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변태영은 끝까지 자기는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사과를 해야 하는 건가 고민하는 것 같았고 심우진은 그냥 견인이 사과할 때 옆에 서 있으면 될 것 같다고 했다.
그래도 S급 에스퍼들이 그렇게 결정을 내린 것이 신기했다.
이하민이 아니었으면 그런 일을 꿈이나 꿀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S급 에스퍼들 사이에서 갑자기 반성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연구팀장은 혼자 숙연해지는 것 같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에스퍼님들에게 죄송하게 됐습니다. 연구원들이 찾아와서 얘기를 하는데 사실대로 말을 하면 일이 커질 것 같아서 제가 처리하겠다고 하고 궁색하게 머리를 썼습니다. 이하민 에스퍼님이 말한 대로 사실은 그런 마음도 조금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사적인 감정이고 센터에서 일을 맡았으면 책임지고 수행을 했어야 하는데 프로답지 못한 모습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그 말은 센터장과 상의도 없이 나왔고 오히려 센터장이 당황한 듯했다.
“지금 바로 상용화할 수 있는 것은 최대, C급 가이드의 점막 가이딩에 해당하는 효과까지 기대할 수 있습니다. 대량 생산은 아직 불가능하고 한 달에 오십 개까지는 생산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하민이 이루어 낸 쾌거였다.
나도, S급 에스퍼들도 일을 그런 식으로 할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에 이하민을 바라보았는데 정작 그도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저야말로 감사합니다, 팀장님.”
센터장과 연구팀장이 돌아가고 S급 에스퍼들은 이 일이 마냥 미루기만 할 일은 아니라고 하며 가이드에 대한 사과를 어떤 식으로 할 것인지 머리를 맞댔다.
“식사 시간에 맞춰 가이드 식당에 가서 말을 하면 어떨까?”
견인의 말에 이하민이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전부 체할걸요?”
“왜?”
“에스퍼님들 얼굴만 봐도 체할걸요?”
이유가 따로 있냐는 듯이 이하민이 대담하게 말했다.
“하…… 이하민이 언제부터 이렇게 할 말 다 하면서 살았지? 서은우랑 같이 다니면서 이렇게 된 거 아니야?”
변태영이 말하자 심우진이 진지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하민은 원래 그랬어. 은우 씨랑 같이 다니면서 좀 더 용감해지기는 한 것 같은데 전에도 할 말은 다 했어. 눈이 커서 겁먹은 표정이기는 한데 생기기만 그렇고 할 말은 원래 다 하면서 살았어.”
S급 에스퍼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듯하더니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하민이 그러는 걸 많이 본 것 같았다.
“태영이 네가 말은 제일 잘하니까 대표로 네가 말하면 되겠다.”
견인이 은근슬쩍 떠넘기려고 하자 변태영이 그를 흘겼다.
“무슨 말이에요? 가장 잘못한 거 많은 형이 하는 게 맞죠.”
견인에게 떠넘기는 이유도, 견인이 자기보다 말을 더 잘한다는 건 아니었다.
이하민은 그 모습을 그저 흐뭇하게 바라볼 뿐이었다.
지금 그는 어떤 기분일까.
오랜 시간을 가이드로 살다가 에스퍼로 발현해 가이드 인권 운동의 선봉에 선 것 같은 이하민.
그것은 그에게 참 잘 어울렸다.
만약 내가 이하민과 같은 삶을 살았다면 나도 그렇게 했을까?
‘그런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나도 사과해야 하나? 나는 정말 잘못한 게 없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일단 물어보기는 하자 싶어서 이하민에게 물었더니 이하민이 나는 빠져도 되지 않겠냐고 했다.
“은우 너는 가이드들이 에스퍼에게 안 좋은 취급을 당할 때마다 직접 나서 줬잖아. 나를 도와준 일도 많고. 가이드들도 알 거야.”
“맞아. 다른 가이드들이 너한테 사과를 한다면 모를까 나는 사과 안 해도 될 것 같아.”
내가 당당하게 말하자 S급 에스퍼들이 부러운 듯이 나를 보았다.
사실 S급 에스퍼들도 가이드들에게 잘못한 것은 없었고 가이드들이 그들을 어려워했던 것뿐인데…….
정말 사과를 해야 할 사람들은 다른 상급 에스퍼들인 것 아니냐고 하자 S급 에스퍼들이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도 우리가 먼저 이렇게 해 놓으면 다른 에스퍼들도 가이드들한테 함부로 못 할 테니까. 역시 우리 걱정해 주는 사람은 서은우밖에 없네.”
견인이 싱글거리면서 말했고 그런 이유라면 나도 같이 사과를 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결국 그렇게 결정이 났다.
“그럼 센터 식당에서 그러지 말고 센트럴에 나가서 고급 레스토랑을 빌려서 거기에서 하면 어때요?”
전에 변태영이 나를 데려가 주었던 곳이 생각나서 말했더니 변태영도 그곳을 떠올렸는지 눈이 빛났다.
“그럼 그럴까? 대충 말로만 하는 거 말고 기왕 할 거면 제대로 하는 게 낫지?”
“그럼 나는 옷이라도 한 벌씩 사 줄까? 계약 안 하고 그냥 센트럴로 돌아가겠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잖아. 그 사람들한테도 기억에 남는 게 있으면 좋잖아.”
