을 움켜쥐었다. 반항할 새도 없이 닿아오는 달콤한 숨결에 상우는 저도 모르게 눈을 꾸욱 감았다. 입술 사이로 파고드는 뜨거운 살덩이는 못된 말만 해 대던 때와 같은 놈이 맞는지 의심이 될 정도로 부드럽게 상우의 혀를 문질렀다. 아프지 않게 가만가만 얽히는 온기가 좋았다. 다정하게 입천장과 치아 사이를 스치는 느낌에 상우가 재현의 코트 깃을 잡아당겼다. 재현의 몸에 익숙해진 상우는 더 깊은 입맞춤을 원했다.

“으응…….”

삽시간에 주변을 휘감은 달큰한 냄새가 상우를 자극했다. 재현만큼 제 입맛에 꼭 맞는 먹이를 찾아낼 수 있을까? 모래 속 바늘 찾기처럼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재현에게 이렇게까지 의존하고 있다는 걸 안다면 재현은 어떻게 반응할까. 기세등등하게 그럴 줄 알았다며 비웃을까? 아니면 이때가 기회다 싶어 마음껏 가지고 놀다가 버릴까? 뭐가 되었든 마음이 아팠다. 심장을 콕콕 찌르는 생각과 달리 당장 맞닿은 입술은 너무 달콤하고 소중해서 상우는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하으…….”

재현의 입술이 떨어지고 상우가 모자란 숨을 헐떡거렸다. 다리 사이로 재현의 단단한 허벅지가 파고들어 뭉근하게 눌러졌다.

“나를 그렇게 좋아해서 키스만 해도 좆이 발딱 서는 건가? 왜. 한번 빼 줘? 쟤네들처럼 숨어서 하는 거 말고 아예 길거리에서 빨아 줄까?”

입술을 맞닿은 채로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상우의 귓가에 위협적으로 울렸다. 진짜 못된 사람이었다. 재현과 닿으면 제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걸 알면서 나쁜 말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었다. 아까부터 꾹꾹 눌러 왔던 눈물이 차올라 눈앞이 흐릿하게 번졌다.

“사장님…… 진짜 싫어요…….”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와 상우의 뺨을 감싸 쥔 손등 위로 툭 떨어진 뜨거운 액체에 재현은 깜짝 놀랐다. 화는 냈지만 울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섹스하다 힘들다고 우는 거면 몰라도 이렇게 상처받은 얼굴로 우는 건 재현의 취향이 아니었다. 재현은 얼른 상우를 꼭 끌어안았다.

“가자. 데려다줄게.”

돌변한 재현의 다정한 목소리에도 상우는 울음을 참느라 대답하지 못했다. 재현의 손가락이 상우의 손 사이로 파고들었다. 힘껏 쥐어지는 깍지에 왈칵 눈물이 쏟아져 상우는 코트 소매로 눈가를 꾹꾹 눌렀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이 가려지니 눈물이 더 펑펑 새어 나왔다. 훌쩍훌쩍 울면서, 한 손은 재현에게 잡힌 채로 다른 한 손은 자꾸 비집고 나오는 눈물을 감추며 상우는 재현의 뒤를 따라갔다. 남들이 보고 뭐라고 쑥덕거리든 상관없었다. 지금은 제 손을 굳게 쥐고 있는 온기가 세상의 전부인 것처럼 느껴졌다.

이게 뭐야. 다 끝이야. 정말 다 끝낼 거야. 손에 잡힌 세상의 전부를 절대 놓지 않을 것처럼 꽉 움켜쥐며 상우는 속으로 계속 끝이라고 중얼거렸다.

마침내 상우를 옆자리에 태운 재현은 열심히 상황을 설명했다. 선을 보러 나간 건 맞지만 상우의 생각과 달리 악의적인 목적이었다고. 듣다 보니 재현의 맞선 상대들이 불쌍하게 느껴졌다. 그 사람들은 무슨 죄라고. 선을 거절하면 거절할수록 더 많이 들어왔다니 상우와 사는 세상이 다르긴 했다. 재현이 건넨 휴지를 받아 든 상우가 팽―, 먹먹하게 막혀 있던 코를 풀었다.

“이 세상에 그 말을 믿는 바보가 어디 있어요.”

