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아마 변태영과 처음 만났을 때였을 것이다.
그 자리에서 폭주 상태로 가이드에게 무차별 폭행을 가하던 에스퍼에게 한마디를 해 줬더니 그의 폭주가 멈추지 않았던가.
견인은 순간적으로 너무 놀라서 떨림이 멈췄다가 그게 지나가자 다시 증상이 나타나는 것 같고.
‘이 정도로 지나갈 폭주가 아니라 이거지?’
“일어나 앉으면 안 돼요? 그러면 안아 줄게요.”
“…….”
대답은 없었지만 이불이 내려갔다.
그러고는 그가 나를 빼꼼 바라보았다.
퇴폐적인 얼굴에 다크서클까지 내려오니 그림이 완성되었다.
“싫어요? 나도 좋아서 이러는 건 아니에요.”
“아아……. 뭔지 알겠다. 처음부터 다 계획적이었어. 이러려고 던전에서 괴수가 날뛰어도 꼼짝을 안 하고 있었던 거군. 나 혼자 능력을 끌어 쓰게 만들고 이러려고.”
하…….
“아. 됐으니까 그럼 그냥 폭주해 버려요.”
“엉큼한 사람이네. 알았으니까 와서 안아 봐.”
저 당당함.
S급 에스퍼의 격이라는 건 언제 어디서든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를 안았다.
확실히 신기하기는 했다.
정말 나에게 가이드 능력이 있는 건가 할 정도로.
“내 생각인데. 이하민과 두 사람이 매칭률이 나타난 건 서은우 에스퍼 때문인지도 몰라. 이하민은 더 이상 가이드가 아니고 에스퍼 능력이 각성되면서 가이드 능력이 같이 사라진 거야.”
“아니에요. 그 후에도 이하민이 가이딩을 한 적이 있었잖아요.”
“그래. 그랬지. 그리고 그 자리에는 언제나 서은우 에스퍼가 같이 있었잖아.”
“…….”
나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고 그런 얘기를 계속 듣고 있을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그러면서 그를 안은 손을 놓으려고 했는데 그가 내 손을 잡아 계속 자기를 안게 했다.
확실히 효과가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건 나라서 알 수 있는 거야. 아마 변태영이랑 심우진도 같은 말을 할 거야. 우리가 원래 서로 그런 부분에 대해서 얘기를 안 해서 그렇지만 바로 확인이 가능할 거야.”
“그게 무슨 말인데요?”
“이하민이 가이딩을 할 때는 박하사탕을 입 안에 넣은 것 같은 청량한 느낌이 들어. 그런데 에스퍼로 각성한 후에는 확실히 그 느낌이 달라졌어. 박하사탕이랑은 다르고…… 뭐라고 해야 하나. 아. 솔 향. 맞아. 솔 향 같은 게 느껴졌어.”
“……솔 향이 내 거라고요?”
왠지 억울했다.
솔 향이 이하민의 기운이고 내가 박하사탕이면 좋겠다. 왜 내가 솔 향이야, 왜?
“정말 맞아요?”
“그래. 확실해.”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그동안 겪어 본 견인은 거짓말을 이렇게 체계적으로 정성스럽게 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었다.
이런 설계는 못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자기에 대해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걸 알면 엄청 화를 내겠지?
“이제 괜찮은 것 같죠?”
“아니. 아무래도 이거로는 부족한 것 같아. 키스하자. 서은우 에스퍼.”
그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확실히 정상으로 돌아온 것 같았다.
“딱 서 봐요.”
그는 내 말에 갑자기 동작이 어수선해졌다.
파장이 안정됐는데 여전히 불안정한 것처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그 생각을 급히 하려고 하다 보니 손발이 정신없이 꼬이는 것이다.
지금껏 그런 짓을 엄청나게 많이 해 왔던 나는 그냥 한 번 딱 보면 알았다.
“다 나았네요.”
“…….”
그는 굉장히 기분 나쁜 표정을 했다.
파장이 왜 하필 그때 가라앉아서 키스도 못 하게 된 건가 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이 웃겨서 피식 웃었더니 그가 나를 노려보았다.
“이게 다 서은우 에스퍼 때문인 건 알고 있지?”
“왜 또요? 뭐가요?”
“맞잖아. 일부러 나 혼자 괴수를 상대하게 하고 이리저리 내빼기만 하고.”
“그걸 벅차 할 줄은 몰랐죠. 그 정도는 그냥 한 손만 가지고도 다 해치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제가 존경하는 선배님이라면 당연히 그 정도는 하실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 판단 착오였던 것 같아요. 그 점에 대해서는 사과드리겠습니다.”
그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면 뭐. 받아들이지.”
그는 던전에 갈 때의 모습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아무리 파장이 날뛰는 것처럼 꾸민다고 해도 더 이상 속을 사람도 없을 것 같았다.
“흠…… 그런데 이제 뭐라고 말할 거야? 다른 사람들도 전부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 텐데.”
“뭐가요?”
“내가 이렇게 쌩쌩한 걸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어?”
“……!!”
뭐야. 이거 엄청 큰일 난 거잖아?
정말 내가 가이드가 된 건가?
이건 절대로 원하지 않은 일이었다.
이곳에서 가이드가 어떤 취급을 받는지를 생각한다면 더더욱.
“아무래도 서은우 에스퍼는 가이드와 뭔가 특별한 인연이 있는 모양이야. 가이드 해방의 역사적 사명을 갖고 태어났다거나.”
