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내가 빠르게 몸을 날리자 점멸해 가던 숫자가 보였다.
「97.3%」
이건 상상한 것 이상이었다.
이건 뭐 거의 영혼의 동반자 수준인데?
두 사람도 긴장이 된 듯했다.
아무래도 자기들은 그것보다 더 높게 나오기는 어렵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고 이제는 조금이라도 나중에 검사를 하고 싶어 하는 게 눈에 보였다.
심우진은 승자 특유의 여유를 보였고 나는 두 사람이 결정을 내리기를 기다렸다.
아무리 그래도 십 분이 넘도록 결정을 못 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않았는데 내가 두 사람을 무시한 거지.
“빨리 안 올라와요? 그냥 내려갈까요?”
그러자 변태영이 터덜터덜 걸어왔다.
견인이 먼저 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였다.
그가 한 번씩 고집을 부리면 다른 사람들도 두 손 두 발 다 드는 것 같더니 이번에도 그게 통한 듯했다.
“하…….”
변태영이 도대체 왜 그렇게까지 긴장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조금 낮으면 어떻다고.
“97퍼센트?”
“변태영이 97?”
심우진과 견인이 차례로 말했다.
두 사람이 그렇게 말하면 굳이 가서 내가 확인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견인은 괜히 뿌듯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못해도 그것보다는 잘 나올 거라는 믿음이 생긴 듯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재미있다고 여기며 나는 그를 기다렸다.
결과는 97.2
매칭률이 그 정도 차이라는 것이 가이딩을 할 때 얼마나 큰 차이를 가져올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쨌거나 무시무시할 정도로 높은 매칭률이었다.
그들도 그 생각을 했는지 나중에는 사소한 차이에는 신경 쓰지 않은 채 흐뭇한 표정들을 지었다.
“그런데 서은우는 정말 대단한 것 같아. 이하민도 대단하기는 하지만 서은우도 대단해. 에스퍼 겸 가이드라니. 다른 나라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나 해서 알아 봤는데 없더라고. 그건 불가능한 거라면서 왜 그런 걸 묻냐고 하던데?”
변태영이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저들이 뭘 알겠냐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한 가지 더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어요.”
한창 매칭률을 가지고 떠들어 대던 S급 에스퍼들은 갑작스러운 말에 나를 바라보았다.
“제 등급요. 다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습니다.”
“등급? D급이었잖아.”
견인이 말을 하더니 뭔가 알 것 같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거기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게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심우진은 말을 하는 대신 등급을 측정하는 기계의 전원을 켰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조용히 나를 기다렸다.
생각해 보면 그 사람들이야말로 웃겼다.
그걸 그렇게 그냥 받아들여 준다는 게 희한했던 것이다.
변태영은 나를 재촉하기까지 했고 나는 기계 위로 올라갔다.
기계가 왜 나를 D급으로 보여 주었는지 그때까지 나는 알지 못했다.
전부터 이상한 것 같다고 생각했고, 내 뜻에 동조해서 시스템이 그렇게 나타나는 걸까 하며 막연하게 궁금해하기만 했다.
지금도 D급으로 나온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러나 기대하는 바도 있었다.
세 사람이 화면을 보다가 그대로 굳은 듯 멍하니 멈춰 있었다.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점점 크게 떠지는 눈, 벌어지는 입.
이제 뭔가 말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러고도 그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차마 나를 보지도 못하는 것 같았다.
“왜 그래요? 뭐라고 나와요?”
내가 볼 수도 있었지만 그들이 하는 말을 듣고 싶었다.
“서, 서은우 에스퍼…… 왜…….”
견인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은우 씨는 알고 있었던 거군요.”
도저히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심우진이 말했다.
“은우 씨는 처음부터 이럴 거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겁니다. 은우 씨가 S급 에스퍼라는 걸 말입니다.”
심우진의 말을 들으며 나는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변한 것이 없었다.
단지 이제 나를 S급 에스퍼로 인정해 주었을 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그동안은 이런 일이 없었잖아. 아니…… 그냥 단순히 높은 등급으로 올랐다고 해도 이상할 텐데 S급이라니?”
견인은 특히나 더 흥분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깜짝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서은우. 혹시 이 등급이 가이드 등급인 건 아닐까?”
그러자 다른 두 사람의 표정도 급격히 변했다.
그것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맞아. 그럴 수도 있겠네. 그게 맞는 것 같아. 원래 서은우, 던전에서는 오지게 못 싸우잖아. 괴수 앞에 서면 아무것도 못 하고.”
견인은 전에 한 번 당했던 것을 두고두고 우려먹으려고 작정을 한 듯했다.
“나도 그 말이 맞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그런 거라면 이해가 되는 일들이 많아요. 은우 씨랑 같이 있으면 별 걸 안 해도 파장이 안정됐죠. 손을 잡은 것도 아닌데 저절로요.”
심우진의 말에 나도 어쩌면 그 말이 맞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에이. 아깝네!”
견인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말하자 변태영과 심우진이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 쪽으로는 자기들 중에 견인이 가장 머리가 잘 돌아간다고 생각하면서 자기들이 놓친 걸 그가 떠올린 건가 하는 듯했다.
나도 견인이 뭣 때문에 그러는지 궁금했는데 어쩌다가 나와 눈이 마주쳐도 견인은 고개를 돌리면서 얼굴을 붉혔을 뿐 왜 그런 건지는 말을 하지 않았다.