코맹맹이 소리로 대꾸하는 상우가 귀여워서 재현은 웃음이 터졌다. 아까 터져 버릴 것같이 치솟던 화는 상우의 귀여운 모습 앞에 사르르 녹아내렸다. 팽―, 가열차게 코를 푸는 소리가 이어졌다. 정말이라니까. 안 믿어요. 오늘도 나 게이라고 깽판 치고 나왔어. 그 말이 더 신빙성 없어요. 상우와 투닥투닥 하는 사이 이제는 네비를 켜지 않아도 찾아갈 수 있는 상우의 집 앞에 도착했다.

“정말 안 믿어?”

“사장님도 저 인큐버스인 거 안 믿잖아요.”

재현이 인상을 찡그렸다.

“여기서 그 얘기가 왜 나와.”

“그리고 사장님 무서워서 싫어요. 다정하게 대해 준다면서요. 저 좋아한다면서요. 사장님은 입만 열면 다 거짓말이라 싫어요.”

한 번 열린 입에서 두 번이나 튀어나온 ‘싫어요’는 아무리 재현이 잘못한 일이더라도 마음이 상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울렸는데.

“미안해. 내가 너를 너무 좋아해서 순간 화를 못 참았어.”

재현은 순순히 사과의 말을 내뱉었다. 이런 적이 없으니 상우도 어지간하면 용서해 주겠지.

“그거 가정폭력 하는 남편들이 하는 말이잖아요.”

“다시는 안 그럴게.”

“그 말도요. 사장님은 가정폭력범이에요!”

순식간에 가정폭력범이 된 재현의 말문이 턱 막혔다. 얘가 술을 많이 마셨나.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가 너랑 가정을 이룬 적이 있었나?”

윽. 그건 아니었다. 아무튼, 상우는 쉽게 재현을 용서할 생각이 없었다. 선을 보러 나갔던 게 정말 재현의 말대로 이상한 소문을 내기 위해서였다 하더라도, 오늘 재현이 보여 준 모습은 충격적이었다. 스토킹에 협박에 성추행까지!

“그럼 데이트 폭력이요!”

“내가 널 때리기를 했냐, 뭘 했냐.”

한숨까지 쉬어 가며 말하는 모습을 보아하니 아직 반성이 부족했다.

“언어적 폭력도 폭력이거든요. 아무튼, 사장님 싫어요.”

또 튀어나온 ‘싫어요’에 재현도 한계가 찾아왔다.

“그래서. 뭐. 나랑 다시는 안 보게?”

그건 싫은데. 상우가 도르륵 눈을 굴렸다. 그러다 문득 재현이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한지 화가 났다.

“안 봐요! 안 볼 거예요! 연락도 하지 마세요!”

상우가 재현의 차 문을 열고 내려 버렸다.

“박상우! 아니지, 상우야! 오해는 풀린 거지?”

재현이 다급하게 외쳤지만, 돌아오는 대답 없이 문이 콩 닫혔다. 우리 변태 새끼, 정액은 안 먹고 가도 되나? 조금 걱정이 됐지만, 상우가 인큐버스라는 사실을 여전히 진지하게 믿고 있지 않은 재현은 곧 별일 있겠어, 하고 차를 출발시켰다.

* * *

모든 지속적인 폭력은 쉬운 용서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상우는 재현이 찾아와서 빌고 매달리면 조금 밀어내다가 마지못해 용서해 주려고 했다. 그전에는 절대로 쉽게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왜 연락이 안 와…….”

상우가 술집 테이블 위에 이마를 기댔다. 아무리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재현에게서 전화는커녕 메시지도 오지 않았다. 혹시 아직도 차단이 걸려 있나 싶어서 몇 번이나 확인해 봤지만, 금요일 저녁 이후로 차단은 풀린 지 오래였다.

“안주에 머리카락 들어간다. 고개 처들어라.”

인수의 싸늘한 목소리에 상우는 미적미적 고개를 들었다. 지난 금요일 인수에게 나오라고 연락한 뒤로 재현과 만나서 바람을 맞힌 꼴이 됐다. 살면서 먹을 욕을 그날 인수에게 몰아서 다 먹은 것 같았다. 1차, 2차, 3차 다 쏘겠다고 손이 발이 되게 빌고 나서야 인수의 화가 풀렸다. 그래. 사과는 나처럼 하는 거지. 사장님처럼 미안하다고 하고 연락 한 번을 안 하면 그게 뭐 사과인가.

“인수야. 왜 연락이 안 올까?”

“네가 다시는 안 본다고 그랬다며. 연락도 하지 말라 그랬다며.”

냉정한 상황 판단이 서러워져 상우는 울상을 지었다. 괜한 허세를 부렸나 보다. 그렇게 말해도 재현이 바로 연락 올 줄 알았다.

