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만약 가이드들이 그랬다면 그동안 에스퍼와 센터가 한 일이 있었으니 그럴 만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연구원들이 그런 건 확실히 심한 감이 있었다.
그러고 있을 때 견인의 디바이스가 울렸다.
“센터장인데?”
그는 연구팀장이 직접 연락하지는 못하고 센터장을 통해 말을 하려고 하는 건가 보다면서 연락을 무시했다.
“그런데 이하민은 왜 그렇게 안정제에 집착을 한 거야? 혹시 서은우가 우리 가이딩을 하는 게 싫어서 그런 건 아니지?”
변태영이 말하자 이하민이 움찔했다.
뭐야. 정말 그런 거라고?
이하민도 정말 웃겼다.
“연구원들을 뭐라 할 게 아닌데? 나는 이하민이 더 나쁜 것 같아.”
심우진의 말에 다른 S급 에스퍼들도 그 말이 맞다고 했고 이하민은 점점 얼굴이 붉어졌다.
“이하민. 정말 그런 거야? 말이나 좀 들어 보자.”
견인이 말했지만 나는 이하민이 그 말에 대답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하민은 미안해하기는 하면서도 대답은 분명하고 확실하게 했다.
“네. S급 에스퍼님들의 가이딩 방법은 제가 꼭 찾아내겠습니다. 그러니까 은우는 제 전속 가이드로 생각해 주세요.”
“…….”
S급 에스퍼들은 자기들이 지금 무슨 말을 들었냐는 듯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 잠깐만. 이하민. 그 일에 내 의사는 전혀 상관없는 거야?”
그러자 이하민이 깜짝 놀란 듯이 나를 보았다.
“은우야. 너는 혹시 싫어?”
“그렇지 않을까? 나는 능력이 있고 아무리 안정제를 빨리 개발한다고 해도 시간이 걸릴 거고 안정제가 아무리 좋다고 해도 가이드가 직접 가이딩을 하는 거랑은 다를 거야. 부작용이 있을 수도 있고. 게다가 나는 가이딩을 정말 잘하잖아. 그러니까 안정제에만 의존하라는 건 너무 심하지.”
S급 에스퍼들은 자기들이 하고 싶은 말을 내가 전부 해 주어서 속이 시원한 것 같았다.
“와아…… 정말 믿을 사람이 하나도 없네. 이하민이 이러다니. 와. 정말 실망이야, 이하민.”
견인이 말했지만 이하민은 굴하지 않았다.
“안정제에 부작용이 있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못 했어요. 그럴 수도 있기는 하겠네요. 그 문제만 아니었으면 저는 은우가 제 전속 가이드가 되어 주었으면 좋겠어요. 아. 그리고 제가 여전히 가이딩을 할 수 있으니까 에스퍼님들 가이딩은 제가 해 드려도 되고요. 그러니까 은우는 제 전속 가이드가 되게 해 주세요.”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나도 서은우가 내 전속 가이드가 돼 주면 좋겠어.”
“나도 그렇습니다, 은우 씨.”
“이 사람들 좀 봐? 서은우 에스퍼. 솔직하게 말해 봐. 내 전속 가이드가 되는 게 인간적으로 제일 낫지 않아? 속에 있는 마음을 감추지 말고 털어놔 봐. 말을 안 하니까 이놈 저놈 전부 날파리처럼 꼬이잖아.”
다른 사람들의 말에도 놀랐지만 나는 방점을 찍는 견인의 말에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걸까?
대체 왜?
정말 희한하고 신기하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벨이 울렸다.
일어날 것도 없이 모니터가 밝아지고 밖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이변 없이 센터장과 연구팀장이었다.
연구팀장이 마음이 급했을 거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되었기에 그 자리에 그들이 나타난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 사람은 없었을 터였다.
이하민이 나가서 문을 열어 주자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계셨군요.”
센터장은 요즘 들어 우리를 자주 본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좋은 일로 본 것도 아니어서 우리를 자주 보는 게 그로서는 별로 유쾌하지 않을 듯했다.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다고 하는데 거기에 대해 얘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서 연구팀장과 함께 왔습니다.”
센터장은 말을 하면서 S급 에스퍼들의 얼굴을 살폈다.
S급 에스퍼들이 우리에게 먼저 그 이야기를 들었는지 궁금한 표정이었다.
“먼저 사과를 하고 싶습니다. 연구원들이 한 이야기를 서은우 에스퍼님이 들으셨다고 하던데 그로 인해 에스퍼님이 오해를 하셨을 것 같아 급하게 왔습니다. 에스퍼님이 들으신 것은 잘못된 내용이고 그 연구원들이 한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이 찾아와서 그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뜻으로 농담을 한 건데 에스퍼님이 그 말을 듣고 그대로 믿은 것 같다고 말이지요.”
그것이 그의 최선이었을까.
어떻게 하면 이 상황을 피할 수 있을까 하고 머리를 맞댄 결과가 그거였을까.
