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이때 그냥 이하민을 죽였어야 하는 거였어. 그렇게 하면 집착광공들이 다 미쳐 날뛰었을 텐데. 그렇게 하는 게 임팩트가 강했을 텐데. 내가 지금까지 이하민을 살려 줬으면 고마운 줄 알아야지 어디서 감 놔라 대추 놔라야.”
나는 정신없이 누나에게 다가가서 누나가 보고 있는 스마트폰을 뺏어 들었다.
“야, 이 새끼야! 너 뭐야. 너 미쳤어? 당장 안 가지고 와?!”
누나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 소리는 정말 옆에서 빽 지르는 것처럼 현실감이 넘쳤다.
“당장 가져오란 말이야!!”
그러나 나는 누나의 말대로 해 줄 수가 없었다.
나는 아예 그것을 들고 현관으로 달려갔다.
그것도 정말 익숙했다.
어디로 가면 되는지, 그걸 열고 나가면 어디로 이어질지 그런 것들을 정말 잘 알 수가 있었던 것이다.
문을 열자 내게 익숙한 풍경이 나타났다.
냄새마저도 똑같았다.
‘돌아왔어? 내가 돌아온 거야?’
무협 게임 세계에 들어간 이후, 나는 이곳으로 돌아오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리고 게임 세계에서 검의 지존이 되고 드디어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했던 것치고 너무 평범하고 지루하다.
심지어 권태롭기까지.
도대체 나는 왜 이곳으로 돌아오려고 그렇게 고생을 했던 걸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보물섬을 찾던 사람들이 마침내 보물섬을 찾았을 때 이런 기분이지 않았을까.
성배를 쫓던 이들이 성배를 손에 넣은 후에 이런 허탈함을 느꼈으려나?
나는, 내 경우에는, 이건 허탈함이라기보다 짙은…….
뭐라고 해야 할까.
꼭 그렇게까지 의미가 있지는 않은 것 같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려나?
누나도, 가족들도, 내가 속해 있었던 삶과 내가 꾸려 왔던 일상과 삶도.
더 이상 그렇게 큰 의미를 갖지 않았다.
돌아오고 싶었던 내 삶은 뭐였을까.
절대로 누나는 아니다.
이 집도 아니고.
내 삶이라는 건 도대체 뭐였을까.
그러나 지금은 한가롭게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지금은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빨리 누나의 소설을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급하게 화면을 터치했다.
누나가 빡칠 만도 했다.
잠시 본 것만 해도 안 좋은 댓글이 많았다.
이것 때문에 누나가 흑화한 거야?
아니. 그보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이게 뭐냐는 것이다.
꿈이겠지?
그냥 단순히 꿈이겠지?
지금 일어나는 일은 나랑 상관없는 거야. 그러니까 뭔가를 바꾸려고 할 필요도 없는 거고 나는 그냥…….
그래. 그냥 이걸 보고 웃어넘기면 되는 거야. 이걸 막 바꾸려고 할 필요도 없는 거고.
그게 맞는 걸 텐데 왜 이렇게 불안한 걸까.
첫 화 보기를 눌렀다.
그리고 첫 화가 완전히 달라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원래 내가 알고 있던 장면이 아니었다.
내가 알던 첫 화는 이하민이 S급 에스퍼들에게 토끼몰이를 당하며 숲으로 도망치는 거였다.
그곳에서 S급 에스퍼들은 이하민을 놀리듯이 유린하고 그에게 희망을 주는 것처럼 놔주곤 했다.
이하민은 절망하고 체념하면서도 도망치고 다시 S급 에스퍼들에게 붙잡히는데 화면 속에는 전혀 다른 장면이 등장했다.
던전에서 괴수를 공략하는 각각의 S급 에스퍼들.
그들의 전투 씬으로 시작하며 판타지적인 색채가 짙게 풍겼다.
지루하지 않게 임팩트만 뿜으면서 그 사이에서 S급 에스퍼의 특별함이 부각되었고 그들이 센터로 돌아가 이하민의 가이딩을 받는 모습이 이어졌다.
내가 알고 있는 이하민의 가이딩.
그 순수한 꾹꾹이가 나오고 있었다.
그것을 보는 동안 나는 그게 내가 있던 소설 속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거야말로 내가 있던 곳의 이야기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야! 너 진짜 미쳤어? 저 새끼가 밥을 잘못 먹었나!!”
누나가 험한 소리를 하면서 쫓아 나왔지만 나는 최대한 멀어지면서 계속 페이지를 넘겼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일들이 계속 나왔다.
대화 하나까지도 전부 똑같았다.
내가 이하민을 훈련시키는 장면도 나왔고 길을 잘못 들어서 숲으로 들어가 심우진을 만난 것도, 그의 바이올린 연주가 어떤 느낌인지도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세세하게 나와 있었다.
각각의 인물들을 묘사한 것은 사진을 앞에 두고 샅샅이 뜯어보면서 하나하나를 글자로 옮겨 낸 것 같았다.
내가 알고 있는 것들은 다시 읽을 필요가 없었다.
그것이 내가 살았던 세계의 이야기라는 것을 확인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빠르게 넘기면서 지금 상황이 펼쳐지는 곳으로 넘겼다.
그러는 동안 간혹 글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하민의 마음이 담긴 지문들이 톡톡 들어왔다.
빠르게 넘기고 있는데 그 문장들이 눈으로 속속 들어온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나를 발견했을 때 그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나를 만날 때까지 어떤 마음으로 기다렸는지.