“그래도 어떻게 6일이나 연락이 없을 수가 있어?”

상우의 말에 맞춰 뱃가죽을 뚫고 꼬르륵 소리가 울렸다. 지지난 일요일에 마지막으로 먹었으니 밥을 못 먹은 지도 꼭 11일째였다. 그동안 재현 덕분에 잊고 살던 굶주림을 새삼 깨달았다. 맞아, 배고파서 온몸에 힘이 없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지…… 그나마 꾸준하게 쌓아 온 재현의 정기 덕분인지 배고프고 기운 없어도 움직일 수는 있었다.

“너는 안주를 이렇게 먹고도 배가 고프냐. 아쉬우면 네가 먼저 연락하던가.”

심드렁하게 말하는 인수를 향해 상우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숙이고 들어가면 재현에게 평생 영원히 숙이고 살게 될 것 같았다. 그래도 배가 고프다는 사실은 어디 가지는 않았지만. 내일 금요일인데 내일도 안 볼 생각인 건가? 상우는 괜히 불안해졌다.

“도대체 그 여자 매력이 뭐야?”

“멋있어. 다정해. 나한테만 잘해 줘.”

재현이 주변 사람들에게 어떻게 행동하는지 보면 상우에게는 그나마 잘해 주는 편이라는 걸 금방 알 수 있었다. 상우의 대답을 들은 인수가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너한테만 잘하긴. 자기 남편한테도 잘하겠지.”

인수의 말에 상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장님 결혼 안 했는데?”

그 말에 오히려 인수가 당황했다. 평범하지 않은 사랑이라고, 남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사랑이라고 노래, 노래를 불러서 당연히 유부녀인 줄로만 알았다.

“그럼 뭐가 문제야. 당장 전화해. 내 앞에서 지랄하지 말고 빨리 전화해.”

인수가 젓가락을 움켜쥐고 상우를 향해 찌를 듯이 들이밀었다. 상우는 슬쩍 저를 향해 들이밀어진 젓가락을 치웠다. 연애가 그렇게 무 자르듯 쉽지만은 않다는 걸 인수는 아직 모르는 것 같았다. 쯧쯧. 어린것. 상우의 깔보는 시선을 알아챘는지 인수가 이번에는 정말 찔러 버릴 것처럼 젓가락을 반대로 쥐어서 상우는 후다닥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도토리묵을 입에 넣고 씨익 웃었다.

인수가 상우의 손목을 잡아 공중으로 들어 올렸다. 툭. 힘을 빼니 맥아리 없는 손이 테이블 위로 중력을 거스르지 않고 떨어졌다. 1차, 2차, 3차까지 다 내신다면서. 3차는커녕 2차에서 완전히 뻗어 버린 친구를 보며 인수가 고개를 저었다. 이 새끼를 어쩌지. 마음 같아서는 길바닥에 버려 두고 가고 싶은데 그랬다가는 나중에 징징거리며 어떻게 저를 버릴 수 있냐고 서운해하는 상우의 모습이 절로 상상이 되었다.

“……사장님…….”

취한 와중에도 웅얼웅얼 찾아대는 그 사장님 얼굴이나 한번 볼까. 인수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상우의 핸드폰을 들었다. 인수가 제 몸을 어떻게 쓰던 인지조차 할 수 없는 상우가 고분고분 지문을 내놓았다. 잠금을 푼 인수는 연락처로 넘어가 도르륵 스크롤을 내렸다. 상우가 울부짖는 사장님이 누구인지 알 만했다. ♡사장님♡. 하트까지 콕콕 박아 놓은 게 제발 알아 달라고 온몸으로 발버둥 치는 꼴이었다. 인수는 망설임 없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드디어 전화했네.]

들려온 목소리에 인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상우야.]

“여, 여보세요……?”

인수가 더듬더듬 말했다.

[시발. 너 누구야.]

낮게 울리는 목소리에 인수는 입을 떡 벌렸다. 이 새끼…… 유부녀를 만나는 게 아니라……! 그동안 상우가 해 왔던 말들이 퍼즐처럼 착착 맞춰져 갔다.

“저 상우 친구인데요…… 상우가 많이 취해서 사장님을 찾아서요…….”

인수는 기지를 발휘했다. 취해서 인사불성인 상태로 널 찾았다는데 싫어할 남자가 어디 있을까.

[아, 거기가 어딥니까?]

그리고 그 기지는 정답이었는지 순식간에 상대의 말투가 정중해졌다. 단순한 게 상우랑 딱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인수는 술집 위치를 상세히 알려 주었다. 혹시라도 잘못 찾아오기 힘들 정도로.

