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S급 에스퍼들이야말로 그 상황에 많이 긴장을 하고 있었는데 서은우가 몸을 아끼지 않고 앞장서서 괴수들을 죽이는 걸 보고 놀란 거야. 감동도 받았고. 전에 느꼈던 감정은 막연한 호기심 같은 거였다면 이제는 그 감정이 한층 더 강해지지. 서은우가 이하민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까 그동안은 이하민에게 양보한 면이 있었지만 이제는 자기들의 마음을 좀 더 확실하게 깨달았다고 할까? 이제부터는 S급 에스퍼들의 적극적인 구애 작전이 펼쳐지는 거지. 마침 이하민은 갑자기 떠오른 기억 때문에 마음이 복잡한 상황이니까 딱 기회가 좋잖아.”
“갑자기 떠오른 기억?”
이하민에게 떠오른 기억은 자기가 소설에 빙의했다는 사실일 텐데 누나가 그걸 알고 있는 건가?
그러면 서은우가 소설에 빙의한 것도 아나?
나는 그게 무슨 말인가 하며 누나에게 물었다.
“그게 뭔데?”
“너 안 읽었어? 어디까지 읽은 건데?”
나는 내가 소설의 내용을 어디까지 아는 걸로 해야 하는 건가 잠시 고민하다가 서은우가 납치된 것까지 읽은 것 같다고 말했다.
“아아. 그러고 나서 여러 일이 일어나는데 그 와중에 우연히 이하민이 기억을 떠올리거든. 자기가 원래는 다른 세계에 살고 있었는데 소설 속에 들어왔다는 걸. 그런데 사실 이하민은 엄청난 호모포비아였던 거야. 그런데 자기가 그 세계에서 서은우를 좋아하고 서은우랑 가이딩을 핑계로 몸까지 섞었잖아. 그 사실을 깨닫고 엄청난 혼란을 느끼게 될 거야. 서은우는 여전히 좋지만 자기가 남자를 좋아하고 남자랑 그런 짓을 했다는 거에 환멸을 느끼는 거지.”
“…….”
누나의 동생으로 태어날 줄 알았다면 태어나기 전에 생각을 잘해 볼 걸 그랬다.
지금 이하민이 어떤 상황인 건지 누나 때문에 확실히 알게 돼서 좋기는 한데 정말 너무나 짜증이 났다.
이하민이 갑자기 그렇게 된 것도 누나의 설정 때문이라서.
“그 설정 재미있지 않냐? 그동안 두 사람의 사랑에는 풍파가 너무 없었어.”
우리 좀 제발 가만 내버려 두라고 소리를 지르려고 하다가 막판에 정신을 차리고 참았다.
안 그랬으면 또 갑자기 잠에서 깨서 차윤을 마주하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무래도 최면에 이렇게 자주 빠지는 건 나한테도 안 좋을 것 같아서 이번에 최대한 알아내고 당분간은 최면에 걸리지 않겠다고 마음을 먹은 참이었다.
“서은우는 서은우대로 죄책감을 갖고 있어. 자기가 그 소설을 쓴 사람의 동생이잖아. 결국 이하민이 그런 마음을 느끼는 게 다 누나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잖아.”
“……뭐?”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뭐라고 했어, 누나?”
“아아. 너무 몰입하지 마. 어차피 네 얘기 아니니까. 그냥 작가의 남동생이 가이드버스 이물질에 빙의했다는 설정이지. 이 소설의 작가가 나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이 작가가 나는 아니잖아. 무슨 말인지 알지?”
누나는 알아?
앞뒤가 안 맞는 것 같은데?
누나는 일단 그런 거로 하자면서 그냥 넘어가자는 식이었다.
와. 이 미친 누나 보게?
처음부터 소설을 쓰면서 그렇게 설정을 한 거였어?
도대체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야. 작가 가족이 소설에 들어갔다는 설정 엄청 흔해. 너를 생각하고 쓴 게 아니라 그냥 클리셰대로 쓴 거야. 그렇게 눈에 불 켤 일이 아니라니까? 잘하면 한 대 치겠다?”
나는 한숨을 쉬고 그럼 차윤에 대해서 말을 해 보라고 했다.
“차윤? 차윤은 그냥 별생각 없이 넣은 건데 왜? 차윤은 윤이재랑 엮어서 나중에 질펀한 19금 외전 쓸 생각으로 만들어 넣은 애야. 윤이재도 지은 죄가 많으니까 윤이재랑 둘이 가학적인 성애 묘사를 해도 반감이 없을 것 같고.”
이 누나가 진짜!
동생 앞에서 못 하는 소리가 없었다.
“아아! 어차피 차윤은 윤이재를 안정제 정도로밖에 생각 안 하고 있고 차윤도 서은우를 좋아하니까 가장 먼저 들이대는 걸 차윤으로 해야겠다. 아아. 딱이네, 딱이야. 서은우가 차윤에게 상담을 하러 가는 거야. 이하민 분위기가 이상하니까. 그런데 그때 차윤이 서은우를 돕는 것처럼 하면서 최면을 거는 거지. 그리고 최면에 걸린 사이에.”
“야!!”
보자 보자 하니까!!
“너! 이거 아직 안 쓴 거지? 쓰지는 않고 지금 막 생각만 한 거지?”
“너? 너 지금 나한테 너라고 그랬냐? 미쳤냐?”
“그래. 미쳤다. 미쳤다!!”
그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당장 잠에서 깨지 않으면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안심이 안 됐다.
이럴 때 어떻게 깨야 하더라? 하다가 내가 그 소설에 들어간 걸 말하려고 하자 그대로 눈앞에 차윤이 보였다.
