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아, 긴장돼.”
내가 말하자 이하민이 웃으며 내 옆에서 함께 걸었다.
“여기 좀 봐 주시죠, 견인 에스퍼님.”
“변태영 에스퍼님, 이쪽으로 한번 돌아 주시겠습니까?”
“심우진 에스퍼님, 오늘 바이올린을 연주하시나요? 케이스에 든 건 바이올린인가요? 바이올린을 공개 석상에서 연주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오늘 특별히 연주하시는 이유가 있을까요?”
나는 그들이 대답을 듣지도 못할 거면서 참 열심히도 말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S급 에스퍼들은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팬 서비스를 확실하게 해 주고 있었다.
심우진은, 오늘 이 자리가 우리를 위해 헌신해 준 가이드들에게 그동안 받았던 고마움을 보답하기 마련된 자리라며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싶었다고 했다.
“이하민 에스퍼님이다. 이하민 에스퍼님. 이쪽 좀 봐 주십시오.”
“서은우 에스퍼님이랑 같이 포즈 좀 취해 주시겠습니까?”
이하민의 인기도 좋았다.
이하민이 차에서 내린 것을 알고는 S급 에스퍼에게 붙어 있던 사람들 중 일부가 그에게 다가올 정도였다.
S급 에스퍼를 포기하고 이하민에게 온다는 건 대단한 의미였다.
나는 이하민의 인기가 정말 대단하구나 하면서 신기한 기분을 감추지 못했다.
혹시 S급 에스퍼들이 질투를 하지는 않을까 했는데 그것은 순전히 내 기우였고 그들은 그 틈을 타서 안으로 들어가자며 나에게 눈짓을 했다.
그래도 이하민을 배신하면 안 되지 했지만 사람들이 이 신예를 도통 놔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아서 어쩔 수가 없었다.
“세계 최초로 증폭 능력이 발현됐는데요. 증폭 능력이라는 게 정확히 어떤 건지 말씀해 주실 수 있습니까?”
“이제껏 가이드로 발현했다가 에스퍼가 된 사례가 없는데 이하민 에스퍼님의 각성으로 전 세계적인 관심이 집중돼 있는데요. 각국에서 이하민 에스퍼님께 러브 콜을 보내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혹시 러브 콜에 응할 생각이 있으십니까?”
“S급 에스퍼들로 구성된 길드에서 좋은 조건으로 이하민 에스퍼님을 스카우트하고 싶어 한다는 소식이 있었는데 혹시 연락을 받으셨나요?”
기자들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 중에 내가 듣지 못했던 것들이 제법 있었다.
‘그랬어? 이하민에게 그런 제의들이 들어오고 있어?’
그런데도 그동안 그런 얘기가 전혀 없었던 걸 보면 이하민은 거기에 관심이 없는 것 같았다.
나라면 좀 흔들릴 만도 했을 것 같은데.
그들이 내건 조건이 뭐냐에 따라서 달라지기는 하겠지만.
나는 S급 에스퍼들과 먼저 들어가려고 하다가 이하민에게 묻고 싶은 게 생겨서 기다렸다.
S급 에스퍼들도 꼭 서둘러 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은 아니었는지 그 옆에서 같이 기다려 주었다.
“이렇게 S급 에스퍼님들이 한자리에 모인 적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다 같이 모여서 기념 촬영을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이하민 에스퍼님도 같이요.”
그러자 견인이 기자들을 보며 말했다.
“D급으로 각성했다가 새롭게 S급이 된 경우도 유례없는 일인데 왜 서은우 에스퍼에게는 질문을 안 하죠? 우리 서은우 에스퍼가 성질이 좀 안 좋기는 하지만 얼굴도 잘생겼고 부족한 것도 없고 레이드도 잘하는데 왜 차별합니까? 성질 나쁜 게 이미 다 소문이 났나요?”
이 인간이.
쓸데없이 나를 챙기려고 그러는 건가 하면서 그럴 필요 없다고 하려고 했더니 나를 먹이려고 그런 모양이었다.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고 나에게도 질문을 퍼부으려고 하기에 그들을 향해 손을 저었다.
사람들의 관심을 받고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영 어색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안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으니 이만 들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가이드분들 중에 앞으로 센트럴로 돌아가 일반인의 삶을 사시게 될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그분들을 보게 된다면 따뜻하게 맞아 주기를 바라겠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이런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이 전부 그분들의 희생 때문이라는 것을 늘 기억해 주십시오.”
변태영이 말하자 일제히 플래시가 터졌다.
랭커 1위의 S급 에스퍼가 한 말에는 대단한 영향력이 있었다.
그 사람이 다른 이도 아닌 가이드들에 대해 해 준 말이 얼마나 큰, 그리고 얼마나 깊은 울림을 안겼을지는 쉽게 짐작이 되고도 남았다.
어느새 이하민이 내 옆으로 왔고 우리는 다 함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올지 몰랐어.”
이하민은 들뜬 기분을 감추지 못한 채 말했고 나도 그의 말에 수긍했다.
S급 에스퍼들조차 후끈 달아오른 분위기에 흥분감을 느끼는 듯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가이드들이 일제히 일어나 박수를 쳤다.
밖에서 변태영이 한 말을 들은 걸까 하며 우리는 인사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테이블이 전과 다르게 배치되어 있었고 센터의 모든 가이드가 왔음에도 자리는 부족하지 않았다.
