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세상에 믿을 놈은 하나도 없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생기다니.
내가…….
내가 개통당하다니.
차라리 S급 에스퍼들이 그랬다면 나는 그나마 납득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 자식들은 S급 에스퍼들이니까.
S급 에스퍼나 되니까 그럴 만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원래 그들에 대한 평가를 아주 박하게 했으니까 기대할 게 없다는 의미였다.
내가 그들을 아주 많이 오해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평가를 많이 바꾸기는 했지만 그래도 원작에서 계속 각인돼 왔던 모습이 있었으니까 만약 나에게 그런 짓을 한 게 S급 에스퍼였다면 왜 아니겠냐고 이해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이하민이.
그 자식이 어떻게 나한테 이래!
나는 배신감과 허탈함에 베개에 얼굴을 묻고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부러 꼼짝을 안 하는 것은 아니고 몸을 어떻게 움직이건 간에 너무 아파서 어쩔 수가 없었다.
내 옆에는 이하민이 쪼그리고 앉아 있을 것이다.
약 십 분 전에 고개를 돌렸을 때도 그러고 있었고 한 시간 전에도 그랬다.
얼굴?
아주 쌩쌩하고 빛까지 나는 것 같았다.
“은우야. 많이 아파?”
“닥쳐. 너는 아무 말도 하지 마!”
베개에서 얼굴을 떼지 않은 채 말을 해서 말이 제대로 나오지도 않았다.
“은우야, 미안해.”
미안하다고 말하는 놈이 실은 전혀 안 미안한 것 같아서 더 짜증이 났다.
“미안해, 은우야.”
미안하다면서 등을 쓰다듬던 손길은 조금씩 아래로 내려갔다.
허리까지는 그렇다 친다.
등을 다독이다가 좀 아래로 내려가서 허리를 쓰다듬을 수도 있다고 쳐.
그런데 이 새끼 손이 더 내려가더니 이제는 엉덩이를 토닥거리고 있었다.
미안해서 그러는 거면 그냥 톡, 톡 치고 손을 떼야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이 새끼가 엉덩이를 지분.
그래. 지분거리고 있는 거다.
굉장히 의도적으로.
휙 고개를 돌려서 죽일 것처럼 노려봤더니 이하민이 환하게 웃었다.
엄마가 언제 잠에서 깰까 하며 옆에서 혼자 놀면서 기다리고 있다가 마침내 엄마가 일어나자 행복해하는 아이처럼.
“이하민. 너 죽을래?”
“은우야. 내 가이딩은 왜 너한테 안 통할까? 안 아프게 해 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 말을 듣고 나는 내가 그동안 나를 치료 안 하고 뭘 하고 있었던 건가 하며 이마를 쳤다.
바보도 이런 바보가 다 있을까.
나는 내 상처를 스스로 고칠 수 있는데.
이건 아무래도 믿었던 베프에게 개통당한 충격 때문인 것 같았다.
“너는 꺼져!”
내가 소리치자 그때까지 제 죄를 알고 찌그러져 있던 이하민이 고집을 부렸다.
저에게 화를 내는 건 괜찮고 뭘 시켜도 들어주겠지만 그 말은 들어줄 수가 없다면서.
지금 나는 보살핌이 필요한 상태고 자기는 나를 혼자 둘 수 없다는 게 요지였다.
웃기시네.
그러다가 기회 봐서 또 나를 잡아먹으려고.
내가 어림없다는 듯이 노려봤지만 이하민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 녀석의 근성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나였다.
나에게 져 주기로 한 것은 그냥 쉽게 져 주지만 일단 뜻을 관철하면 그 녀석의 고집을 이길 수 없었다.
“야, 이하민. 말 안 들으면 다시는 네 얼굴 안 볼 거니까 그래도 좋으면 그렇게 해.”
“…….”
“그래도 말 안 들으면 앞으로 S급 에스퍼들 전담 가이드가 돼서 S급 에스퍼들 돌아가면서 가이딩해 줄 테니까 그렇게 알고.”
“어…… 은우야…….”
최대 위기에 봉착한 듯?
S급 에스퍼의 전담 가이드가 된다는 것이나 그들을 가이딩해 주는 게 무슨 의미인지 그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강도 높은 가이딩을 해 줘야 하는 경우라면 S급 에스퍼가 목숨까지 위험할 정도로 폭주한 상태일 것이라 그러면 안 된다는 말도 할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협박을 잘못한 것 같았다.
“너. 내가 S급 에스퍼들 가이딩해 줘도 좋아?”
그러면서 녀석을 노려보자 이하민이 풀 죽은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S급 에스퍼님들이 죽게 할 수는 없잖아.”
“…….”
이 자식한테는 다른 말로 협박을 해야 되는 거였다.
“내 얼굴 앞으로 안 봐도 되면 계속 그렇게 있어.”
“그럼 문 앞에 있을 테니까 필요하면 불러 줄래, 은우야?”
그러겠다고 하지 않으면 안 나갈 것 같아서 알았다며 손을 이리저리 흔들었더니 겨우 나갔다.
하! 징그러운 자식.
나는 그때부터 내 내공을 써서 몸을 치료했다.
치료를 하는 동안 몇 번이나 웃음이 나왔다.
그곳을 다쳐 본 적이 없어서 어떤 식으로 치료를 해야 할지 영 감이 잡히질 않았던 것이다.
