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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버스 이물질이 되어버렸다-77화 (77/137)

77화.

“그들에 대한 조치를 요구했는데 정부 관료들은 그것을 거절했고, 이전의 센터장에게 성 상납까지 받았다. 거기에 힘없는 가이드들이 동원됐다. 어떻게 하라는 건지 알겠죠?”

“멋진데? 웬만한 드라마보다 낫겠는데? 이 정도 콘텐츠면 시청자가 확보된 채널이 아니더라도 상관없겠어. 방송이 시작되고 나면 저절로 시청자가 유입되겠는데?”

나는 일이 이런 식으로 진행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전율을 느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라는 건 S급 에스퍼들의 얼굴을 보며 알 수 있었다.

그들은 꿈을 꾼 것 같은 얼굴이었다.

“일을 이런 식으로 해결할 수도 있는 거라고? 어떻게 이게 가능하지?”

차윤은 몇 번이나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밖으로 나갔다.

다른 S급 에스퍼들이 이하민에 대해 좋게 말하는 일은 종종 있었지만 차윤은 그런 적이 거의 없었기에 차윤의 반응은 꽤나 신기했다.

S급 에스퍼들도 그 생각을 했는지 밖으로 나가는 차윤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하민이 대단하기는 대단하네. 차윤한테 저런 말을 다 듣고.”

우리는 더 이상 처음의 분노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다.

처음에는 정부에 대해서도, 미등록 에스퍼에 대해서도, 그리고 토파즈에 대해서도 화가 나서 참을 수가 없더니 이하민의 얘기를 들은 후에는 그럴 이유가 전혀 없게 되었다.

우리는 그냥 늘 하던 대로 우리가 하던 일만 제대로 하면 되었던 것이다.

“센터 내 가이드는 전원 다 계약을 마쳤어.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일반인으로 살려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는데 전원 다 계약을 했고 센터 상주 가이드가 85퍼센트가 넘어. 87퍼센트였나? 비상주 가이드도 센트럴에 있는 가족들이랑 같이 살면서 일을 하고 싶어서 그런 것뿐이고 던전이 자주 나오거나 공략이 몰리면 그때는 센터에서 머물면서 가이딩을 하겠다고 했고.”

견인이 전해 주는 소식은 희망적이었다.

“다른 국가에도 이형 던전이 나타나고 있고 각국이 대책 마련에 고심 중인 모양이야. 던전을 공략하지 못해서 던전이 개방되고 괴수의 습격을 받아 센트럴이 사라진 곳도 나타나고 있고. 지금이 이렇게 힘겨루기를 할 때가 아니라는 걸 다른 사람들도 빨리 알아야 하는데.”

“피해 없이 던전을 공략하는 데 성공한 건 거의 우리가 유일한 것 같아. 아마 토파즈 한국지부에 있는 에스퍼들이 다른 곳으로 가게 될 가능성도 높기는 한데 역으로 이곳으로 오려는 에스퍼들이 늘어날 수도 있어. 목숨이 직결된다고 생각하면 안전한 곳을 찾고 싶을 수도 있을 테니까.”

변태영과 견인이 추가로 다른 센트럴의 상황을 알려 주었다.

“접경 지역 센트럴의 상황은 우리한테도 영향을 미칠 수 있어서 계속 주시하고 있는데 접경 지역 센트럴에서는 던전이 거의 나타나지 않고 있어. 이러다가 갑자기 큰 게 오는 건 아닌가 하면서 긴장하는 분위기인데 정부 통해서 협조 요청이 올 가능성도 있어.”

견인이 말하자 모두 웃음을 터뜨렸다.

“낯도 두껍네요. 토파즈 건은 싹 무시하고 그때는 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협조 요청을 할 건가 보죠?”

내 말에 견인은, 그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는다며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오리진 센트럴 있잖아요.”

우리가 그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조용하던 이하민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거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는 거예요?”

“그러지 않을까? 미등록 에스퍼들은 살고 있을 수도 있으려나? 꼭 알아야 하는 거면 몇 사람 보내서 확인하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으면 거기로 가는 것도 생각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웬만하면 끝까지 이곳에 남는 게 좋기는 하겠지만요.”

“그렇지. 새로 들어선 정부도 계속 헛발질이나 하고 있으면 그때는 아예 떠나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그 센트럴의 건물값 지금은 엄청 많이 떨어졌겠네요?”

나는 이하민이 그 얘기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때까지 한 이야기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 오리진 센트럴에 대해서도 가능성을 열어 두자는 정도라고 생각한 탓이었다.

그러다가 이하민이 건물값까지 얘기하자 견인은 대충 대답하고 말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정확한 정보가 필요하냐고 물었다.

“그건 아닌데 사 둘 수 있으면 사 놓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나중에 가서 또 헛소리하면 안 되니까요.”

그 말을 듣자 소름이 돋았다.

급할 때는 생존이 문제지만 생존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권리 문제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아마 거래 자체가 없을 거라 우리가 가진 돈으로 상당 부분을 사 들일 수 있을걸?”

그것은 괜히 하는 말이 아니었다.

처음에 S급 에스퍼들의 숙소로 옮겨 오면서 우리는 그들이 받는 급여를 듣고 놀랐었는데 이제는 우리 급여도 올랐다.

나는 가이딩까지 할 수 있게 되면서 오히려 S급 에스퍼들보다 더 많이 받았고 이하민은 표면적으로 A급이라 우리보다 낮게 받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일반 직장인이 받는 평균 보수를 훨씬 뛰어넘었다.

“나 돈 엄청 많은데.”

