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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정하게 대해 주지 말지 그랬어요 (8/11)

7. 다정하게 대해 주지 말지 그랬어요

상우가 번쩍 눈을 떴다. 나름대로 빠르게 뜬다고 떴지만 잘 안 떠져서 간신히 꿈지럭거리며 떴다. 뭐야. 왜 눈이 부었지. 필름이 끊겼나 보다. 재현을 처음 만났던 날 이후로 처음인 것 같았다. 그렇게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이 쓸모없는 몸뚱어리는 정기가 부족해 배고프면 술도 약해지는 것 같았다.

어디까지 기억나는지 더듬더듬 상기해 보았지만 2차에서 인수에게 왜 재현의 연락이 안 오냐며 진상 부린 게 마지막이었다. 집인 걸 보니 인수가 데려다준 것 같았다. 이건 욕을 백 번 처먹어도 어쩔 수 없지. 상우는 핸드폰을 찾기 위해 울렁거릴 게 분명한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오래전 기억이라도 물만 마시면 토하는 숙취의 고통을 몸이 기억했다.

음? 상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필름이 끊기면 절대적으로 따라오는 숙취가 느껴지지 않았다. 이 상황, 겪어 본 적 있었다.

“사장님……?”

상우가 재현을 조용히 불러봤다. 여자에게 주니어가 반응하지 않아 굶어 죽어 가던 때 재현이 상우를 살려 주었다. 그때는 재현인 줄 몰라서 누군지 알아만 내면 당장 무릎을 꿇고 저와 사귀어달라 말하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일주일째 연락조차 없는 재현이 이번에도 슈퍼히어로처럼 나타나서 배고픔을 가져갔을까?

그러다 문득 상우는 굉장히 안 좋은 상상이 들었다. 만약 재현이 아니면 누구의 정기를 먹은 것인가 하는 생각. 모르는 사람이어도 끔찍하고 만약 인수의 정기라면…… 헉! 상우는 재빨리 핸드폰을 찾았다.

“인수야!”

통화연결음이 멈추자마자 상우가 꽥 소리를 질렀다.

“아니지? 아니지!?”

[미쳤냐…… 아침부터.]

“내가…… 내가 어제 혹시…….”

너에게 몹쓸 짓을 했니? 네 좆을 빨았니? 아니면 혹시 반항하는 너를 억지로…… 무슨 말을 해도 상상만으로 토가 나왔다.

[나 그런 데 편견 없어. 걱정하지 마.]

어라. 내가 좀 잘했나? 의외로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하는 인수의 말에 상우가 다리를 달달 떨었다. 너는 괜찮을지 몰라도 나는 아닌데.

“그…… 그래……?”

[근데 너 위험한 건 아니지?]

“어? 어…… 병은 없어.”

재현이랑만 해 봤으니 재현에게 병이 없다면 상우도 없을 것이다.

[병은 개뿔. 존나 건강해 보이시던데. 너도 쉽게 둘러업고.]

기계를 타고 넘어온 목소리에 상우가 숨을 멈췄다.

“응? 누가?”

[누구긴 누구야. 너네 사장님. 야, 진짜 그 사람이 뭐 위험한 짓 시키는 거 아니지?]

상우는 가만히 핸드폰을 떼고 내려다보았다. 그러다가 손가락을 들어 꾸욱 제 입술을 눌렀다. 또야. 또 사장님이 살려 줬어. 울컥하는 마음과 동시에 깊은 안도가 찾아왔다. 야, 야, 하고 저를 부르던 인수의 목소리가 조그마한 욕설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상우는 전화가 끊긴 핸드폰의 통화내역을 눌렀다. 인수의 바로 아래 남아 있는 ♡사장님♡ 이라는 통화내역은 수신도 아니고 발신이었다.

아오, 미친놈! 상우는 속으로 저를 욕했다. 아마 술에 잔뜩 취해서 재현에게 전화해 배고프다고 징징거렸나 보다. 그렇지 않아도 안 보겠다고 허세를 부려서 저에게 정이 떨어졌을 수도 있는데. 술주정까지 했으니 간당간당 남아 있던 정도 완전히 떨어졌을 게 분명했다. 상우는 인수가 제 핸드폰을 가져가 재현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을 차마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무거운 마음과 달리 가벼운 몸으로 방에서 나온 상우는 엄마에게 한바탕 잔소리를 들었다. 어디서 술을 그렇게 처마시고 다니냐고. 그러면서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해장을 위해 콩나물국을 내주셨다.