던전에 간 내가 늦어질 때면 마음이 얼마나 타들어 갔는지.
그의 모든 순간은 나에 대한 그리움으로 채워진 것 같았다.
내가 없는 세계는 빛마저 사라진 무채색이었다가 내가 돌아오면 비로소 그의 세계가 다시 색으로 물들었다.
이하민이 정말 그랬다는 건 나도 알 수 있었다.
잠시 손이 멈췄다.
녀석이 그립다는 생각.
녀석에게서 전해지던 따뜻한 온기.
나를 안아 오던 손길과 녀석의 눈빛.
그 모든 것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생생하게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기만 하면 나를 바라보고 서 있는 녀석을 발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돌아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곳에는 끝없이 펼쳐진 회색빛 도시의 전경만이 이어져 있을 뿐이었다.
다시 스마트폰으로 고개를 돌려 조금 더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안정제, 새로운 센트럴, 엑소더스. S급 에스퍼.
이하민이 에스퍼로 각성하고 내가 가이드가 되고 내가 S급 에스퍼가 되는 장면까지 빠르게 지나갔다.
그러다가 너무 빠르게 지나가 버린 이름이 머릿속에 남아 자꾸만 불편하게 나를 잡아당기는 것 같은 기분에 나는 급하게 앞으로 돌아갔다.
차윤.
거기에 그 이름이 나왔다.
‘이게 누구지?’
그동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이름이었다.
새로운 센트럴 오리진으로 떠나자고 견인이 나를 회유한 장면이었다.
내가 거절하자 견인에게 다가온 사람이 있었다.
‘나는 모르는 장면인데?’
내가 익히 아는 거라고 생각해서 넘겼던 건데 기계적으로 페이지를 넘기면서도 그 장면이 자꾸만 나를 붙잡아 몇 페이지나 다시 돌아가 기어이 그것을 찾아냈다.
포기한 줄 알았던 누나가 또 한 번 문을 열고 나와서 당장 가져오라고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마음이 더욱 급해졌다.
스마트폰을 손에서 떼 놓으면 절대로 안 된다고 생각하는 누나였다.
몇 번 저렇게 좋은 말로 하다가 안 들으면 기습적으로 달려와서 나를 깔아뭉개고 무자비하게 주먹을 날릴 수도 있었다.
유교 사상에 찌들어 있는 내가 누나를 마주 때릴 수는 없으니 그냥 맞기만 하겠지.
이러려고 돌아온 건 아니니 나는 최대한 멀리 피한 채 빠르게 그 부분을 눈으로 읽어 나갔다.
「“할 수 있다더니. 그런데 D급 에스퍼한테 너무 공들이는 거 아니에요? 얼굴 보니까 타격이 큰 것 같은데. 서은우한테 특별한 능력이라도 있습니까?”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글쎄요? 그런 건 못 느꼈는데. 그보다 이하민은 어떻게 돼 갑니까? 이하민은 오리진으로 꼭 데려가야 할 텐데요. 싫다고 하면 에스퍼님이 강제로라도 데려오세요. 그래야 합니다.”
“그래? 정말 그렇게 생각해? 그렇다면 좀 실망인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이하민과 비교해서도 서은우가 더 낫다고 말하는 겁니까?”
차윤의 입에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S급 에스퍼 앞에서 보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는 난폭한 웃음이었다.
그러나 견인은 개의치 않았다.
자신의 말이 맞다는 것을 굳이 차윤에게 설명하고 싶지도 않았다.
“곱상하기는 하네요. 가이드였다면 쓸모가 있었겠어요. 에스퍼를 가이드로 강제로 개조하는 방법은 없나? 연구원들을 연구동에 가두고 알아내도록 해 볼까요? 아. 안 될 건 없지. 정말 그렇게 해 볼까?”
견인은 기가 막힌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나 차윤의 눈이 빛나는 것을 보고 그에게는 그게 전혀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곧 새로운 센트럴로 떠날 것이다.
실력 있는 연구관들에게는 이미 손을 써 둔 상태였다.
차윤의 선택을 받은 연구관들은 새 오리진으로 함께 떠날 것이고 이곳에 남게 될 이들은 폐급으로 분류된 자들 뿐이었다.
차윤은 자기가 폐급으로 분류한 자들을 이용해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에스퍼를 강제로 가이드로 각성시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도록.
그의 명령을 받으면 연구원들은 피곤이나 배고픔을 느끼지도 못하고 계속 연구에 매달릴 것이다.
지친다는 것을 알지 못한 채 계속해서 매달리다가 쓰러지는 이들이 속출할 터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될 테니 그렇게까지는 하지 않으려나?
견인은 신경 쓰인다는 듯이 차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처리해야 할 일들이 많았고 차윤에 대해 오래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그래서 어느 날 갑자기 서은우가 가이드로 각성했을 때도 그 일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도록 그는 그 사이의 연관성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
센트럴에서 우연히 차윤을 만났을 때까지도.」
‘이게 뭐지? 이게 무슨 말이야? 내가 가이드가 된 게 차윤 때문이었다고? 차윤이 연구관들에게 연구를 하게 한 거야? 그래서 에스퍼가 가이드로 각성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낸 거라고? 이 자는 오리진으로 떠났는데? 사람들이 오리진으로 떠날 때 이 자도 같이 떠났는데? 그러고도 우리 센터에 다시 왔던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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