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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버스 이물질이 되어버렸다-96화 (96/137)

96화.

“원래대로라면 너는 잊고 있던 기억을 떠올리고 나한테서 멀어졌을 거야. 그사이에 S급 에스퍼들이 나한테 다가왔을 거고.”

“그건 어떻게 알아?”

“누나가 말해 줬거든.”

이하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나는 차윤이 최면을 걸면 누나를 볼 수 있는 것 같다고 했고 누나랑 있는 동안에 내가 소설에 빙의했다는 말을 하려고 하면 잠에서 깼다는 말도 했다.

다른 이야기는 빠짐없이 해 주었지만 차윤이 나에게 하려고 한 짓에 대해서는 말을 하지 못했다.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유가 누나 때문인 거라 그 사람들을 악인이라고 규정짓고 미워하고 화를 내야 하는 건지 그것도 조금 헷갈리기는 했다.

“나는…… 내가 소설 속에 들어왔다는 걸 깨닫고 정말 기분이 이상하고 혼란스러웠는데 은우 너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다.”

“그래. 그리고 너는 우리 누나의 동생도 아니잖아. 그것만 해도 너는 정말 평범하고 순탄하고 행복한 삶을 산 거야. 상상이 되냐?”

말을 하다 보니 너무 울컥했다.

“그러게…….”

이하민은 말을 하다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데 이거. 말하고 다녀도 되는 거야?”

“몰라. 안 될 것 같기도 한데 그래도 너한테는 말을 해야 됐어. 누나가 내 삶을 이렇게까지 엉망으로 만들게 할 수는 없잖아. 네가 엇나갈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고 원래는 내가 죄책감을 느끼면서 끙끙 앓게 되는 거였나 본데 생각해 보니까 짜증 나잖아. 나는 그런 식으로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아. S급 에스퍼들도 나를 두고 시간 낭비를 하게 되는 건데 우리가 누나 소모품이냔 말이야.”

“멋지네. 그러면 이제는 소설이랑 다르게 진행되는 거야?”

“나도 모르지.”

“그러면 소설은 어떻게 되는 거야?”

“그것도 모르지. 그건 누나가 알아서 하겠지. 내가 지금 누나를 걱정해 줄 입장은 아니잖아.”

이하민은 이제 웃음을 도저히 멈추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후련하기는 하다. 이런 말을 듣게 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정말 후련해. 조금 전까지만 해도 머리가 터질 것 같았거든. 은우 네가 한 말이 전부 다 맞아. 네가 없이는 못 살 것 같아. 너하고 보냈던 모든 시간이 전부 좋았어. 너를 도려내고는 내 인생이 의미를 가질 것 같지도 않아.”

“그래. 내 말이 맞다니까?”

그가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마 안도의 한숨이겠지? 맞겠지?

“어쩌면 잘 된 건지도 모르겠네. 소설 속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영 만날 수도 없을 운명이었을 것 같은데. 넌 거기에서 뭘 했어?”

“난 대학생.”

“그래? 그럼 나보다 어렸을지도 모르겠네.”

“그런 얘기는 하지 말자.”

급히 그의 말을 막았더니 이하민이 웃었다.

분위기를 봐서 자기 나이가 더 많을 것 같다는 것을 간파하고 말을 막았다는 걸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내 생각이기는 한데. 앞으로도 차윤의 도움을 받아서 누나를 만나 볼 수 있을 것 같아. 누나한테 던전에 대해 알아낼 수도 있을 것 같고. 게이트가 나타나는 던전에 대해서도 물어볼 수 있을 것 같고. 그런데 다음부터는 네가 그 자리에 같이 있어 주면 좋겠어.”

“차윤 에스퍼한테 최면을 받을 때? 맞다. 정말 그러는 게 낫겠다.”

그렇게까지 얘기를 할 수 있게 돼서 정말 후련했다.

“이하민. 그래도 사과는 할게.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 누나 때문에 이렇게 된 거니까.”

“네 잘못도 아닌데 뭐. 그런데 은우 너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고 싶진 않아?”

“전에도 그 생각을 많이 했었고 돌아가고 싶은 줄 알았는데 꿈속에서나마 돌아가 보니까 더 이상 원하지 않는 것 같았어.”

“그래? 그런 확신이 들어?”

“응.”

이하민은 어떨까.

물어볼 수도 있겠지만 어떤 대답을 듣게 될지 알 수가 없어서 묻지 못했다.

“다행이네. 네가 여기에서 행복하다고 생각하면 좋을 것 같아.”

“너는 어떤데?”

슬그머니 물어 놓고 대답을 기다렸다.

그러자 이하민이 나를 바라보며 가만히 웃음을 지었다.

“어떤 것들은 마음에 안 들지만 그래도 많은 게 마음에 들어. 그리고 행복한 것 같기도 하고. 너하고 함께 있는 시간들이 다 즐거워.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거기에서 너를 만날 수 없다면 내키지 않을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혹시 다른 말을 하면 어떨지 걱정이 됐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여기에 있는 동안 죽는 일은 없게 해 줄게. 아마 누나가 새드 엔딩으로 하지는 않을 거야. 처음에는 새드 엔딩이 될 수도 있었는데 그때 내가 막았거든. 원고도 이미 넘어갔는데 그걸 바꿨잖아, 내가.”

“그런 일이 있었어?”