인수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상우를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는 남자를 넋 놓고 바라봤다. 친하게 지내는 동기 놈이 제정신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깡패 새끼랑 만나고 있을 줄은 몰랐다. 어디 대부업체 사장님일지 모르는 남자가 인수를 향해 까닥 고개를 끄덕였다.

“연락해 줘서 고마워요.”

들려온 지극히 상식적인 인사도 의외로 느껴졌다.

“아…… 아뇨.”

인수가 깜짝 놀라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녁도 먹고, 안주도 넉넉히 시켰는데 오늘 몸 상태가 안 좋았나 봐요. 빨리 취하더라고요.”

인수는 아무도 묻지 않은 변명을 재빨리 늘어놓았다. 무서운 남자가 얘들이 술을 얼마나 마셨나 하는 표정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을 세는 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말이 다행히 납득이 갔는지 남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제발 빨리 데리고 사라져 주세요. 인수는 속으로 하염없이 빌었다.

크게 수틀릴 만한 내용은 없었는지 남자는 자연스럽게 엎어져 있는 상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상우야, 집 가야지.”

남자는 저에게 내뱉던 말투와 달리 소름이 돋게 다정한 목소리로 상우의 귀에 속삭였다. 인수는 저도 모르게 똥 씹은 표정을 하다가 화들짝 놀라 표정을 지웠다.

“으응…… 사장님…….”

상우가 몸을 뒤척거리자 남자가 싱긋 웃었다.

“그래.”

“사장님…… 미워요…….”

악! 시발! 인수가 숨을 들이마셨다. 제발 조용히 업혀 가 주면 안 되겠니!? 굳이 밉다고 말하는 상우의 말에 인수가 기겁을 했다.

“알겠어.”

상우의 밉다는 말에도 남자는 상관없다는 듯이 상우를 둘러업었다. 맙소사. 인수는 할 말을 잃은 채 이 광경을 빤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동기가 게이인데, 그거보다 상대가 깡패인 게 무서웠고, 그거보다 깡패인 상대를 향해 패기 있게 밉다는 말을 하는 동기가 더 무서웠고, 그거보다 그 말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이는 상대가 죽을 만큼 무서웠다. 결론적으로 이 모든 상황이 너무 무서워서 인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계산은 제가 하고 가겠습니다.”

까닥. 또다시 고개만 끄덕이며 인사하는 모습에 인수는 벌떡 일어나 인사했다. 마음대로 하세요. 제발 계산이든 뭐든 마음대로 하고 동기 새끼나 잘 챙겨 주세요. 아니, 절 죽이지만 말아 주세요.

상우를 차에 태운 재현은 그제야 허리를 바로 펴고 좌우로 스트레칭을 했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그동안 돈 주고 근력을 키운 건 이 주정뱅이를 업고 다니기 위함이었나 보다. 생긴 거에 비해 무거운 상우를 술집에서부터 들고오느라 혹사당한 허리를 재현이 주먹으로 톡톡 두드렸다. 오해가 풀리고도 연락 한 번을 안 해서 미웠던 놈이 술 처마시고 저를 찾았다니, 귀여워서 꽉 깨물어 주고 싶었다. 내일은 상우에게 연락이 오지 않아도 슬그머니 찾아가 볼 생각이었는데 의외로 상우가 저를 먼저 찾았다.

기분이 좋아진 재현에게는 상우의 집 앞으로 가는 길도 짧게 느껴졌다. 그냥 제 집으로 데리고 갈까 싶었지만, 말없이 외박했다 혼났던 상우를 생각하면 부모님이 계신 집으로 데려다주는 게 맞았다. 그리고 이미 많이 늦긴 했지만, 술 취한 상대에게 함부로 손대지 않는 신사다운 모습을 보여 주고 싶기도 했고.

“상우야, 집 도착했어.”

재현이 가볍게 어깨를 흔들자 상우의 속눈썹이 팔랑팔랑 흔들렸다.

“사장님…….”

오늘만 몇 번째 부르는 건지. 재현이 상우의 귓바퀴를 슬그머니 문질렀다. 느끼는 건지 움찔움찔하며 상우가 배시시 웃었다.

“진짜 사장님인가……?”

“그래.”

술에 취한 상우가 제 귀를 만지는 재현의 손을 잡아끌어 꾹꾹 입술을 눌렀다. 술 취한 모습을 제정신으로 보는 것도 꽤 즐거웠다.