나는 연구관 사람들이 그보다는 머리가 잘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내놓은 답은 최악이라고 할 만했다.
S급 에스퍼들도 기가 차는 듯 헛웃음만 웃었다.
“이러면 우리가 연구원들을 안타깝게 생각할 이유는 전혀 없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알겠습니다.”
내가 말하자 연구팀장은 그게 무슨 의미인가 하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가 센터장에게도 같은 이야기를 했을까.
센터장은 그 말을 믿었을까.
나는 그게 더 궁금했다.
센터장은 정치에 능한 사람이었다.
센터의 수뇌부들 대부분이 그 능력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런 사람에게 연구팀장이 지금 우리에게 한 말을 했다면 센터장은 그 저의를 알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연구팀장과 함께 와서 그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답 없네, 진짜.’
그때부터 나는 입을 다물었고 이하민과 S급 에스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식으로 나오겠다는데 괜히 상대를 해 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분위기를 눈치챘는지 연구팀장이 애꿎은 바지 위에 손을 문질렀다.
센터의 연구팀장이라면 결코 낮은 자리가 아닌데 그런 그를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게 만들 정도로 S급 에스퍼들의 존재감은.
아니. 잠깐만.
그게 아니라 실제로 지금 물리력을 사용하고 있는 건가?
견인을 힐끔 보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이 그가 능력을 사용하고 있었다.
변태영이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연구팀장은 쿨럭거렸고 센터장도 그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다.
그러나 자기들이 한 짓이 있어서 그랬는지 그만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보다, 그만하라고 말을 했는데도 견인이 능력을 거두지 않았을 경우에 떨어진 위신을 어떻게 수습할까 해서 그러는 건지도 모른다.
“연구팀장님은 일반인입니다. 일반인에게 에스퍼가 이런 식으로 능력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S급 에스퍼님이 그러시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이번 일이 있기까지 에스퍼의 잘못이 없었다고 할 수도 없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에스퍼는 사회의 최상류층이고 지금까지 많은 힘과 권력을 누렸어요. 그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밟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고요. 그런 에스퍼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희생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것은 당연했을지도 모릅니다.”
이하민의 말이었다.
나는 그가 그런 식으로 나설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연구원들이 연구 결과를 사실대로 꺼내 놓을지, 아직 확인할 게 더 남았다고 하면서 내놓지 않을지는 순전히 연구원들에게 달렸을 겁니다. 아직 검증하고 확인할 절차가 남아 있어서 지금까지 만든 안정제를 주지 못하겠다고 하면 우리로서는 그 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에스퍼들이 전과 같은 방식으로 일반인이나 가이드를 대한다면 저라도 그렇게 할 것 같습니다. 일반인들이 사회의 상류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일지도 모르니까요.”
이하민에게 저런 모습이 있었다고?
늘 그에게 한 방이 있다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그때의 모습은 전혀 상상외의 모습이었다.
견인은 재미없다고 생각한 듯 힘을 거두었고 연구팀장은 밭은기침을 해 댔다.
생각할수록 이하민의 말이 맞았다.
그리고 이하민이 말한 것처럼 말하는 게 연구팀장에게 더 좋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하민 역시 연구팀장이 한 말이 사실이라고 믿지 않았지만 그를 몰아세우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도망칠 길을 열어 준 것 같은데 그게 우리 입장에서는 훨씬 이로웠다.
일반인들, 특히 연구원들과 척을 져서 좋을 건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사람들의 목을 전부 치면 그 순간은 후련할지 몰라도 결국 궂은 일도 하나하나 자기 손으로 해야 했다.
S급 에스퍼들은 서로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틀린 말은 아니네. 이하민 말을 듣고 가이드들한테 좀 미안하다고 생각하기는 했는데 직접 말을 한 적도 없고 사과를 하지도 않았으니까 나도 잘못하기는 했네.”
“나는 잘못한 거 없는데. 가이드들한테 물어봐도 나한테 서운하다고 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변태영 너는 그냥 인상부터가 더럽게 생겼잖아. 네가 그렇게 인상 쓰고 옆에 서 있으면 저절로 숨이 막혔을걸? 그런데 나는 정말 억울한데. 나는 연습하고 훈련하느라고 거의 숲에 있었는데. 나야말로 가이드들이 안 무서워했을 텐데.”
견인부터 변태영과 심우진에 이르기까지 한마디씩을 했고 센터장은 그거야말로 적응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내가 그라고 해도 그럴 것 같았다.
“그러면 가이드들을 한번 모아 주시죠, 센터장님. 우리가 먼저 사과를 하면 다른 에스퍼들도 그러겠죠. 그게 좋겠네요. 일의 순서를 잘못 잡은 것 같아요.”
이래저래 가이드들에게 잘못한 게 많은 것 같은 견인이 가장 먼저 말했다.
처음에 우리 식당에 나타났을 때만 해도 견인의 존재에 가이드와 하급 에스퍼들이 얼마나 불편해하고 겁을 냈는지 생각해 보면 그는 그런 말을 할 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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