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이드버스 이물질이 되어버렸다-54화 (54/137)

54화.

처음에는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내가 너무 순진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정신계 에스퍼.

‘이럴 게 아니야. 차윤에 대해 찾아야 돼.’

누나의 소설이라서 가능한 이야기.

이하민의 등급이 측정되지 않았지만 사실은 S급 가이드라거나 내가 표면상으로는 D급 에스퍼지만 사실은 S급 에스퍼라는 것처럼 누나의 소설 속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등급과 실제의 능력 수준이 다른 경우가 있었다.

차윤에 대해서도 그게 나와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걸 어디에서 찾아야 할지, 그 방대한 양을 전부 읽어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드디어 양치를 끝낸 듯 칫솔을 내던진 누나가 문을 발로 차며 나를 불렀다.

“야!”

“누나!”

내가 겁을 먹고 도망치기는커녕 자기를 부르자 누나는 잠시 움찔했다.

얼굴을 보니 뭔가 좀 뿌듯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위협을 하는데도 피해 가면서 볼 만큼 자기 소설이 그렇게 재미있나? 했을지도 모른다.

나에게도 스마트폰이 있는데 굳이 누나 폰을 가지고 도망쳐서 보는 이유는 그것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하겠지.

“누나!”

가까이 다가가자 누나는 내가 왜 이러는 건가 하는 듯이 갈고리눈을 떴다.

“너…… 왜 이래?”

“누나. 차윤도 그래? 차윤도 이하민이랑 서은우처럼 그래? 겉으로는 평범한 에스퍼지만 실제로는 S급 에스퍼라거나 그런 거야?”

그러자 누나가 깜짝 놀란 듯이 나를 보았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정말이라고?

아니. 뭘 이렇게 함부로 막 던져?

평범한 에스퍼인 줄 알았던 애가 사실은 S급 에스퍼였다는 걸 써먹었더니 독자들에게서 반응이 좋았던 건가?

그랬더니 가이드였던 이하민을 에스퍼로 만들고 그때도 재미를 본 것에 힘을 얻어 차윤까지 그렇게 만들기로 한 거야?

이 누나가!!

“누나 지금 제정신이야?!!”

누나는 나에게 갑작스럽게 그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됐으니까 말해 봐.”

“뭘!”

“차윤에 대해서! 그 인간이 어떤 놈인지!!”

말을 해 놓고 보니 정말 황당할 것 같았다.

갑자기 나타나서 스마트폰을 뺏어 도망치더니 몰래 소설을 읽다가 와서 하는 말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캐릭터에 대해 말을 하라고 추궁을 하고 있었으니.

그러나 누나는 그 순간에도 내가 이상하게 군다는 것을 수상쩍게 생각하기 보다는 자기가 만들어 낸 캐릭터에 내가 그렇게나 몰입한 것이 좋았는지 표정이 밝아진 채 이야기를 줄줄 읊어 댔다.

“내가 말이야. 처음에는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막 썼거든. 처음에는 이게 이렇게 반응이 좋을지도 몰랐고 출간 제의까지 올 것도 몰랐거든. 그런데 쓰다 보니까 점점 읽는 사람이 많아지고 반응이 좋은 거야. 순위도 높고. 너 몰랐지? 이거 전체 장르 1위도 했거든.”

“아니. 그런 건 하나도 안 중요하니까 다른 얘기는 필요 없고 차윤에 대해서만 말해.”

“너 좀 웃긴다…… 그래도 왜 그런 설정이 들어갔는지는 알아야지.”

“됐다니까?”

“뭐가 돼? 일단 들어!”

누나는 고집을 부렸다.

일단 자기가 마음먹은 건 어떻게든 하는 사람이니까 그냥 말을 하게 냅두는 게 차윤에 대한 이야기를 더 빨리 들을 수 있는 방법일 것 같아서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궁금해하니까 말은 해 줄게. 차윤은 S급 에스퍼야. 그러면 S급 에스퍼가 너무 많이 나오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많은 것도 아니야. 거기에 나오는 게 우리나라에 있는 S급 에스퍼들 전부니까. 딱 거기에 카메라를 비추고 있어서 그 자리에 있는 애들이 전부 S급 에스퍼들인 거지.”

그 이야기는 귀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S급 에스퍼라니.

차윤이 S급 에스퍼라니.

그렇게 하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한 누나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아니. 그런데 소설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건 이제는 나하고 상관도 없는 일이잖아? 나는 이제 소설에서 나왔는데. 그런 것 맞지? 나 소설에서 나온 것 맞지?’

이상하고 몽롱하고 헷갈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누나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자신의 망상을 풀어 내는 것이 취미였던 누나였는데 자기가 만들어 낸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동생을 발견했으니 얼마나 신이 났을까.

“처음에는 반응이 괜찮았거든. 신기해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하고. 어머, 가이드인데 에스퍼가 된 거야? 어머, 에스퍼였는데 가이드이기도 해? 그러면서 같이 신기해해 주고 좋아했단 말이야. 그런데 막 환청이 들리는 것 같은 거지. 너무 즉흥적으로 이것저것 다 갖다가 섞어 버린 것 같고 어디선가 그런 댓글을 달고 있는 독자의 모습이 상상되고.”

댓글 쓰는 모습이 상상될 정도라니.

누나는 도대체 어떤 삶을 살고 있었던 걸까.