하, 이 새끼!
눈이 풀려 있는 게 내가 조금만 더 늦었으면 무슨 짓을 했을지 훤했다.
“너는 어쩌면 변하질 않냐, 어?!”
주먹을 날렸더니 차윤이 바닥에 처박혔다.
그래도 할 말은 없었는지 제 뺨을 만지기만 하고 있었다.
하긴. 저건 무슨 죄냐. 다 미친 누나 때문이지.
정말 짜증이 제대로 나 버렸는데 이러고 있다가 큰일이 나겠다는 생각에 그대로 이하민을 찾아갔다.
그런 누나를 둔 게 내 죄인 건 맞지만 가장 큰 피해자는 나 아닌가?
그런 걸 누나로 두고 지금까지 이렇게 험한 인생을 살아왔는데.
죄책감?
개나 주라지.
나는 이하민을 찾아갔고 이하민은 내가 온 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누나 마음대로 되게는 못하겠다는 생각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에게 부탁했다.
“제가 이하민 에스퍼와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데 잠깐 자리 좀 비켜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모두 내 기세에 놀란 듯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떠났다.
이하민은 무슨 짓이냐는 듯한 얼굴로 나를 보았고 나는 자리를 옮길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말했다.
“이하민. 혼란스러운 거 알겠는데 네가 그런다고 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는 거 말해 주려고 왔어. 그런다고 해도 어차피 너 나 못 잊고 나한테서 못 벗어나잖아. 나 없이 살 수 있을지 생각해 보면 답 나올 것 같은데. 너는 나 아니면 안 돼. 나 없으면 안 되고. 전에 네가 어떤 모습이었는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게 중요하냐? 아니잖아. 네가 갖고 있던 생각은 틀렸어. 그런 생각을 했을 때 너는 나를 몰랐잖아. 그런 상태에서 한 생각이 지금 무슨 의미가 있다고 그러는 거지?”
직접적으로 말을 하면 안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가 이곳에 빙의했다는 것은 피한 채로 말했다.
네가 호모포비아였든 어쨌든 지금은 나를 좋아하는 게 네 본심이고 아무리 고민해도 그건 변하지 않을 거라는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 말을 들은 이하민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 채 나를 바라보았다.
“은우야…….”
“맞잖아. 아니면 지금 결정해. 네가 고민하고 돌아와도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아. 내가 그러고 싶어도 다른 사람들이 나를 놔주지도 않을 거고. 너도 알잖아.”
“…….”
“내가 갈 때까지 대답하지 않으면 너는 나하고 완전히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거야. 그리고 그 시작을 영영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어. 너는 네가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본데 사실 안 그렇거든.”
말을 하고 나니까 후련해졌다.
이하민에게 말을 했다는 것도 후련했지만 누나의 소설을 망치고 있다는 게 더 후련한 것 같기도 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이제부터 소설을 개막장으로 만들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다.
“다른 사람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서 우리 인생 곳곳에 함정을 놓을 수 있어도 우리는 그러면 안 되는 거니까.”
그러고는 빤히 녀석을 바라보았다.
“은우야. 잠깐. 잠깐만.”
이하민은 나에게서 들은 폭탄 같은 발언에 잠시 어리둥절한 것 같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너…… 그런 걸 어떻게 알았어? 아아. 차윤 에스퍼? 차윤 에스퍼를 만나고 온 거야?”
차윤이 이런 식으로 쓰이는구나.
나는 그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렇게 하는 게 이해하기에 편하다면 부정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말 나온 김에 하나 더 말하자면. 나도 너랑 같아. 나도 원래 여기에 살던 사람이 아니야.”
그 말을 할 때는 조금 신중해졌다.
누나에게 그 말을 했을 때는 꿈에서 깨는 것으로 끝났지만 여기에서는 예상하지 못한 페널티가 주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었다.
나는 말이 나온 김에 전부 다 털어놓기로 했다.
당하고 보니, 내가 좋아하는 녀석과의 사이에 말하지 못할 비밀이 있다는 것은 정말 뭣 같았다.
“나. 이 소설을 쓴 작가의 남동생이야.”
“…….”
이하민이 나를 가만히 보더니 큰 소리로 웃어 댔다.
나중에는 두 눈에 눈물까지 맺혔다.
안 믿나 보다.
믿어 달라고 굳이 사정까지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나도 그냥 웃으면서 은근슬쩍 넘어갈까 했는데 이하민이 갑자기 다시 물었다.
“정말이야?”
“어. 처음에는 미안했는데 생각해 보니까 나야말로 동정을 받아야 할 사람인 것 같더라. 네가 나라고 생각해 봐. 어땠을 것 같은지. 게다가 처음에 이 소설은 이런 내용도 아니었어. 나는 죽는 역할이었다고.”
이하민은 자기가 나에게 그런 얘기를 듣게 될 거라고 상상도 하지 못한 듯했다.
나는 지금이 아니면 언제 다시 기회가 올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 자리에서 하소연에 가까운 얘기를 시작했다.
나는 너처럼 여기로 바로 온 것도 아니고 처음에는 무협 게임에 빙의했다고 하자 이하민은 더 이상 무슨 얘기가 더 나올까 하는 듯이 나를 보았다.
그러나 내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 은우 너……!”
“그래. 그게 아니었으면 어떻게 했겠어. 내가 한 것들, 그중에는 무공도 많았어.”
“그럼 혹시 괴수를 피해서 도망칠 때도…….”
“그래. 맞아. 그것도 무공이야.”
이하민은 내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그동안 이해되지 않았던 일들을 전부 다 떠올리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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