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이하민과 함께 있었지만 이야기는 오가지 않았다.
우리는 소파를 놔두고 바닥에 앉아 있었다.
처음에 내가 소파에 기댄 채 앉아 있었는데 그가 내 옆에 와서 앉았다.
그때부터 서로가 각자의 생각에 열중했고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고심했다.
던전이 전부 다 개방되면 그때는 어떻게 될까.
그렇게 해서라도 S급 에스퍼들 전원이 함께 싸우는 게 그나마 승산이 있는 건 아닐까?
분산되면, 이하민이 없는 그룹은 부상을 당하거나 죽는 사람도 나오지 않을까?
그냥 기다리자고 할까?
던전이 개방되도록?
다른 에스퍼들도 같이 싸우면 버틸 수 있지 않을까?
만약 그러고도 이기지 못하면?
그때는 스무 마리가 넘는 괴수들을 한 번에 상대해야 하는 건데 가능할까?
할 수 있을까?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이하민이 결국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각자가 뛰어넘어야 돼. 자기 자신을.”
“이하민…….”
그 모습은 참 낯설었다.
내가 아는 이하민이 아닌 것 같은 느낌.
언제나 내가 지켜 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그 이하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길 거야, 은우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우리가 이길 거야. 내 말 믿어.”
말을 하고 이하민이 내 손을 잡았다.
그의 손가락이 내 손을 어루만졌다.
잊지 않겠다는 것처럼.
이렇게 잡은 손을 놓지 않겠다는 것처럼.
자기 자신을 뛰어넘어야 한다는 말은 나에게도 해당될 터였다.
‘그래. 그동안 안주하고 있었어. 내 본 모습은 보인 적도 없어. 내 본신의 힘을 전부 다 드러내면 나 혼자서 던전을 공략하는 게 맞아. 이곳에 와서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싸운 적이 없었어.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면서 힘을 감추고, 그러다가 결국 내가 누구인지도 잊어버렸던 것 같아.’
그를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겨우 이런 놈들에게 지면 안 되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나는 못 끝내겠어. 나는 이곳에서 행복하거든. 이곳에서 오래 머물고 싶거든. 네 옆에서.”
나에게서 내내 시선을 떼지 않던 그의 입가에 웃음이 지어졌다.
“고마워, 은우야. 그리고 나도 그래. 나도 네 옆에 오래 머물고 싶어.”
그의 입술이 다가왔다.
가이딩이 아닌, 순수한 키스였다.
“나는, 은우야.”
뭔가를 말하려는 것 같더니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있는 얼굴이었는데 멈춰 버렸다.
“아니. 이 얘기는 다음에 해 줄게. 다음에도 우리는 다시 얘기할 수 있을 거니까.”
아쉽기는 했지만 그 말이 마음에 들었다.
다음.
다음이 돌아오기를, 나는 간절히 소망했다.
그날 우리는 그렇게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보고 입을 맞추었다.
뺨을 쓸고 어깨를 만지고 또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한껏.
탐욕스럽게.
***
S급 에스퍼들을 찾아가 개인 훈련을 하고 싶다고 말하자 그들은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내가 괜히 그러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모두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나는 작은 훈련장 하나를 차지했다.
검의 경지에 이르렀고 수많은 무공을 대성한 나였다.
처음부터 바로 시작을 하지는 못했다.
어떤 게 가장 좋을지, 지금 상태에서 바로 사용할 수 있는 건 뭐가 있을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생각 끝에 떠오른 것들을 하나씩 되새겨 보았다.
검을 들고 천천히 기운을 움직였다.
이내 대기가 휘말리며 기운이 검으로 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공과는 분명히 구분되지만 움직임은 다르지 않았다.
어느덧 검과 내가 완전히 하나가 됐다는 기분이 들었을 때 위로 들어 올렸던 검으로 바닥을 내리쳤다.
검격에 바닥이 깊이 파인 채, 살아 있는 것처럼 앞으로 달려 나갔다.
흙더미가 솟구쳐 해일처럼 치솟아 벽을 이루다가 무너져 내렸다.
바닥을 차고 허공을 달려 검을 휘둘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날카로운 감각이 깨어났다.
죽었던 내가 다시 눈을 뜨고 있었다.
한번 기억을 떠올리고 나면 그 후부터는 생생했다.
이게 맞는 건지 의문을 품을 이유도 없었다.
수많은 절기가 그곳에서 펼쳐졌다.
바닥은 깎이고 깎였다.
푸스스 내려앉은 흙더미가 다시 솟구치고 또 뒤집혔다.
무림의 나였다면 이제 내공의 소진을 느껴야 했을 텐데 S급 가이드라서 그런 건지, 무림의 규칙이 이곳에서는 적용되지 않는 건지 한계 이상으로 힘을 사용하고도 지치지 않았다.
이러다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쓰러지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기는 했지만 안정제를 먹는 한이 있어도 일단 확인할 수 있는 건 전부 확인해 보자는 생각이었다.
중천에 떠 있던 태양이 다 기울어 갈 때까지 연습을 멈추지 않다가 변태영이 나를 찾으러 왔을 때야 멈췄다.