수많은 직원들이 능숙하게 테이블 사이를 오가며 요리를 날랐고 심우진은 한쪽으로 가서 바이올린을 연주했다.
누가 소개할 틈도 없이 냅다 연주를 시작한 거였는데 주목받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그런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그의 성격을 생각하면 지금 사람들의 앞에 나가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도 대단한 일이었다.
가이드들은 그 자리가 얼마나 특별하게 만들어졌는지 충분히 알았을 것이다.
전 세계적인 인기를 구가하는 S급 에스퍼들에, 눈부신 신예 이하민, 그리고 내 입으로 말하기는 그렇지만 역시나 눈부신 신예인 나까지.
그 사람들이 센터의 가이드들을 위해서 자리에 나와 준 것이 아닌가.
식사를 하는 동안 S급 에스퍼들은 테이블을 찾아다니며 가이드들에게 자연스럽게 말을 걸어 주었고 가이드들은 감격 어린 표정으로 S급 에스퍼들을 바라보았다.
정말 진귀한 장면이었다.
나는 그곳에 있는 가이드들 중에 센터의 계약 요청에 응할 사람들이 얼마나 될지 궁금했다.
이하민은 계속 내 옆에 있었는데 그와 얘기를 나누고 싶어 하는 가이드들이 많았다.
“나하고 한잔하자, 이하민.”
식사가 아직 끝나기 전에 이하민에게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익숙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윤이재였다.
이하민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는 A급 가이드.
“이런 자리도 마련하고. 정말 대단하네. 존경스럽다. 내가 너였으면 가이드를 챙기자는 말 같은 거 안 했을 것 같은데.”
윤이재도 그런 말을 할 줄 아나 하면서 이하민을 보자 그가 씁쓸하게 웃었다.
가이드를 챙기자는 말 같은 거.
그 어감이 그다지 유쾌하지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그는 굳이 그것을 지적하지는 않고 웃어 주었다.
“잠깐 상담 좀 요청해도 돼? 내가 A급이다 보니까 센터에서는 나를 붙잡고 싶은 것 같은데 센터에서 제의한 계약 조건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서. 너 아니면 털어놓고 물어볼 사람도 없고 말이야.”
그를 보면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이하민은 내키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윤이재가 계속해서 조르며 자리를 떠나지 않자 어쩔 수 없겠다는 듯 일어섰다.
“금방 올게, 은우야.”
“가고 싶지 않으면 꼭 갈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나도 이하민이 윤이재와 같이 나가는 게 썩 달갑지 않아 말했지만 이하민은 금방 돌아오겠다는 말을 반복했다.
그가 마냥 윤이재에게 휘둘리기만 하는 것도 아니라서 나는 이하민을 기다렸다.
바이올린 연주를 마치고 돌아온 심우진이 이하민이 앉아 있던 자리에 앉았다.
“식사도 못 하셨겠어요. 그렇게 오래 하실 줄 몰랐는데.”
“하다 보니 분위기에 취했나 봐요. 다음에 또 이런 걸 하게 될 것 같지도 않고 한번 하는 김에 끝장을 보자고 생각했죠. 오늘은 연주가 잘 되기도 했고요. 은우 씨는 재미있게 보냈어요?”
“네. 재미있네요. 솔직히 감동받았어요. 이렇게까지 열심히 할 거라고 생각 안 했는데. 다들 이하민을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 것 같아서 감격했어요.”
“이하민을 소중하게 생각해 주는데 왜 은우 씨가 감격해요?”
심우진이 샤인 머스캣을 입에 가져가며 물었다.
“이하민은 제가 이곳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니까요.”
“이곳에 와서요?”
그는 그 말이 희한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고 나도 내가 실수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는 내가 이곳에 온 게, D급 에스퍼로 각성해서 센터에 온 때일 터였다.
“은우 씨를 조금 더 일찍 알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으면 에스퍼로서 실력도 더 좋았을 것 같고 그 긴 시간이 그렇게 삭막하지도 않았을 것 같아요. 요즘 보내는 시간이 만족스러우면 만족스러울수록 왜 진작 그러지 못했는지 생각하면 조금 아쉬워요. 우리가 다른 곳에서 지낸 것도 아니고 같이 센터에 있었는데. 우리는 계속 정말 가까이에 있었는데 말이죠.”
그거 아닌데.
그러나 그의 오해를 풀어 줄 수는 없었기에 나는 그냥 웃기만 했다.
“그런데 이하민은 어디에 갔어요? 오래 걸리네요?”
“윤이재 가이드랑 나갔어요. 가이드 계약 때문에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고요. 자랑하고 싶은 것 같던데……. 가이드일 때부터 이하민을 많이 견제했거든요.”
“그 A급 가이드 말이죠?”
심우진도 그를 아는 듯했다.
“판은 이하민이 깔아 놨는데 막상 누리는 건 윤이재 가이드 같은 사람들이겠죠.”
“간단히 얘기하고 돌아올 줄 알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네요? 한번 나가 보는 게 좋을까요?”
심우진은 내가 하는 말을 듣지 못했다.
초대도 하지 않은 센터장이 갑자기 그곳에 들어오며 그를 부른 탓이었다.
분위기를 보니 나도 부를 것 같았는데 나는 시선을 피한 후에 우선 이하민을 찾으러 나갔다.
지금까지 오지 않는 걸 보면 윤이재가 또 말도 안 되는 시비를 건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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