“엄마…… 난 먹을 가치도 없는 놈이야.”

상우가 울적하게 말했다.

“그걸 이제 알았어!?”

엄마의 사나운 목소리를 들으며 상우는 숟가락을 들었다. 먹을 가치가 없는 놈도 맛있는 건 좋아한답니다, 어머니. 얼마 만에 느껴 보는 음식 맛인지 몰랐다. 국물을 호로록 마시던 상우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엄마. 나는 인큐버스야, 서큐버스야?”

재현이 이 의문을 제기한 이후로 상우도 내내 마음이 쓰였다. 자신은 어쩌면 서큐버스가 아닐까? 상우의 물음에 엄마가 별 희한한 말을 다 듣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상우의 앞에 자리 잡고 앉았다.

“그게 무슨 소리니? 인큐버스나 서큐버스나 다 똑같은데. 그냥 생물학적 성별에 따라 부르는 게 다를 뿐이야.”

엄마의 말에 상우의 의문은 더 미궁으로 빠져들었다.

“근데 왜 나는 여자 정기를 못 먹어?”

이번 질문은 엄마도 답을 모르는지 글쎄, 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왜 못 먹는 걸까. 인큐버스, 서큐버스도 일반 단체처럼 협회가 있었다면 알아볼 텐데. 어디다 물어봐야 할지도 모르는 게 아쉬웠다.

그리고 사실 여자뿐만 아니라 재현이 아닌 다른 남자의 정기도 못 먹는 게 현실이었고.

“엄마, 내가 서큐버스가 아니라면 나는 진짜 그냥 게이인 거 같아.”

처음 먹이가 남자라는 걸 밝혔을 때 자신은 게이가 아니라고 펄펄 뛰던 상우가 차분하게 커밍아웃을 했다. 이미 한번 아들이 게이임을 받아들였던 상우의 엄마도 지난번과 달리 의연하게 대해 주었다. 엄마는 이제 정말 괜찮았다. 상우가 게이라고 해도, 남자의 정기밖에 못 먹는다고 해도 여전히 사랑하는 아들이었다.

이 사실을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건 시간이 걸렸지만. 어쨌든 엄마가 바라는 것은 상우가 남들이 보기에 정상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본인이 느끼기에 행복한 삶을 사는 거니까 괜찮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상우의 아빠가 빌었던 소원에 손주 계획은 없었다. 가정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달라고 했지 자손을 퍼뜨려 달라는 내용은 없었으니 계약 위반도 아니었다. 내 아를 나도! 이제는 연약한 중년 남성이 된 남편이 계약할 땐 어찌나 남자답고 멋있었는지. 지금 돌이켜 생각해 봐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엄마는 상우도 그런 행복을 가졌으면 하고 바랐다.

“상우야. 좋아하는 사람의 정기만 먹고 싶어?”

엄마의 물음에 상우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언제 커서 저런 어른스러운 웃음을 지을 줄 알게 됐대! 기특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사장님은 조금 특별해. 내가 좋아한다고 생각하기 전부터 맛있었어.”

게이니 뭐니 쓸데없는 고민을 하느라 상우는 미처 제 마음속 소리를 귀 기울여 듣지 못했다. 상우는 처음 재현을 봤을 때부터 좋아했던 것 같다. 고운 말 하나 없이 우악스럽게 대하다가도 다정하게 바라보던 눈빛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던 온기에 이미 마음 한구석을 내주었다. 어쩌면 기억도 나지 않는 처음 만난 날 밤 첫눈에 반했던 걸지도 모르고.

“엄마는 내가 사장님이랑 계약해도 괜찮아?”

상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계약은 신중히 하라고 또 혼나면 어쩌지. 상우의 물음에 엄마가 음, 하고 고민하는 소리를 내었다.

“네가 꼭 알아야 할 게 있는데, 아들. 계약은 쌍방향이란다. 그 사람이 계약하기 싫으면 어쩌려고 그래?”

상우가 덜커덕 숟가락을 내려놨다. 그 생각은 한 번도 못해 봤는데!

점심도 먹다 말고 뛰쳐나온 상우는 호텔 앞에 서서 물끄러미 거대한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재현을 처음 만난 곳.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여기였다. 우연은 인연이 되었고 사냥은 사랑이 되었다. 재현이 계약하기 싫다고 딱 잘라 내면 어쩌지. 덜컥 두려움이 밀려 왔지만 그래도 상우는 꼭 말하고 싶었다. 자신이 재현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이번에는 남자답게 제대로 말할 것이다.

