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정말 그렇게까지 해야 돼요?”
“네. 방금 하신 말씀을 그대로 다시 한번 하시면 돼요.”
이 사람들…….
굉장히 적극적이었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예고되었는지 그들이라고 모르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렇게 적극적으로 나와의 약속을 기대한다는 것이 한편으로 안타까웠다.
나는 그들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던전 처리를 끝내면 저를 만나고 싶다고 하는 분을 초대하겠습니다. 센터로 초대해야 되나? 센터에는 일반인 출입이 제한되는데 어떻게 하지?”
그러고 있는데 우리 훈련장에 놀러 온 변태영과 심우진이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끼어들었다.
“내 집 빌려줄게. 거기 엄청 넓어. 거기 정원에서 파티하면 되겠네. 거기에서 하는 거로 해.”
변태영의 말에 심우진이 손을 저었다.
“우리 별장이 그런 거 하기에는 더 어울려요. 우리 별장에서 해요. 파티 준비는 내가 맡아서 할게요.”
“형은 똥손이잖아요. 파티는 해 본 적도 없으면서. 내가 한다니까요? 그리고 우리 집이 더 커요. 정원도 우리 정원이 더 넓거든요?”
두 S급 에스퍼가 서로 자기 집이 더 크네, 자기 정원이 더 넓네 하는 것으로 신경전을 벌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에스퍼들이 난감한 듯이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눈치를 살피면서도 착실히 그 말을 녹음하고 모두가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아내에게 보내 놔야겠어요. S급 에스퍼님들 목소리라고 말해 주면 기절할지도 몰라요.”
“와아. 나도 그래야겠네. 내 친구들한테 다 보내야지.”
“에스퍼님, 제 여자 친구가 임신 중인데 힘내라고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평소에 말이 별로 없던 조용한 성격의 C급 에스퍼의 말에 변태영이 알았다고 하자 그가 화들짝 놀랐다.
변태영은 너무 감격스러워서 그러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는지 어서 전화를 걸라고 재촉했고 그는 민망한 듯이 말을 이었다.
“서……은우 에스퍼님한테 말씀드린 건데요……. 제 여자친구가 서은우 에스퍼님을 엄청 좋아하거든요.”
“…….”
미안해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그 모습에 웃음이 터졌다.
“몇 개월인데요?”
“6주 됐습니다.”
그 말에 뿌듯함이 잔뜩 묻어 있었다.
어쩌면 그는 아기가 태어나는 것을 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감정적으로 조금 힘이 들었다.
“에스퍼님 성함이…….”
“한이현입니다.”
“아이 이름은 생각해 두신 게 있어요?”
“우라고 지으려고요. 여자친구가 에스퍼님 광팬이어서 에스퍼님 이름을 따서 짓고 싶대요.”
“……우요?”
자기 이름이 한이현이라면서 아이를 우라고 부른다고?
“그건 안 됩니다. 엄마 취향 때문에 아이가 이름으로 놀림받게 하면 안 돼요. 내 이름이 왜 변태영이 됐는지 압니까? 엄마 때문이라고요. 태영이라는 이름 좋죠. 정말 좋죠. 그런데 내가 변씨라는 걸 생각했어야 하는 거 아니냐고요. 절대 안 됩니다. 이럴 때는 아빠가 말려야죠! 우리 아빠는 옆에서 뭘 하고 있었던 건지 정말 이해가 안 되던데. 그래서 나는 엄마보다 아빠랑 더 사이가 안 좋았습니다. 절대 그 이름은 안 돼요!”
변태영이 이렇게 강하게 나설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사람들은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나 변태영은 정말 심각한 모습이었고 나도 그 말이 맞을 거라고 여겼다.
변태영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자연스럽게 변태가 떠올랐고 별것 아닌 말이나 행동을 해도 이름값 한다는 생각을 하곤 했으니까.
“그럼 뭐가 좋을까요?”
한이현의 말에 우리는 모두 머리를 굴렸다.
“서은우 에스퍼님의 광팬이어서 그런 거면 우 말고 은으로 하면 되는 거 아냐?”
“한은. 괜찮네. 한은으로 하면 되겠네. 그러면 여자 친구도 받아들일 수도 있겠고.”
다른 에스퍼들이 열심히 나서 준 결과 우리는 이름까지 짓고 한이현의 여자 친구와 전화 통화를 시도했다.
던전 쇼크를 앞두고 있는 상황, 그것이 나타날 때 던전으로 들어가 괴수와 싸워야 하는 운명들이 아니라면 그것은 그냥 시끌벅적한 소동에 불과했을 텐데 한이현이 사흘 후에도 살아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생각 때문에 순간적으로 침묵이 감돌 때마다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그런 분위기를 일부러 더 띄우며 S급 에스퍼들이 더 크게 떠들어 댔다.
디바이스에 얼굴이 야윈 여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입덧이 심해서요. 아무것도 못 먹거든요. 그래서 걱정이에요. 원래도 마른 편이었는데.”
화면에 떠오른 여자 친구 모습을 보며 한이현이 안타까운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요? 임신 중이라 약도 아무거나 못 드시잖아요.”
“그렇죠. 약이라도 처방받으라고 하면 그러다가 아기가 잘못되면 어떡하냐면서 어차피 입덧은 금방 끝날 거라며 버티네요.”