“사장님…… 진짜 미워요.”

어떻게 된 놈이 밉다는 말을 해도 귀여울까. 재현은 그저 상우가 하고 싶은 대로 가만히 두었다. 그랬더니 상우가 꼬물꼬물 안전벨트를 풀고 운전석으로 기어와 재현의 허벅지 위에 앉았다. 집에 들여보내기 전 상우가 어디까지 하나 싶어 재현은 시트를 뒤로 밀었다. 넓게 앉아서 마음껏 애교를 부리라는 마음으로.

상우의 입술이 쪽, 재현의 입술 위에 떨어졌다.

“배고파요…….”

“오늘은 안 돼. 집 가야지.”

양보 없는 재현의 목소리에 상우는 재현의 어깨 위에 이마를 부볐다.

“못 먹은 지 엄청 오래됐는데…….”

그러고 보니 오늘 유난히 상우의 기운이 없어 보이긴 했다. 술에 취해서 그런가 싶었는데.

“집 앞이야. 오늘은 들어가고 내일 연락해.”

재현의 말에 상우가 히잉―, 하고 애교 섞인 소리를 냈다.

“사장님 진짜…… 진짜, 미워요.”

아이고, 그놈의 밉다는 소리. 재현은 피식피식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얼마나 미운데?”

“음…… 하늘만큼 땅만큼.”

잔뜩 취해서도 꼬박꼬박 대답하는 게 귀여워서 재현은 상우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으응, 하고 귓가에 울리는 콧소리에 재현도 슬슬 흥분됐다. 맞닿은 자지도 어느새 벌떡벌떡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맛있는 냄새…… 사장님 냄새 좋아요…….”

밉다고 하든가, 좋다고 하든가 둘 중 하나만 하면 좋을 텐데. 주정뱅이가 된 상우는 일관성이 없었다.

“내가 좋아?”

재현은 그 틈새를 놓치지 않고 파고들었다.

“……사장님, 미운데…….”

밉다고 말하는 상우가 재현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귀여운 우리 주정뱅이. 재현도 상우의 등을 힘주어 안아 주었다.

“미워서 나 다시는 안 볼 거야?”

재현이 은근슬쩍 상우가 와락 지르고 간 말을 물어봤다. 무언가 말할 줄 알았던 상우가 아무 말 없이 재현의 옷을 꽉 움켜쥐었다. 순식간에 어깨가 축축해지고 상우의 몸이 잘게 들썩였다. 울어? 내가 뭘 했다고 또 울어!? 당황한 재현은 상우를 힘으로 일으켜 세웠다.

커다란 눈동자에 울망울망 눈물이 고여 있었다. 무슨 말만 하면 울어 대니 재현은 난감함을 감출 길이 없었다.

“흐윽…… 사장님 이제 나한테 연락도 안 하고…….”

연락도 하지 말라 그래서 얌전히 명령을 따른 것뿐인데 그게 울정도로 서러웠나 싶어 재현은 달래듯이 상우의 입술을 쪽, 문질렀다.

“그리고?”

“나는…… 흑, 이제 차단도 다 풀었는데…….”

이어지는 상우의 말에 재현이 인상을 찡그렸다. 감히 차단을 했었어? 이 변태 새끼가 진짜! 재현의 손이 상우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으…… 아파.”

“박상우. 따라 해.”

아무리 술에 취해도 재현의 스산한 목소리가 들리자 상우는 꼴딱 눈물 섞인 침을 삼켰다.

“뭐…… 뭘요?”

“다시는 사장님 번호를 차단하지 않겠습니다.”

상우가 고개를 저었다. 자기가 한 잘못은 생각도 안하고 왜 차단한 거로만 뭐라고 한담.

“흑, 사장님이…… 사장님이 나빴었잖아요…….”

억울함에 항의를 해 봐도 재현은 순순히 넘어갈 것 같지 않았다. 단호한 눈빛을 마주하던 상우가 결국 힝, 하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다시는…… 차단 안 할게요.”

상우가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재현의 어깨에 이마를 툭 기댔다.

어디서 대충 넘어가려고. 늘어지듯 기댄 상우를 똑바로 세워 앉힌 재현이 상우에게 다시 따라 하라고 말했다.

“박상우. 똑바로 말해. 어물쩍 넘기지 말고.”

“흐윽…… 다시는…… 사장님 번호를…….”

울먹임과 술기운이 겹쳐진 탓에 상우가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나 재현은 전혀 봐줄 생각이 없었다.

“똑바로 말할 때까지 못 내릴 줄 알아.”