견인이 말하자 심우진이 자기는 뭘 하는 게 좋을까 고민하는 모습이었고 나는 그에게 바이올린 연주를 제안했다.
“아아…….”
심우진은 별로 내키지 않는 것 같았고 일단 그가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챈 S급 에스퍼들은 이때다 싶었는지 꼭 그걸 해야만 한다고 몰아세웠다.
나도 그들을 도왔고 심우진은 어쩔 수 없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점점 커지는 것 같았지만 이하민에게 의미 있는 일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충분히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
예약 한 번 하는 것도 어려워서 이미 2개월 후까지 예약이 꽉 차 있다는 레스토랑이었다.
그러나 변태영의 전화를 받고 잠시 회의를 거친 후에 답변을 주겠다고 하더니 십 분도 지나지 않아 연락이 왔다.
센트럴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센터의 에스퍼와 가이드들에게 빚을 지고 있는 만큼 그날은 우리를 위해서 레스토랑을 오픈하겠다고 했던 것이다.
계획을 세우고도 예약이 될까 하며 조바심을 내던 우리는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레스토랑 예약을 맡았던 변태영은 속으로 긴장했는지 누구보다 더 기뻐하는 모습이었다.
그건 정말 쉽게 구경할 수 없는 모습이라 다들 신기해하는 분위기였고 견인은 여러 대의 차를 대절해 가이드들을 태우고 센트럴에 나가 최고급 백화점에서 쇼핑을 시켜 주었다.
평범한 사람들은 예약도 어려운 최고급 레스토랑에 가고, S급 에스퍼인 견인과 함께 쇼핑을 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평생 기억에 남을 만한 사건이었을 것이다.
견인의 인기는 견인과 가이드들이 백화점에 떴다는 소식이 각종 SNS를 뜨겁게 달군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견인이 왜 가이드들과 백화점에 온 건지 그 이유도 같이 알려지면서 일부러 홍보를 한 것보다 더 좋은 효과가 나타났다.
그리고 S급 에스퍼들과 이하민이 가이드들과 함께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할 거라는 소문이 같이 나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이하민. 사람들이 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안 떨려?”
“떨리지. 나는 은우 네 옆에 딱 붙어 있을 거야.”
“자신 있어? 내가 제일 인기가 많을 것 같은데. 내 옆에 있으면 너한테도 관심이 쏟아질걸?”
“정말 그럴 것 같기는 한데 그건 내가 감수할게.”
이 녀석이라면 정말 그럴 것 같아서 놀리는 게 재미가 없었다.
심우진에게도 떨리지 않냐고 물어봤는데 그는 떨릴 게 뭐가 있겠냐고 반문했다.
“일부러 실수를 하려고 해도 실수하기가 어려울걸요?”
“아…….”
“아니. 그게 사실이잖아요. 어울리지도 않게 겸양 떠는 거 정말 싫어하거든요.”
그가 그렇다는데 뭐라고 할 건가 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갈수록 기대감에 들떴다.
가이드와 함께 하는 레스토랑에서의 식사를 기대하는 사람이 우리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미리 생각했어야 했다.
***
그렇다고 거기에 각 매체의 취재진들이 그렇게나 많이 모여들 거라고는 상상을 하지 못했는데 그 일이 벌어졌다.
취재 경쟁이 어찌나 과열됐는지 정작 우리도 레스토랑에 가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나는 S급 에스퍼들이 짜증을 낼까 봐 조금 걱정이 됐는데 그들은 오랜만에 나온 게 즐거운 건지, 그날은 웬만하면 화를 내지 말자고 서로 약속이라도 한 건지 퍽 여유로운 모습을 보였다.
“이하민. 너도 여기에 와 본 적 있어?”
나는 전에 와 본 적 있다고 자랑을 하고 싶어서 물었고 이하민은 내 말을 듣지도 못한 채 바깥을 구경하느라고 여념이 없었다.
“저기에 저게 생겼네? 전에 왔을 때는 없었는데. 저 건물도 바뀌었네? 저기에는 빵집이 있었던 것 같은데 이사 갔나?”
그런 것까지 아는 걸 보면 적어도 나보다는 더 자주 와 본 모양이었다.
“가이드들이 너한테 많이 고마워하겠다, 이하민. 내가 너였으면 나는 이렇게까지는 못했을 것 같아. 나는 개구리가 되면 올챙이 적 기억은 안 할 거거든.”
이하민은 내 말이 웃긴다면서 큰 소리로 웃어 댔다.
그러면서 그건 아마도 내 생각이 틀린 것 같다고 말했다.
“너는 이미 개구리가 되고 나서도 올챙이들을 잘 챙겨 줬어. 너는 정작 올챙이 시절을 거치지도 않은 엄청난 개구리였는데도 그랬지.”
그렇게 믿고 싶다면 허락해 줘야지, 뭐.
S급 에스퍼들이 탄 차가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수많은 카메라에서 플래시가 터졌다.
레스토랑은 우리를 제외한 다른 손님은 받지 않기로 했는데도 불구하고 북새통을 이루었고 그곳에 가기까지 정말 오래 걸렸다.
S급 에스퍼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 몰려든 팬들로 주변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S급 에스퍼들은 차에서 내리고도 먼저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우리를 기다려 주었는데 유명 디자이너가 직접 디자인한 정장을 입고 서 있는 모습이 조각상을 방불케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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