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가는 동안 여러 사람과 마주쳤는데 S급 에스퍼들을 대하는 하급 에스퍼들의 태도나 가이드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이곳에서 가이드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고 있는지 다시 한번 깨달았다.
정작 S급 에스퍼들은 가이드를 괴롭힌 적이 없었지만 지휘부와 다른 에스퍼들에 의해 늘 안전을 위협받던 사람들.
“우리가 말을 했으면 달라질 수도 있었겠어. 우리랑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우리에게는 더 급한 일이 있다고 생각해서 관심을 갖지 않았을 뿐이지. 우리한테도 잘못이 없다고는 못 할 것 같은데…….”
변태영의 말에 나는 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그 말에 견인과 심우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말이다. 가이드들이 받는 대우가 부당하다는 생각을 하기는 했었는데.”
“말이 나온 김에 지금 가서 그 얘기를 먼저 할까? 우리가 또 미루고 지나가는 동안 어떤 가이드가 힘들어하고 있을지 모르는데.”
견인에 이어 심우진이 말했다.
가이드들에 대해 말을 한 거였나 보다.
내가 가이드로 발현하면서 그 문제를 생각하게 된 것 같아 진심으로 놀랐다.
그러더니 그들은 다른 사람의 생각은 필요하지도 않다고 여긴 듯 그대로 발걸음을 돌렸다.
이하민을 보자 그는 놀란 얼굴로 나를 마주 봤다.
그도 거기에 합류할 거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런 중요한 말을 하는데, 그리고 그렇게 엄청난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자리에 내가 끼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은 들겠지만 나도 그 자리에 함께 하기로 했다.
우리 다섯이 함께 걸어가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위압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며 나는 그들과 함께 걸었다.
특별히 뭔가를 하지 않아도 우리는 그 자체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우리가 상부로 올라가자 일을 보고 있던 직원들이 놀란 얼굴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여기에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마침내 센터장의 집무실이 있는 층까지 이르자 비서진들이 일제히 일어나 다가오며 물었다.
S급 에스퍼 한 사람이 떠도 무슨 일인가 싶을 텐데 세 명의 S급 에스퍼가 모두 나타났고 거기에 새롭게 촉망받는 이하민까지 있었으니.
여기에 왜 나까지 낀 건지는 솔직히 의문이기는 했을 것 같았다.
“센터장님을 만나고 싶습니다.”
말을 하는 사람은 변태영이었다.
세 사람이 함께 있는데 대표로 말하는 사람이 변태영이라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도 않았다.
그들 사이의 역할이 그런 식으로 정해져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센터장의 비서진은 바쁘게 움직였고 이내 안에서 센터장이 나왔다.
갑자기 S급 에스퍼들이 함께 움직인 이유가 그도 궁금했을 것이다.
“무슨 일입니까?”
그의 표정은 정말 복잡해 보였다.
우리 다섯을 한꺼번에 보고 편안한 얼굴을 하기는 아무래도 많이 어려울 것 같았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나는 그의 머릿속에 지금 어떤 생각들이 지나가고 있을지 추측해 보았다.
다른 센터가 생긴 지금, 우리가 집단행동을 하려고 하는 건 아닌지 그게 가장 먼저 걱정되지는 않을까.
“이런 일은 없었던 것 같은데. 무슨 일인가요?”
그를 보며 나는 그가 애써 침착한 척을 한다고 생각했다.
다섯이 그의 앞에 같이 앉았고 센터장이 몇 사람을 불러 그의 사람들도 자리에 함께했다.
무슨 얘기가 나올지는 몰라도 혼자서 들을 얘기는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센터에 있는 가이드들에 대한 처우가 개선돼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견인의 말에 센터장의 눈에 의혹이 일었다.
그걸 당신들이 왜 상관하냐는 것 같은 눈이었다.
“이 자리에서 정확한 답과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듣고 싶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센터장이 함께 있던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당신들은 알겠냐는 얼굴이었고 그들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만.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요?”
센터장은 견인을 어린아이 다루듯이 하고 있었다.
나이로 보면 그럴 만도 하기는 했지만 견인은 이곳에서 그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견인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심우진이 나서 주는 게 낫지 않을까 했다.
그동안 행보가 가장 진중했기에 그가 말을 하면 자연스럽게 힘이 실리지 않을까 해서였다.
그리고 내 바람이 통했는지 그가 입을 열었다.
“센터장님. 저희가 여기에 온 것은 괜한 분란을 만들려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센터장님이 잘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가이드는 에스퍼와 함께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가이드 없이는 에스퍼가 존재할 수도 없죠. 그런데 지금까지 가이드는 너무 열악한 대우를 받아 왔습니다.”
센터장이 웃어 버렸다.
같잖다는 웃음.
변명의 여지도 없이 그런 의미였을 것이다.