상우가 성큼성큼 로비 안으로 들어갔다. 프런트 직원에게 곧장 가서 얼굴을 들이밀자 직원이 아는 체를 했다.

“사장님 뵈러 오셨어요?”

자의식과잉은 무슨. 모두가 상우를 기억하는 게 맞았다. 덕분에 상우는 약속도 잡지 않고 다짜고짜 쳐들어와도 재현의 방으로 안내받을 수 있었고. 오가며 몇 번 마주쳤던 비서도 상우를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사장님 안에 계세요. 들어가셔도 됩니다.”

비서의 말 뒤에 ‘어차피 사장님은 하시는 거 없으니까요’가 숨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상우는 똑똑 무거운 문을 노크했다.

“들어와요.”

익숙한 목소리인데도 괜히 가슴이 떨렸다. 빼꼼히 문을 열자 오늘도 열심히 월급을 축내고 계신 가야호텔 대표가 핸드폰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으셨다.

“……사장님.”

갑자기 들려온 상우의 목소리에 재현은 화들짝 놀랐다. 안 그래도 이쯤 되면 일어났을 텐데 우리 변태 새끼가 왜 연락이 없나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연락은 없고 눈앞에 상우가 나타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여긴 어쩐 일이야?”

놀란 것을 애써 감추느라 평소보다 무미건조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여긴 어쩐 일이냐니. 상우가 생각했던 것보다 재현은 더 많이 화가 난 것 같았다.

“다시는 안 보겠다고 하고 불쑥 찾아와서 죄송해요.”

마주 잡은 상우의 손가락이 꼼지락거렸다. 또, 또. 재현은 화나지 않았는데 상우가 지레 사과를 했다. 저 버릇도 날 잡아서 싹 고쳐 줘야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어서요.”

손가락 끝만 내려다보던 상우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남자답게! 내가 널 좋아한다!

“사장님, 왜 그동안 연락 한번 안 해 주셨어요?”

아. 이게 아닌데. 긴장한 나머지 먼저 튀어나온 말은 상우의 생각과 달랐다. 그래도 한번 터져 나온 말이 멈추지를 않았다.

“이제 제가 싫어졌어요?”

남자답게, 남자답게. 아무리 속으로 중얼거려도 재현이 저를 싫어한다는 생각에 눈물이 점점 차올랐다.

“이렇게 쉽게 싫어할 거면 좋아한다고 말하지 말고, 웃어 주지도 말고, 밥 먹었냐고 묻지도 말고, 자꾸 내 이름 부르지도 말고. 아무튼…… 다정하게 대해 주지 말지 그랬어요…….”

점점 작아지던 목소리는 끝내 울음으로 번졌다. 재현은 너무 당황스러웠다. 갑자기 제가 왜 상우를 싫어하는 놈이 됐는지 이해가 안 갔다. 어제 상우를 위해 밤길을 달려가 집에 데려다주고, 그거로도 모자라 자는 애를 상대로 자위해서 정액도 먹였는데. 그게 싫어하는 놈이 할 짓인가?

“뭐야.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재현은 일단 상우를 달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쫓아내려나 보다 싶어 상우는 차오르던 눈물이 왈칵 터졌다.

“흑…… 사장님이…… 좋아요! 선 같은 거 보지 마세요……! 나랑만 해요!”

흐어엉―, 상우가 울음을 터뜨렸다. 상우는 엉엉 우는데 재현은 씰룩씰룩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출 길이 없었다. 드디어 들었다. 상우의 진심이 담긴 좋아한다는 말.

호텔이 무너져라 울어 대던 상우가 갑자기 팔을 쭈욱 뻗었다. 저 몸짓 뭐 하라는 건지 이제 잘 알지. 재현은 팔을 벌린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상우에게 빠른 걸음으로 다가갔다. 그 짧은 거리를 거의 뛰다시피 걸어가 와락 끌어안은 몸이 익숙하게 재현의 목덜미에 매달렸다.

“아, 정말 버릇을 잘못 들였네.”

상우의 귀에 속삭여지는 목소리에는 웃음이 가득 배어 있었다. 마침내 재현은 열 살이나 어린 변태 새끼를 완벽하게 손에 넣었다.

당겨서 안 되면 밀어라. 인터넷에 올라왔던 연애 조언 글들이 모두 다 거짓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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