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상황이 그렇게 되자 이제는 S급 에스퍼들이 더 당황하며 이하민을 말리려 했다.
평소에는 그런 상황을 상상하기도 어려웠다.
이하민이 폭주해서 S급 에스퍼들이 그를 말린다?
어쩌다가 이런 일이 다 생긴 건가 하면서 나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확실히 구경하는 재미는 있었다.
센터장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이하민을 노려보았다.
“이하민 에스퍼. 지금은 이하민 에스퍼가 많이 흥분한 상태인 것 같아 징계를 보류하지만 다음에는 이렇게 넘어가지 못할 겁니다.”
“지금도 넘어가지 말도록 하시죠. 저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습니다. 저는 에스퍼지만 가이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제부터 센터에서 명령하는 것을 듣지 않을 생각입니다. 센터에서 가이드에 대한 처우 개선을 약속해 주지 않으면 여기에서 나가지 않겠습니다.”
“이하민 에스퍼!”
“올해에 죽은 가이드가 몇 명인지 아십니까? 그 가이드를 죽인 에스퍼들에게 어떤 징계가 내려졌습니까! 센터장님이 하는 말을 들으니 애초에 징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던 거네요. 틀립니까?”
센터장은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바라보더니 피식 웃었다.
얘 왜 이러냐는 듯한,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는 듯한 웃음이었다.
명백한 조롱.
그것이 이하민에게 던져졌다.
“왜 웃죠, 센터장님?”
짜증이 치밀어 말하자 그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노려보았다.
“뭐라고 했나, 서은우 에스퍼? S급 에스퍼들과 같이 다니니까 너도 같은 급인 것 같다고 생각했나? 머리가 처돈 거야?”
“그러게요. 처돌았을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처돈 게 상황 파악 못하는 멍청한 것보다는 낫지 않은가요? 제가 보기에 센터장님이 지금 그 상태인 것 같거든요. 상황 파악 엄청 못 하고 있는 것 같으세요. 지금 여기 있는 분들이 센터장님한테 부탁하는 게 아니라는 거. 아직 감이 안 잡히세요?”
견인이 한숨을 쉬고 한 손으로 자기 얼굴을 덮었다.
그는 일이 이렇게까지 되기를 바라지 않았던 것 같았다.
심우진은 아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푹 숙였다.
얘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선을 넘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이렇게 간단히 넘어 버릴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것 같았다.
센터장도 결국은 이게 그냥 평범한 상황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듯했다.
“그렇다네요, 센터장님. 이 자리에서 확답을 해 주시죠. 가이드에 대한 처우 개선. 앞으로 어떤 에스퍼나 센터 관계자도 가이드를 이유 없이 폭행할 수 없고. 아니, 이유가 있더라도 폭행을 할 수는 없다고 해야 될 것 같군요. 가이드는 센터의 필요에 의해 이곳에 왔고 가이딩을 해 주는 존재들이니만큼 센터는 거기에 합당한 조건을 제시해야 할 겁니다.”
변태영이 말하자 센터장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건지는 모르지만 그는 변태영만큼은 끝까지 자기편에 서 있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마도 그가 랭킹 1위의 에스퍼여서 지금까지 자기가 누리던 것을 포기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해서 그런 듯했다.
센터장의 난처한 얼굴을 보면서 S급 에스퍼들은 그를 압박하듯 재촉했고 센터장은 결국 한숨을 쉬었다.
아직 S급 에스퍼들의 입에서 센터를 떠나겠다는 말까지는 나오지 않았지만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상급…… 가이드에 대해서는 처우 개선을 약속하겠습니다. 그런데 모든 가이드에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에스퍼들의 불만이 커질 겁니다. 에스퍼들의 불만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이 마련되기는 해야 합니다.”
센터장은 최후의 보루라고 생각한 듯 말했고 S급 에스퍼들은 나와 이하민을 보았다.
그러나 내가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이하민이 입을 열었다.
“그건 안 됩니다. 불만을 해소하지 못해서 생기는 일은 에스퍼들이 책임져야 합니다. 제가 불만을 해소하고 싶다고 센터장님을 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제가 그렇게 하면 센터장님은 가만히 계실 건가요?”
센터장은 큰 모욕이라도 당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발끈했다.
그렇게 반응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
단지 자기에게는 그럴 권리가 있고 가이드들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한 가지 물읍시다. 서은우 에스퍼. 가이드로 발현한 건가?”
센터장이 나를 향해 묻자 주위에 같이 있던 사람들이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하냐는 얼굴이었는데 그들도 결국 답을 찾아낸 것 같았다.
이하민 같은 사람도 있는데 나 같은 사람이 없으라는 법은 없는 것 아닌가.
견인이 폭주한 채 센터로 돌아왔을 때,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견디지 못하는 동안 옆에서 홀로 꿋꿋하게 서 있던 내 모습을 떠올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하면 에스퍼들이 너무 위험해질 겁니다.”
센터장을 대신해 가이드 관리 팀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는 센터장처럼 꽉 막힌 사람이 아니였기에 합리적으로 풀어 보자고 생각한 듯했다.
