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버스 이물질이 되어버렸다-12화 (12/137)

12화.

이틀 연달아 나온 게 미안했는지 던전은 한동안 얌전했다.

이하민은 여전히 근성 넘치게 훈련을 소화해 냈고 나는 녀석의 훈련 강도를 높여 주기 위해 비품실에 갔다.

‘역시 마음에 드는 게 없네. 주문 제작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마보와 달리기는 어느 정도 하게 된 것 같으니까 평소에도 늘 장착하고 다니면서 훈련이 될 수 있도록 특별한 선물을 준비해 주려 했다.

다행히 센터에서는 에스퍼에게 그런 쪽의 지원은 관대하게 해 주는 편이었고 약간의 자비만 부담하면 훈련 용품은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이 경우에는 제작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기다리는 보람이 있을 터였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야? 내가 길을 잘못 찾아왔나?’

이하민이 디바이스를 이용해서 장소를 찾아갈 수 있다고 알려 줬는데 나는 무협 게임 속에 있던 시간이 너무 길어서 그런지 그런 기술에 적응하는 게 어려웠다.

알지 못하는 곳에 이르고도 나는 조금 더 가다 보면 내가 아는 곳이 나올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영 안 되면 이하민에게 전화를 걸어 나를 데리러 와 달라고 해도 될 거라고 생각하며 우선은 내 힘으로 해결을 해 보고자 했다.

정처 없이 이어지던 걸음은 어느덧 나를 숲으로 인도했다.

평소에 이하민과 함께 훈련을 하곤 하던 숲의 반대쪽인 것 같았다.

더 이상은 스스로 내 숙소로 돌아갈 수 없겠다는 생각에 이하민에게 전화를 하려던 순간 어디선가 청명한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파가니니 카프리스 24번.

누군가 숲에서 휴식을 취하며 음악을 듣고 있는 모양이었다.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고 불린 파가니니의 카프리스는 고난이도의 다양한 기법이 요구돼서 연주가 어려운 곡이었다.

좋아하는 곡이 들려왔다는 이유로 나는 어느새 낯선 곳에 대한 불안함보다는 호기심을 안고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길지 않은 곡의 연주가 다 끝나기 전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서둘렀을 때 나는 숲의 공터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남자를 발견했다.

뒷모습이 보일 뿐이었지만 어깨를 덮으며 길게 흘러내린 머리를 보면서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심우진이 여기에는 왜……? 아니. 그보다 심우진이 이 정도였어?’

누나의 소설에도 이런 자세한 내용은 없었기에 나는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라고 해도 전혀 손색없을 정도의 연주에 깜짝 놀라 그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소리가 뚝 멈췄다.

그러고는 그가 천천히 나를 향해 돌아섰다.

“아아…….”

연주를 방해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너무 커서 저절로 앓는 소리가 나와 버렸다.

그는 무슨 일이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길을 잘못 들었다가 소리가 나서……. 좋아하는 곡이 나오길래 저도 모르게…….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있습니까? 여기가 내 사유지도 아니고.”

“그래도 연주하는 중이었는데 제가 방해한 것 같아서요.”

“상관없습니다. 방해받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누구인가 해서 돌아본 것뿐입니다. 이런 파장은 느껴 본 적이 없어서.”

파장?

내 파장이 왜?

그러고 있을 때 그가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라 캄파넬라.

연주를 하는 동안 그는 나를 바라보며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하민이 해 주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에스퍼들이 하는 말에 너무 주눅 들지 말고 그들이 폭력을 행사하면 나에게 말하라는 얘기에 이하민은 놀란 눈으로 자기가 맡은 에스퍼들은 자기를 때린 적이 없다고 했다.

나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자존심이 상해서 그러는 건가 하며 솔직하게 말하고 도움을 청하는 게 좋다고 하자 그도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그렇지만 그건 사실이라고 했다.

그러면 그동안 내가 알고 있던 건 뭐였던 건가 해서 혼란스러운 채로 정말이냐고 몇 번이나 확인을 했는데 이하민은 맹세도 할 수 있다고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S급 에스퍼들을 경멸하고 미워했던 게 미안해지는 순간이었다.

심우진은 연주를 마치고 바이올린과 활을 든 손을 내렸다.

“희한하네요. 파장이 참…….”

“어떤데요?”

“연주를 할 때 다른 사람이 있으면 예민해지는 편인데 편안하네요.”

“잘됐네요.”

잠시 침묵이 오갔고 그게 어색하다고 생각되려던 찰나 이하민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어디냐고 묻는 그에게 길을 잃은 것 같다고 하자 심우진이 말했다.

“숙소에 가야 하는 거면 같이 가죠. 나도 이제 돌아가야 하니까.”

어색할 것 같기는 했지만 이하민을 오게 하는 것보다는 그의 도움을 받는 게 나을 것 같기는 했다.

“그런데 은우씨도 센터에 온 지 꽤 된 걸로 아는데 이곳 지리를 아직 다 모르는 건가요?”

“아…… 네. 제가 잘 안 돌아다녀서…….”

내가 어느 정도로 안 돌아다니는 사람인지 알면 아마 깜짝 놀랄 거다.

그와 함께 가다가 마침내 내가 아는 곳이 나왔을 때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 알겠어요.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다가 다시 이어 붙였다.

