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소설에도 그런 묘사가 있었다.
이하민이 도망치는 동안, 세 사람이 남긴 체액이 그의 몸 안에서 나와 다리를 따라 흘렀다는 묘사가.
그러고도 폭주가 멈추지 않아 흥분을 높이기 위해 숲으로 토끼몰이를 했던 것이다.
나는 그가 지금 그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거라고 생각하며 긴장했다.
어떻게 위로를 해 줘야 할까 해서였다.
그러나 이하민에게서 나온 것은 전혀 다른 내용이었다.
“S급 에스퍼들이 있기만 하면 나는 모든 던전을 다 공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날은 아니었어. S급 에스퍼들도 부상을 크게 입었어. 가이딩도 힘들기는 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믿고 있던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 것 같은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이하민은 그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무섭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서 나는 S급 에스퍼들이 나한테 야단을 치면 그게 고마워. 게이트가 나타나고 한동안 완전히 무기력해지고 겁을 먹은 것처럼 사람들이 넋이 나간 것 같았거든. 그때는 빨리 정신 차리고 전처럼 나한테 야단을 쳐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그래서 일부러 야단맞을 짓도 해 보고 그랬는데. 가이딩 호출이 오면 늦게 가고.”
그 말이 어이가 없었는데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하민에게 S급 에스퍼들은 제대로 길이 들지 않은 사냥개처럼 여겨질 수도 있었다.
더 위험한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켜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안심을 했다면 이하민을 이해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가이딩은 정말 힘들었었어. 다들 괴로워서 날뛰는데 제압을 하느라고. 미친 황소 위에 타서 문신을 새기는 것 같았다니까? 그래도 파장에 반응을 보여서 다행히 모두 안정이 됐었지.”
나는 그가 심우진을 가이딩하던 모습을 떠올렸다.
어쩌면 나는…….
내가 읽은 소설의 전연령 버전에 들어온 모양이다.
다른 가이드와 에스퍼 사이에는 심도 깊은 성적 접촉이 이루어지지만 이하민과 S급 에스퍼들에게는 그게 해당 사항이 없는 건가?
그때까지도 설마라고 생각했는데 이하민이 하는 얘기를 들어 보니 그게 맞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날 이후에.”
이하민은 장장 삼십 분 동안 쉬지도 않고 그 이야기를 했다.
자낮수 본연의 임무를 수행하느라, 아니 작가에 의해 그렇게 만들어져서 지금까지 다른 사람과 대화다운 대화를 하지 못하고 살다가 나와 친해지고 나서 이하민은 그동안 못 했던 말을 전부 하고 싶어진 것 같았다.
그나마 다른 때는 할 얘기가 별로 없어서 못 했는데 한 번씩 자기가 잘 아는 얘기가 나오면 정말 열성적으로 오래오래 했다.
나라면 그 이야기를 그렇게 오래 하지는 못했을 텐데.
게이트가 있는 던전이 나오는 바람에 에스퍼들 끔살당하고 가이드도 덩달아 개고생했지. 끝.
그러면 될 일을 이하민은 각자의 감정 표현과 디테일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말을 해 줘서 나는 그 시간 동안 각자의 삶을 대신 살아 본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덕분에 정말 정말 피곤했다.
앞으로 이하민과 더 가까워지는 것은 조금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심검을 쓰고도 이렇게까지 피곤하지는 않았는데.
‘……어? 그러고 보니까 심검을 썼는데 엄청 힘들지는 않네?’
그것도 신기하기는 했다.
심검은 원래 내공의 소모가 어마어마한 검술이라서 아무리 내공이 많고 무공의 수위가 높은 초고수라고 하더라도 심검을 한두 번 사용하면 내공이 바닥을 드러냈다.
날고 긴다는 사람들이 평생을 바쳐 수련을 해도 그 끄트머리의 단서도 찾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한 것이 심검이었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쌩쌩하다는 건 말이 안 되는데?
이 소설의 세계관이 무협 게임의 설정을 이긴 건가?
소설이니 작가신의 권능으로 모든 일이든 다 가능할 것 같기는 하지만 나한테는 현실이고 인생인데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내 목숨이 누군가 두드린 자판 몇 개로 좌우된다는 것도 정말 마음에 안 드는 일이다.
“너 안 힘들어, 이하민?”
이하민은 얘기를 하는 동안 계속 마보를 하는 중이었고 나는 얘가 힘들 때가 됐는데 잘 참는다고 생각하며 말했다.
“아아. 그래서 힘들었구나.”
녀석의 말에 다음부터는 이하민을 조심해서 다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워낙 근성이 강하다 보니 몸이 한계에 이르러 몸부림을 쳐도 그냥 자신의 의지로 버티는 듯했다.
“마보는 이제 그만해. 힘들겠다.”
“고마워, 은우야.”
“그럼 이제 달리기하자.”
“어? 어…….”
“내가 없을 때도 마보랑 달리기는 계속해. 그리고 며칠 지나면 그때부터는 통나무 들고 달리기를 할 건데 시간 있으면 네가 적당한 통나무 하나 구해 두고.”
이하민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왜? 싫어?”
“아니. 너 어디 가려고?”
아……. 놀란 부분이 통나무 들고 달리는 부분이 아니었나 보다.