변태영은 그곳에 와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검을 휘두르면서 돌지 않았으면 그가 있는 걸 끝까지 알아차리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너는 도대체 뭐냐는 것 같은 눈빛.
나는 할 말이 없었고 검을 바닥으로 내린 채 물었다.
“왜……요?”
“하루 종일 굶은 것 같아서. 식사를 했냐고 물었더니 오늘 온 적이 없다고 하기에. 식사는 거르지 말고 해야지. 훈련만 하고 죽으려고? 실전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잔소리가 길어졌다.
“안 그래도 이제 가려고 했어요.”
“항상 말은 잘하지.”
그의 잔소리도 그때는 달가웠다.
“그런데 이제 막대 사탕 안 먹는 모양이에요?”
“아. 그거. 그러게. 여기서는 그걸 안 팔더라고.”
자연스럽게 화제를 바꿨다고 생각하며 뿌듯해하고 있는데 그가 물었다.
“서은우. 너는 도대체 뭐야? 전에도 물었던 것 같은데.”
그랬다.
전에도 그는 나에게 그것을 물었고 나는 그에게 D급 에스퍼라고 대답했었다.
이제는 S급 에스퍼라고 말을 해야 할까.
그도 내 생각을 알았는지 선수를 쳤다.
“S급 에스퍼라는 말로 넘어가려고 하지 말고. 나도 S급 에스퍼지만 나는 그런 거 못 하니까. 다른 어떤 신체 강화자도 그런 건 못 하니까.”
“저는 그냥. 골고루 잘해요. 그런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하하하하하.”
부자연스럽기 짝이 없는 웃음에 변태영이 피식 웃었다.
“전에도 그러기는 했었지. 이하민이 다른 에스퍼들에게 괴롭힘당했을 때.”
그가 무슨 얘기를 하는 건지 알고 있었지만 굳이 대답을 해서 얘기를 길게 할 생각은 없었다.
“이런 때는 믿고 싶어지는군, 서은우.”
변태영이 그러는 걸 보니 마음이 좋질 않았다.
늘 무섭고 엄하던 아버지의 힘 빠진 모습을 본 것 같은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에스퍼님도 잘하실 겁니다. 다음 주가 돼도 우리는 전부 살아 있을 거예요.”
그 말을 해 놓고 나니 정말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주에도 우리가 이렇게 마주 설 수 있을까?
그때에도 S급 에스퍼들이 전부 센터에 남아 있을까?
다른 에스퍼들은?
괜히 생각했나 보다.
그러나 변태영은 웃음을 지었다.
“그래. 믿어 보지. 잊어버리지 말고 식사해. 이러다가 던전이 나타나기도 전에 쓰러진다. 지금 한 사람이 아쉬운 때인 거 알잖아.”
그는 정말 그 말을 하려고 온 것처럼 그 말을 하고 돌아갔다.
이하민이 아직 식사를 하지 않았으면 같이 먹으려고 전화를 걸었다.
녀석의 전화를 심우진이 받았고 그는 내가 묻기도 전에 지금 연구실이라며 빨리 그리로 오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연구실? 이 시간에 연구실에는 왜?
궁금증 때문에 저절로 서두르게 됐다.
내가 연구실에 갔을 때 그곳에는 S급 에스퍼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변태영도 어느새 그곳에 와 있었다.
S급 에스퍼들은 충격적인 소식이라도 들은 것처럼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무슨…… 일이세요?”
“전부터 이상해서 이하민의 등급 측정을 다시 했어. 전에 이상하기는 했잖아. 측정 불가로 떴다가 갑자기 A등급이라고 떴었고 말이야.”
견인이 말하는 동안 나는 이하민에게 다가갔다.
“뭐라고…… 나왔어?”
이하민은 어리둥절한 얼굴이었다.
“……SS급.”
“……뭐?”
나는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건가 해서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이하민은 자기도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이 기계에 SS급이 나타날 수도 있기는 해요?”
내가 물었더니 견인이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에 이하민을 옆에서 계속 지켜보지 않았다면 그냥 그걸 믿을 수도 있었을 거야. A급이라고 해도 충분히 높은 등급이잖아. 그런데 우리는 이하민을 계속 봤잖아. 이하민의 능력 등급이 절대로 우리한테 뒤지지 않았고. 나는 이하민이 S급 에스퍼라는 확신이 있었어. 다른 S급 에스퍼들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했고. 그래서 연구팀에 측정 기계를 다시 만들어 볼 수 있겠냐고 했지. 연구팀장도 우리가 이하민의 등급을 믿지 못한다는 걸 이해했어. 연구팀장 생각도 우리랑 같았고.”
그거야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이기는 했지만 여전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아니었으면 갑자기 기계를 새로 만들라고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그런데 새로운 던전이 나타나고 에스퍼들 각자의 정확한 기량을 알 필요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연구팀장에게 말을 했는데 일이 진행된 거죠.”
심우진은 자기가 그 등급을 받은 것만큼이나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S급 에스퍼들의 얼굴이 전부 비슷했다.
‘SS급이라니.’
그건 소설의 내용을 알고 있는 나도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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