“좋은 연주를 듣게 해 주신 것도 감사합니다.”

“나야말로요.”

멀리서 이하민이 나를 발견하고 달려왔고 심우진은 긴 다리를 휘적이며 다른 곳으로 사라졌다.

***

심우진을 다시 만날 일은 금방 생겼다.

심우진이 어떤 사람인지는 다음 던전이 나타났을 때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디바이스가 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나타났다.

“오늘은 나랑 같은 팀입니다. 여기에서 바로 출발하면 돼요.”

엉겁결에 나는 그의 차에 올랐다.

심우진은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보고 씽긋 웃었다.

햇빛 아래에서 그의 머리카락은 선연할 정도로 새카맣게 빛났다.

그에게서는 잘못 만들어진 사제 폭탄 같은 분위기가 풍겼다.

언제 터질지 알 수 없고, 모두의 규칙에서 어긋나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지금의 행동이었다.

던전이 나타났다고 해도 이런 짓을 하면 안 되고 센터의 통제와 지시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데 그는 먼저 나를 데리고 출발하고 그 후에 센터에 연락했다.

자기는 밖에 있으며 나와 함께 갈 거고 가까운 던전으로 바로 출발하겠다고.

그러면서 던전을 배당받았다.

“위험도는 몇 단계예요?”

그와 이상한 방식으로 던전에 와 버리는 바람에 나는 출동 전에 들었어야 할 것들을 전혀 듣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건 몰라도 됩니다. 내가 여기에 있으니까요.”

“…….”

놀라운 건 그런 말을 듣고도 놀랍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왜 아니겠나, 그가 심우진인데.

소설을 보는 동안 가장 이해되지 않았던 캐릭터가 심우진이었다.

다른 것도 다른 거지만 나는 누나가 심우진 캐릭터를 너무 날림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구도를 다공일수로 잡은 것 같은데 공을 둘로 할지, 셋으로 할지 결정을 확실하게 내리지 못하다가 어영부영 끼워 넣은 게 심우진이 아니었을까 했을 정도였다.

처음에 심우진은 서브 캐릭터나 엑스트라 정도로 출연을 했는데 주위에서 심우진을 좋아하는 사람이 의외로 많아지면서 너도나도 심우진 주식을 산다고 하자 누나가 혼란을 느낀 듯했었다.

뜻하지 않은 인기를 끌고 조연이 주연이 되고 원래의 주연은 쥐도 새도 모르게 하차하는 드라마도 있지 않았던가.

심우진은 그런 식으로 갑자기 배역이 커진 케이스인 것 같았는데 그래서 빌드 업도 제대로 되지 않았고 스토리가 진행될 때마다 급히 그에 대한 설정이 덧붙여지는 느낌이었다.

소설 속의 캐릭터가 그렇게 만들어지면 그 소설에 빙의한 사람에게 그는 폭탄과 다를 바가 없었다.

캐릭터가 그런 식이니 그가 할 일을 예측하기가 엄청나게 힘들었던 것이다.

나는 유독 심우진에 대해서 캐릭터에 일관성이 없다는 피드백이 자주 나왔었다는 것을 뒤늦게 떠올렸다.

이건 그냥 설정 붕괴라는 평가가 대부분이었는데 설정 붕괴 심우진과 함께 레이드를 해야 하는 내 운명이란…….

“나도 별로 설명을 들은 건 없는데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심우진은 내가 경직돼 있다고 생각한 듯 연거푸 말하고 바이올린을 챙겼다.

사람들을 대피시키고 던전 주위를 지키고 있던 에스퍼들은 우리가 그렇게 빨리 도착한 것을 희한하게 여기는 듯했다.

아무리 심우진이라고 해도 함께 출동한 팀원이 이렇게 적었던 적은 별로 없었는지 우리가 던전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미심쩍다는 듯한 시선이 계속 따라붙었다.

일단 이렇게 된 바에야 나도 어느 정도 실력 발휘를 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하며 그때부터는 정신을 집중했다.

던전에 들어가자 곧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괴수는 얼굴과 몸이 따로 구분되지도 않았고 겉을 둘러싸고 있는 피부의 상태도 기이했다.

불순물이 많이 섞인 용암이 흘러내리는 것 같다고 해야 할까.

얼굴이라고 할 것도 없는 부위의 괴상한 구멍에서 기다란 혀가 나왔고 가슴 부분이 벌어져 내장이 보였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모습을 상상해 낼 수 있을까 하며 진저리가 쳐질 정도였다.

그것은 확실히 그동안 내가 봐 왔던 다른 것들보다도 더 흉측한 형태를 하고 있었다.

몸에서 위험한 열기가 느껴졌는데 신체 강화를 하고도 쉽사리 주먹이나 다리로 공격을 하기가 어려울 듯했다.

닿기만 해도 몸이 녹아내릴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단순히 기분만 그런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심우진이 시험 삼아 던진 것 같은 돌이 형체도 없이 녹는 것을 보면서였다.

심우진도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나를 한 번 보았다.

“거리를 유지하십시오. 안전하게 있어야 합니다.”

괴수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고개를 숙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나 역시 공략법을 생각해야 했다.

그때 심우진이 바이올린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