“뭐가 아까운데요?”
“아니야. 못 들은 거로 해.”
“들었는데 어떻게 못 들은 거로 해요? 뭔데 그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러면서 그의 얼굴은 왜 계속 붉어지기만 하는 걸까.
“뭔데 그래, 형? 답답하게 굴지 말고 그냥 말해 버려. 나도 궁금하잖아. 말을 안 할 거면 처음부터 하질 말던가.”
변태영까지 그러자 견인이 난감한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아니…… 서은우랑 뭘 하고 싶다는 건 아니고…… 말이 잘못 나온 거야.”
그 말을 듣자 그 인간이 무슨 의미로 그 얘기를 했던 건지 갑자기 이해가 돼 버렸다.
내가 F급 가이드로 발현했다면 파장을 안정시키거나 작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도 강도 높은 스킨십을 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런…….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아쉬워하는 듯한 느낌이었는데 견인이 그럴 리가 없잖아?’
세 사람의 표정이 점차 비슷해져 갔다.
“그래서 그랬던 거네. 그때 내 파장이 그렇게 쉽게 안정될 게 아니었는데 S급이라서 그랬던 거야. 이제 전부 다 이해됐어. 젠장.”
전혀 이해되지 않는 부분에서 짜증을 내고 견인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변태영도 말은 하지 않았지만 기분이 나쁜 것 같았고 심우진도 유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아마 아닐 거예요. 이 등급은 에스퍼 등급일 거예요. 제가 잘한다는 거는 다들 아시잖아요.”
“혹시 은우 씨는 우리가 이걸 공개하기를 바라고 있어요? 하긴. 그게 낫기는 하겠네요. 에스퍼 등급이 S급이라는 것도 말이 안 되는 건 아니에요.”
심우진이라면 그렇게 말을 해 줄 거라고 생각했다.
견인도 그래야 되는 건데.
“이 사실이 알려지면 전 세계의 모든 자료가 다 바뀌게 되겠네요. 축하해요, 은우 씨. 이건 축하할 일이잖아요.”
심우진이 말하자 변태영이 자기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고 했고 견인은 믿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은우 씨가 S급 에스퍼라는 사실은 우리가 공증을 하고 사람들 앞에서 따로 검사를 받지는 마세요. 그러다가 가이드라는 게 밝혀지는 건 은우 씨도 별로잖아요.”
다른 사람들이 감정적으로 구는 동안 심우진은 제법 구체적으로 상황을 판단하고 앞으로의 계획도 세우고 있었다.
내가 가이드라는 것이 밝혀진다…….
아무래도 그 후에 벌어질 일은 상상하고 싶지 않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억지로 다시 측정을 하려고 하면 어떻게 하죠?”
“그럴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만약 그런 일이 있으면 제가 하지 못하게 했다고 말하세요.”
심우진의 말에 감동을 받으려 하고 있는데 변태영이 이상하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S급 신체 능력 강화자가 그런 소리를 하는 거. 좀 가증스럽지 않나?”
이 인간이 갑자기 이렇게 돌직구를?
“에이. 태영아. 그건 네가 너무 했다. 서은우 에스퍼도 가끔은 약한 척도 해 보고 싶고 그럴 텐데. 서은우 에스퍼. 그렇게 해. 지휘부에서 강제로 검사를 하려고 하면 우리 이름을 팔아. 만약에 강제로 검사하면 우리 S급 에스퍼들은 모두 센터를 떠날 거라고 해. 센터가 여기에만 있는 것도 아니잖아?”
견인은 아직도 새 센터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건가 해서 바라보자 견인은 내 오해를 알아차린 듯 두 손을 가로저었다.
“정말 가겠다는 건 아니야. 그렇게 하면 지휘부에서도 함부로 하지 못할 테니까 그때 써먹으라는 거지.”
“왜 이렇게 어렵게 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네. 누가 서은우를 강제로 끌고 갈 수 있냐고. 그러려고 하면 손목을 비틀어 버릴 수도 있을 거면서. 우리가 말해 주지 않아도 알아서 잘만 그럴걸?”
변태영하고는 아무래도 심도 깊은 대화를 좀 나눠 봐야 할 것 같았다.
***
이하민은 멍한 얼굴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막 나에 대한 얘기를 들은 참이었다.
S급 에스퍼들은 그 이야기를 자기들이 해 주는 게 나을 것 같다면서 이하민에게 서로 가려고 서둘렀고 나는 차라리 나에게 듣는 게 낫다고 생각해서 덩달아 서둘렀다.
S급 에스퍼들은 남의 감정을 살필 줄 모르는 내가 말했다가는 이하민이 충격에 빠질 거라고 하면서 그런 이야기는 자기들처럼 섬세한 사람들이 말을 해야 한다고 했고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말라고 하면서 덩달아 달려갔다.
그 결과 내가 가이드가 됐다는 소식을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던 것이다.
이하민은 평화로운 모습으로 거실 소파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휴식을 취하고 있다가 우리가 바람을 일으키며 나타나는 것을 보았다.
바람을 일으킨 건 사실 나였고 나머지 S급 에스퍼들은 내가 일으켜 놓은 바람 속에 같이 서 있는 것일 뿐이기는 했지만.
“은우야. 무슨 일 있어? 엄청 기분이 좋아 보여.”
이하민이 환한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아닐 텐데.
정말 그렇게 보이는 거 맞아?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