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내가 혼자 갈게. 나 정도면 보통보다 조금 큰 정도니까 아주 눈에 띄지는 않을 거야. 일단 나는 거기에 있을 테니까 너는 밖에서 기다려. 일이 생기면 내가 호출할 테니까 곧바로 와.”
이하민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걱정이 된다는 건 알겠지만 다른 방법은 없었다.
“야. 나 서은우야. 잊어버렸냐? 너만 아니었으면 내가 센터 에이스였다고.”
“내가 있어도 네가 센터 에이스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같이 움직이기로 했잖아.”
“그런 소리 할 거였으면 조금 작으시던가.”
이하민은 고개를 저어 댔다.
“걱정 안 해도 돼. 나 엄청 세. 걱정할 일 안 일어날 거야.”
녀석이 그러는 이유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나는 전에도 차윤에게 납치되었던 적이 있었다.
그 트라우마가 깊이 남아 있는 것이리라.
“그때는 정말 워낙 특수한 경우였잖아. 그런 일이 다시 생길 가능성은 거의 없어.”
더 이상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가 없었다.
“간다. 따라오지 마. 디바이스 잘 간수하고.”
이하민도 더 이상은 나를 막지 못했다.
차에 있던 모자를 쓰고 이하민의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주고 밖으로 나왔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부러 어깨를 구부리고 구부정하게 걸었다.
사실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을 것 같은데 나만 그러고 있는 듯했다.
엘리베이터 대신에 일부러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명품 매장이 있는 곳까지 가면서 주위를 살폈지만 이상한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16층에 있는 매장에 이르렀을 때 수많은 사람들에 깜짝 놀랐다.
내가 더 놀란 것은 그들 중 에스퍼의 비율이 높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만한 가격대면 그럴 만도 하겠네.’
그때였다.
“서은우 에스퍼님?”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미쳤나?
일부러 모자까지 쓰고 나왔으면 모른 척할 것이지.
나는 모르는 척하려고 걸음을 빨리했다.
그러나 그 소리는 집요하게 나를 따라붙었다.
사뭇 악의까지 담겨 있었다.
“서은우 에스퍼님. 여기에는 어쩐 일이세요? 몰래 온 거예요? 왜 도망가세요?”
목소리를 듣자마자 눈이 마주칠까 봐 고개를 숙여 버려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 이제 그게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A급 가이드 윤이재.
지금껏 좋은 식으로 연결된 적이 없었는데 한동안 조용해서 이제는 찌그러져서 잘 적응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내 착각이었나 보다.
“서은우 에스퍼님. 자꾸 어딜 가세요? 서은우 에스퍼님 맞잖아요?”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래? 정말 서은우 에스퍼님이야?”
“아닌 것 같은데? 서은우 에스퍼님이면 알은척을 하셨겠지.”
사람들이 저마다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저 사람이 계속 그러잖아.”
“아는 사람인가? 에스퍼는 아닌 것 같은데. 가이드인가?”
윤이재는 내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가까이 다가오면서 오히려 더 큰 소리로 나를 불렀고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다른 곳에 있던 에스퍼들까지 그 소리를 들은 것 같았고 이제는 그들 중에도 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생겨났다.
모르는 사람은 숨기겠지만 일단 아는 사람들이 알아차린 후에는 그들을 속일 방법이 없었다.
“아아…….”
에스퍼들은 나를 알아보고도 나에게 다가오거나 나를 부르지는 않았다.
윤이재가 나를 불러 대는 동안에도 내가 나서거나 그에게 알은척을 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조용히 있으려고 한다는 걸 안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이까지 바짝 다가온 윤이재를 더 이상은 피할 수 없게 되었을 때 나는 진심으로 살인 충동을 느꼈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내가 간과한 걸까.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가 너무 물러져 버렸던 건가.
여러 생각을 하는 동안 윤이재는 이제 아예 내 팔에 손을 대기까지 했다.
“서은우 에스퍼님. 여기에는 웬일이세요? 이하민 가, 아니. 이하민 에스퍼 선물이라도 사려고 오셨어요? 이런 게 어울리려나 모르겠네요.”
이하민이 가이드였던 게 언제 적 일인데 아직도 이하민을 가이드라고 부르려다가 헷갈린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니라면.
