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던전이 나타나고 우리가 한 일은 센터를 비우는 거였다.
센트럴의 시민들이 센터로 왔다.
그들은 지금이 어떤 상황인지 알고 있었고 겁에 질린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마주치는 에스퍼들에게 고맙다는 말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에스퍼들의 가족이거나 친척이거나 친구였고 그중에는 한이현의 여자 친구도 있었다.
“에스퍼님. 서은우 에스퍼님.”
뒤에서 부르는 소리에 돌아보자 여러 사람이 나를 불러 세웠다.
“네?”
“저분이 부르셔서요.”
그 말에 바라보니 한이현의 여자 친구가 힘겹게 달려오고 있었다.
“아아. 뛰지 마세요. 제가 갈 테니까요.”
임신 초기라 그렇지 않아도 조심해야 할 텐데 내가 정신을 딴 데 팔아 소리를 듣지 못해 그런 듯했다.
“에스퍼님.”
그녀가 환한 얼굴로 나를 불렀다.
“이렇게 뵙게 돼서 반가워요.”
“저도 반갑습니다. 한이현 에스퍼님은 만나셨어요? 찾아드릴까요?”
“아니에요. 아니에요. 만났어요.”
“아기는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죠?”
“네. 그럼요. 기억해 주셔서 감사해요. 그리고 전에 전화해 주신 것도 감사하고요.”
우리가 말하는 동안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너무 불안해하지 마세요. 우리 센터에는 S급 에스퍼도 많고 SS급 에스퍼도 있으니까요. 괴수들은 센터에 들어오지 못할 겁니다.”
입에 발린 말로 다른 사람의 근심을 잠재우려 하는 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편히 잠들라고 말해 주고 싶었고 그녀의 뱃속에서 아기도 편안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웃음 짓는 그녀를 보면서 이미 진실을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상황인데도 포기하지 않아 주셔서 감사해요. 덕분에 우리도 자존감을 지키면서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요. 버림받은 것도 아니고 소중히 지켜진 거잖아요. 사라진 센트럴의 시민 중 우리가 가장 존엄할 것 같아요.”
“…….”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는데 그런 일을 절대 없을 테니 우리를 믿으라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다.
“돌아오시기를 기다릴게요. 그런데 돌아오실 것 같아요.”
“네. 은이를 꼭 봐야죠. 우리가 이름도 지어 줬는데. 한우가 될 뻔한 걸 구해 줬다고 말해 주고 고맙다는 말도 꼭 들을 겁니다.”
“그런데 그 이름도 괜찮지 않아요? 정감 있잖아요.”
“그건 굉장히 주관적인 생각일 것 같아요. 외향적인 성격이라면 모르지만 내성적인 성격이라면 이름 때문에 놀림을 받을 수도 있잖아요.”
때맞춰 변태영과 심우진이 지나가다가 그녀를 알아보고 다가왔고 변태영은 아기 이름은 꼭 한은으로 지으라며 신신당부했다.
“한우진은 어떠세요? 제 이름도 상당히 예쁜데.”
심우진은 그 사이에서 소소하게 자기 이름을 자랑했고 함께 있던 사람들은 한은보다 한우진이 낫겠다면서 갑자기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S급 에스퍼들의 얼굴에서는 웃음이 사라졌다.
“토파즈에서 지원을 하겠다고 연락이 왔어. 미등록 헌터들도 같이 싸우겠다고 했대.”
“이제 와서 왜요?”
변태영의 말에 묻자 그도 모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센터장님은 어떻게 하실 거래요?”
“전체 회의를 하면 좋겠지만 워낙 촉박하기도 하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끼리 회의를 했는데 거부하기로 했어. 괴수만 상대하기도 벅차다고 결론을 내렸어.”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믿을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괴수와 에스퍼의 싸움에서 에스퍼의 편을 드는 게 당연하겠지만 인간의 욕심은 종종 상상하기 어려운 일을 저지르는 법이었고 나는 그들이 내민 손을 잡는 게 내키지 않았다.
변태영과 심우진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랬냐고 할 줄 알고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했는데.”
심우진의 말을 들으면서 나도 조금은 씁쓸해졌다.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 똘똘 뭉쳐 있다는 것을 드러내 버린 것 같아서.
“이번에 이거 끝나면 나는 다이어트를 하려고. 허리에 살이 조금 붙은 것 같아.”
느닷없이 변태영은 다이어트 타령을 했고 심우진은 악기를 새로 배워 보고 싶다고 했다.
이번에는 타악기에 도전해 보고 싶다고 하면서 자기랑 같이 배울 생각이 없냐고 해서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제가 비트 감각이 좋거든요. 춤은 배워 볼 생각 없으세요? 저는 춤도 배우고 싶은데.”
“춤 잘 춰요, 은우 씨? 나는 춰 본 적은 없는데 춤 선이 예쁠 것 같기는 해요. 안 그래요?”
도대체 그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거냐고 하고 싶었지만 쓰윽 보니 부정할 수 없을 것 같기는 했다.
“에스퍼님은요? 에스퍼님도 같이 배우실 거예요?”
변태영에게 물었더니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로 다이어트를 하면 되겠네. 나는 운동은 정말 싫거든.”
“아예 아이돌 그룹 결성을 할까요? 전에 보니까 우리가 인기가 많더라고요. 그룹명은 블랙 에스퍼스 어때요?”
