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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버스 이물질이 되어버렸다-76화 (76/137)

76화.

그렇게 위험한 선을 계속 넘나들더니 더 이상은 나도 참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을 즈음 나를 놔주었다.

“이제 된 것 같아요. 효과 괜찮네요, 점막 가이딩.”

하……!!

뭐라고 말을 할 틈도 없이 그가 상큼하게 웃더니 내 셔츠를 가져다주었다.

내가 셔츠를 입자 그도 셔츠를 입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 피식 웃었다.

“가이드가 있어서 든든하네요. 정말이에요.”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

고마운 거 맞나?

아닌 것 같기도 해서 말을 하지 않자 그가 웃었다.

“그 정도 말은 해 줘도 되는 것 아니에요?”

그러고는 고갯짓을 했다.

나가자는 듯이.

그의 파장은 완벽에 가까울 정도로 안정을 되찾았다.

마치 무슨 일이 있었냐는 것처럼.

나는 어느새 심우진의 안정이 크게 기뻤다.

센터의 모든 S급 에스퍼들이 그랬으면 좋겠고 그들이 조금도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하민이야 말할 것도 없이 그랬고 하다못해 차윤까지도 그랬다.

자기를 ‘하다못해 차윤까지도’라고 생각하는 걸 알면 아마 길길이 날뛰겠지만 지금의 감정은 딱 그 정도였다.

심우진의 집무실에서 나오며 내다본 창밖은 붉은 태양이 지면에 가까워져 하늘이 붉은빛을 띠고 있었다.

우리는 무엇을 향해 질주하고 있는 것일까.

어떤 시간이 다가오고 있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마냥 불안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이렇게나 나를 강하고 견고하게 만든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

남아 있던 네 개의 던전은 모두 공략되었다.

센터 소속의 에스퍼들에 의해서였다.

토파즈는 공략을 거부했고 센터에서는 전에 계획했던 일을 추진했다.

그러나 우리는 센터일 뿐 센트럴의 통치권까지 가진 것은 아니었고 그 일을 실행하려면 정부가 나서야 했다.

처음에 변태영이나 우리가 그걸 몰랐던 것은 아니고 정부가 우리 일에 딴지를 걸 거라는 것을 모른 것뿐이었다.

그동안 너무 순순히 공략을 해 준 모양이었다.

정부 측 답변이 별다른 이유도 없이 미뤄지다가 불가하다는 답변이 돌아왔을 때 우리는 한동안 고민에 휩싸였다.

차윤까지 포함해 그 자리에 있던 모든 S급 에스퍼들은 당장 센트럴을 떠나자며 분개했고 나는 짐을 어떻게 운반할지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우리가 호구가 되려고 S급 에스퍼가 된 줄 아나.

그러나 정부 관료들만 욕할 건 아니었다.

그동안 그렇게 해도 된다고 생각하게 만들어 온 우리 잘못이지.

그런데 이하민만큼은 우리의 과격한 행동에 동참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그는 혼자서 아무 얘기도 듣지 못한 것처럼 평화롭게 생각에 잠겨 있었다.

보다 못한 변태영이 이하민에게 한마디를 했을 정도였다.

“이하민. 너는 화도 안 나?”

“화는 나죠.”

우리가 하는 얘기를 안 듣고 있던 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그래? 너는 안 떠날 거야?”

“네.”

“화난다면서. 그런데 왜 안 떠나? 우리가 떠나면 사람들이 죽을 테니까? 사람들이 불쌍해서? 언제까지 그렇게 호구처럼 살 건데, 어?”

변태영은 답답해 죽겠다는 듯이 말했고 견인과 심우진도 그러면 안 된다며 이하민을 설득했다.

만약 이하민이 끝까지 고집을 부린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그들은 확신이 서지 않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그것도 대단한 변화였다.

센터 내에서 이하민의 입지가 그렇게나 막강해졌다는 것이.

이하민은 더 이상 S급 에스퍼 전담 가이드가 아니었고 가이딩을 하지도 못하며 여전히 가이딩 능력이 남아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그가 가이드였을 때보다 훨씬 더 존재감이 강해져 있었다.

그의 증폭 능력은, 이전에 S급 에스퍼들이 꿈꿀 수 없었던 수많은 일들을 가능하게 해 주었고 S급 에스퍼들은 이하민을 어느 때보다 의지하고 있었다.

비록 나이가 S급 에스퍼들보다 어렸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런 구도가 자주 만들어졌다.

세 명의, 아니 차윤까지 포함한 네 명의 S급 에스퍼들이 이하민을 중심으로 서서 현안에 대해서 고민하고 의견을 나누는 모습을 보는 것은 더 이상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던전에 함께 나가 괴수를 공략할 때부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구도였다.

그의 옆에 있어야 증폭 능력을 받기가 쉬웠기에 S급 에스퍼들은 늘 그를 중심으로 섰다.

던전에서의 전열이 익숙해져서 그런 건지는 몰라도, 이하민의 역할이 크게 줄어드는 센터에서도 종종 그런 그림이 연출되었다.

그리고 그런 이하민의 역할은 점점 넓은 범위로 확대되는 듯했다.

