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머리를 말리고 제복으로 갈아입고 나가자 시간이 아슬아슬했는데 간신히 내가 정한 시간 안에 정문 앞으로 갈 수 있었다.
변태영은 근사한 차 앞에서 모델처럼 서 있었다.
한국에 몇 대 없다는 차였는데 변태영에게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었다.
훈련장에서도 봤지만 자연광을 받으며 그런 포즈를 하고 서 있는 것을 보니 숨이 멎을 것처럼 멋있다는 표현이 그대로 딱 들어맞을 듯했다.
소설 속에서도 그의 잘생긴 외모를 설명하느라 여러 문단을 할애했지만 이렇게 보고 있노라면 그 설명으로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가 나를 보더니 시계를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지.”
차에 타자 그는 능숙하게 거리를 질주했다.
“꼭 한번 말을 해 두고 싶었는데.”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화려한 거리를 구경했다.
센터 밖으로 나온 건 오랜만이었다.
‘와. 저런 건물도 있었어? 저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엄청 예쁘다. 거리 자체가 고급스럽네.’
“듣고 있나, 서은우?”
고개를 뒤로 돌려 가며 멀어져 가는 건물들을 구경하고 있었더니 변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어. 네.”
“집중해 주면 좋겠군.”
“네. 죄송합니다.”
“그래. 한번은 얘기를 하고 지나가려고 했는데 이하민 가이드는 서은우도 알다시피 좀 특별해. 가이딩 방식이 독특하지. 보통의 다른 가이드와 달리 성적인 접촉은 거의 하지 않아. 손을 잡거나 포옹하는 정도로만 해도 파장이 가라앉지. 파장이 위험 수치에 이르면 에스퍼만 상의를 벗은 상태에서 이하민이 손을 대 줘. 그러면 우리 파장이 안정되지.”
“……네.”
“그동안 폭주 직전까지 간 적도 있고 몇 번은 폭주한 적도 있었는데 이하민은 그때마다 그렇게 가이딩을 해 줬어. 키스도 한 적이 없었지. 점막 키스는 물론이고 입술끼리 맞닿은 적도 없었어.”
그런데 그걸 왜 나한테 말하는 걸까.
다른 에스퍼나 가이드들한테 말하면 더 좋을 텐데.
그러면 이하민에 대한 오해가 사라질 것이다.
“그날 싸움이 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었어요. 에스퍼들이 이하민 가이드에게 저급한 말을 했어요. 그러면서 이하민 가이드를 붙잡으려고 했는데 이하민 가이드가 피하니까 화가 나서 그렇게 된 거였어요. 저는 S급 에스퍼님들이 그 이야기를 분명히 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쉬운 문제는 아니야. 다른 가이드들은 실제로 그렇게 가이딩을 하는데 그러면 그 사람들의 가이딩은 어떻게 되는 걸까. 안 그래?”
그런 생각을 해서 그런 거였다고?
나는 정말 그동안 나 혼자서 그들을 오해한 건가 해서 혼란을 느꼈다.
“정말 그런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이하민은 다른 가이드와 다르다. 다른 가이드와 달리 키스도 하지 않고 성적인 접촉도 없이 가이딩을 한다. 그렇게? 이하민 가이드를 부각시키기 위해서 다른 가이드들이 시종 노릇을 해야 하는 건가?”
“…….”
그의 얘기를 거듭 듣고 나자 그게 쉽게 생각할 일이 아니라는 걸 알 것 같았다.
“그래도 서은우가 이하민이랑 친하게 지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우리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었거든. 게이트가 나타난 후로 우리는 벽에 부딪쳤어. 그때…… 던전에서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 했던 것 같아. 겁이 나더군. 언제든, 어떤 던전이든, 어떤 괴수든 겁나지 않는 것처럼 굴고 싶은데 그렇지 못했지.”
그가 내 앞에서 그렇게 깊은 속내를 드러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에 어리둥절해졌다.
“우리와 있는 시간을 이하민이 겁낸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이하민까지 챙길 여력이 없었어. 많이 힘들어한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말하는 재주도 없었고. 모두 마찬가지였을 거야. 그래서 서은우에게 고마웠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언어를 알고 그 녀석이랑 소통하는 것 같아서 조금 반갑기도 했어. 서은우랑 다니면서 그 녀석. 많이 밝아졌잖아.”
그 말까지 들었을 때는 정말 놀랐다.
도대체 소설의 내용이 얼마나 바뀐 거야?
세계관이나 다른 것들은 거의 그대로 흘러가는 것 같은데 공수의 관계성은 완전히 갈아엎은 건가?
놀라운 얘기는 계속되었다.
아직 확인이 되지 않았고 그의 얘기만 들은 거지만 만약 변태영이 하는 말이 사실이라면 그동안 나는 S급 에스퍼들에 대해 정말 많은 오해를 한 게 되었다.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건지, 얼마나 잘못된 건지 의아해하는 동안 차가 서서히 멈췄다.
화려한 건물이 가득 들어선 거리 앞이었다.
인파가 북적였고 곳곳에서 음악이 흘러나왔다.
도시의 사람들은 이렇게 살고 있구나.
던전이 나타났다고 이들의 삶이 멈춘 것은 아니구나.
에스퍼들의 활약으로 이들은 내일이 올 거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삶을 즐기고 있구나.
