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견인이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하겠냐? 아니라는 거 아는데. 죽을 운명이니까 죽는 거겠지. 그리고 나는 살아서 돌아오라고 명령할 거야. 그러니까 임무를 완수하려면 꼭 살아서 돌아와야 돼. 센터장을 무시하지 않으면 임무 완수해라.”
“알았어요.”
더 이상 얘기가 길어지면 또 감정이 울컥 올라올 것 같아서 그의 집무실을 나왔다.
걸어가는 동안 에스퍼들이 나를 따라왔다.
함께 훈련을 하며 호흡을 맞췄던 사람들이었다.
그중에는 한이현도 있었는데 그의 표정은 사뭇 비장했다.
이제부터는 그들이 나와 함께 다닐 터였다.
모두 완전 무장을 했고 미련은 뒤에 남겨 둔 듯 걸음이 가벼웠다.
그저 완벽하게 흉내 낸 것에 불과할 수도 있겠지만, 이제 준비는 끝이 났다.
센터에서 그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을 때 마침내 디바이스가 울렸다.
던전이 나타났다는 소식과 함께 출동 명령이 떨어졌다.
우리는 준비되어 있던 차량에 몸을 실었다.
센터 내에 사이렌이 울렸다.
S급 에스퍼들은 디바이스를 통해 상황판을 볼 수 있었다.
잠재적인 던전들이 서서히 활성화되고 있었다.
징후를 통해 던전이 나타날 거라고 예상했던 곳에서 실제로 던전이 나타났던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황실과 연구팀의 예측이 거의 착오 없이 맞아떨어졌다는 거였다.
현재 여섯 개.
견인의 말을 생각했다.
게이트가 나타나는 던전도 아니니 쫄 것 없다.
쫄 것 없다는 의미로 그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차에 탄 에스퍼들에게 그 이야기를 해 줄까 했지만 괜히 사기만 저하시킬 것 같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저 한 사람 한 사람을 바라봤을 뿐이었다.
저마다 삶의 의지가 강렬한 사람들이니 잘해 주기를 바랐다.
가장 먼저 던전에 도착해 그들을 바라보았다.
“오래 끌지 않습니다. 최대한 빨리 끝나고 다른 팀을 돕습니다.”
“예!”
그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가장 먼저 던전으로 달려들어 갔다.
평소였다면 이하민과 함께 척후팀을 꾸려 던전의 상황을 미리 알아볼 수 있었겠지만 이번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다.
어차피 척후 활동이 의미가 없기도 했다.
각각의 던전에 우리가 투입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조합을 투입하는 거였으니까.
에스퍼들은 몸을 날려 나를 쫓아왔다.
던전에 나타난 것은 인간형 괴수였다.
인간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형체 때문이었고 다른 것은 모든 상상의 범위를 가볍게 넘어섰다.
센트럴 하나를 사라지게 만들고 타이탄이라는 별명을 얻은 괴수.
놈은 던전에 거의 머리가 닿을 정도로 거대했다.
팔다리는 압도적으로 굵었지만 몸통은 두껍지 않았다.
거기에서 나오는 민첩성은 살인적이었다.
이럴 때는 첫 공격이 중요했다.
혼자서 싸우는 게 아니었고 이 싸움이 마지막 싸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함께 온 에스퍼들의 사기를 끌어 올리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나는 처음에 극성의 권격을 가하기로 마음먹었다.
내 공격에 괴수가 쓰러진다면 에스퍼들도 자신감을 가질 거라고 생각하면서.
걸어가면서 이미 주먹에 기운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팔 주위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어른거리며 빠르게 기운이 달려들어 가고 있었다.
손가락을 하나씩 접었다.
감각을 극대로 끌어 올렸고 괴수의 작은 기척도 놓치지 않으려 했다.
걸음을 옮기는 동안 전해지는 압박감이 상상을 초월했다.
조금 전까지 나를 따라오던 사람들이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괴수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 때문에 발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그들을 독려하는 것보다는,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게 나았다.
놈과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압박감은 더욱 거세졌다.
살갗이 따끔거릴 정도의 기운이라고 느꼈는데 실제로 살갗이 찢어졌다.
생소한 경험은 아니었다.
굴곡 많은 삶을 살아서 그런 건지 원했건, 원하지 않았건 많은 것을 경험했던 것이다.
타이탄은 위에서 거만하게 나를 내려다보았다.
센터 4층 높이 정도는 되는 듯했다.
5층 높이가 아닌 게 어디인가.
돌덩어리로 만들어진 것 같은 타이탄의 몸에 주먹을 휘두르면서 두렵지 않다면 거짓이었다.
그러나 모든 복잡한 생각을 지우고 다른 팀만 생각했다.
내가 이렇다면 다른 S급 에스퍼들은, 그리고 그들을 따르는 에스퍼들은 훨씬 더 무서울 거라고.
주먹이 부서질 수도 있었고 팔뼈가 가루가 돼 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때로는.
내 앞에 있는 것이 사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건너야 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이 바로 그 순간이라고 생각했다.
바닥을 차고 달려 올랐다.
벽을 타듯 한 손을 가져다 대면서 오른손을 휘둘렀다.
빠각-!
