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무협 게임에 빙의했다가 누나의 소설 ‘스며 번진’에 재빙의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건 눈앞에 있는 이하민을 보고서였다.
이하민의 모든 것이 내가 소설에서 본 것과 너무 똑같아서.
자기의 소설을 평가해 달라면서 나를 따라다니며 읽어 주는 바람에 정말 알고 싶지 않은 남자들의 찐한 이야기에 강제로 개안을 당해 버린 것도 이제 까마득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측정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바람에 등급이 나타나지 않아서 그렇지 이하민은 S급 가이드로, 가장 위험도 높은 던전을 공략하고 나온 S급 에스퍼 세 사람을 동시에 가이딩해서 하루 만에 다시 빨빨거리고 다니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S급 에스퍼들이 누리는 삶을 가능하게 하는 본질.
그것이 이하민의 실체였다.
손을 대기만 해도 부서질 것 같은 피폐한 분위기에, 투명해 보이는 피부와 미인의 표본 같은 얼굴.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남자와 경쟁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마음을 저절로 들게 만드는 이하민을 보면서 나는 비로소 그 사실을 인정했다.
이 남자는 이하민이고 나는 소설 ‘스며 번진’ 속에 들어왔다는 것을.
그게 벌써 1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부정기가 꽤 길게 이어져서 그 사실을 받아들인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이곳에서 나는 서은우라는 스무 살의 에스퍼였다.
소설에서 S급 에스퍼들의 전담 가이드인 이하민을 질투하고 온갖 계략을 펼치다가 S급 에스퍼들에게 끔살당하는 ‘인세에서 보기 드문 미모의’ 이물질 되시겠다.
이하민은 S급 에스퍼들이 서은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고 서은우도 그렇게 믿었다.
S급 에스퍼 본인들도 이하민에 대한 마음을 몰랐으니 주위 사람들이 그들의 마음을 오해한 것은 이상한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집착광공, 자낮수, 다공일수, 미인공, 미인수.
그 키워드에 낀 이물질.
그게 나였다. 시발.
그런 죽음을 맞이할 수는 없어서 어떻게든 그들과 접점이 생기지 않도록 부지런히 피해 다니는 중이다.
그나마 소설의 도입부에 빙의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지금이라면 죽음을 피할 기회가 아주 없는 것도 아닐 것 같아서.
그런데 S급 에스퍼들은 몰라도 소설의 주인수인 이하민은 완전히 피해 다닐 수가 없었다.
하급 에스퍼와 가이드는 생활 반경이 겹치기 때문이었다.
S급 에스퍼는 특별 대우를 받아서 지내는 곳도, 생활하는 곳도 따로 있지만 하급 에스퍼는 가이드와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그래서 원치 않게 이하민을 자주 보게 됐는데 내가 그를 본 만큼 이하민 역시 나를 봤을 것이고 점점 내 존재를 알아차린 듯했다.
이하민은 그 고운 얼굴을 하고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기에 바빴다.
사람들이 자기를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어떻게든 자기 존재감을 지우기에 여념이 없는 듯했다.
이 세계에서 가이드가 받는 취급이 열악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모든 가이드가 그런 대우를 받는 건 아니었다.
일단 상급 에스퍼의 가이딩을 자주 하고 그 에스퍼의 관심과 보호를 받기라도 하면 다른 사람들도 함부로 대할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러나 이하민은 전 세계에 백 명이 채 되지 않으며 한국에는 셋뿐인 S급 에스퍼 세 명과 미친 매칭률을 보이고 그들에게 효과적인 가이딩을 해 왔으면서도 지금껏 그들의 냉대를 받아 왔고 그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이하민을 함부로 대했다.
‘그 새끼들이 지들 마음을 알지도 못하고 워낙 함부로 굴기는 했지.’
S급 에스퍼들은 이하민을 보면서 격동하는 마음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았고 왜 자기들이 남자인 이하민에게 집착하고 그를 갈구하는지 알 수 없어 했다.
그리고 이하민을 원하는 마음이 강해질수록 그것을 부정하고 싶어 하며 그를 지독하게 괴롭혔다.
그걸 본 사람들은 S급 에스퍼들이 이하민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면서 덩달아 그를 괴롭혔고 그런 환경이 총체적으로 자낮수 캐릭터를 완성시켰다.
내가 서은우의 몸에서 깨어났을 때부터 이하민은 늘 혼자였다.
에스퍼와 가이드들은 죄책감도 느끼지 않고 그를 괴롭혔고 이하민은 어느덧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를 보지 않는 것 같아도 S급 에스퍼들은 늘 이하민을 주목했기에 나는 이하민과 엮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렇게 되는 순간 자연스럽게 S급 에스퍼의 눈에 띌 수밖에 없고 그러면 끔살 루트를 피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서서히 영혼까지 죽어 가는 것 같은 이하민을 계속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S급 에스퍼들이 나를 공격하려고 하면 그때 가서 내가 그놈들 목을 똑 똑 따 주면 되겠지라고 생각하고 이하민을 괴롭히려는 놈들을 소소하게 막아 주었는데 녀석이 그걸 알아차린 듯했다.
나름대로 남들이 모르게 한 거였는데 감도 좋지.
그래서 지금 이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였다.
“저기…… 은우야.”
센터에서 대기를 하다 구내식당에 왔더니 이하민이 나를 발견하고 불렀다.
줄을 서서 음식을 담고 식판을 들고 자리에 앉자 마찬가지로 식판을 든 이하민이 쪼르르 다가왔다.
