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왜? 아닐 것 같아?”
“아니. 그 말이 맞을 것 같아서. 나도 그렇게 생각하거든. 끝이 없겠지. 이 세계는 이러다가 결국은 종말을 맞는 거겠지?”
그건 나도 모른다.
“이하민.”
그가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강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그래. 다른 사람들이 너를 함부로 대하게 놔두지 마. 너는 그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야.”
“…….”
누나의 소설에서는 몇 번이나 이하민의 잠재력에 대해 이야기가 나왔다.
그때마다 빨리 이하민의 잠재력이 터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소설의 중반이 넘도록 그 부분이 결국 터지지 않았다.
말이 중반이지, 그 소설은 끝내 완결이 되지 않았으니 이야기 전체로 봤을 때는 어느 부분에 해당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터지긴 하는 거냐고 누나에게 물었을 때 누나는 자기도 아는 바가 없다고 했다.
이 아이의 잠재력이 일찍 각성이 되기만 해도 좋을 텐데.
“고마워. 은우야. 나한테 이런 말 해 준 사람은 네가 처음이야. 다들 나를 보면 짜증만 냈는데…….”
이하민을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 하면서 계란프라이를 입에 넣었다.
갑자기 소설의 한 부분이 떠오른 것은 그때였다.
이상한 소설 좀 억지로 옆에서 읽어 주지 말라고 난리를 친 후 누나랑 대판 싸우고 한동안 누나가 소설을 읽어 주지 않았는데 나중에는 이하민이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서 내가 누나 소설을 찾아서 읽었다.
나한테 알려 준 제목 그대로 사이트에 올리고 있어서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의미 있는 묘사라고 생각한 적이 없었는데 소설에는 분명히 그런 내용이 있었다.
이하민이 에스퍼 각성 여부를 판독하는 장비를 지날 때 장비가 작동했다는…….
누구도 그것을 알아보지 못했고 이하민조차 그 사실을 알지 못하고 지나갔지만 그가 에스퍼라는 것을 나타내는 복선은 아니었을까?
이하민이 가이드이자 에스퍼라면 이 세계에는 다른 결말이 도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너무 허황된 생각 같기는 했지만 또 모르는 일이 아닌가.
“이하민. 나랑 훈련 같이 할래?”
내 말에 이하민의 눈이 동그래졌다.
“가이드는 따로 훈련을 안 받는데…… 우리가 받는 교육 말고는.”
“이건 내 생각인데 너한테는 공격 능력도 있는 것 같거든.”
“내가? 정말 그렇게 생각해?”
내가 하는 말은 터무니없는 거였다.
지금 단계에서는 아무 근거도 없고 지금껏 가이드이자 에스퍼였던 사람은 없었다.
그러니 내가 이 말을 하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비웃는 게 맞을 거였다.
그러나 이하민의 눈에는 기대감이 서렸다.
“그게 가능하면 좋겠다. 정말 가능하기만 하다면……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정말 좋겠다.”
“그러지 말란 법도 없잖아.”
“내가 할 수 있을까, 은우야? 훈련 말이야. 너랑 같이 훈련하는 거.”
“응. 나는 잘 가르쳐.”
그러자 녀석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공격 능력을 갖는 것보다 나랑 훈련하는 것 자체가 좋은 걸까?
“그래. 잘 부탁해. 그럼 언제부터 시작해?”
“나는 안 미뤄.”
“와. 부러운 성격이네. 나는 항상 미루는데.”
“나랑 같이 하면 미룰 수 없게 될 거야. 나는…….”
말을 하면 질리다고 하려나?
“뭔데?”
이하민이 기대된다는 얼굴로 물었다.
“나는 분 단위로 계획을 세워. 그리고 어떻게든 내가 목표로 세운 걸 반드시 해내려고 하고. 못하면 엄청 예민해지고 대부분은 해내.”
“와아…….”
이하민은 나와 함께 하기로 한 것이 과연 잘한 짓일까 하는 듯이 나를 보았다.
“혹시 지금이라도 안 하겠다고 하면 안 돼?”
“당연히 안 되지. 나 지금 계획 다 세웠어.”
“그래. 알았어.”
이하민이 흐뭇한 얼굴을 하고 웃었다.
안 하겠다고 하면 안 되냐는 말은 그냥 해 본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나한테 그 말 한 건지 물어봐도 돼?”
“왜겠어? 나 센터에서 얘기하면서 지내는 사람 많지 않아.”
“왜? 그건 아니지.”
그러면서 이하민이 웃었다.
견인도 있고 변태영도 있지 않냐는 말일 거였다.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그날은 S급 에스퍼들이 다 같이 무슨 작당을 한 건지 식당에 나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정말 살 것 같았다.
그 두 인간이 식당에 오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평화로울 수가 있다니.
우리가 왜 그동안 그 평화를 뺏기면서 살았어야 했던 건가 싶어 안타깝고 억울할 지경이었다.
“그런데 나는 에스퍼 훈련소에 못 갈 텐데.”
“그럼 내가 다른 곳으로 가면 돼. 혹시 너 잘 아는 곳 있어? 특별히 기구가 필요한 것도 아니라서 조용한 장소이기만 하면 되는데.”
“그런 장소는 있지만 정말 그래도 돼? 기구가 필요 없어? 어떻게 단련을 하는데?”
“나만의 방식이 있어.”
보면 아마 깜짝 놀랄 거다.
나도 모르게 웃었다가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자각이 다시 들었다.