재현은 할 수만 있다면 상우를 유치원 어린이들이 앉는 생각 의자에 앉혀 놓고 싶었다. 번호 차단 같이 나쁜 건 어디서 배워서는! 재현은 열심히 상우를 몰아쳤다. 똑바로 말해! 똑바로 말할 때까지 집 못 가!

“다시는, 흑…… 다시는 사장님 번호를…… 차단하지 않겠습니다…….”

마침내 상우가 전체 문장을 내뱉고 나서야 재현이 안도의 숨을 내뱉었다. 잘했어, 하며 쓰다듬는 손길에 상우가 소매로 눈물을 꾹 눌러 닦았다.

“이제 집 갈까?”

재현의 말에 상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 진짜 배고파요…….”

“정액은 내일 실컷 먹고.”

상우의 엉덩이를 도닥도닥 두드려 주자 히잉, 하는 애기 소리가 또 들려왔다. 애들이 치대는 건 질색이었는데 상우가 부리는 어리광은 밤새도록 받아 주고 싶을 만큼 좋았다. 아, 집에 보내기 싫다. 재현이 일정한 박자로 상우를 토닥이는 사이 귓가에 색색 고른 숨소리가 들렸다. 칭얼칭얼하다가 금세 잠드는 게 진짜 애기가 따로 없었다. 물론 보통의 애기가 분유를 먹고 칭얼거린다면 이쪽 애기는 술을 처마시고 칭얼거리는 게 다르긴 하지만.

읏쌰. 재현의 소중한 허리가 또 혹사를 당했다. 허리가 나가면 아쉬운 건 저보다 상우일 거라고 생각하며 재현은 힘겨운 발걸음을 옮겼다. 상우가 끝까지 안 만나 주면 쳐들어가려고 몰래 알아본 집 호수가 이런 식으로 유용하게 쓰일 줄은 재현도 몰랐다. 막상 집 앞에는 도착했지만, 초인종을 누르려니 망설여졌다. 상우의 부모님을 뵙는 첫 자리인데 지금의 모양새는 빈말로라도 좋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축 늘어진 상우의 무게를 감당하기 힘들어질 무렵, 재현은 하는 수 없이 초인종을 눌렀다.

“누구세요?”

재현은 순간 고민했다. 상우 애인인데요, 상우 남자 친구인데요. 저를 표현하고 싶은 말이 한참 많았지만, 어느 것도 쉽게 내뱉기 힘든 말이었다.

“안녕하세요. 상우 아는 형입니다. 상우가 많이 취해서 데려왔는데 문 좀 열어 주십시오.”

결국, 아는 형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재현이 힐끔 업혀 있는 상우를 돌아봤다. 어머니에게 아는 동생이라고 소개한 거로 삐쳤던 것 같은데. 너도 내 입장이 되어 봐라, 인마. 애인 소리가 쉽게 나오나. 재현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열 살이나 어린, 철없는 놈을 좋아하게 된 제 탓이지.

달칵, 문이 열리자 홈웨어를 입은 여자가 나타났다. 상우가 여자로 태어났으면 이런 얼굴일까. 누가 봐도 상우와 혈연관계임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똑같은 얼굴이었다. 상우가 엄마를 많이 닮았네.

“어머님, 안녕하세요. 상우가 친구랑 술을 좀 마셨나 봅니다.”

절대 제가 먹인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어필하며 재현은 최선을 다해 싱긋 웃었다. 무조건 좋은 인상을 남겨야 하는데. 재현의 등에 업혀 자고 있는 상우를 본 어머님의 얼굴이 무시무시하게 변했다. 이 세상 모든 어머니는 다 똑같구나. 재현은 저도 모르게 침을 꼴딱 삼켰다. 그냥 우리 집으로 데려갈 걸 그랬나. 내일 다리 몽둥이 하나 부러져서 나타나는 거 아닌가 걱정이 됐다.

“어휴. 우리 애가 정신머리가 없어서…… 미안해요. 그냥 현관에 던져 놓고 가세요. 미안해서 어쩌지…….”

이왕 집까지 온 김에 상우 방도 한번 구경하고 싶은 생각에 재현은 또다시 싱긋 웃었다.

“아닙니다. 상우가 보기보다 무거워서요.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방에 눕혀 놓고 가겠습니다.”

상우의 엄마가 미안해라, 하면서도 길을 비켜 주었다. 재현이 안내받은 상우의 방에 들어가려는 차에 등 뒤에서 재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총각.”