굴하지 않은 채 누나는 얘기를 계속해 나갔다.

“그래서 치밀한 장치를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만든 게 차윤이야. S급 에스퍼들은 차윤의 정신계 공격이 통하지 않지만 이하민이랑 서은우에게는 통하지.”

“왜? 서은우도 S급 에스퍼잖아.”

“너. 벌써 거기까지 읽었어? 엄청 빨리 읽는다?”

그 말을 듣고 뜨끔했다.

다행히 현재 거기까지 진행이 되기는 한 모양이었다.

“그랬지. 그런데 차윤이 손을 쓴 건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야. 서은우가 한 번 바뀌잖아. 게임 세계에서 검의 지존에 올랐던 애가 빙의하면서. 서은우가 정말 강해지고 S급 에스퍼가 된 건 그때부터잖아. 그 전의 서은우는 등급도 낮고 이하민을 질투하면서 괴롭히던 애였고.”

나는 누나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하면서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에게 너무 익숙해서 소설이 그렇게 바뀐 것에 전혀 이질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빙의하고 난 후의 내용으로 완전히 바뀌어 있었는데.

소설 속의 서은우는 무협 게임에서 살다가 와서 자신의 힘을 감춘 채 이하민과 적당히 거리를 두려고 하다 어느새 이하민의 절친이 되는 캐릭터였는데.

그게 나고…….

이마에서 땀이 흐르는 것 같았다.

누나는 그 서은우가 누구인지 전혀 모른 채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사실 그거 설정 붕괴였거든. 심우진처럼. 심우진도 갑자기 반응이 좋아서 살린 거잖아. 서은우에 대해서 한참 쓰다가 보니까 얘가 처음부터 강한 애가 아니었잖아. 빙의하고 난 후에 강해진 거지. 만약에 빙의가 안 됐으면 끝까지 이하민을 괴롭히다가 죽는 애였을 거고.”

“그럼 서은우는 그 전에 차윤에게 정신 공격을 당한 적이 있었던 거야? 그게 계속 유지됐던 거고?”

“바로 알아듣네? 그런데 계속 유지된 건 아니고 일단 한 번 정신 공격을 당한 적이 있어서 그 후부터는 쉽게 당하게 됐다는 설정인 거지. 전에 당했던 공격 때문에 플랫폼이 생겨났다고 할까? 그래서 그 후에 차윤이 다시 정신을 조종하려고 하면 쉽게 당하는 거야.”

“왜…… 그랬는데?”

“이제 서은우가 수잖아. 그런데 너무 강하고. 사건이 만들어져야 하는데 그럴 틈도 없을 정도로 강하잖아.”

“그렇게 해서…… 무슨 사건을 만들 건데?”

마른침이 넘어갔다.

누나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몰라 누나의 입만 노려보았다.

“차윤한테 감금당하는 거지. 극악 새드 엔딩으로 하려고. 서은우랑 이하민, S급 에스퍼들 전부 죽는 거야. 서은우는 차윤한테 감금당하고 정신 개조돼서 돌고 자기가 누구인지도 잊은 채로 이하민이랑 S급 에스퍼하고 싸우는 거야. 걔들은 서은우를 구하려고 온 건데 말이지.”

“웃기지 마!”

누나가 놀란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나도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나서, 그리고 누나의 얼굴을 보고 나서 그게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그러나 그럴 수밖에 없었다.

누구 맘대로?

누구 맘대로 그렇게 만들어?

극악 새드 엔딩?

이 누나가 미쳤나!

“말도 안 돼. 고쳐. 당장 고쳐! 그렇게 쓴 거 아니지? 아직 안 끝났지?”

누나는 그때야말로 희한하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야. 너 괜찮냐? 혹시 어디 아파?”

“그래. 아파. 아프니까 고쳐. 원고 고쳐. 나 죽이지 말…….”

아니지.

나라고 하면 안 되지.

“서은우 죽이지 말라고. 이하민도 죽이지 말고 S급 에스퍼들도 건드리지 마!!”

“야…….”

누나는 이걸 불쌍해서 어쩔까 하는 듯이 아련하게 바라보더니 갑자기 성큼성큼 다가와 나를 덥썩 안았다.

“그렇게 슬펐어?”

뭐래?

“그렇게 확 이입이 된 거야? 나 성공한 거네. 다른 사람들도 그러겠지? 그러면 여운이 오래 남을 거고 이 웹소설의 홍수 시대에 오랫동안 사람들 마음에 기억될 수 있다면 그것도 큰 성과인 거잖아. 안 그래?”

“안 그래. 절대 안 돼. 절대 그런 결말은 안 된다고!”

내가 객기를 부린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내가 정말 진지하게 하는 말이라는 걸 알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야 누나가 내 말을 믿고 내 부탁을 들어줄지 알 수가 없었다.

‘무릎을 꿇어?’

누나 앞에서?

그건 지금까지 상상도 해 본 적이 없는 일이었지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도 나한테는 결말을 바꿀 수 있는 기회라도 있지 않은가.

“야……. 너 뭐해? 왜 이래? 정말 얘가 왜 이래?”

누나는 자기 앞에서 무릎을 꿇은 나를 보고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부탁이야. 살려 줘.”

이런 말을 내 입으로 하게 될 줄이야.

게임에서도 해 본 적이 없는 말인데.

진짜 미치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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