그와 함께 있던 사람들도 비슷한 웃음을 터뜨렸다.
간단한 던전들만 나오고 공략이 쉽다 보니 사는 게 편해져서 이제 별 헛소리를 다 하는가 보다고 생각했을까.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그런 얘기를 하는 이유를 모르겠군요. 이하민 에스퍼님 때문이라고 하기에도 이상하고……. 이하민 에스퍼님은 이제 에스퍼로 활동을 하시게 될 거고 그것은 다른 분들도 전부 이해하고 받아들인 부분이 아닌가요?”
센터장이 웃음기가 남아 있는 얼굴로 말을 하다가 서서히 표정을 지웠다.
그가 지웠다기 보다 저절로 표정이 사라진 것일 터였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나에게로 향했다.
무서운 통찰력이었다.
단지 그 타이밍을 근거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나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는 건가?
그동안 단서가 수시로 뿌려지기는 했지만 그 순간에 그 모든 것을 조합해서 내가 가이드라는 것을 알아내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거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나를 보는 센터장의 눈을 보면서 이내 확신할 수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서은우 에스퍼?”
“……예.”
“혹시.”
그의 말을 변태영이 막았다.
“그 답이나 하십시오, 센터장님. 센터가 가이드에 대한 처우를 개선하겠다고 약속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집단행동을 할 겁니다.”
센터장의 얼굴에 강한 당혹감이 떠올랐다.
집단행동이 뭘 말하는 거냐고 묻지는 않았다.
그것을 묻는 것이,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치욕스러워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에스퍼님들이 여기까지 와서 그런 얘기를 한다는 것은…….”
그는 어떻게든 설득을 해 보려고 말을 한 것 같았는데 그 말은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황당했을 것이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지.
그는 잠시 말을 가다듬었다.
그는 타고난 달변가였고 그 사실이 지금 이 순간 증명되었다.
“가이드는 센터에서 아주 중요한 존재입니다. 던전이 나타나고 에스퍼라는 신인류가 나타난 이래 가이드가 없었다면 에스퍼는 제대로 활약을 하지 못했을 겁니다. 정말 많은 에스퍼가 죽거나 부상을 당했을 거고 지금의 에스퍼 평균 수명은 훨씬 더 단축되었을 테죠.”
그거야 그가 굳이 다시 말을 해 주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그때부터 그는 우리를 다독이려는 듯이 말했다.
“가이드들은 에스퍼에게 주어지는 보상입니다. 거친 살육을 끝내고,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이 얻게 되는 달콤한 보상. 가이드는 에스퍼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그 가이드들에게 무슨 짓을 하건 에스퍼는 용서받습니다. 그런 보상도 없다면 에스퍼는 도대체 어디에서 안식을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가이드는 선택받은 자들입니다. 자기들이 에스퍼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그들은.”
누가?
누가 그렇다고 하는데?
“그건 센터장님의 생각 아닙니까?”
이하민의 목소리였다.
지금껏 이하민이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었던가.
나는 슬그머니 그를 바라보았다.
다른 S급 에스퍼들도 나와 같은 생각이었는지 이하민을 보고 있었다.
평소의 이하민이었다면 우리의 시선이 저에게 향하는 걸 알아채곤 그 순간에라도 멈췄을 것이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한 거지? 하면서 움츠러들었을 터였다.
그러나 지금의 그는 다른 사람 같았다.
그동안 억눌려 있던 것이 폭발한 느낌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다른 가이드와 같은 상황이 아니면서도 이하민은 화를 억누르지 못하는 듯했다.
“그건 센터장님의 생각 아닌가요? 누가 가이드들의 운명을 그런 식으로 결정짓죠? 가이드가 없으면 에스퍼는 이렇게 싸울 수 없습니다. 그러면 가이드들에게도 거기에 맞는 대우를 해 줘야 하는 거예요. 지금처럼 억압하고 착취할 것이 아니라요!”
이하민의 격앙된 말투에 센터장이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감정 뒤에 이어진 것은 강한 불쾌감과 분노였을 것이다.
“이하민 에스퍼님. 이하민 에스퍼님이 무척 특수한 케이스라서 특별하게 대우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하민 에스퍼님 역시 센터에 소속된 에스퍼로 센터 내의 규칙을 지켜야 합니다.”
센터 내의 규칙.
센터의 수장인 센터장의 명령에 언제든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터였다.
실제로 그것을 들먹이는 일이 거의 없어서 거의 사문화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는데 센터장 본인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센터장은 이 정도면 함부로 날뛰는 이하민을 잠재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는데 그것은 그의 오판이었다.
이하민은 비뚜름하게 웃으며 센터장을 바라보았다.
센터장도 놀랐겠지만 내가 느낀 놀라움 역시 결코 만만치 않았다.
이하민이 그런 모습을 보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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