그 소리는 안타깝게도 내 팔에서 들렸다.
억지로 좋은 점을 찾아내자면 내 회복 능력의 수준을 알 수 있었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상처가 빠르게 회복된다고 해서 온몸에 불이 번지는 것 같은 그 끔찍한 통증까지 잊히는 것은 아니었다.
순간의 충격으로 나는 바닥에 나뒹굴었다.
‘큰일이다!’
나는 에스퍼들이 이제 꼼짝도 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단순히 타이탄에게 느껴지는 압박감만으로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는데 S급 에스퍼인 내가 나뒹구는 것을 봤으니 얼마나 겁이 날까.
어쩌면 이곳에서의 시간이 아주 길어질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우리는 살아서 이곳을 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
어느덧 그런 체념까지 들었을 때 타이탄은 가소롭다는 듯 나를 향해 발을 들어 올렸다.
놈이 그렇게 빨리 움직이지 않았던 것은 순전히 나를 무시해서 그런 것이었을 터였다.
이전의 움직임을 생각해 보면 그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부러진 팔은 회복되었고 놈의 공격을 피하는 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런데 내 앞으로 에스퍼가 나타났다.
한이현이었다.
그는 절대 혼자서 타이탄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는데 내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막아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내 팔이 회복된 것을 그들은 알지 못한 듯했다.
팔이 부러지고 주먹이 부서져 나가면서 피투성이가 되었는데, 팔이 회복된 후에도 핏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런 채로 나뒹굴다가 일어선 것을 보며 내가 그대로 타이탄에 깔려 죽을 거라고 생각하고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몸을 내던진 것 같았다.
그 틈을 타서 나를 구하려고 그런 건지 두 사람의 에스퍼가 양쪽에서 나를 부축했다.
타이탄의 발은 이제 막 한이현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나를 부축하려던 두 사람을 뿌리치고 몸을 날렸다.
한이현은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었다.
“이제 움직일 수 있게 됐으면 싸워 보죠. 잊지 않았죠? 우리는 여기에서 오래 머물면 안 된다고 한 거.”
일단 에스퍼들이 움직일 수 있게 됐으니 그들을 조금은 믿어 봐도 될 것 같았다.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들떴다.
나를 구하려고 온 것이다.
강한 사람들이, S급 에스퍼 정도 되는 사람들이 그랬다면 지금처럼 감격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 약했고 죽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타이탄의 엄청난 압박감을 이겨 내고 몸을 날려 주었다는 것이 고마웠다.
이제부터는 복잡하게 여러 생각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한 번으로 안 되면 수십, 수백 번을 때리면 되지 않겠냐고 무식한 생각을 한 채 검을 뽑아 들었다.
에스퍼들은 타이탄을 상대로 검을 뽑는 게 과연 잘하는 짓인가 할 만한데도 각자 자기들의 위치로 갔다.
몇 번의 수신호로 우리는 작전을 주고받았고 타이탄을 노렸다.
무림을 평정한 검이 타이탄의 앞에 드리워졌다.
검신에 달려 들어간 기운이 그 주위에 휘몰아쳤다.
에스퍼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놀란 듯했지만 그러면서도 타이탄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내가 틈을 만들어 주면 그들은 일제히 타이탄을 공격할 터였다.
검을 든 채 타이탄의 몸을 밟고 뛰어올랐다.
타이탄은 나를 떼어 내고 싶은 것 같았지만 헛손질을 반복할 뿐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약이 바짝 오른 듯 두 팔의 움직임이 빨라졌고, 목을 노리던 나는 놈의 가슴팍을 베어 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날붙이가 들어가지 않을 것 같던 두꺼운 가죽에 날카로운 검상이 새겨졌다.
검을 꽂아 넣고 두 손으로 잡은 채 옆으로 긋자 타이탄이 몸부림을 쳤다.
검을 뽑으려는데 뭐에 걸렸는지 뽑히지 않았다. 당황한 찰나 아래를 내려다보니 한이현이 나를 보고 있다가 자신의 검을 던졌다.
공중에서 회전하던 검이 마침내 내 손에 들어왔고 나는 그것을 든 채 다시 한번 목을 노렸다.
타이탄은 나를 잡으려 했지만 팔의 움직임이 확연히 느려져 있었다.
내가 목을 노리는 동안 에스퍼들이 저마다 공격을 가했고 타이탄의 신경이 분산되었다.
오래 호흡을 맞춰 온 만큼 그들의 공격은 효과적으로 이루어졌고 타이탄이 더 이상 나를 신경 쓰지 못하는 동안 나는 놈의 목까지 올라가는 데 성공했다.
뒤늦게 나를 발견한 타이탄이 급히 나를 내동댕이쳤지만 내 검에서 날아간 검강이 이미 놈의 목을 향하고 있었다.
지형을 뒤바꾸는 검강이었다.
그 검강을 직격으로 맞았으니 아무리 타이탄이라고 해도 버틸 재간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바닥에 착지하고 에스퍼들을 불렀다.
“너무 오래 머물렀습니다. 일단 차에 타서 쉬세요.”
에스퍼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차피 뛸 수밖에 없었다.
타이탄의 거대한 몸이 서서히 우리들 쪽으로 쓰러지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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