총각이라는 단어가 간지러워 재현은 머쓱하게 뒤를 돌았다.

“혹시…… 우리 애가 주말마다 신세 지고 있나요?”

상우의 엉덩이를 받치고 있던 재현의 손이 불안하게 꼼지락거렸다. 와, 이거 완전 직구인데 뭐라고 말씀드려야 하나. 이미 다 알고 묻는 말인 것 같아 재현은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 예, 맞습니다.”

“상우 밥은 먹였어요?”

갑자기 밥? 재현은 술집에서 봤던 안주들을 재빨리 떠올렸다. 도토리묵과 파전만 먹고 술 처마셨다고 하면 상우가 내일 더 많이 혼나려나.

“아마 술 마시기 전에 먹은 것 같습니다.”

재현의 대답이 마음에 썩 들지 않았는지 상우 엄마의 고운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고기 먹은 거 같다고 거짓말을 덧붙일까? 재현은 속으로 혼자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뇨. 제 말은, 그 밥 말고 그쪽 정액이요.”

재현이 할 말을 잃고 입을 떡 벌렸다. 이 가족이 진짜 단체로 미쳤나. 초면에 내 정액을 왜 찾아. 난감과 당황이 교차해서 재현은 도저히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애가 요즘 기운이 없어서요. 마지막으로 먹인 게 언제예요?”

재현의 손가락이 당황스러움을 대변하듯 꼼지락거림을 넘어서 달달 떨렸다. 외간남자에게 아들이랑 마지막으로 섹스한 게 언제냐고 묻는 어머니가 정상인가?

“여…… 열흘 전쯤입니다…….”

대답하는 재현의 목소리가 바르르 떨렸다. 어지간하면 평정심을 유지하는 재현으로서도 이 상황은 힘겨웠다. 이런 상황에서도 태연할 수 있다면 진짜 안하무인인 놈일 것이다. 재현은 저도 모르게 다음 말을 기다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방에 안 들어갈 테니까 먹이고 가요.”

“네?”

재현은 너무 놀라서 상우를 떨어뜨릴 뻔했다. 미끄러진 상우를 다시 주섬주섬 고쳐 업으며 제가 들은 말이 뭔지 복기했다. 부모님 다 계신 집에서 아드님이랑 떡 치고 가라고요? 재현의 얼굴에 경악이 가득하든 말든 상관없는지 상우의 엄마가 말을 마저 이었다.

“앞으로…… 적어도 삼일에 한 번은 먹여 줘요. 부탁 좀 할게요.”

네? 앞으로 삼일에 한 번은 아드님이랑 떡 치라고요? 망부석처럼 서 있는 재현을 그대로 둔 채 상우의 엄마가 안방으로 들어가 문까지 닫았다. 나름대로 배려인 것 같았지만, 여전히 재현은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상우를 침대 위에 눕힌 재현은 자신이 들은 말이 뭔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진짜 인큐버스인지 서큐버스인지 그런 게 아니라면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대화였다. 이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 건지 당황스럽기만 해서 재현은 불이 꺼진 상우의 방만 서성서성 돌아다녔다. 이런 분위기라면 좆도 반응하지 않을 것 같았다.

“와 나…… 시발, 살다 살다 별…….”

그렇게 궁금해했던 상우의 방인데도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사장님…….”

그 사이 잠에서 깼는지 웅얼웅얼하는 목소리가 재현을 불렀다. 재현은 후다닥 상우의 침대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상우가 일어나서 이 난관을 같이 헤쳐나가 주기 바랐던 것은 재현의 욕심이었는지 상우의 눈은 여전히 꼬옥 감겨 있었다. 꿈을 꾸고 있는 듯 눈꺼풀 아래에서 눈동자가 요리조리 움직이는 게 보였다.

“배고파요…….”

잠꼬대조차 배고프다는 소리여서 재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시선 끝에 자신의 가랑이 사이가 들어왔다. 상우를 만나기 전까지는 과도하게 크고 굵어서 천대받던 놈이 이제는 상우와 상우의 어머님에게 구명줄 취급을 받고 있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누구 하나라도 좋아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너는 참 좋겠다, 좆 대가리야.

이러고 죽치고 앉아 있어 봤자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밑져야 본전이라고. 부모님 허락도 다 받은 마당에 잠들어 있는 상우를 상대로 딸을 친다고 해서 문제 될 건 없었다. 재현은 슬그머니 상우의 방문을 닫았다. 빨리 치고 빨리 집에 가고 싶어졌다. 이 가시방석 같은 상황을 한시라도 빠르게 벗어나고 싶었다.