“나도. 쓸 데가 있어야지. 차 사고 뭐 하고 한 것 말고는 다 그대로 있어.”

“나는 악기 사느라고 좀 많이 썼는데…….”

S급 에스퍼들은 자기들이 가진 돈을 전부 내놓을 기세였고 나는 이 일이 점점 흥미진진해진다고 생각했다.

만약 그 센트럴이 다시 살아난다면 우리는 돈방석에 오르겠지만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면 모두 빚더미 위에 올라앉게 될 터였다.

오리진 센트럴 가까이에 최고 위험도의 던전이 생기고 도저히 공략이 불가능해서 던전이 개방되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괴수가 나오기라도 한다면?

등줄기에 시원하게 식은땀이 흘렀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인데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그랬다.

“모 아니면 도네.”

“이거 재미있겠는데? 나는 평소부터 이런 걸 꿈꿨어. 만약에 망한다고 해도 나만 망하는 게 아니니까 별로 아깝지도 않을 것 같아.”

심우진의 말에 견인이 신이 나서 말했다.

변태영은 혼자서 이것저것 생각을 하는 듯하더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하민이 특임대장을 할 게 아니었어. 이하민이 센터장이 됐어야 할 것 같은데 형 생각은 어때요?”

나는 다른 S급 에스퍼들의 반응이 궁금했다.

특히나 견인은 그 자리에 만족하고 있다고 생각해서 뭐라고 말할지 대답이 기대됐다.

그러나 견인의 말은 예상외였다.

“이하민이 원하지 않을걸?”

“나도 이하민이 하고 싶지 않을 것 같은데?”

“네. 저는 안 원해요.”

견인과 심우진이 거의 동시에 말하고 이하민이 곧바로 대답했다.

“우리가 얼마나 바쁜지 뻔히 알면서 이하민이 센터장을 하겠다고 할 리가 없지. 그러면 서은우랑 깨 볶을 시간도 없을 텐데 그런다고 하겠어? 하겠다고만 하면 나도 고맙게 넘기지.”

“깨, 깨는 누가 볶는다고 그러세요?”

갑자기 내 이름이 나오는 바람에 깜짝 놀라서 말하자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졌다.

“가만 보면 이하민이 제일 포지션을 잘 잡았어. 처음부터 그런 것 같아. 이하민이야말로 흑막이 아닐까? 생각해 봐. 우리는 모두 S급 에스퍼로 시작했잖아. 센터에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자리인 것 같았지만 그래서 우리는 늘 S급 에스퍼로 기대됐고 거기에서 충격을 안기기도 어려웠잖아.”

견인이 말하자 심우진도 덩달아 미간에 주름을 만들어 가며 거기에 대해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말이 맞긴 하네. 이하민은 가이드여서 은우 씨랑 친해질 수 있었던 거고, 은우 씨랑 친해진 후에 에스퍼로 발현했지. 그것도 말이 안 되는 거기는 한데. 그리고 그 능력치도 사실 오랫동안 이해가 안 됐어. 처음에는 분명히 측정 불가라고 했단 말이야. 그런데 갑자기 A등급이라고 했지.”

처음에는 웃자고 시작한 말이었을 텐데 갑자기 사람들이 진지해졌다.

“맞아요. 그전까지는 등급에 대해 확신이 있었는데 나는 서은우 보면서 등급에 의미가 있기는 한 건지 의심이 들기는 했거든요. S급 에스퍼로 측정되기 전의 서은우는 정말 D급 에스퍼였을까요? 나는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때도 이미 서은우는 S급 에스퍼였어요. 맞지 않아요?”

이, 이 사람들이 갑자기 왜 그런 소리를?

이하민은 재미있다는 듯이 웃고 있었다.

“일단은 흩어지지. 나중에는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일단 이 센터의 주인은 우리고 앞으로 나올 던전에도 대비해야 하는 거니까.”

이제 견인에게는 그런 말이 잘 어울렸다.

토파즈의 에스퍼들이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정부가 토파즈의 편을 들어주면서 생긴 일의 파급 효과는 그렇게 거세게 퍼져 나가고 있었다.

***

채널 블랙피시는 시청자를 거의 확보하지 못한 채 바닥을 기는 시청률을 기록하는 채널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찾아온 차윤으로 인해 이제 블랙피시에 대해 그렇게 기억하는 사람은 없게 되었다.

건물마다 전광판이 설치되고 그 전광판에서 블랙피시의 프로그램이 나왔다.

차윤이 프로그램을 독점으로 방영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으로 건물에 전광판을 설치할 수 있겠냐고 했을 때 대표는 홀린 듯이 그러겠다고 했다.

생에 단 한 번, 절대로 놓치면 안 되는 기회를 만나게 되면 이런 기분이 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판단이 맞았다는 것을 연일 절감하고 있었다.

그동안 에스퍼와 가이드를 소재로 한 프로그램이 없던 것은 아니었다.

에스퍼가 사회 최상류층인 만큼 드라마 주인공으로 가장 각광받는 직업이 에스퍼였다.

그러나 에스퍼 세계를 심도 깊게 다루지는 못했다.

실제 에스퍼가 출연하는 드라마는 흥행 성공이 보장돼 있었지만 대부분의 에스퍼들은 드라마 출연을 좋아하지 않았다.

인기나 돈은 드라마에 출연하지 않아도 충분히 얻을 수 있었기에 연연하지 않는 듯했다.

그리고 대중이 가장 원하는 이들은 S급 에스퍼들이었는데 S급 에스퍼들은 방송에 얼굴을 비치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러던 차에 차윤이 제안한 것은 상상하기도 어려운 것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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