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그래도 지금 이렇게 해 놓지 않으면 안 되기는 할 거예요. 나중에 던전이 나올 때를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 두지 않으면 안 되니까요. 훈련만 해도 그래요. 지금은 너무 주먹구구식이에요. 게이트가 나오는 던전에 대한 대응책도 미리 마련해 놓지 않으면 안 되고 던전에서 나오는 각각의 괴수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 공략을 하는 게 좋은지 그 훈련도 필요해요. 체계적으로 훈련을 해 놓으면 던전에서 부상을 당하거나 죽는 사람들이 훨씬 줄어들 거예요. 지금까지의 센터장이나 수뇌부가 그런 일에 적합하지 않았다는 건 모두 알고 있잖아요.”
어쨌든 기왕 하기로 했으니까 힘을 내보자는 취지로 말했더니 S급 에스퍼들이 ‘오오오오’ 하며 감탄하는 눈빛을 했다.
특히나 심우진은 엄지까지 들어 올리며 역시 대단하다고 추켜세웠다.
“그 말이 맞기는 해. 해결되지 않은 일이 잠깐 멈췄다고 다 끝난 것처럼 덮어놓고 지나갔잖아. 결국은 다시 돌아올 텐데 말이야.”
견인이 말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서은우. 괜히 정보팀장을 맡네 어쩌네 하지 말고 에스퍼들 훈련을 맡으면 어때? 그러면 내가 센터장 할게.”
“왜 거기에 조건을 달아요?”
말을 그렇게 하기는 했지만 상당히 끌렸다.
가장 좋아하는 사람은 이하민이었다.
“그래. 은우야. 너는 역시 그게 잘 어울려. 지금의 나를 만든 것도 너잖아. 너라면 잘 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장담해.”
하긴. 내가 잘하기는 하지.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얘기라 고개를 끄덕였더니 견인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웃었다.
“서은우 에스퍼. 좀 겸손해져 봐.”
“일단 저처럼 생기면 겸손해지는 게 쉽지는 않아요.”
“그래.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야. 나라도 그럴 것 같기는 하니까.”
결국 변태영과 심우진은 따로 다른 직책을 맡지는 않고 견인을 보좌하는 것으로 정해졌다.
그동안 해 왔던 조직 체계를 그대로 유지해야 할 필요는 없을 거라는 생각에 다 같이 공감했는데 일단 결정이 내려지고 나자 그때부터는 빠르게 일이 추진되었다.
***
센터 내부에 거센 바람이 휘몰아쳤다.
센터장을 비롯해 대부분의 기관장이 날아갔고 그들의 비리 사실이 드러났다.
센터장이 가이드를 이용해 정재계 인사들에게 성 상납을 해 왔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다른 기관장들도 그렇게 받은 이익을 같이 누렸다는 내용이 공개되었다.
에스퍼들은 오리진이 갈라져 나갈 때 왜 센터장이 그렇게 무력하게 가만히 있었는지 그제야 이해하는 듯했다.
오리진 센트럴에 대한 조치도 발표되었다.
오리진 센트럴은 다시 원래의 센트럴에 편입되고 우리는 더 이상 베타 센트럴로 불리지 않는다고 공표했다.
모든 에스퍼와 가이드는 본 센트럴로 돌아오도록 했고 오리진 센트럴에 생기는 던전의 공략은 후순위로 밀린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차윤은 그 선봉에 서서 마치 개선장군처럼 돌아왔다.
만약 내가 정보팀장을 맡으면 차윤을 한번 보기는 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견인과 S급 에스퍼들은 차윤을 정보팀장으로 두는 게 어떻겠는지 나에게 물었다.
그건 딱히 상관이 없었다.
나는 에스퍼들의 훈련을 맡았고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기에 거기에서 더 많은 것을 생각할 여력이 전혀 없었다.
차윤은 윤이재를 자신의 전담 가이드로 두고 싶어 했고 S급 에스퍼들은 비웃으면서 거절했다.
차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별로 타격을 받는 표정도 아니었다.
그럴 줄 알았으면 애초에 부탁은 왜 한 걸까 할 정도였는데 차윤이 나를 찾아왔다.
“나에 대해 감정이 안 좋을 건 아는데 일단은 사과를 하고 싶어서. 꼭 사과를 받아 줘야 하는 건 아니고 용서하고 싶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아는데 그래도 사과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미안한 줄 알면 그냥 내 앞에 나타나지 마. 같은 장소에 있게 돼도 와서 알은 척하지 말고.”
확실하게 말을 했지만 차윤은 할 말을 계속했다.
“윤이재 가이드는 여러 사람이랑 닿아 있어. 자기가 가진 걸 이용해서 필요한 걸 얻는데 도가 튼 사람이거든. 윤이재랑 자연스럽게 만날 기회가 만들어지면 정보팀을 하나 운영하는 것보다 더 유리할 수도 있어서 그러는데 일이 잘되게 해 주면 안 될까?”
그러면서 그는 윤이재를 통해 자기가 알아낸 걸 말해 주었다.
에스퍼들에게 말해 주는 것은 어려운 게 아니라 그러겠다고 했을 때 차윤이 나를 보고 웃었다.
“이 일이 센터에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허락한 것뿐이야. 다음부터는 다가오지도 말고 말 걸지도 마.”
“얼마쯤 지나면 화를 풀 건데?”
이 미친 새끼.
미안하다고 생각은 하는 건가?
“나를 그 정도로 팼으면 인간적으로 화를 풀어 줘도 되는 것 아닌가?”
그 말을 들으니 순간적으로 수긍하게 될 것 같았는데 일단은 버텼다.
“서은우 에스퍼.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데. 혹시 말해 줄 수 있나?”
“꺼져.”