이런 상황에서 이하민이 센터를, 그리고 센트럴을 떠나지 않겠다고 하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자 S급 에스퍼들은 마음이 조급해졌던 것이다.

“이하민. 그러면 이 일을 그냥 넘기자고? 그러면 우리 입장은 어떻게 되는데? 토파즈에게 이미 경고를 하고 선전 포고도 해 놨는데 이대로 꼬리를 내려? 그러면 앞으로 우리가 하는 말에 아무 힘도 안 실릴걸?”

견인이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하자 이하민이 그를 바라보았다.

“센트럴을 지금까지 지킨 게 우리인데 왜 이 센트럴을 떠나겠어요? 같이 지낼 수 없으면 정부 관료들을 내보내면 되는 거죠.”

“……어?”

우리는 이하민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어쨌건 이곳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였다.

초기에 던전이 생겨나면서 공략되지 않은 던전이 개방되고 그곳의 괴수가 밖으로 나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곳곳이 황폐화되며 이제 사람이 살 수 있는 곳은 센트럴이라는 계획도시 일부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래도 정치 체제는 바뀌지 않았다.

에스퍼의 거주지인 센터의 영향력이 막강해졌다고 해도 센트럴을 다스리는 곳은 아직 정부였다.

그랬기에 이전의 센터장이 가이드들을 동원해 성 상납을 해 가면서까지 정부 관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던 것이기도 했다.

나는 이하민에게 그 이야기를 다시 설명을 해 줘야 하는 건가 해서 조금 고민이 됐다.

만약 그가 몰라서 그런 거라면 설명을 하고 이해를 시켜 줘야 하는데 몰라서 그런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차피 던전 때문에 선거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잖아요. 새로운 선거를 하자고 할 때마다 던전을 핑계로 이 정부가 계속 연임을 해 왔고요. 저는 이 정부에 정당성이 있다고 인정 못하겠어요. 센트럴의 유지나 발전에 오히려 저해되기만 하고 있죠.”

“혹시 전복을 생각하고 있어?”

“그건 센트럴의 시민들이 할 일이죠. 정부 관료들의 비리 사실을 알리고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공개하면 시민 저항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이하민을 바라보았다.

생각해 보니 그 말이 맞았다.

화가 난다고 이 센트럴을 버리고 떠나면 우리는 새로운 센트럴을 찾아야 하고 그곳에 적응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해야 하는데 잘못은 정부가 해 놓고 고생은 왜 우리가 해야 한다는 말인가.

화가 나서 저지르는 일치고, 그 뒤에 겪어야 할 고생이 너무 컸다.

“그 말이 맞기는 하겠네요. 굳이 그런 고생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일찌감치 내가 이하민의 편을 들자 다른 사람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네. 말이 쉽지 새로운 센트럴을 만들려면…… 아오.”

“일단 에스퍼랑 가이드들은 우리를 따라서 같이 갈 가능성이 크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생길이 까마득하기는 하지.”

“그렇지. 초기에 센트럴을 만들 때만 해도 엄청나게 고생들이 많았다고 하니까.”

S급 에스퍼들은 하나둘씩 이하민의 말에 동의했고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차윤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었다.

설마하니 이하민에 의해서 일의 방향이 이런 식으로 급선회하게 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럼 어떤 식으로 할까?”

견인이 묻자 이하민이 차윤을 바라보았다.

“알고 있는 방송사 하나 없어요? 그중에서 채널 하나를 쓸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요. 그 채널을 통해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 주는 거죠.”

차윤은 그런 것을 좋아했다.

자신의 능력보다 조금 벅찬 일을 시켜 주는 것.

그리고 지금 이하민이 말한 것은 딱 그 정도의 난이도를 지녔다.

“할 수 있지.”

“그럼 해 주세요. 에스퍼들의 활약 영상을 편집하고, 가이드들과의 공조도 다뤄 주세요. 우리가 던전을 공략하는 영상도 만들어 주면 좋고요. 성공하는 모습, 실패하는 모습도 같이 보여 주고 부상당한 에스퍼의 모습도 부각시켜 주세요. 우리가 얼마나 힘들게 훈련하는지, 매 순간 어떤 위험을 감수하는지. 감동적으로 할 수 있죠?”

“할 수 있지.”

“그러고 나서 센터 소속의 에스퍼와 미등록 에스퍼를 대비해서 보여 주고 그 뒤에 토파즈를 배치하는 거예요. 토파즈는 미등록 에스퍼가 아니지만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집단을 형성하고 지극히 개인적으로 움직이죠. 돈이 되는 던전을 공략하는 민간 에스퍼 기업. 세제의 특혜를 받지만 사회에 환원하는 게 없고 이번 공략 요청도 전면적으로 거부했다는 사실도 정확하게요.”

우리는 어느덧 이하민이 하는 말에 빠져든 채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서사가 명확했고 피아가 분명하게 나누어졌다.

이입할 대상이 확실했고 사람들은 미등록 에스퍼와 토파즈 소속 에스퍼들에게 분개할 것이다.

미등록 에스퍼보다 토파즈 소속 에스퍼에 대한 분노가 더 커질 것이고 그것은 이제부터 차윤의 기획력에 달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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