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알았어. 나도 안 가지. 나도 내 목숨이 아깝고 죽는 게 싫어서 이러는 거니까. 서은우 에스퍼가 여기에 남겠다고 하면 둘 중 더 안전한 곳은 여기가 되겠지. 대신 나를 잘 지켜 줘야 해.”
그의 목소리가 유쾌하게 들렸다.
그가 잠시 눈을 감더니 처연하게 눈을 떴다.
자꾸만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었다.
분명히 화가 나 있는 것 같은데.
“하, 젠장. 뭐라고 말하지?”
나 때문에 일이 꼬인 건가?
그냥 가면 되지 왜 나 때문에 안 가?
아니지. 가면 안 되는 거지. 그래도 이 인간이 여기에 있어야 그나마 센터의 안전을 지킬 수 있을 텐데.
“서은우. 요물이네.”
놀고 있네.
누굴 보고 요물이네 마네야?
저렇게 퇴폐적인 눈을 한 채 속눈썹을 들어 올리면서.
***
상급 에스퍼가 탈주하는 일이 기어이 벌어졌다.
그러나 센터 내에서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아직까지는 탈주한 사람의 수가 많지 않으니 그냥 모르는 척하는 게 낫다고 판단한 듯했다.
원작 소설과 비슷한 전개였다.
센터의 연구진과 행정반은 게이트가 나왔던 던전이 저절로 사라지기 전에 조사를 하느라고 바빴고 S급 에스퍼들도 거의 그곳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말은, 내가 센터에서 엄청나게 자유롭게 활개를 치고 돌아다닐 수 있다는 의미였다.
숲의 초입은 이제 우리의 아지트가 되어 있었고 나는 그곳에 선베드까지 갖다 놓은 채 이하민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며 그를 구경했다.
처음에는 그냥 몇만 원짜리 선베드를 가져다 두었는데 그걸 본 변태영이 무슨 짓이냐면서 없애 버리더니 기백만 원짜리 초호화 선베드를 가져왔다.
그건 절대 그런 곳에 어울리지도 않았는데 아니 무슨 선베드가 천만 원에서 겨우 몇만 원 빠지는 가격이야?
돈은 많이 버는데 막상 쓸 곳이 없다 보니 머리가 돌아 버린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자주 쓰지도 않을 건데 왜 그런 데에 돈을 쓴다는 건가 하면서 속으로 엄청 욕을 했는데 이게 또 쓰다 보니 편하고, 기왕 돈 주고 샀는데 애용을 해 줘야 하지 않겠나 해서 정말 야무지게 쓰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쪽쪽 빨며 이하민을 지켜보고 있었더니 그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은우야. 책을 보거나 다른 데 좀 보고 있으면 안 돼?”
“왜. 쉬게?”
“아니. 나는 잘할 건데 네가 너무 나를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눈으로 보니까 좀 부담스러워서.”
그러는 이하민의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마보는 이제 아주 간단하게 하기에 팔을 들어 올리게 하고 이틀 후부터는 고리를 팔에 끼고 하도록 했다.
“흐으윽……!!”
파들파들 떨며 눈을 적시면서 애처로운 소리까지 내는 이하민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흔들리는 때가 많았다.
“하민아. 그만할래?”
“아니이……!”
“그럼 내가 다른 데로 갈까?”
“아냐. 안 지루하면 거기에 있는 게 나는 좋아. 좀 전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하민아. 내가 너 괴롭히려고 이러는 거 아니라는 건 알지?”
“그럼. 당연하지. ‘게이트’가 나와서 그런 거잖아. 네가 나를 얼마나 걱정해 주는지 알아. 가이드도 강해져야 한다는 말도 맞는 것 같고. 그래서 다른 가이드들한테도 같이 훈련을 하자고 해 봤는데 상대도 안 해 주더라고.”
S급 에스퍼들의 대우가 이상하게 달라졌다 뿐이지 이하민이 센터에서 받는 대우는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에스퍼는 물론 가이드들도 이하민을 좋아하지 않았고 자기들끼리 여전히 작당을 해서 괴롭히는 듯했다.
내가 있을 때도 그런 시도가 있는 걸 보면 혼자 있을 때는 얼마나 더할지 상상도 안 된다.
그래도 본인은 현재 생활이 퍽 마음에 드는 것 같았다.
“다음에는 에스퍼님들한테 말하고 너도 던전에 같이 가 볼래, 이하민?”
“나도?”
“응. 누가 들어줄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한 사람은 들어주지 않을까?”
“나를 왜? 내가 가까이에 있다가 바로 가이딩을 해 주면 좋을 것 같아서?”
이하민은 내가 그 말을 해 준 게 좋은 듯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힘들어 죽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더니 순식간에 표정에 피었던 것이다.
그런 이하민을 보면서 나는 그동안 내가 잊고 있던 것을 떠올렸다.
소설을 보는 동안 나는 누구보다 이하민을 응원했었다.
그의 안타까운 상황이 속상하고 그가 받는 가혹한 처우가 화가 나서, 너는 그런 대우를 받을 아이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었는데 막상 소설에 들어왔을 때는 내가 하필 이하민과 적대적인 관계인 데다 목숨까지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에 그런 마음은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야. 이하민.”
“응?”