피폐 소설 속 집착광공들에 둘러싸인 자낮수.
그 애를 지금 내가 너무 가까이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원작과 노선을 달리하고 있고 S급 에스퍼들에게 거리를 두려 하고 있기는 하지만 원작대로라면 그 주위에서 얼쩡대다가 죽는 건데…….
그런데 마냥 이하민을 모른 척할 수도 없었다.
그것 말고도 이유는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던전에서 나오는 괴수는 점점 강해지고 공략이 어려워진다.
S급 에스퍼 여러 명이 같이 출동하고도 공략하지 못하는 던전도 생겨나고 부상당하는 에스퍼도 속출한다.
꿈도 희망도 없는, 디스토피아에 준하는 이 세계에 누나가 준비해 놓은 희망은 어쩌면 이하민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세계가 멸망하면 나는 어떻게 될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누나는 알까.
자기가 만들어 놓은 설정 때문에 이 귀여운 동생이 여기에서 죽어 버릴지도 모른다는 걸?
내가 한 말 때문에 이하민은 다른 때에 비해 확실히 기분이 좋아 보였고 활기가 넘치는 듯했다.
“은우야. 요즘에는 정말 기분이 좋아. 너 때문에 밥도 잘 먹고. 사실 전에는 식당에 가는 게 무서웠거든. 내가 식당에 가면 사람들이 괴롭히고 옆에서 놀리고 그래서 조금만 먹고 도망치듯이 돌아가곤 했었어. 그래서 항상 속이 아프고 소화도 안 되고 그랬는데 요즘에는 너 때문인지 나를 괴롭히는 사람도 없고. 참. 방송실에 갔었는데 그냥 가라고 하던데 그것도 너 아니었으면 어림도 없었을 거야.”
이하민은 그 후에도 지난 일들을 계속 기억해 내며 고마워했다.
“나도 그래. 나도 고마워. 너 아니었으면 나는 말을 할 일도 없었을 거고 친구도 없었겠지. 혼자 훈련하는 것보다는 둘이 하는 게 좋은데 너랑 하면 도움이 될 것 같아.”
확실히 이하민에게는 기대되는 것이 있었다.
소설의 그것이 정말 복선이었는지, 이제 그것을 곧 확인할 수 있을 듯했다.
***
이하민이 나를 데려간 곳은 숲으로 들어가는 초입이었다.
거기에는 사람들도 오지 않았는데 이하민이 어떻게 그런 장소를 알고 있는 건지 알 것 같아서 좀 짠했다.
힘이 들면 남들이 돌아다니지 않는 그곳으로 와서 혼자 숨죽이고 있었을 듯했다.
“이하민. 나는 말이야. 지금 같은 가이딩 방법은 조금 바뀌어야 한다고 봐. 가이드가 가이딩을 해 줄 수 없는 상황도 있잖아.”
“그렇기는 하지. 그런데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아니야. 지금까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아서 그렇지 방법을 찾으면 어떻게든 찾을 수 있을 거야. 에스퍼에게 듣는 안정제 같은 걸 만들 수도 있을 것 같고. 지금껏 가이드들이 가이딩하는 거랑 가이딩에 의해서 에스퍼들이 안정되는 걸 봐 왔으면서 연구진들이 그런 걸 만드는 게 마냥 불가능하기만 했을까?”
“안정……제?”
소설에서 안정제는 몇 년 후에 나오게 되는 거지만 일단 이하민에게 말을 해 두면 개발이 앞당겨질 수도 있을 듯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이하민은 S급 에스퍼들의 전담 가이드고 S급 에스퍼들은 센터 내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무방하니까.
그리고 자기들이 아직 그 사실을 자각하지 못해서 그렇지 S급 에스퍼들 전원이 이하민을 좋아하고 있으니 이하민이 부탁을 하면 들어줄 가능성도 높았다.
안정제만 만들어진다면 던전을 처리하는 일은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
폭주로 죽어 가는 에스퍼 한 사람만 구할 수 있다고 해도 상황은 훨씬 유리하게 변하는 거였다.
“은우 너는 정말 대단하다. 나는 그런 생각은 해 본 적도 없는데. 당연히 가이드가 가이딩을 해야 에스퍼의 폭주가 멈추는 거니까 그렇게만 생각했어. 너는 정말 엄청나다.”
“마냥 불가능하기만 한 건 아닐 거야. 나 같은 하급 에스퍼가 말하면 귓등으로도 듣지 않을 거라 문제기는 한데.”
“그러게. 나도 마찬가지고…… 아쉽다. 상급 에스퍼들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아까워.”
이하민. 포기하지 마. 네 주위에 S급 에스퍼들이 드글거리는데 왜 그런 얼굴을 해?
그래도 일단은 이하민이 스스로 깨닫기를 바라며 입을 다물었다.
이하민은 이제 슬슬 뭔가를 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보았다.
“나는 뭘 할까? 체력 훈련은 어떤 식으로 해? 다른 에스퍼들이 하는 걸 본 적이 있기는 한데.”
“아. 네가 본 건 다 잊어버려.”
“응?”
“체력이랑 근성을 키우려면 마보(馬步)가 최고야.”
“……마보?”
“응. 기마 자세로 버티는 거.”
이하민은 자기가 잘못 들은 건가 하는 듯이 나를 보았다.
괜찮아, 이하민.
나는 다 이해해.
그렇지만 내 말을 믿는 게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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