그동안 다친 곳은 어깨나 허리, 팔이나 다리 같은 부위였지 아니 누가 엉덩이 사이의 그 은밀한 곳을 다쳐 봤겠냐는 말이다.
그쪽으로 내공을 움직이는 것도 어려웠다.
나중에는 기가 차서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만약 그랬으면 이하민이 바로 뛰어 들어왔겠지.
나는 이게 상당히 심각한 문제라는 것을 깨닫고 집중해서 치료에 전념했고 결국 그 일을 해냈다.
‘진작 이러는 건데. 멍청했네.’
치료를 끝마치고 일어섰더니 전혀 아프지 않았다.
일어난 김에 방에 딸린 욕실에 들어가 개운하게 샤워를 하고 나왔는데 이런 썅.
걸을 때마다 허벅지 사이로 기이한 느낌이 들었다.
이하민 저 자식을 내가 기필코 죽여 버린다!
내 몸에 흔적을 남겨 놔?
걸을 때마다 찔끔찔끔 그 자식의 흔적이 흘러나오는 통에 깊이 빡쳐 있다가 가까스로 수습을 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했어야 하는 거라는 것을 몰랐던 내 무지의 탓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일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다.
문을 쾅! 열고 밖으로 나가자 이하민이 소동물처럼 움츠리고 눈만 굴려서 나를 보았다.
이런 가증스러운 것.
“이하민. 너 앞으로 접근 금지야. 내 주위에 얼씬하지 마. 반경 1킬로미터 이내로 오지 마.”
“은우야. 그렇지만 네 방이랑 내 방이 10미터도 안 떨어져 있는데?”
“다른 숙소 얻어!”
“그건…… 안 될 것 같은데.”
“그러면 내 눈에 띄지 마!!”
너무 버럭버럭 소리를 질러서 그런 거였는지 S급 에스퍼들이 각자 자기들 방에서 기어 나왔다.
“은우 씨는 아침부터 활기차네요. 역시 S급은 S급이에요. 나는 어제 이하민 송장 치르는 줄 알았는데. 도대체 얼마나 가이딩 능력이 대단한 거예요?”
심우진이 화사한 얼굴로 웃으면서 물었다.
가이딩이라는 말을 당분간 금지어로 만들고 싶은데 이 인간들이 협조를 해 줄지 알 수가 없었다.
“그건 나도 그래. 나 정말 이하민 죽는 줄 알았거든.”
견인은 말을 해 놓고 이하민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괜찮은 건지 확인을 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지금 당신이 걱정해야 할 건 이하민이 아니라 나다!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나도 쌩쌩한 상태였기에 어차피 말을 해도 믿어 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런데 의외로,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변태영이 나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서은우. 괜찮아? 지금쯤 시름시름 앓아누워야 할 텐데?”
“네?”
“그 정도로 힘든 가이딩은 처음이었던 것 아니야? 처음이 아니었다고 해도 지쳐 쓰러지는 게 정상일 텐데? 서은우. 몸이 부담을 느끼는데 정작 본인은 그걸 모르는 거 아니야?”
사람을 천치 취급하는 건가 하면서 그 말을 무시하려고 했는데 다른 S급 에스퍼들도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는지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게 말이야, 서은우 에스퍼. 정말 괜찮아? 아무래도 서은우 에스퍼는 그런 쪽으로 문제가 있는 것 같아. 왜, 그, 사람에 따라서 그런 사람도 있다고 하잖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서은우 에스퍼도 그런 부류 아닌가? 통증은 느끼지만 자기가 힘들다는 건 느끼지 못하는 거지. 실제로 육체는 한계에 이르렀는데 정작 그 사실을 모르는 거야. 그래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죽어 가는 거야.”
말을 해도!
그런데 S급 에스퍼들은 그게 상당히 타당하다고 생각했는지 나에게 다가와서 이마에 손을 대 보기도 하고 눈앞에 손가락 두 개를 펼쳐 보이기도 했다.
“은우 씨. 이게 몇 개로 보여요?”
심우진은 나를 놀리려는 의도는 없이 정말 심각한 얼굴로 물었고 나는 고개를 흔들어 대면서도 두 개라고 말을 해 주었다.
“서은우, 정말 괜찮은 거야? 아프지 않아?”
“네.”
변태영에게 대답해 주자 모두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정말 엄청난 거네.”
그러나 마냥 감탄만 하는 것은 아니고 이번에는 그것 때문에 또 다른 고민이 생긴 것 같은 모습이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번에야말로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아. 오리진은 스스로 센트럴을 지킬 능력이 안 된다는 게 확실히 밝혀진 셈이잖아. 균열은 순식간에 나타날걸? 그 자들한테는 우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할 거야. 체제 유지를 위해서.”
전에 무슨 얘기를 했었는지, 견인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정말 S급 에스퍼를 납치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형? 나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았는데. S급 에스퍼를 어떻게 납치해요? 우리가 사람들을 상대로 해서 능력을 사용하지 않아서 그러는 것뿐이지 막상 마음먹고 하려고 하면 못 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나한테 헛짓거리를 하려는 놈이 나타나면 그냥 불살라 버리면 되는 건데 어떤 미친놈이 나를 납치하려고 하겠어요?”
변태영은 진지하게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이 말했고 심우진도 그 말에 동조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러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구나. 나는 가능성이 있겠네. 이하민도 가능성이 있겠는데?”
그러던 그가 나를 보더니 나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듯 다시 이하민을 보았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