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그건 말이 안 돼요. 일단 누나를 설득할 수 있어야 됩니다.”
“설득 못해요? 사실대로 얘기해요. 누나 때문에 내가 그 세계에 와 버렸고 지금 누나를 이렇게 만나고 있는 건 꿈이고 나는 그 세계로 돌아가지도 못한다고.”
“누나는 좋아할지도 몰라요.”
“아…….”
그렇다면 할 말이 없다는 듯이 그가 나를 보았다.
“있을 때 좀 잘하지 그랬어요.”
차윤은 왜 인생을 그렇게 살아서 자기까지 이렇게 힘들게 하냐는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차윤에게 그런 취급을 당하는 건 참 억울했다.
“그러면 일단 잠들게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전에 암시를 풀어 버려서 이제는 잘 안될지도 모르는데.”
“아아…….”
그 문제가 있었구나.
“그러면 안 되는 거예요?”
다급한 얼굴로 묻자 차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하라는 대로 협조를 잘하면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한번 해 볼까요?”
“해 봐야죠. 지금으로서는 그게 가장 확실한 해결책이 될 것 같아요. 누나라면 공략법도 알 것 같거든요. 그 꿈을 꾸면 누나 소설을 찾아서 다 읽고 와야겠어요.”
차윤도 내가 왜 잠을 자겠다고 하는 건지 확실하게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그러면 최면을 걸어 볼 테니까 내가 하라는 대로 잘 따라 하세요. 그게 가장 중요해요.”
그와 나는 의기투합했고 그는 나를 편한 의자에 앉도록 했다.
등을 기대고 누우라고 했는데 의자가 정말 편해서 나중에 어디서 샀는지 물어보고 나도 하나 사야겠다는 마음까지 들었다.
“지금부터 내가 말하는 걸 떠올리세요.”
그는 떠올리기 쉬운 것부터 하나씩 말했고 나는 그것들을 떠올렸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런 것들을 이행해 나갔는데 어느 순간 귓가에서 그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그리고 그 대신 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먹고 싶은 거 없어? 저녁 시킬 건데 같이 시키게. 오늘은 중식 먹고 싶은데 괜찮지?”
됐다.
나는 방문을 열고 나가 누나를 확인했다.
“나 배 안 고파. 그보다 누나 소설 좀 보여 줘.”
“내 소설? 전에도 그러더니 너 내 소설에 엄청 관심 많다? 그때 너 때문에 내용 바꾸고 담당자가 아쉬워했는데.”
“어?”
내가 꿈속에서 한 얘기를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후에도 나는 이곳에서 계속 지내고 있었다는 건가?
나를 보고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랬……어?”
“그래. 좋았는데 왜 갑자기 바꾼 거냐고 해서 말하느라고 혼났어.”
“나 때문이라고는 안 했지?”
“그렇게는 말 안 했지.”
“일단 소설 먼저 보여 줘, 누나.”
“너 이상하다? 전에는 내가 옆에서 읽어 줘도 질색을 하더니. 재미……있어?”
양심은 도대체 어디에 갖다 처박아 놓은 걸까.
재미있냐고?
재미있냐고?
정말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참았다.
아니지. 내가 이렇게 계속 참기만 할 일이 아닌 건지도 모른다.
내가 어떤 상황인지, 누나 때문에 내가 지금 얼마나 목숨이 위태로운지 누나도 알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 생각에 나는 누나를 바라보았다.
“누나. 이리 와서 좀 앉아 봐.”
누나의 손을 잡아끌면서 말하자 누나가 질색을 하며 손을 털었다.
“얘가 왜 이래?”
“아, 좀 앉아 봐! 나도 누나가 좋아서 이러는 거 아니니까!”
화가 나서 소리쳤더니 누나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하고 노려보았다.
그렇기도 하겠지.
자기는 지금 자기 때문에 내 인생이 얼마나 꼬였는지 모를 테니까.
“이리 좀 와 보라니까?”
누나는 이해 안 된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젓기는 했지만 그래도 내가 말하는 대로 오기는 했다.
“뭔데 그래?”
“누나. 나 지금.”
‘누나가 쓴 소설에서 살고 있어’라고 말을 하려고 했다.
믿기 힘들겠지만 그래도 말을 하려고 했다.
누나에게 우리 센터와 센트럴 사람들의 목숨이 달려 있는데 그 말을 못 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왜 내 눈앞에 갑자기 차윤이 나타난 걸까.
“……왜 갑자기 눈을 떠요?”
차윤이야말로 놀랐는지 나에게 물었다.
“그러게요? 누나한테 말을 하려고 하고 있었는데. 에스퍼님이 깨운 건 아니에요?”
“아닌데요? 정말 잘도 잔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나는 건드리지도 않았어요.”
그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설마. 그 말을 하려고 해서 그런 건가? 그 말을 하면 안 되는 건가?”
멍한 얼굴을 하고 허공을 보면서 중얼거리자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물었다.
“얘기하려고 했거든요. 누나가 쓴 소설에 와 있으니까 소설 내용을 바꾸라고 하려고요. 그런데 그 말을 하려고 하는 순간 잠에서 깼나 봐요. 좀 전까지만 해도 누나가 제 앞에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졌어요.”
그는 정말 희한하다는 표정을 짓고 나를 보았다.
“어떻게 할까요? 다시 해 볼까요? 다시 최면을 걸어 줄 수는 있어요.”
“네. 다시 한번 해 보고 싶어요.”