그냥 입 좀 닫아 주고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밖으로 나가자 그가 어느새 종종종 뛰어서 나를 따라왔다.
그래도 다 죽어 가던 모습을 본 후라 그가 그러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견인은 역시 힘이 넘쳐서 나를 쫓아다니며 종알거리는 게 어울렸다.
“다음부터는 힘 조절 좀 잘해요. 훈련도 열심히 하고요. 솔직히 그런 괴수하고 싸웠다고 폭주한다는 건 정말 실망이에요.”
그러자 그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다른 때는 에스퍼들이 같이 갔으니까 그랬지……. 이번에는 평소와 많이 달랐잖아. 그래서 그런 거지.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싸우느라고. 다음에는 이런 일 없을걸?”
말소리가 점점 자신 없이 기어 들어갔다.
이 맛에 견인을 놀리는 거지.
흐뭇한 얼굴을 하고 가다가 그를 보고 말했다.
“파장이 저절로 가라앉은 것 같다고 하세요.”
“어차피 안 믿을걸?”
“제가 가이드로 발현했다는 말은 믿기 쉬운 얘기겠어요? S급 에스퍼면 그런 것도 할 수 있나보다고 생각할 거예요. 그렇다는데 자기들이 뭐라고 할 거예요? 안 그래요?”
그러라고 말하라는 눈빛을 하고 윽박지르자 견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내가 다시 이런 상태가 되면 가이딩해 줄 거지?”
일단 내가 그러겠다고 말을 해 주기만 하면 문제없다는 듯이 그가 말했다.
“알았어요. 그렇다고 아무 때나 파장 엉망으로 만들어서 찾아오지 말고요.”
그러자 그가 기가 막힌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아무려면 내가 그러겠어? 도대체 평소에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면 이런 말을 할 수가 있는 건지 정말 이해가 안 돼.”
“알았어요.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속에 있는 말을 꺼내기 전에 한 번 더 생각할게요.”
“아니. 그건 또 무슨 말인데?”
그가 기가 찬다는 듯이 말했고 나는 밖에서 나는 소리에 창밖을 내다보았다.
슬슬 공략을 마친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 뒤로 태양이 내려앉으며 붉은빛을 뿌려 대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 모습을 보고 서 있을 수 있다는 것도 대단한 축복인 거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었다.
“아, 깜짝야!!”
그러다 고개를 돌렸을 때 내 옆에 너무 바짝 붙어 서 있는 견인을 보고 놀라서 소리치자 그는 몇 배나 더 놀란 듯 가슴을 움켜쥐었다.
“아, 심장이야!! 대체 왜 그래? 나도 에스퍼들 봤어. 에스퍼들!! 변태영이랑 심우진도 왔나 해서 본 거라고!! 사람을 무슨 변태 취급을 하고 있어!! 아오! 심장 떨려!”
어지간히 억울했는지 그가 몇 번이나 말을 하기에 나도 미안해서 사과를 했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계속 구시렁거렸다.
“그런데 애들한테는 어떻게 할 거야? 애들한테도 말 안 할 거야?”
“네?”
“S급 에스퍼들. 그 애들은 알아야 하지 않을까? 서은우 에스퍼가 가이드를 할 수 있다는 거. 딱 그 둘한테만 말하지. 다른 사람들한테는 말하지 말고.”
그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가이딩을 하는 모습이 상상돼서 기분이 나쁜 듯했다.
생각 같아서는 심우진이나 변태영에게도 말을 하지 않았으면 싶은데 그들의 파장이 불안정해지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폭주까지 할 때 그걸 방치할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바로 얘기하지는 말고 문제가 생길 때 말을 하는 거로 하지.”
끝까지 꼼수를 부리는 그를 보다 결국 웃어 버렸다.
“나는 다 서은우 에스퍼 생각해서 말하는 거야. 정말이라고.”
“네. 저는 아무 말도 안 했어요.”
“그런데 왜 나를 쓰레기로 생각하는 것 같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나는 걸음을 빨리 옮겼다.
이하민이 차에서 내리는 걸 봐서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처음 던전에 간 기분이 어땠는지.
다치지는 않았는지.
공략은 성공적이었는지.
그가 어떤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를 할지 그것도 전부 궁금했다.
***
내가 왜 그랬을까.
이하민이 얼마나 말이 많은지 알고 있었으면서 내가 스위치를 올려 버렸다.
정말 겁도 없이.
그래서 나는 두 시간이 넘게 이하민의 얘기를 듣고 있었다.
S급 에스퍼들은 다른 곳으로 가지 않고 같이 얘기를 듣다가 그럴 게 아니라며 S급 에스퍼 전용 휴게실로 가자고 했다.
그곳이 확실히 훨씬 아늑하기는 했다.
“앞으로 두 사람도 여기로 와. 어차피 여기는 넓고 사용하는 사람이 우리밖에 없으니까.”
견인이 말하자 변태영과 심우진도 좋은 생각이라면서 그렇게 하라고 말했다.
“아. 이번 기회에 숙소도 여기로 옮기는 게 어때? 그게 좋겠네.”
“숙소까지요?”
견인의 말에 이하민을 보았더니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가이드 숙소에 계속 있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의 상황이 달라졌으니 장소를 바꾸는 게 좋기는 할 듯했다.
그렇게 해도 되냐는 말 같은 것은 물을 필요도 없었다.
세 명의 S급 에스퍼들이 모두 그러겠다고 하는데 누가 뭐라고 할까.
센터 측에도 이렇게 하는 게 더 좋을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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