“너는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존재야.”
소설을 보면서 꼭 들려주고 싶었던 말을 했다.
“…….”
그러자 이하민의 얼굴에 홍조가 깃들었다.
와…….
이런 말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었던 거네.
아무래도 나 같은 사람은 이런 말을 하는 게 아닌 것 같다.
너무 어색해서 금방 후회가 돼 버렸다.
그래서 그냥 입을 다물고 싶어졌는데 이하민의 눈을 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막연한 말로 희망을 주느니 그 자신에게 확신을 심어 주고 싶기도 했다.
“이하민.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건 알지?”
“그럼. 당연하지. 너 같은 사람은 없어. 너는 센터에서 최고야. 나는 사실 너는 S급보다 더 높은 에스퍼일 거라고 생각해.”
어! 이 자식 통찰력이?!
“그럼 내가 하는 말도 믿는 거지?”
“당연하지, 은우야.”
“이하민. 너는 가이드지만 가이드 능력보다 더 강한 공격 능력을 갖고 있는 것 같아.”
“……어?”
웬만하면 내가 하는 말을 다 믿어 주고 싶은 것 같지만 아무래도 그건 좀 어려웠을까.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일단 한번 말은 하고 싶어서 하는 것뿐이니까.
그리고 일단 힘들게 말한 김에 다시 한번 확실히 말해 주었다.
“너는 에스퍼와 가이드의 능력을 같이 각성한 것 같아. 단지 아직 에스퍼로서의 능력이 발현되지 않은 것뿐인데 그것도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 같아.”
이하민이 웃었다.
이렇다 저렇다 말은 하지 않고 그저 웃기만 했다.
이하민이 내 말에 대해서 뭐라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
이하민과 함께 느긋하게 식사를 하고 숙소에 돌아온 나는 작전을 세웠다.
이제부터는 S급 에스퍼들을 공략해야 하는데 그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해서.
이하민을 던전에 데려가 달라고 하면 그 말을 들어줄까?
누가 가장 만만할까…….
먼저 견인을 노려 볼까?
말을 들어주지 않으면 센터를 탈주하려고 하는 계획을 폭로해 버리겠다고 협박을 할까?
너무나 나다운 발상이었지만 그래도 일단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한번 기회를 줘 보자고 생각했다.
흔쾌히 허락하는 인간이 있을지도 모르는 것 아닌가.
그런 사람이 있으면 이하민이 얼마나 좋아할까.
그동안 바닥을 기던 자존감이 완전히 회복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 좋아. 먼저 다른 사람들한테 말을 해 보고 안 되면 최후에 견인을 협박하자. 그럼 변태영한테 말을 해 볼까?’
아무래도 심우진은 생각이나 행동을 파악하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그나마 변태영이 나을 것 같았다.
그렇게 마음을 먹고 잠을 청하며 누워 있었다.
오랫동안 아무 일도 없었고 S급 에스퍼들도 우리를 귀찮게 하지 않아 불안할 정도로 평화로웠다.
그동안 얼마나 시달렸으면 너무 평화롭다고 잠이 안 올까.
금방 또 다른 생각들이 떠올랐다.
‘뭐라고 말을 해야 변태영이 이하민을 던전에 데려가 줄까? 이하민을 싫어하는 것처럼 하기는 해도 사실은 전부 다 집착광공들이니까 이하민이 부탁하면 들어주겠지?’
처음부터 그랬지만 나는 에스퍼와 가이드들의 관계가 이해되지 않았다.
이 세계에서 가이드의 존재가 얼마나 중요한데 가이드들에 대한 처우가 이렇게 열악하다는 건가 해서.
누나에게 아무래도 그건 좀 이상한 것 같다고 여러 번 말을 해 봤었는데 그때마다 누나는 네가 뭘 아냐는 말만 했었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보니 확실히 이해가 됐다.
가이드들은 권력자의 장난감 같은 존재였다.
아니. 장난감이라면 함부로 할 수 없겠지…….
그보다는 권력자의 창부 같은 존재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이하민의 가이딩 방법은 특별한 것 같지만 그의 에스퍼들이 그 사실을 말하지 않는 한 다른 이들이 그것을 알 방법은 없었다.
그러니 세 명의 에스퍼를 전담하는 이하민에 대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지는 보지 않아도 훤했다.
겉으로는 말을 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하민을 멋대로 오해하고 속으로 비웃고 있는 것이다.
‘겉으로도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S급 에스퍼들이 정확하게 말을 해 주면 이하민이 그런 대우를 받지는 않을 텐데.
‘나도 직접 보기 전까지는 이하민의 가이딩이 특별하다는 걸 몰랐지.’
어쨌든 이제부터는 이하민을 잘 가르쳐서 잃어버린 자존감도 회복시키고 계략수로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것이다.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나 이거 진짜 완전 잘할 것 같아!!’
너무 의욕이 타오르는 바람에 잠이 다 달아났다.
그러다 잠을 완전히 설치고 늦잠을 잤다.
***
이하민이 식당에서 혼자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기다릴까 봐 서두르는 와중에, 뒤에서 찾고 있던 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이하민이 제대로 뛰지도 못하고 다리를 질질 끌고 왔다.
무슨 일 있냐고 물으려다가 내가 한 짓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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