나는 그가 식당에 오는 걸 얼마나 부담스러워하는지 알고 있었다.
식당에 올 때는 어쩔 수 없이 사람들과 부딪쳐야 하는데 이하민은 이 시간을 지지리도 겁냈다.
이곳에서 대우를 받으려면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거나 등급이 높은 에스퍼여야 했다.
그리고 이하민은 거기에 해당 사항이 없었다.
나?
나는 원래 낮은 신분과 낮은 등급으로 인한 열등감 때문에 이하민을 괴롭히고 남다른 정치질로 사람들의 이목을 끌게 되는 캐릭터인데 지금은 그냥 ‘낮은 신분’, 거기까지만 전개가 진행된 상태였다.
그러니 나에 대한 대우도 이하민과 별다를 게 없었다.
게다가 끔살 루트를 피하기 위해 세력 자체에도 들어가지 않고 열심히 혼자 다니는 중이라 더더욱 그랬다.
그래서 이하민이 나에게 동질감 비슷한 걸 느끼는 모양인데 나에게는 그게 그저 부담스럽기만 하고 얘가 가까이 오지 않았으면 싶고 내 인생도 벅찬데 이하민까지 지고 가고 싶지 않은 그런 상황이었다.
“같이 앉아도 돼?”
도톰한 붉은 입술이 움직이며 듣기 좋은 미성이 흘러나왔다.
“여기가 다 내 자리냐? 비어 있으면 앉지 뭘 물어?”
나는 그를 제대로 바라보지도 않고 식판에 담긴 음식만 내려다보며 말했다.
오늘 메뉴로 나온 간장 닭 오븐 구이를 빨리 조져 주겠다는 일념으로.
“어…… 자리 있어?”
“비어 있는 거 보면 모르냐고.”
“아앗. 그럼 나 여기에 앉아도 돼?”
“된다는 말이잖아. 이하민. 도대체 같은 말을 몇 번 하게 해.”
결국 긴 한숨이 나왔다.
대화 몇 번 한 것만으로 이렇게 진을 빠지게 할 수 있다니.
진짜 피곤한 애네.
“아니. 나는…… 내가 앞에 앉는 걸 싫어할 수도 있으니까…….”
고개를 숙인 채 우물우물 말하는 녀석이 뜻하는 바를 모르는 건 아니다.
에스퍼들이 이하민에게 종종 그런 말을 하면서 짜증 낸다는 걸 소설을 봐서 알고 있으니까.
역겹고 토할 것 같으니까 꺼지라고.
특히 견인은 걸레 같은 주둥이를 벌릴 때마다 그런 말을 해 대면서 안 그래도 낮은 이하민의 자존감을 한 뭉텅이씩 깎아 내곤 했었지.
“앉아. 괜찮으니까.”
나는 식판에서 시선을 떼고 그를 보며 말했다.
빙의하기 전까지 남의 인생에는 관심이 없던 나였는데 이하민 때문에 강제로 성격 개조가 되어 가고 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비현실적인 미모였다.
아무리 필력이 좋은 작가라고 하더라도 이 아름다움을 표현할 방법은 없었을 거라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을 만큼.
“저, 정말…… 괜찮아?”
“그래. 괜찮으니까. 이하민, 제발 그냥 좀 앉아. 같은 말 여러 번 하게 하지 말고.”
“응. 그래. 미안. 내가 좀 짜증 나는 성격이지? 미안해.”
좀?
아주 어마어마하게 그런 것 같은데…….
가만히 있으면 식판을 든 채 계속 물어보기만 할 것 같아서 빨리 와서 앉으라고 하자 아주 잠깐 이하민의 눈이 곱게 접혔다.
“고마워. 너도 간장 닭 오븐 구이 좋아해? 다리 너 줄까?”
애가 어마어마하게 착한데?
가만히 보면 성격도 그렇게 나쁘지도 않은 것 같다.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아!
그러던 이하민의 얼굴에서 웃음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갑자기 그의 몸이 앞으로 기울며 식판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아아앗!!”
사방에 별별 희한한 능력을 가진 에스퍼들이 드글거리다 보니 이런 일은 아무렇지 않게 일어난다.
옆에서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니 갑자기 이하민의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했거나 그가 서 있는 바닥을 미끄럽게 했거나 하는 등의 이상한 방법을 쓴 듯했다.
에스퍼라면 그런 일에 재빠르게 대처가 가능하지만 일반인에 불과한 가이드라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십상이었다.
지금의 이하민처럼.
이하민은 자기가 당연히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채 움직이다가 넘어질 뻔한 상황인 거고.
‘아으, 씨!!’
맞은 편으로 돌아갈 틈도 없어 그대로 식탁에 손을 짚고 몸을 날려 식탁 위로 올라가 이하민의 몸을 잡아 주고 식판까지 잡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야. 저걸…… 잡는다고? 떨어지는 식판을?”
나는 최대한 무심하게 내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웬만하면 다들 모른 척하고 넘어가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나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식사에만 전념했다.
“고마워. 은우야. 나 때문에 네가…….”
“아니. 너 때문에 불편한 거 아무것도 없으니까 지금부터는 조용히 그냥 식사만 하자. 그렇게만 할 수 있으면 나는 정말 좋겠어. 알았지?”
“응!!”
그건 정말 잘할 수 있다는 듯이 숟가락을 집어 드는데 얘는 손도 어쩜 이렇게 예쁜지.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