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이하민. 네가 가이드였어서 그런 걸까? 너한테 아직 가이딩 능력이 남아 있나 봐.”
“왜?”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녀석을 바라보았다.
“너랑 있으면 나도 안정이 되니까.”
“은우 네 파장은 언제나 안정적인데? 단 한 순간도 치솟지 않…… 아, 아니네. 있네.”
“있어? 언제?”
처음에는 나도 그렇게 주장하고 있었지만 자신 있게 아니라고 하던 이하민이 그렇게 말하자 그게 언제인지 궁금해졌다.
“차윤 에스퍼랑 있을 때.”
그러고는 녀석이 웃음을 터뜨렸다.
“아아. 그건 인정하지. 그 인간이랑 있으면 분노 게이지가 폭발해.”
“그래. 너를 보는 사람은 누구라도 그걸 알 수 있어.”
그의 웃음을 보다가 눈을 감았다.
녀석의 웃음이 생생하게 그려졌다.
“이제는 다 알 것 같아, 이하민. 눈을 감아도 네가 보여.”
“그래도 봐 줘.”
눈을 감고 있는데 눈앞이 한층 더 어두워졌다.
그가 다가온 것이다.
그리고 곧 이하민의 입술이 느껴졌다.
이마에서 눈으로, 콧등에서 뺨으로.
그리고 턱과 귀를 지나 다시 입술로 돌아오더니 그곳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내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어찌나 자상하고 부드러운지 심장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언제 벗겨진 건지, 내가 걸치고 있던 옷이 바닥에 쌓였다.
나도 서둘러 이하민의 옷을 벗겼다.
왜 유독 그의 몸은 질리지 않는 걸까.
왜 권태로움이라는 감정이 그에게만은 적용되지 않는 걸까.
그가 내 어깨를 가볍게 물었고 그 바람에 이하민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쏟아졌다.
나는 지극히 평화로운 기분을 느끼면서 동시에 헐떡였다.
오직 그만이 나에게 안겨 줄 수 있는 만족감에 대한 기대감이 조금씩 내 호흡을 가빠지게 했다.
따뜻한 손길이 허리를 쓸다가 나를 저에게로 당겨 안았다.
비틀거리며 그에게 매달린 채 그를 보았다.
녀석의 입술이 눈에 들어왔다.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던 입술이었다.
붉게 물든, 깊은 열망으로 젖은 입술에 파고들어 그것을 머금었다.
나도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은데 영 어색하고 민망해서.
내가 한 말이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것은 창피할 것 같아서 녀석에게 키스를 하고 입을 맞춘 그대로 중얼거렸다.
“사랑해.”
소리가 되지도 않고 그저 숨결에 묻어 나간 속삭임이었다.
그런데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이하민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직되는 것 같았다.
기어이 나를 떼 내고 그가 물었다.
“은우……야. 너 지금 뭐라고 했어?”
왜인지, 그를 볼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하기 힘든 말이라서 전에 그 말을 들었을 때 나도 그렇게 가슴이 두근거린 거였을까.
“은우야. 다시 말해 줄 수 있어?”
세상을 다 가진 표정으로 이하민이 말했다.
“싫어. 못 들었으면 말아.”
“아니…… 들었는데. 들었는데…….”
그는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르고 싶은 것 같은 얼굴이었다.
얼마나 좋은지 알 것 같았다.
“너. 정말이야?”
“그래. 좋아하지도 않는데 이렇게 열심히 가이딩을 해 줄 줄 알았냐?”
“너는 가이드니까 해 주기는 해야지.”
이하민은 가끔씩 이랬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꼭 필요하지도 않은 말을 정확하게 해서 분위기를 애매해지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지금도 그랬다.
“그래도 이렇게까지는 안 해도 될걸? 안정제도 이제 제법 개발됐고 S급 에스퍼들도 파장이 위험 수치에 도달하기 전에 안정시켜 주니까. 그리고 나는 S급 가이드잖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대부분은 다 안정이 돼.”
그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내 말이 맞다는 걸.
한없이 부드럽게 나를 안은 이하민이 언제 그랬는지도 모르게 나를 눕혔다.
무수한 키스가 쏟아졌고 나는 지금 내가 그를 가이딩하는 것인지, 그가 나를 가이딩하는 것인지 알지 못한 채 더운 열망에 파묻혔다.
확실한 것은, 그가 내 구원자라는 것.
그리고 그것으로 충분했다.
***
만족스러운 통증을 느끼며 누워 있는 내 옆에서 나를 바라보면서 이하민이 내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고 뺨을 쓰다듬으며 열심히 나를 예뻐하고 있었다.
오늘은 그 시간이 꽤 오래갔다.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이러는 건가 하고 있을 때 결국 그가 입을 열었다.
“은우야, 있잖아.”
“응?”
“너는 가이드잖아. 그래서 하는 말인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렇게 어려워하는 걸까.
“가이드면 만일의 경우도 생기는 거잖아. 물론 너는 S급 가이드고 점막 가이딩까지 가야 하는 경우도 웬만하면 생기지 않는다는 거 알고 있지만 그래도 나중에 S급 에스퍼들이 정말 크게 다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때가 되면 주저하지 말라고. 가이딩이니까.”
“…….”
“혹시라도 네가 부담스러워할까 봐.”
부담스러워한 적 없는데.