근본 없는 토크를 하면서 걷다가 모두 차에 올랐다.
던전이 개방될 때까지 이제 우리는 센트럴에 머물 터였다.
이곳에 다시 설 일이 있을까.
돌아본 땅끝이 주홍빛으로 불타는 듯 물들었다.
차라리 아름답지 말지.
정들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미련 같은 건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차가 출발하고도 나는, 그러지 말자고 생각하고도 결국 고개를 돌려 가며 센터를 바라보았다.
건물의 창문에 태양 빛이 닿아 눈이 부셨지만 나는 손을 들어 그림자를 만든 채 그 모습을 오래오래 두 눈에 담았다.
***
기어이 그 시간은 다가왔고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다 그럴 게 아니라고 생각하며 걸음을 빨리했다.
수많은 에스퍼들이 나를 보고 있을 텐데 내가 그렇게 가라앉아 있을 일이 아니었다.
“괴수 한 마리를 죽일 때마다 제 애장품을 고를 기회를 주겠습니다. 제가 인기가 많던데 제 애장품을 팔면 돈을 벌 수 있을지 몰라요. 그러니까 다들 힘내 주세요.”
내 팀의 에스퍼들은 시원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제가 다 죽이고 싶지만 그러면 다른 사람들한테 원망을 들을 것 같으니까 한 마리만 죽이겠습니다.”
“안 그러셔도 돼요. 애장품은 많습니다.”
“검도 주십니까?”
“검도 드립니다.”
“와아. 그건 노려볼 만하네요.”
그러는 동안 견인이 다가왔다.
“센터장님.”
에스퍼들이 견인에게 인사를 하는 걸 보고 돌아서자 그가 환한 얼굴을 하고 걸어왔다.
“서은우 에스퍼.”
“센터장님.”
“이따가 보자.”
“네. 끝나고 술 한잔해야죠.”
“한 잔으로 안 되지.”
견인은 내 말에 웃고 다른 에스퍼들을 격려하고 돌아갔다.
변태영과 심우진도, 그리고 차윤까지도 나를 보러 왔다.
상황실의 예고에 따르면 이제 던전이 개방될 시간은 삼십 분도 남지 않았다.
각각의 개방 시간에 차이는 있겠지만 첫 개방 이후 순차적으로 개방이 될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두 번째 던전이 개방되기 전에 첫 번째 던전의 괴수를 죽이는 거지만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을 위해서 무리하게 힘을 쓰는 것도 지양해야 했고 각각의 S급 에스퍼들은 자기들과 함께 레이드를 할 에스퍼들에게 그 점을 몇 번이나 강조했다.
시간이 갈수록 점점 말이 없었다.
나는 S급 에스퍼들을 자주 바라보았다.
여러 전술을 미리 짜 놓은 상태였고 협력이 필요하면 얘기를 하도록 되어 있었기에 나에게 부탁하는 사람이 있는지 봐 두려는 이유였다.
처음에는 이하민도 자주 봤지만 그가 나를 피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은 후에는 나도 그를 보지 않으려 했다.
몇 번은 나도 모르게 자꾸 시선이 향하더니 이제는 나도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았다.
“5분 남았습니다, 에스퍼님.”
내 부탁에 따라 한이현이 시간을 알려 주었다.
“2분 남았습니다.”
나는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S급 에스퍼들을 바라보았다.
신호를 보내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을 훑다가 이하민에게 다시 시선이 지나갔다.
이번에는 그가 나를 보고 있었다.
‘……왜?’
냉랭한 적의.
명백한 혐오.
생각지도 못했던 감정이 그의 눈에 실려서 스쳐 가는 것을 보고 깜짝 놀라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것을 알아차렸는지 우리 팀의 에스퍼들이 일제히 이하민을 보았다.
나는 내가 멍청한 짓을 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 따라 다른 팀의 에스퍼들도 우리 팀의 에스퍼들을 따라 이하민을 봤던 것이다.
거기다 S급 에스퍼들까지도.
‘하!!’
멍청한 짓을 해도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건가 하는 생각에 화가 치밀었다.
이하민이 왜 그러는 건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와 나의 개인적인 문제였다.
그 개인적인 문제에 내가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바람에 순간 모든 사람의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30초 남았습니다.”
한이현의 목소리에 나는 검을 붙잡았다.
‘정신 차려, 서은우. 망치더라도 이놈은 죽이고 망쳐!’
그런 눈으로 나를 보면 내가 흔들릴 거라는 걸 몰랐을까?
그걸 몰랐다면 멍청한 거고 알면서도 그랬다면 잔인한 거였다.
뭐가 됐건 더 이상은 머릿속에 그를 담을 공간은 없었다.
푸른 기운이 넘실거리는 검은 어느 순간 나와 하나가 되었다.
던전이 개방되는 것과 동시에 왼손을 들어 우리 팀 에스퍼들을 막았다.
에스퍼들은 갑작스러운 동작에 당황한 것 같았지만 나는 신호를 보내 놓고 앞을 향해 달려 나갔다.
“서은우!!”
변태영이 불렀지만 멈추지 않았다.
던전에서 뭐가 튀어나오건 간에 한 번에 벤다.
만용은 아니었다.
나는 할 수 있었다.
나라면 할 수 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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