이하민은 정말 엄청나다는 듯이 나에게 얘기를 해 달라고 했고 나는 누나가 만들려고 했던 엔딩을 말해 주었다.

그는 정말 놀라서 나를 보기만 했다.

“그런데 은우 너. 정말 엄청난 사람인 거다. 이 세상을 창조한 사람의 동생이라니. 엄청난 권력자잖아. 게다가 네가 원하면 그 누나를 계속 만날 수가 있는 거잖아. 토파즈를 한순간에 없애 버릴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센트럴 하나를 생겨나고 사라지게 하는 것도 할 수 있잖아.”

“그……렇지.”

그동안 누나가 저질러 놓은 일을 수습하는 것에만 집중하느라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하민의 말을 듣고 보니 정말 그런 것 같았다.

뭐야. 나 엄청난 수저네.

이건 다이아몬드 수저를 거뜬히 뛰어넘는 것 같은데?

“이하민. 너 원하는 거 있어? 내가 해 줄게. 다음에 누나 만나면 해 달라고 할게. 가고 싶은 곳이 있으면 거기로 가는 거로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혹시 너 아이돌 같은 거 하고 싶은 생각은 없어? 던전은 사라지고 이제 예전 같은 삶이 펼쳐지는 거로 해 달라고 할까? 거기에서 네가 꿈을 펼치는 거지.”

“아이돌? 나는 그런 거 관심 없는데. 왜? 은우 너는 내가 아이돌 되면 좋겠어?”

“아니. 그건 아닌데. 네가 되고 싶은 게 있으면 들어주고 싶어서 그러지.”

“내가 아이돌이 되면 사람들이 나를 너무 좋아하게 될 것 같은데 그래도 괜찮아?”

“아…… 어…….”

그러게.

그건 또 그것대로 문제네?

“네 생각은 어떤데? 그런 걸 떠나서 네 마음만 말해 봐. 어떤지.”

“아이돌 같은 건 전혀 관심 없어. 그리고 나는 지금의 이 생활도 크게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조금 재미있기도 하거든. 전보다 강해졌고 할 줄 알게 된 것도 많고. 이 이야기의 축은 너희 누나가 만들었을지 모르지만 매 순간이 만들어지는 건 우리 때문이잖아. 그렇게 생각하면 여전히 우리 삶의 주인은 우리가 아닐까?”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이번 일만 해도 그랬다.

던전이 그렇게나 많이 나와 버리고, 원래의 괴수들보다 더 강해진 것은 정말 위험했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었다’라는 말이 누나의 변덕에 의해 ‘더 이상 살아남은 사람이 없었다’라고 기술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은우야. 이건 내 생각인데 누나를 만나서 이 소설은 이대로 끝내 달라고 하면 어떨까? 열린 결말로. 그리고 그 후로는 우리가 살아가는 거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그리고 누나한테는 이제 다른 소설 쓰시라고 하자. 그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어. 이 녀석 천재인가?

열린 결말로 끝내면 되는 건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이하민이 천재인 게 아니라 그냥 내가 바보인가?

“괜찮은 것 같은데?”

“그렇지? 그리고 도중에 꼬여 가는 것 같으면 다시 누나를 찾아가서 에필로그를 써 달라고 하면 될 것 같아.”

“이하민. 정말 좋다. 정말 좋은 것 같아.”

그렇게 하면 열심히 살 이유가 충분히 생길 것 같았다.

“그런데 너 정말 따로 바라는 거 없어? 재벌 같은 것도 되고 싶지 않고?”

“그게 뭐가 좋은데? 그것도 별것 없을걸?”

처음에 이하민이 아이돌에 대해 대수롭지 않게 말할 때만 해도 별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재벌에 대해서까지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을 보며 혹시 이 녀석이 이미 그런 삶을 살아 본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이. 아니겠지.

그래도 결국 호기심을 못 참고 물었다.

“이하민. 너 아이돌이거나 재벌이었거나 그랬던 건 아니지?”

그러나 말을 하고 나니 내가 생각해도 너무 오글거리고 영 이상해서 그를 막았다.

“아니야. 말하지 마. 나도 알아. 아니라는 거.”

이하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쪽에서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는 비밀에 부쳐도 좋을 것 같았다.

그 정도 신비감은 남아 있어야지.

우리가 아직 얘기를 나누고 있을 때 변태영이 급하게 들어왔고 그 뒤를 견인이 따랐다.

문이 닫히는가 싶었는데 닫히는 문을 붙잡고 심우진까지 들어왔다.

“야, 서은우. 네가 참아. 무조건 네가 참아.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래도 그냥 참아.”

변태영의 말에 무슨 말인가 했더니 에스퍼들의 걱정이 대단하다고 했다.

“네가 갑자기 들어와서 사람들한테 다 나가라고 했는데 분위기가 너무 안 좋다면서 빨리 가 보라고 하잖아.”

“……네?”

“이하민. 괜찮아?”

그들은 모두 이하민을 걱정하고 있었다.

지금은 SS급 에스퍼여도 처음에 가이드였어서 그런 건가?

두 사람이 갈등을 빚는다는 말을 듣고 이하민을 걱정한 모양이었다.

“이하민 SS급이에요.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에 가장 강하다고요. 단적으로 말해서 센터장님보다도 더 센데요? 편을 들어 주실 거면 제 편을 들어 주셔야죠. 제 걱정을 하셔야 하고요.”

내가 조목조목 따지면서 말을 했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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