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거대한 설치류 형 괴수였고 타이탄보다 2미터 정도가 더 커 보였다.
두 앞발로 바닥을 박차고 뛰어오르는 놈을 보며 모두가 겁에 질려 있을 때 나 역시 날아올랐다.
놈의 도약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위협적이었고 나는 딱 필요한 만큼 도약했다.
대단한 의지를 가지고 뛰어오른 괴수는 순간적으로 복부에 따끔한 통증을 느꼈을 것이다.
내가 할 일은 검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두 손으로 붙잡고 버티는 것뿐이었다.
그게 결코 말처럼 간단한 일은 아니었지만 절대로 실패해서는 안 됐다.
다른 때라면 몰라도 나로 인해 사람들의 집중력이 완전히 흩어진 지금은 안 되는 것이다.
손끝이 저리고 팔이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복부가 찢기며 놈의 체액이 고스란히 내 몸으로 쏟아졌다.
쿠에에에엑-!
놈이야말로 괴롭고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제가 몸을 날리는 것에 맞춰 맞은 편에서 내가 날아올라 제 배를 갈라 버릴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을 터였다.
스스로 공격에 뛰어든 꼴이었고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괴수는 멈추지 못했다.
배가 완전히 갈라질 때까지도.
놈이 바닥에 떨어졌을 때, 그리고 내가 착지했을 때.
사람들은 소리를 내지 못했다.
“주…… 죽었습니다…….”
몇십 초가 지난 후에, 한이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7분 남았습니다, 에스퍼님.”
역시 한이현이었다.
“누구, 옷을 가져온 사람 없습니까? 어차피 소용없으려나?”
견인이 말을 하다가 빠르게 포기했다.
옷을 갈아입는다고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아 버린 것 같았다.
괴수의 피를 온몸에 뒤집어쓴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그 때문에 에스퍼들의 사기는 크게 올랐다.
“와아아아……. 이건 정말 기록인데요? 저도 그렇게 해 볼까요, 에스퍼님?”
우리 에스퍼들이 말을 하기에 깜짝 놀라며 시도도 하지 말라고 말했다.
“팔 부러집니다. S급 에스퍼님들도 시도하시면 안 돼요.”
S급 에스퍼들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들은 그런 건 생각도 안 했다고 하면서.
우리 팀이 있는 곳으로 가는 데 가는 길에 이하민과 그의 팀이 있었다.
나를 보지는 않았는데 얼핏 시야에 들어온 얼굴이 웃는 것 같았다.
다시 감정이 날뛸 것 같아서 일부러 그를 보지 않았다.
나를 바라보는 사람들이 많은 판국에 내 표정에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감정이 보이면 영향을 받을 것이다.
마침 한이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3분 남았습니다.”
개방될 던전은 거리가 떨어져 있었는데 이동은 하지 않은 채 이곳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괴수는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향하게 되어 있었고 텅 빈 센트럴에서 괴수는 우리가 있는 곳으로 올 터였다.
이동하는 게 좋은가 하는 생각을 하는 것도 설치류 괴수가 너무 빠르게 끝나 버린 탓이었다.
원래대로였다면 난전이 벌어진 와중에 새로운 괴수가 나타나야 했을 것이다.
“30초 남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던전이 개방되었고 던전의 괴수는 순식간에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
이번에도 인간형 괴수였다.
부쩍 인간형 괴수의 빈도가 늘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냥 단단하기만 한 놈은 아니었다.
‘엄청나게 빠르다.’
색이 뭉개지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믿기지 않는 속도에 모두가 할 말을 잃고 그것을 바라보기만 했다.
크기는 타이탄의 절반 정도인 것 같았는데 가까이 다가온 것을 보니 거의 타이탄 정도였다.
이런 속도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까 하면서도 다른 에스퍼들이 나를 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에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크으으아아아-!
짐승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소리가 큰 것은 둘째치고 그것이 자체로 공격이 되었다.
에스퍼들은 저마다 귀를 막고 주저앉았고 몇 사람은 바닥을 나뒹굴었다.
쓰러진 사람들의 귀에서 짙은 핏물이 쏟아졌다.
S급 에스퍼들의 공격이 일시에 퍼부어졌다.
그러나 눈으로 따라잡을 수 없는 수준의 빠른 속도 때문에 괴수가 지나간 곳에 변태영의 화염이 던져지곤 했고 견인의 염력은 흙더미만 치솟게 했다.
다른 에스퍼들은 공격에 가세하지 못한 채 귀를 막으며 고통스러워했고 시간이 갈수록 바닥을 나뒹구는 사람들이 늘어 갔다.
S급 에스퍼들도 정신력으로 참고 있는 것뿐이지 괴수의 공격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니었다.
심우진과 차윤이 괴수에게 정신계 공격을 가하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목표가 어디에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그것이 잘 될 리가 없었다.
내 귀에서도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통증은 앞으로 올 재앙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터였고 나는 그것을 부정했다.
그때부터는 안력을 돋우는 데 집중했다.
다른 사람과의 연계는 기대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소리와 휘말리는 흙먼지.
궤적이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을 알게 되고도 쉽게 마음이 다잡아지지는 않았다.