거실에서 새어 들어오던 불빛까지 차단되자 상우의 방이 어둠에 휩싸였다. 상우의 머리맡에 털썩 주저앉은 재현은 한숨을 내쉬며 성기를 꺼냈다. 쥐고 몇 번 흔들어 봤지만, 고상한 자지님께서는 까닥도 하지 않았다. 상우가 저에게 맨날 아무데서나 시도 때도 없이 흥분한다고 타박했었는데. 그 타박이 무색하게 재현도 TPO를 따지는 편이었나 보다.

어쩌지. 시무룩한 좆만 빼꼼히 꺼내 놓고 멍하게 앉아 있던 재현이 바로 누워 있는 상우의 위로 올라갔다. 묵직한 성인 남성의 무게에 매트리스가 삐거덕대며 눌렸다. 그 작은 소리에도 재현은 심장이 쿵쾅쿵쾅 울려 댔다. 어? 이거 부모님 몰래 나쁜 짓 하는 거 같고 조금…… 꼴리는데?

재현은 드디어 주인을 도와주려고 반응하는 기특한 좆 대가리를 상우의 말랑한 입술 위에 슬그머니 문질렀다. 요 통통한 입술이 어떻게 자지를 물었더라. 단단하게 일어선 자지 끝이 상우의 입술 사이로 파고들었다. 배고프다고 징징거렸으면서 완전히 꿀잠을 자는 상우가 통 입을 벌리지 않아 예민한 귀두에 단단한 치아가 쓸렸다.

“하아…….”

그 감촉조차도 후두둑 소름이 돋아 재현은 낮은 한숨을 흘렸다. 천천히 손을 흔들며 재현은 상우의 얼굴 이곳저곳에다가 자지를 비벼 댔다. 입술 주변을 덧그리던 것은 콧날을 따라 쭉 미끄러졌고 이내 부드러운 속눈썹 위에 닿았다. 매끈한 뺨 위에는 재현의 자지 끝에서 새어 나오는 투명한 액체가 미끌거리며 자국을 남겼다.

인큐버스, 악마, 정기, 정액. 그 모든 단어와 어울리지 않는 말간 얼굴을 한 상우가 천사같이 잠들어 있었다. 자지를 움켜쥔 재현의 손이 점점 빨라졌다. 재현은 비어 있는 손으로 상우의 입술을 벌렸다. 어금니 사이를 힘으로 비집고 들어간 손가락에 날카로운 단면이 눌러졌다.

“시발…….”

뜨겁고 습한 곳에 사정없이 좆을 처박고 싶었다. 열흘. 상우와 섹스를 하지 않은지 자그마치 열흘이 넘었다. 적어도 삼일에 한 번은 정액을 먹이라고? 할 수만 있다면 옆에 끼고 매일같이 끌어안고 싶은데. 지금은 오밀조밀하게 닫혀 있을 그 구멍을 제 좆 모양으로 벌어져서 닫히지도 않게 만들고 싶은데.

“흣…….”

탁탁탁. 살이 쓸리는 소리가 더 빨라졌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데리고 살겠다고 말해 볼까. 평생 놀고먹고, 상우가 하고 싶은 것만 하면서 살게 해 줄 테니 저에게 달라고 말해 볼까. 재현이 잔뜩 인상을 찡그렸다. 상우와 같이 산다는 상상만으로, 집 안 구석구석에 상우의 손길이 닿는다는 생각만으로 사정감이 몰려 왔다. 재현은 상우의 입안에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어 틈새를 벌렸다.

“상우야…… 후…… 상우야.”

상우의 이름을 부르던 재현의 등이 단단히 굳었다. 벌려진 입술 사이로 정액이 투두둑 떨어졌다. 혹시나 기도로 넘어갈까 걱정되어 숨을 죽이고 지켜보던 재현은 상우의 목울대가 꼴딱 넘어가는 모습에 안심했다. 상우의 입가에 묻은 정액을 문질러 닦아 준 재현은 마침내 현실로 돌아왔다. 처음에는 자는 애를 상대로 내가 무슨 짓을 한 건가, 하는 자괴감이 몰려 왔다. 그다음에는 이 방에서 어떻게 나가지, 하는 두려움이 휘몰아쳤다.

하, 근데 진짜 어떻게 나가냐. 아드님에게 정액 잘 먹이고 갑니다, 하고 인사할 수도 없고. 재현은 한숨을 내쉬며 홀로 수고한 좆 대가리를 바지 안으로 집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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