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그 자리에서 눈을 감자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도 심우진이 만들어 내는 것인 듯했다.
단순히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바람까지 일으키는 것에 놀라고 있을 때 열기까지 느껴졌다.
그건 확실히 더 놀라웠다.
후두둑 거리는 소리와 함께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갑자기 먹구름이 빠르게 몰려오다가 번개가 내리꽂혔다.
나는 나를 향해 내리치는 번개를 피해 몸을 날렸다.
번개는 그대로 거대한 파충류로 변했고 내가 몸을 피하고도 몇 번이나 나를 쫓아왔다.
신체 강화로 이리저리 피한 덕에 공격에서 벗어났지만 확실히 심우진의 공격은 경이로운 지경이었다.
그것이 사라진 것은 심우진의 환상이 시작되고 거의 삼십 분이 지났을 때였다.
환영이 사라지고 나는 내 앞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하고 서 있는 그를 보았다.
그러나 그의 얼굴을 보고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그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지금 혹시 힘드세요, 에스퍼님?”
“……네?”
그는 내가 그 말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많이 힘들지 않으면 제가 몇 가지만 말씀드려도 될까요?”
“네.”
그는 놀라는 것도 지쳤다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 환영을 만들 때 어느 정도나 힘이 소모되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건 영업 비밀과 비슷한 것일 수도 있을 것 같았지만 만약 그가 말을 해 준다면 그를 위해 훨씬 더 효과적인 조언을 해 줄 수 있을 것 같아서 물었다.
심우진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강도를 높였습니다. 위험도가 높은 던전에서나 사용하는 강도였습니다.”
그렇다는 말이지.
아주 나를 죽이려고 그런 걸 수도 있겠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벼락을 칠 때는 힘이 더 들었어요?”
“그럼요. 당연하죠. 마지막에 사용한 건 가장 위험도가 높은 던전을 공략할 때 사용하는 강도였습니다.”
“…….”
“……나도 모르게 전력을 다했네요. 미안합니다.”
그 상황에서 순순히 사과를 하는 것도 웃겼다.
“그런데 은우 씨가 워낙 아무렇지 않게 피하기에 혹시 잘 안되고 있는 건가 해서 그랬어요.”
믿어 달라는 듯한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느낀 걸 말씀드려도 될까요?”
“예.”
“좀 전의 공격은 너무 소모적인 느낌이 컸어요. 지금까지 다른 괴수들이 그 공격에 당했다고 해서 앞으로 다른 괴수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건 너무 낙관적인 것 같아요. 너무 극심한 고통을 겪으면 죽음으로 피하고 싶다는 것도 에스퍼님의 판단이고 저는 그런 식으로 공격을 하면 안 될 거라고 생각해요.”
처음에는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일단 들어나 보자는 듯했던 그의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졌다.
나에게 그런 말을 듣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었을 것이다.
나도 누군가 내 영역에 훅 들어와서 이건 잘못하고 있는 거라고 말을 하면 당연히 기분이 좋지 않을 터였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겠습니까?”
심우진은 화를 내는 대신 나에게 물었다.
“에스퍼님이 아니면 할 수 없는 능력이에요. 그 능력으로 괴수를 좀 더 효율적으로 공격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괴수에게 환영을 보게 하고 정해진 자리로 오도록 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정해진 자리요?”
“네. 다른 에스퍼들과 같이 공격을 하는 거예요. 예를 들어서 저는 신체 강화자지만 검을 사용해서 괴수를 죽일 수도 있어요. 그래도 던전에서 날뛰는 괴수와 직접 붙어서 싸우려면 힘이 들기는 할 거예요. 그런데 에스퍼님이 괴수의 움직임을 봉쇄해 주고 제가 원하는 곳으로 괴수를 끌고 온다면 저는 그 자리에서 집중하고 있다가 공격을 성공시킬 수 있을 거예요.”
그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어떤 식으로 하면 괴수를 몰 수 있는데요?”
“눈앞에서 바닥이 꺼진다고 생각해 보세요. 저쪽부터 갑자기 바닥이 꺼져 가기 시작해요. 빠르게요. 그러면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죠.”
심우진의 눈이 빛났다.
어떻게 해야 할지 떠오른 듯했다.
“지금 다시 한번 해 볼까요, 은우 씨?”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곧바로 연주를 시작했다.
환영을 직접 보면 죽을 수도 있다고 걱정하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진 후였다.
그는 나를 괴수라고 생각하는 듯 내 앞의 지형을 바꾸는 것에만 중점을 두었다.
“조금 더 빠르게 해 보세요. 그리고 이 정도로 땅이 꺼지면 위기감이 안 들어요. 확 꺼져야죠. 확. 땅이 꺼지면서 그 안에 있던 용암 같은 게 확 튀어 오르고 그게 닿는 곳이 녹아 버리는 효과는 혹시 못 내나요?”
나는 그가 보여 주는 환영을 보며 주문했고 심우진은 그것들을 해냈다.