그 맹렬한 움직임을 막아선다면 몸이 송두리째 찢겨 나갈 것 같다는 공포가 전신을 감쌌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고 이를 악다물었다.
‘고통에 집중하지 마. 어차피 한 번 죽는 거야.’
나에게는 지금껏 그 말이 적용되지 않았지만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다졌다.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온다!’
두 다리에 빠르게 기운이 몰렸다.
신체를 극한까지 강화한 채 몸을 쏘았다.
전면으로 부딪치면 살아남을 수 없겠기에 괴수의 궤적을 읽고 있다가 발목을 노리며 옆에서 미끄러져 갔다.
그것을 미리 눈치채고 괴수가 속도를 줄일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고 눈앞에서 멈췄던 괴수가 쓰러진 나를 노리며 달려오는 것을 보았다.
일어날 틈도 없었다.
그대로 놈의 발아래에 깔리겠다고 생각한 순간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괴수에게 그런 능력까지 있는 건가 하면서 고개를 돌리고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몸이 괴수에게서 멀어졌다.
‘견인?’
모든 일이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졌기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런데 왜…….
허공에 누운 채로 날던 내 몸은 이하민의 팔에 닿으며 바닥에 내려졌다.
나에게 화가 난 것 같더니 그래도 죽으라고 버려 두지는 않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변태영의 능력을 복제했다더니 이 정도였던 건가.
말없이 부축해 내려놓는 손길이 거칠지 않았다.
그런 것을 신경 쓰고 싶지는 않았는데.
“내가 구덩이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아. 방금 네가 넘어졌던 거기로 하자.”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피해야 돼. 늦으면 안 돼, 은우야.”
늦어도 구해 줄 것 같고 늦어서 구해 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나는 도대체 어떻게 된 인간인 걸까.
그러면서도 이하민이 화를 푼 건가 하면서 기분이 좋아졌다.
내가 잘못한 건 없다고 해도 이미 누나의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유죄니까 할 말이 없었다.
그때부터 나는 괴수를 향해 달렸다.
정말 잘할 자신이 있었다.
없던 힘도 생겨나는 것 같았고 괴수의 공격이 계속되고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혼자 다른 곳으로 가 있는 것처럼 느끼고 있었다.
전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가볍게 달리면서 괴수를 유인했고 정해진 장소에 가까워지며 이하민을 바라보았다.
녀석의 손이 허공에 들렸다가 콰쾅 내리치듯이 아래로 떨어졌고 그 자리에서 흙더미가 솟구쳐 올랐다.
괴수의 반응 속도가 빠르다는 것을 알았기에 나는 함정이 만들어진 곳을 피하지 않았다.
이미 흙무더기가 치솟는 것을 본 터라 괴수도 조심할 수밖에 없을 거였다. 그런 생각으로 멈추지 않은 채 달리는데 나를 지켜보던 이하민이 놀라며 달려 오는 것이 보였다.
내가 피하지 못한다면 염력으로 나를 이동시킬 거라고 생각하며 그를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이하민은 잠깐 동안 나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나를 믿어 보고, 내가 실패하면 그때 나서도 늦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빛처럼 빠른 속도로 쫓아오는 괴수를 피하는 중이었으니 내 눈빛을 알아차린 이하민의 안력도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발밑에서 느껴지는 단단함의 정도가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 순간 나는 물 위를 걷는 수법으로 달렸다.
겉으로 보기에는 땅 위를 달리는 것 같겠지만 실제로는 바닥에 발을 대지 않은 채 몸을 띄우고 달렸던 것이다.
괴수를 속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도 속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달리자 괴수는 내가 무슨 짓을 한 건지 상상하지 못한 채 내 뒤를 따라왔다.
다른 누구보다 이하민의 놀라움이 가장 큰 것 같았다.
함정을 만든 장본인이 그였으니 내가 함정을 피하지 않은 걸 보고도, 그리고 거기에 빠지지 않은 걸 보고도 놀랐을 것이다.
그 앞에서 속도를 줄이자 괴수는 이제 곧 나를 잡을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빠르게 달려왔다.
“에스퍼님!”
순간 변태영을 바라보자 그가 나를 보다가 괴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자기가 나서야 할 차례라는 것은 어렴풋이 깨달았는데 뭘 하라는 건지 알지 못해서 그런 거였을 터였다.
그러나 괴수가 있던 곳이 우르르 가라앉자 충격도 뒤로 물리고 그 위로 화염 공격을 퍼부었다.
그를 도와 화염 능력자들이 모여 괴수에게 공격을 퍼붓자 견인도 와서 가공할 염력으로 괴수의 몸을 찢어발겼다.
“이하민. 에스퍼님을 도와줘!”
어느새 이하민이 다가왔고 변태영은 최후의 일격을 준비하며 손안에서 커다란 화염 구를 만들어 냈다.
“결계 능력자들은 불구덩이 주위로 결계를 만들어 주세요!”
곳곳에 흩어져 있던 결계 능력자들이 달려왔고 에스퍼들의 합동 공격에 괴수가 끔찍한 냄새를 풍기며 화염에 휩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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