“이 일을 너무 에스퍼와 가이드의 대립 관계로만 보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하민 에스퍼님에게 묻고 싶습니다. 이하민 에스퍼님이 가이드였을 때 에스퍼에게 적대적이었는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러자 이하민은 그렇지 않았다고 말했다.
“제가 그런 건 제가 S급 에스퍼님들의 전담 가이드여서 그랬던 겁니다. S급 에스퍼님들은 저를 다르게 대했으니까요. 그런데 대부분의 에스퍼들은 가이드를 그렇게 대하지 않습니다.”
“예. 제가 말하고 싶은 것도 그겁니다. 대부분의 에스퍼들은 그러지 않죠. 그런데 전부 그런 건 아니지 않습니까. 가이드를 괴롭히지 않은 에스퍼들도 같은 운명이 돼야 하는 건가요? 가이딩을 받지 못한 채 죽어야 할까요?”
이하민은 그 말에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계약 관계로 하면 어떤가요. 가이드가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서 가이딩을 할 수 있게 하시죠. 정당하게 대가를 지불하세요. 가이드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해서 가이딩을 하는 거라면 문제가 해결될 수 있습니다. 폭행은 절대로 금지되어야 하고요.”
그런 부분에서는 내가 다른 사람들에 비해 훨씬 많은 의견을 내놓을 수가 있었다.
일단 나는 이 세계관이 다른 소설에서 어떤 식으로 사용되는지 누나에게 얘기를 들은 적이 있으니까.
굳이 그런 것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는데 그게 도움이 되고 있었다.
센터장과 관계자들은 그렇게 해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는 표정이었다.
“당장 에스퍼가 가이딩을 받아야 하는데 가이드에게 계약을 하자면서 찾아다녀야 하는 겁니까?”
“계약은 미리 해 두는 거죠. 그리고 어느 정도 강제성은 두는 거예요. 그건 계약으로 인한 강제성이죠. 센터와 가이드 계약을 하면 그 계약 기간 동안 가이딩을 한다는 내용에 합의를 하는 거예요. 대가를 충분히 받고 안전을 보장받은 채로요.”
센터장과 관계자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센터장은 아직도 그 말에 불만이 많은 것 같았지만 계속 대치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는 것을 그도 깨달았을 것이다.
“다른 분들도 그 말에 동의하십니까? 그렇게 하면 불만이 없는 건가요?”
센터장은 이미 기분이 상한 얼굴이었다.
그러면서 자기가 대단한 아량을 베풀어 주는 듯 말했고 S급 에스퍼들도 그 뉘앙스를 느낀 듯했다.
그들은 딱히 대답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은 것 같았고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나는 센터장과 관계자들이 가이드 계약 규정을 만들기 쉽게 대략적으로 설명을 해 주었다.
“전속 가이드와 비전속 가이드에 차등을 두고 계약을 하시면 좋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전속 가이드는 센터에 상주하면서 가이딩을 하는 거고 비전속 가이드는 던전이 나타나지 않을 때는 외부에서 살다가 던전이 나타나 가이딩이 필요할 경우에 오는 거죠.”
“구체적으로 생각을 많이 해 둔 모양이네? 서은우 에스퍼는.”
견인이 신기하다는 듯이 말했고 센터장이 가이드 팀장에게 눈짓을 했다.
가이드 팀장도 에스퍼였다.
가이딩에 관한 부분을 총괄하고 있는 것이지 가이드와는 상관이 없는 사람.
“서은우 에스퍼와 얘기를 해 봐.”
“제 의견은 이 정도입니다. 이제부터는 알아서 결정을 내리시면 될 거예요.”
제안을 했다고 해서 그 일을 떠맡고 싶은 생각까지는 없어서 말했더니 변태영이 웃었다.
왜 아니겠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할 이야기는 거의 했고 이제 훈련을 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어나 밖으로 나가는데 한 사람이 다급한 표정을 하고 들어왔다.
“센터장님, 오리진에 나타난 던전이 계속 미공략 상태입니다. 이 상태로 계속 가다가는…….”
그는 연구원 가운을 입고 있었는데 전에는 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평소에 에스퍼나 가이드들을 상대하지 않고 다른 업무를 보는 사람인 듯했는데 급하게 들어와서 이야기를 하다가 분위기가 다르다는 것을 느꼈는지 뒤늦게 입을 닫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센터장은 그를 보고 이야기를 계속하라고 했고 나는 그 자리에서 이야기를 계속 들어도 되는 건가 싶어 S급 에스퍼들을 보았다.
그들도 그런 이야기를 직접 들은 적은 없었는지 나와 별다를 것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새 도시의 이름이 나왔고 던전에 대한 얘기라서 신경이 쓰였다.
“지금 오리진이라고 했습니까?”
견인이 묻자 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급한 일이 없으면 같이 얘기를 듣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다른 사람들은 나가서 일을 보도록 하고.”
센터장이 말하자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들은 나가고 급히 들어온 연구원은 머뭇거리는 걸음으로 센터장에게 다가갔다.
센터장은 우리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다시 말하고 연구원에게 계속 말을 해 보라며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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