“게임 세계에 빙의했었어?”
돌아서는 내 뒤에 대고 차윤이 말했다.
“……!”
아무 대꾸도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게 어깨가 솟구친 것 같았다.
‘봤을까? 그런데 저 새끼가 그걸 어떻게 안 거지? 설마 그 오두막에서? 내가 다 말해 버린 건가?’
나는 잠시 멍하니 허공을 보다가 그대로 걸음을 옮겼다.
“이건 누나가 쓴 소설이야?”
“헛소리하지 마.”
“맞아? 맞네.”
“차윤. 아직 덜 맞았지? 내 앞에서 얼쩡거리지 마. 나는 아직 너 용서 안 했으니까. 너에 대한 처벌도 아직 정해지지 않았고. 내가 너를 사적으로 처리하게 해 달라고 S급 에스퍼들에게 허락을 받으면 어쩔 거지?”
그러자 차윤이 입에 지퍼를 잠그는 시늉을 했다.
확 그냥 한 대 시원하게 쳐 버리면 좋겠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한테는 그 이야기를 안 했어? 이하민한테도? 왜? 이하민이랑은 엄청 각별한 사이인 것 같던데. 만약에 나한테 그런 비밀이 있으면 나는 말을 할 것 같은데. 만약에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배신감을 느끼지 않을까?”
결국 돌아서서 성큼성큼 다가가자 차윤은 내가 때리지 못할 거라고 믿는 듯 환하게 웃었다.
내 주먹에 얻어맞고 쓰러져 바닥에서 데굴데굴 구를 때까지도 그 녀석의 얼굴에는 그 웃음이 남아 있었다.
“사람이.”
퍽-.
“말을 하면.”
퍽-.
“들어, 새끼야!”
퍽, 퍽, 퍽-!!!!
발길질과 주먹질은 지나가던 특임대원들의 만류에 겨우 멎었다.
그래도 차윤이 더 이상 웃지 못한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됐다.
진짜 마음에 안 들어.
***
이하민은 아무래도 계획적으로 그런 것 같았다.
특임대원들을 훈련시키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고 하기는 했지만 이제는 그도 자신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 얼마나 힘을 쓰면 한계에 이르는지, 그리고 어느 선을 넘어가면 파장이 위험 수치에 이르는지 알 때도 됐다.
남들은 그걸 알게 되면 위험 수치에 이르지 않도록 조절하고 멈춘다.
그런데 이 녀석은 오히려 위험해지려고 작정을 하고서 능력을 사용하는 것 같았다.
특임대원들도 그걸 느끼는지, 이하민이 자기들을 훈련시킬 때마다 걱정을 할 정도였는데 녀석은 기어이 위험 수치에 이르러 나를 찾아왔다.
나는 에스퍼들을 훈련 시킬 커리큘럼을 짜는 중이었다.
사실 커리큘럼이야 별것 없고 이하민에게 했던 것을 그대로 다시 할 생각이기는 했다.
그래도 새로 맡은 거니까 뭔가 좀 있어 보이게 하려고 머리를 굴리는 중이었는데 이하민이 내 새 집무실에 들어왔던 것이다.
“나 아픈 것 같아.”
그 말을 어찌나 뿌듯하고 자랑스럽게 하는지.
“그래? 어디가?”
“몸이 전부 다 그렇지.”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좋을까.
‘정말 그렇다는 말이지?’
이번에도 순순히 가이딩을 해 주면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나타날 것 같아 이번에는 절대로 호락호락 넘어가 주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녀석도 이미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아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전혀 긴장한 얼굴이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내가 무슨 마음으로 자기를 기다렸건 상관없이 조금만 지나면 자기가 그러는 것보다 더 간절히 내가 그를 원할 거라는 걸 알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아서 분했다.
“너 왜 자꾸 웃냐, 이하민?”
괜히 시비를 걸었더니 녀석의 웃음이 더욱 환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잖아, 은우야. 나는 너랑 같이 있으면 너무 좋아.”
이하민은 언제나 그랬다.
싸움을 걸어도 너무 터무니없이 져 주는 바람에 이쪽에서 의욕을 상실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이하민. 너 정말 이러면 안 돼. 내가 전에도 말했는데 그냥 허투루 들은 것 같아.”
내가 가이딩을 하지 못할 때를 대비하라는 말.
그때도 이하민은 내 말을 대충 듣는 것 같더니 또 이렇게 나타난 것이다.
“이번에는 가이딩 안 받아도 돼. 어차피 그렇게 많이 힘이 든 것도 아니고 이 정도 파장은 스스로 가라앉힐 수 있어. 나도 가이드였잖아.”
그냥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혼자서 참아 내는 걸 어떻게 보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는가.
내가 그러지 못할 거라는 걸 모르지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그 마음을 이용하려고 그런 것 같지는 않고.
이하민은 언제나 어려웠다.
그리고 그게 좋았다.
녀석을 아무리 알아 가도 알아 갈 것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다는 게.
“이리 와.”
손을 내밀자 녀석의 얼굴에 거부할 수 없는 웃음이 지어졌다.
이하민은 알까.
자신의 웃음이 나를 어떻게 만드는지.
나를 꼼짝 못하게 하고 숨이 멎을 것처럼 가쁘고 헐떡거리게 만든다는 걸 이 녀석은 상상이라도 할 수 있을까.
너는 알아?
내가 너를 얼마나…….
***
어느 때부턴가 그랬다.
능력을 너무 많이 사용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면 기대가 생겼다.
이대로 조금 더 능력을 쓰면 가이딩이 필요해지겠다는 생각이 들고, 은우를 만날 정당한 이유가 생긴다는 사실이 좋았다.
하민은 자기가 자꾸만 웃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의 주변에 있는 모두가 알고 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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