그는 나에게 최면을 걸었고 나는 조금 전과 같은 절차로 최면에 빠져들었다.
잠이 들었고 꿈을 꾸었으며 누나를 보았다.
누나는 나가서 음식을 받아 오라고 했다.
“계산은 내가 했으니까 그 정도는 할 수 있잖아? 뭘 그렇게 억울하다는 듯이 빤히 보냐?”
음식을 시켰다고?
아까의 상황이 지금 그대로 이어지는 건가?
누나와 내가 입고 있는 옷도 그대로였고 누나의 뻗친 머리도 그대로였다.
내가 말을 하자고 하다가 사라진 것을 모르는 건가?
이곳에서는 그대로 시간이 흘러가는 건가?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음식을 받아 왔다.
내가 좋아하던 굴짬뽕이네.
여기는 해물을 정말 많이 넣어 주는데.
그러고 보니 거기로 가면서 이걸 전혀 못 먹었다.
‘그래. 어차피 그쪽에서도 급한 일은 없으니까 일단 먹고 얘기하자.’
내가 짬뽕 앞에서 그렇게 간단히 무너질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는데 짬뽕의 유혹은 생각보다 컸다.
짬뽕을 먹고 나서 누나에게 다시 그 말을 하려고 시도했다.
“누나, 사실은 내가.”
누나가 쓴 소설 속에서 살고 있거든.
그 말을 그냥 머릿속에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다시 차윤이 보였다.
이번에는 놀랍지도 않았다.
“말했어요?”
차윤이 기대되는 듯이 물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왜요? 한참 지났는데요? 바로 깨어나지 않아서 이번에는 됐나 보다고 생각했는데.”
“네. 저도 그런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아니더라고요.”
“그럼 왜 이렇게 오래 걸렸는데요?”
“짬뽕 먹고 왔어요.”
나는 그에게 다시 한번 최면을 걸어 달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하면 잠이 깨는 것 같으니 그건 포기해야겠다고 하자 그도 그게 맞는 것 같다고 하고 다시 최면을 시도했다.
“아. 잠깐만요. 그런데 자꾸 이렇게 최면에 빠지면 몸이 이상해진다거나 부작용이 생긴다거나 그런 건 없어요?”
“네.”
이 사람 말을 믿어도 되는 건가?
괜찮은 거 맞겠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믿을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다시 꿈을 꾸었을 때 우리는 식사를 끝내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고 나는 누나에게 다시 소설 얘기를 했다.
누나는 연재되고 있는 플랫폼에서 사서 읽으라고 했고 나는 결연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공개 안 된 것도 있잖아. 누나 원고를 직접 보고 싶어.”
“너 또 내용 바꾸라고 하려고 그러지? 이제는 절대 안 바꿔.”
“그러면 안 된단 말이야!”
“웃기고 있어. 네가 내 담당자야? 네가 내 독자야?”
“독자지! 독자지!!”
누가 독자가 되고 싶어서 됐나.
자기가 억지로 읽어 주고는!
누나는 내가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릴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더니 결국 노트북을 켜서 파일을 열어 주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진짜 이상해졌어!”
알기는 하는데 나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니라고.
소설은 우리에게 일어난 일까지 진행이 되어 있었다.
딱 거기까지.
“뭐야. 에스퍼들이 괴수를 죽이고 센터로 돌아간 게 끝이야?”
“그래. 그다음 내용은 이제부터 써야 돼.”
“뭐라고 쓸 건데?”
던전의 공략 방법에 대해서 알 수 있을까 했던 내 꿈은 수포로 돌아갔다.
아쉬움을 숨긴 채 물었더니 누나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도 잘 모르겠어. 원래는 이렇게까지 길게 쓸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담당자님이 재미있다면서 자꾸 더 써 보라고 하잖아. 원래는 훨씬 전에 끝났어야 되거든. 거기에서 끝났으면 글이 훨씬 예뻤을 것 같은데. 분량을 늘리려고 하다 보니까 괴수 죽이는 거랑 전투 신만 자꾸 늘어나고 걱정돼.”
그런 소리까지 구구절절 다 들어 줄 여유는 안 돼서 다음 내용을 어떻게 쓸 거냐고 그거나 말해 달라고 재촉했더니 누나가 진짜 웃긴다는 표정으로 나를 보더니 팔짱을 꼈다.
“이하민이랑 서은우의 애정 전선에 빨간불이 켜지게 하려고. S급 에스퍼들이 빌드업이 잘 됐는데 공기화 됐잖아. 비중이 급격히 줄어든 것 같아서 아까워. 걔들이 그렇게 쩌리 역할이나 할 애들이 아니잖아? 그동안은 던전이 개방될 수도 있다는 사실 때문에 연애 감정 같은 건 사치였지만 이제는 그 문제가 해결됐으니까 다시 S급 에스퍼들이 들이대는 거로 할까 봐. 서은우의 치명적인 매력에 자꾸 감기는 거지. 게다가 이번에 서은우가 활약을 많이 했잖아.”
“누나. 그렇게까지는 안 해도 될 것 같아. S급 에스퍼들에게는 새로운 짝이 생긴다고 하자. 걔들도 인기 많으니까 센트럴에 있는 좋은 사람 만나서 행복하게 산다고 하면 되지 않을까?”
“서은우 인생을 왜 네가 간섭해?”
그야 내가 그 삶을 살고 있으니까 그렇지, 이 인간아!!
그러나 누나는 상상의 나래를 계속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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