전화가 연결된 것도 생각하지 않고 우리는 그 걱정을 하며 얘기를 하고 있었고 화면 속의 얼굴에 충격의 빛이 떠오르는 것을 알아차렸다.
[이, 이현 씨? 에, 에스……. 서은우 에스퍼님이에요? 서은우 에스퍼님이랑 같이 있어요? 세상에! 말도 안 돼!!]
그 말에 변태영과 심우진이 동시에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내 어깨에 손을 걸치고 허리를 붙들면서 필사적으로 자기들의 얼굴을 보여 주려 애썼다.
“저희도 있습니다.”
“서은우를 좋아한다는 건 말도 안 돼요. 믿을 수가 없어요. 저는 어떻게 생각하시죠? 저를 더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심우진과 변태영이 주접을 부리는 동안 그녀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더욱 커졌고 비명을 지르고는 주위에 있던 사람들을 불러들였다.
[에스퍼님들이에요! S급 에스퍼님들이 같이 전화를 거셨어요!!]
[어머! 남자 친구가 에스퍼라더니. 그렇다고 S급 에스퍼님들이 전화를 걸어 줬다는 얘기는 한 번도 못 들어봤는데.]
[세상에. 정말이야! S급 에스퍼들이야. 꺄아아아아악!! 서은우야. 웬일이야!!]
여기저기서 스마트폰을 들이미는 모습이 화면에 여과 없이 드러났다.
주변 사람들은 한이현의 여자 친구 스마트폰을 그대로 촬영하는 듯했다.
“말하세요. 에스퍼님. 우라고 지으면 안 된다고 하셔야죠.”
왁자지껄한 분위기에서 한이현에게 말하자 그가 정신을 차렸다.
“자기야. 에스퍼님이 그러시는데 우라고 짓지 말래. 특히 변태영 에스퍼님이 이름을 그렇게 지으면 안 된다고 막 화를 내셨어. 우리 아이 이름, 은이라고 짓자. 한은.”
[알았어. 그렇게 해. 한은. 좋다. 은아. 인사해. 아빠 동료들이야.]
화면이 아래로 내려가더니 임신한 게 거의 드러나지 않는 배를 비추다가 올라왔다.
“자기야. 서은우 에스퍼님이 자기랑 은이한테 해 주실 말씀이 있대.”
어…… 에스퍼님?
그러나 이미 그의 여자 친구는 감격을 끝내 놓은 상태였다.
수많은 사람이 나를 찍고 있었고 창피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이제 와서 못 하겠다고 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안녕, 한은. 나는 서은우 에스퍼다. 아버지의 동료야. 네가 지금 6주째라고 들었는데 너희 아버지랑 우리는 던전 쇼크를 앞두고 있어. 우리는 힘을 합쳐서 던전을 공략할 거고 센트럴을 지킬 거야. 너희 아버지는 너와 함께 많은 걸 보고 싶을 거고 우리는 그걸 위해서 싸우는 거야. 던전은 공략되고 너는 아버지를 만나게 될 거야. 그런데 만약 그렇게 되지 못한다고 해도 너희 아버지가 너를 얼마나 그리워하고 기대했는지, 너를 보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했는지 잊지 않으면 좋겠다. 네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여기 있는 모두가 너를 만나고 싶어 해.”
말을 하다 보니 방향을 잘못 잡은 것 같았다.
네 아빠는 죽겠지만 너는 소중한 아이니까 힘내라는 식으로 된 것 같아서.
한이현의 여자 친구는 이미 울고 있었고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도 눈물바다가 됐다.
이러라는 게 아니었을 텐데.
그러나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한테, 아빠는 반드시 살아 돌아올 거라고 거짓말을 해 주면 거짓말쟁이가 되는 건데.
아니. 그보다…… 우리가 던전을 공략하지 못하면 저 애는 태어나지도 못하는 거구나.
에스퍼들이 모두 쓰러지면 센트럴 역시 사라지게 될 터였다.
센트럴이 사라져도 생존자는 얼마쯤 남을 수도 있지만 이번에는 그런 행운을 기대하기도 어려웠다.
내가 분위기를 이상하게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 다른 사람들도 더 이상 말을 하지 못한 채 통화를 급하게 마무리했다.
너는 태어나지도 못하겠지만 반갑다.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서.
“전화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에스퍼님.”
한이현이 환하게 웃었다.
“역대급이네, 서은우. 꿈과 희망을 이렇게 박살 내 놓을 수가 있나?”
변태영이 말하더니 피식 웃고 돌아섰다.
심우진은 엄지를 들어 보였다.
네가 최고의 빌런이라는 뜻일까?
“충분히 쉬었으면 다시 하죠.”
한이현의 여자 친구와 통화한 후 에스퍼들의 의지는 조금 달라져 있었고 나는 그들을 맹렬히 몰아붙였다.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지만 우리는 주저앉지 않았다.
삶의 의지는 시시각각 더 강해졌고, 강렬한 소망은 계속해서 뜨거워졌다.
***
숙소에 어떻게 들어갔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였다.
침대에 아무렇게나 몸을 던지고 젖은 빨래처럼 구겨져 있는데 견인이 보낸 직원이 나를 찾아와 현재의 상황을 전달해 주었다.
이제 던전 공략이 앞으로 서른 시간도 남지 않았으니 이제부터는 능력을 사용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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