그가 괜히 S급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속도만 빠르게 해 보죠. 뒤로 물러서지 않으면 안 되도록요.”
심우진은 내가 말하는 대로 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뒤에도 제한을 두면 좋을 것 같아요. 벽이 있는 것처럼요. 그러면 움직일 수 있는 장소가 정해질 테니까 공격을 하기가 쉬울 것 같은데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뒤에 벽이 생겨났다.
“아예 앞이 절벽인 거로 해도 될 것 같아요. 그러면 피하지도 못하고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심우진은 내가 말하는 대로 그곳을 깎아지른 절벽으로 만들었다.
이제 나는 끝도 보이지 않는 절벽을 앞에 두고 뒤까지 가로막힌 곳에 갇혀 있었다.
그것이 허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한 발을 앞으로 내딛을 생각이 안 들었다.
‘그래도 한번 해 봐?’
그러고는 허공에 발을 디뎠다.
한 발을 내밀고 다른 발까지 뗐을 때.
나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환영이니 원래 그렇게 되는 게 맞기는 하지만 오히려 그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심우진은 내 발을 보면서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린 것 같았다.
“그만할까요?”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환영이 사라졌다.
내가 스스로 그의 환영을 찢고 나올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는 것이 그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서 기다렸다.
심우진과 마주했을 때 그는 한껏 고무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것 같아요. 생각할 게 엄청 많아졌어요.”
그라면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빨리 던전이 나오면 좋겠네요. 아예 게이트도 나오면 좋겠어요.”
“그러면 에스퍼님은 죽을 텐데요?”
아……. 너무 솔직하게 말했나?
심우진은 한숨을 푸욱 쉬었다.
나는 검증된 D급 에스퍼인데 나에게 그런 말을 듣는 게 자존심이 상했을 것이다.
“한 번 더 해 볼까요?”
심우진은 나를 데리고 연습을 하는 게 좋은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를 상대로 연습을 하면 뭘 봤는지 알려 줄 수도 있고 서로 얘기를 할 수 있어서 도움이 될 터였다.
“그런데 훈련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능력을 많이 사용하면 파장이 위험해지지 않아요?”
내가 말하자 그도 아차 싶은 듯 자신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더니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희한하네요. 상당히 능력을 많이 써서 이 정도면 정말 위험해야 하는데요. 전에 이하민 가이, 아니. 에스퍼의 방에 찾아가서 가이딩을 받았을 때보다도 지금 사용한 능력이 훨씬 더 큰 것 같은데 말이죠.”
정말 그런 거라면 지금부터는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될 듯했는데 그는 고개를 저었다.
“일단은 해 보죠. 지금 떠오르는 게 많은데 해 보고 싶어요. 나중에는 이게 구현되지 않을 것 같아서요.”
“아아. 그런 거라면 해 봐야죠. 쓰러지시면 제가 이하민을 불러올게요.”
“그러면 되겠네요.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그는 신이 나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나를 오도 가도 못하게 지형을 바꾸려고 하는 거면서 그렇게 신이 나 있다는 것도 웃겼다.
심우진은 내가 움직일 수밖에 없도록 지형을 바꿨다.
어떤 식으로든 내 움직임에 제약이 되도록 장애물을 만들어야 하는 건데 이번에는 내가 맹금류형 괴수인 것을 상정하려고 하는 듯했다.
그럴 거면 말이나 해 주지.
그때부터 나는 장장 세 시간이나 그에게 잡혀 있었고 내 주위에서 지형이 끔찍하게 바뀌는 것을 지켜보았다.
처음과는 끔찍하다는 의미가 달라졌다.
검은 수면.
지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은 창공.
어떻게 들어간 건지 모를 벽의 틈새.
숨이 턱 막힐 것 같은 공포가 쉴 새 없이 찾아들었다.
마지막에는 내 발끝만 겨우 걸쳐지고 발의 대부분이 허공에 떠 있는 환영이 만들어져 나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 앞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낭떠러지여서 금방이라도 내 몸이 떨어질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이다.
환영이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소리를 지르고 결국 바닥에 넘어졌다.
심우진은 서둘러 환영을 거두었고 자기가 완벽하게 심상을 조종했다는 사실에 감격한 모습을 하며 나를 일으켜 주었다.
“처음보다 나은 것 같아요?”
내 손바닥에 묻은 흙을 털어 주며 그가 물었다.
“네. 확실히 좋아요. 능력이 소모되는 정도는 어떠세요?”
“처음보다 지금이 훨씬 효율적으로 사용되는 느낌이에요. 진작 이런 연습이 필요했겠어요.”
그러고는 그가 웃었다.
“은우 씨가 아니었으면 환영을 보여 줄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에스퍼들은 자신의 능력을 다른 에스퍼 앞에서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었는데 심우진은 특히나 더 했을 것이다.
그는 정신을 조종하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거기에 대해 언급이 많이 되면 저항할 방법을 찾아낼 수도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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