그럴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생기게 하지도 않을 거고.
“일단은. 고마워.”
정말 고마운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그때 가서 내 마음이 불편하지 않기를 바라서 그런 걸 테니까 말은 해 주었다.
“그런데 너는 걱정이 너무 많아, 이하민.”
“그러게. 원래는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아닌데? 처음에도 이랬던 것 같은데?”
나는 처음에 그를 봤을 때 그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전부 다 말해 주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혼자 거기에 집중해서 이하민이 나를 희한하다는 듯 바라보는 것도 잊었다.
“…….왜?”
“그게 처음이야?”
그의 말에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하며 이하민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인데?”
“나를 처음 봤을 때 내가 그랬다며. 너는 그전에도 나를 봤을 텐데?”
“……어?”
“그때가 처음이었던 건 아니지.”
그러면서 이하민이 웃었다.
그는 내가 서은우의 몸에 들어오기 전, 내가 아니었던 서은우와 만났던 순간을 기억하는 것 같았다.
“아. 아아…… 그러네.”
나는 대충 얼버무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씻어야겠다. S급 에스퍼들은 쉬지도 못했을 것 같은데. 다들 바쁘겠지? 팀 구성은 다 했으려나? 이제부터 우리가 척후팀이 되는 거지? 준비됐어? 자신은 있는 거지?”
“당연하지. 이제 또 쌩쌩해졌으니까 힘을 쓰러 가야지.”
다행히 이하민도 그 말에 대해 오래 생각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생각한다고 해도 내가 다른 세상에서 온 사람이라는 것은 아마 상상도 하지 못할 것이다.
그날은 다른 날보다 훨씬 빠르게 일정이 시작됐다.
이하민과 함께 미공략 던전들을 확인해 달라는 메시지가 심우진으로부터 전달되었다.
그런 메시지는 보통 견인에게서 왔는데 견인이 다른 일로 바쁜 듯했다.
이하민을 재촉해 서둘러 준비하고 나가자 한 무리의 에스퍼들이 대회의실로 급하게 향하는 중이었다.
“우리만 너무 여유를 부렸나 보네.”
“그러게.”
가이딩을 이유로 지금까지 봐주고 있었던 거라는 것을 깨닫고 먼저 상황실에 들렀다.
미공략 던전은 어제와 같은 숫자였고 그사이에 특별히 다른 징후가 나타나지는 않았다는 말을 듣고 던전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특별한 것은 없었고 전날 얘기를 나눴던 것처럼 던전 안의 괴수를 파악하고 전술을 짜서 전달하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어제 너무 긴장했나 봐. 사실은 별 게 아니었던 것 같고. 그렇지?”
이하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말로 내가 생각했던 거라서.
“센터에 돌아가면 다른 나라에서 나타나는 던전도 변화가 생겼는지 알아봐야겠어. 여기만 이럴 것 같지는 않잖아. 이게 변화의 과정인지도 알아야 할 것 같기는 하고.”
“그래. 당분간 좀 바빠지기는 하겠네.”
가는 동안 이하민이 운전했고 나는 옆에서 내 생각을 말했다.
미등록 에스퍼들을 찾아내서 그들에게 던전을 할당하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해 봐야 하지 않겠냐고 하자 이하민은 좋은 생각 같다면서 그건 특임대에서 나서야겠다고 했다.
훈련을 도와주느라 많은 시간을 썼지만 그는 특임대장이었고 특임대의 역할이 필요할 때면 그것을 우선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미등록 에스퍼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상급 에스퍼가 제한돼 있어 우리가 구성할 수 있는 팀이 한정적이라는 이유가 가장 컸다.
센트럴의 안전을 우리만 책임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는 목숨을 내걸고 센트럴을 지키는데 미등록 에스퍼들은 아무 위험도 감수하지 않은 채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는 것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위험을 감수하는 것은 결코 미등록 에스퍼들을 편안히 살게 해 주기 위한 건 아니었다.
이하민은 그런 것에서 나와 뜻이 잘 맞았고 미공략 던전이 공략되면 슬슬 그 일에도 본격적으로 나서야겠다고 했다.
센터로 돌아갔지만 S급 에스퍼를 만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각자가 모두 바쁘게 일을 하고 있어서 한참이 지나도록 만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새삼스럽게 그들이 있는 자리가 얼마나 중요하고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안전이 달려 있는지 깨닫게 됐다.
그리고 많은 사람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까지 열심히 살고 싶은 생각은 없었는데 나는 누나의 소설 속에 들어와서 뭘 하고 있는 건지.
그나마 가장 먼저 볼 수 있었던 사람은 변태영이었다.
그는 하루 사이에 확 초췌해져 있었다.
그는 우리를 보자마자 던전 수색을 마쳤는지 묻고 얘기를 들었다.
설명을 하고 나서 미등록 에스퍼들에 대해 말하자 그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아, 그래. 맞아. 그 인간들이 있었지. 토파즈도 잊고 있었네. 토파즈에도 던전을 할당해야겠어. 토파즈에 할당하는 건 미룰 필요도 없겠네. 남은 던전 중에 하나는 토파즈에서 처리하라고 하고 거부하면 센트럴을 떠나라고 해야겠어.”
처음에는 그냥 의식의 흐름대로 나온 말인 것 같았는데 안 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드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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