“아니. 그래도 사람 일은 모르는 거잖아. 언제 어떻게 될지.”
“은우야…….”
이하민이 안타깝다는 듯이 나에게 다가와 내 손을 잡았다.
“놀랐구나. 그래. 놀랄 만하지. 심우진 에스퍼님이 같이 계셨으니까 네가 위험할 일은 없었겠지만 그래도 놀라기는 했을 거야.”
“……그래. 맞아.”
이하민이 그렇게 오해를 해 줘서 편했다.
“나도 많이 도울게. 은우야. 아. 그리고 내가 그 얘기했어. 안정제. 그랬더니 S급 에스퍼님들이 다 좋게 생각하시는 것 같았어.”
“그랬어?”
이하민이 신이 나서 설명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견인 에스퍼님에게 말했거든? 그랬더니 정말 좋을 것 같다고 하시는 거야. 그렇게 하면 다른 에스퍼님들에게는 안정제를 먹이고 나는 견인 에스퍼님만 전담으로 가이딩을 하면 되겠다고. 다른 에스퍼님들한테 말했더니 다 똑같이 말씀하시더라.”
하여간. 생각하는 게 어떻게 다 그렇게 똑같은지 그냥 헛웃음이 나왔다.
“정말 좋은 생각 같았는지 벌써 센터 연구관들한테 말을 하셨다고 하던데? 센터 연구관들도 S급 에스퍼님들이 말하는 건 그냥 흘려듣지 못하는데 세 분이 압박을 해 버렸으니까 아마 결과물이 나오기는 할 것 같아. 뭐가 됐건 자기들이 시도는 했다는 걸 보여야 할 거거든.”
대단했다…….
나는 일이 그렇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안정제가 생기면 확실히 좋을 것 같아. 던전에서 여기까지 오다가 폭주해서 사고가 나기도 하잖아. 안정제가 있으면 그런 일은 막을 수가 있겠지.”
이하민은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그 생각을 하는 듯했다.
가이드가 현장에 가서 대기하면 되겠지만 가이드마다 가이딩해야 하는 에스퍼가 많고 던전은 분산되어 나오다 보니 그 문제가 쉽지 않았다.
만약 이하민이 담당하는 S급 에스퍼가 한 사람이었다면 그가 가는 던전에 이하민도 같이 가서 현장에서 가이딩을 해 줄 수도 있었겠지만 세 사람이라서 같이 현장에 나가지 못했다. 어쩌면 이하민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제 달리기를 시작하라고 하자 이하민은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나만 가는 거지?”
“응. 당연하지. 나는 지금 힘들어.”
“그래. 알았어. 그러면 훈련 시작할게.”
“수고해.”
손을 팔랑팔랑 흔들어 주고 이제야말로 나도 쉴 수 있겠다고 생각하며 숙소로 돌아가려는데 심우진이 다시 나타났다.
그가 왜 그곳에 나타났는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다시 한번 말을 해 보고 싶은 거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게 나 때문이라는 결론에 이르렀을지도 모르고.
이제 왔다는 것은 그사이에 나에 대한 것을 조사를 해 봤다는 걸 수도 있고.
‘그런다고 해도 특별히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었을 텐데?’
그러나 몇 가지 신경이 쓰이는 것은 있었다.
의도치 않게 내 능력을 발휘해 버린 일들이 전에도 몇 번 있기는 했던 것이다.
‘역시 그게 문제야. 병이야, 병.’
그래도 내가 모른 척하면 심우진도 별수 없을 것이다.
심증은 있다고 해도 내가 아니라고 하는데 어쩔 건가.
그러나 나에게 다가온 그는 그런 얘기는 전혀 하지 않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에 자주 오는 모양이죠? 센터에 살면서 정작 여기에는 와 본 적이 없는 것 같네요. 아예 이쪽으로는 와 본 적이 없어서. 은우씨를 찾으러 왔다가 좋은 곳을 보게 돼서 기분이 좋군요.”
“…….”
그 말을 들으며 나는 한 가지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그가 숲에 가 본 적이 없다면 소설의 첫 장면에 나오는 일은 이 세계에서 일어난 적이 없는 것이다.
심우진이 거짓말을 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굳이 그런 것으로 거짓말을 할 것 같지도 않았다.
내가 뭘 알고 있는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혼자 명상하기에 좋은 곳입니다. 다니는 사람도 없고요. 저는 많이 힘이 들어서 이제 들어가서 쉬려고 합니다. 에스퍼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인 후에 지나가자 심우진도 나를 잡지는 못했다.
숙소에 오고 나서 나는 소설의 결말을 떠올려 보려 했다.
어차피 완결이 나지 않은 것이라 엔딩은 알지도 못한다.
그래도 내가 빙의한 서은우라는 캐릭터의 엔딩은 확실하게 알고 있었는데 이제 그 부분만큼은 조금씩 희망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서은우 개인의 문제를 극복해도 이 세계가 멸망하면 끝인데. 뒤로 갈수록 전체적인 분위기가 피폐했는데……. 긴장감을 고조시키려고 그런 건지는 몰라도 알 수 없는 던전이 나타났고 괴수를 해치우는 일은 점점 더 어려워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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