그런 생각들을 하며 차에서 내리자 거리를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를 보았다.
센터의 제복이 그들의 눈길을 끈 듯했다.
그리고 곧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변태영이다……!”
“세상에! 진짜 변태영이야!”
몇몇이 외치자 점점 더 많은 사람이 돌아보았고 순식간에 사람들이 우리를 에워쌌다.
환호하며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고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졌다.
연예인의 인기를 방불케 했다.
그러는 동안 변태영은 싸늘한 표정을 한 채 나에게 다가와 어깨 위로 팔을 들어 올렸다.
금방 내 어깨에 내려올 거라고 생각했던 손은 어깨에 닿지 않았다.
팔만 들어 나를 보호하면서 걷는 듯했다.
아무리 S급 에스퍼라고 해도 일반인을 상대로 능력을 사용해 위해를 가하는 일은 허용되지 않았는데 그 때문에 그는 일을 키우지 않기 위해 애쓰는 듯했다.
그렇게 그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 들어간 곳은 조용한 레스토랑이었다.
예약이 되어 있었는지 직원이 능숙하게 우리를 맞이했다.
선택된 소수만 들어올 수 있을 것 같은 곳이었는데 그 안에 있던 사람들도 변태영의 등장에 관심을 보였다.
그들 자신이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화제의 중심에 설 만한 인물들임에도 변태영을 보고는 조금이라도 알은척을 하고 싶어 전전긍긍하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새삼 변태영이 어떤 사람인지 알 것 같았고 S급 에스퍼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도 실감이 났다.
자리에 앉자 따로 주문을 받지도 않고 서빙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화려한 플레이팅이나 맛 좋은 요리, 훌륭한 서빙에 정신을 쏟을 여유가 없었다.
곧바로 나온 그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게이트’가 나온 던전을 조사하면서 궁금증이 생기더군. 우진 형은 공치사를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자기 공적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사람도 아니지. 자기가 한 일이면 자기가 했다고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야. 그런데 그건 자기가 한 게 아니라고 확실히 말하더군. 전력에 대한 건 함부로 거짓말을 하면 안 되는 거니까. 우리는 누가 가장 실력이 좋은지 겨루는 게 아니라 다음에 게이트가 나타날 때 대응할 방법을 찾아내야 하는 거라서 말이지.”
아무래도 이번에는 그냥 모른 척 지나간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이야기를 한 후 그는 한동안 말을 잇지 않았다.
이번만큼은 확실히 대답을 듣고야 말겠다는 굳은 의지가 엿보였다.
식사를 하는 동안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고문이 따로 없었다.
고기가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겠다.
‘하…….’
그래도 아직은, 그런 말을 왜 나한테 하는지 모르겠다는 투로 식사에 열중했다.
결국 그가 물었다.
“서은우. 너는 누구지?”
지평선을 물들이는 황혼처럼,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일렁였다.
“몰라서 물으신 것 같지는 않지만 다시 말씀드리자면 저는 D급 에스퍼 서은우입니다.”
그 말에 그가 나를 바라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나오겠다는 말이지.
나를 보는 그의 눈에는 그 정도의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그 후에도 그는 여러모로 나에 대해 알아보려는 듯 많은 질문을 했지만 나는 매번 같은 식의 답변밖에 할 수 없었다.
게이트를 없앤 게 나라는 걸 밝히고 허황된 환호를 받으며 모두를 대신해 순교하듯 최후의 던전으로 들어가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다.
모두가 목숨을 바쳐 싸우는 동안 그들을 돕는 것이야 그렇다 쳐도 적어도 나 혼자서 인류의 운명을 짊어질 생각은 없었다.
영웅이라는 칭호를 얻는 대신 다른 사람의 인생과 평화로운 삶을 책임져야 하는 그 호구짓은 무협 게임에서 한 번 했으면 충분했다.
“즐거운 시간이었으면 좋겠군. 다시 오고 싶다고 생각하면 좋겠어. 만약 그렇다면 자주 오지. 서은우.”
식사를 마친 나에게 그가 한 말이었다.
“신기한 경험이었지만 한 번이면 족한 것 같습니다.”
설핏 묻어났던 기대감이 스르륵 무너지고 그가 피식 웃었다.
“그래. 그렇게 알도록 하지.”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는 이하민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정확히는 이하민이 말한 안정제에 대한 얘기였다.
“그 안정제 말인데. 왜 진작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싶어. 하긴, 그동안은 센터의 연구관들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걸 몰랐으니까.”
“진전이 있다고 하던가요?”
“그런 것 같더군. 상용화까지는 시간이 걸리는 모양인데 그래도 최대한 서두르는 모양이야. 점점 안정제의 성능을 개선할 수 있을 것 같아. 지금은 D급 가이드가 손을 잡고 파장을 안정시키는 정도의 효과라고 하는데 일단 연구관들 의욕이 대단해. 나중에는 A급이나 S급 가이드의 가이딩 효과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
“잘됐네요.”
“그런데 이하민에게 왜 그렇게 잘해 주지? 그러는 걸 보면 희한해. 원래 성격이 그러면 그래서 그런가 보다고 생각을 하겠는데 사람들이랑 잘 어울리는 성격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잘해 주는 사람도 아니잖아?”
아무리 내가 그렇다고 해도 그 지적을 변태영에게 듣고 싶지는 않았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