이제는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것도 아니고 더 이상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조용히 하세요.”
그냥 처음부터 이렇게 하는 게 좋았을까 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말을 하면 들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였다.
그런데 윤이재는 그동안 쌓인 감정을 풀겠다고 작정이라도 한 것 같았다.
도저히 이성적으로는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혹시 차윤을 믿고 이러는 건가?
그런데 정말 그 이름이 나왔다.
“저한테 이래라저래라 하실 입장은 아닌 것 같은데요? 센터에 있는 동안에는 모르겠지만 여기는 센터도 아니고 센터 밖에 있는 동안 저는 특별한 이유가 아니라면 명령을 듣지 않아요. 저는 S급 에스퍼 차윤님의 전속 가이드로 계약했고요. 그러니까 센터에 있다고 해도 서은우 에스퍼님의 명령을 들을 이유는 더더욱 없는 거죠.”
작정을 했구나, 작정을 했어.
이곳에서의 작전은 실패였다.
이보다 더 완벽한 실패는 없다고 해도 될 것 같았다.
토파즈의 에스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이 모습을 전부 봤을 것이다.
만약 없었다고 해도 내가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을 들을 수는 있었을 듯했다.
쇼핑을 위해서 온 거라고 생각해 주면 좋을 것 같지만 그런 운이 통할까.
하고 싶은 말이 정말 많았지만 이 자리에서는 할 수가 없었다.
가이드를 위한 권리를 찾아 준 것은 윤이재에게 이렇게 설치고 다니라고 한 일이 아니었는데.
속으로 부글부글 끓는 것을 참고 돌아서는데 윤이재가 기어이 쫓아왔다.
“아직 물건을 구경도 안 한 것 아니에요? 들어오실 때부터 쭉 봤는데. 물건 사러 오신 것 아니었어요? 사람을 만나려고 오신 건가? 혹시 이하민 에스퍼가 여기로 오기로 했어요? 저도 못 본 지 오래돼서 같이 보면 좋은데. 아닌가? 그래서 두리번거리신 거예요? 이하민 에스퍼 찾으시려고요?”
보다 못한 에스퍼 몇 명이 다가와 조용히 윤이재의 팔을 잡았다.
“왜 이러세요?”
윤이재가 카랑카랑하게 소리쳤지만 에스퍼들은 만만치 않았다.
한 사람은 결계 능력을 가진 이였고 한 사람은 신체 강화자였다.
결계 능력을 가진 이가 결계를 만들었고 그때부터는 그가 만든 결계 밖으로 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에스퍼님. 센터로 데려갈까요? 임무 수행 중이신 것 같은데 윤이재가 일부러 적을 도운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예요? 나는 이런 곳에서 S급 에스퍼님을 만나서 반가워서 그런 것뿐이에요!”
윤이재가 억울한 듯이 말했지만 그게 만약 사실이라고 해도 그것도 그것 나름대로 문제가 되었다.
앞뒤 모르고 물불을 가릴 줄 모르는 사람이라면 존재 자체가 죄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차윤 에스퍼님이 어떻게 나오실지는 모르겠지만 우선은 센터로 데려가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윤 에스퍼가 문제를 제기하면 내가 시킨 일이라고 하세요. 내가 설명하겠습니다. 지금은 임무 수행 중입니다. 차윤 에스퍼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니 이 일로 문제를 제기하거나 윤이재를 두둔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만약에 그렇게 한다고 하면 그 일은 내가 책임을 질 테니 센터로 데려가세요. 곧바로 특임대에 이관하시고 이 일을 분명하게 조사하도록 하십시오.”
“알겠습니다. 일찍 나서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지만 그 말을 오래 해 줄 시간은 없었다.
결계를 사용했다는 것은 외부에서도 곧 알아차릴 수밖에 없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결계로 막는 거니까.
더군다나 지금처럼 수많은 사람의 이목이 우리에게 집중된 상태에서는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다.
에스퍼들도 그 사실을 알아차린 듯했고 나는 두려움에 가득 차 있는 윤이재를 노려보다 고개를 돌렸다.
“아니에요, 에스퍼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모르겠는데 오해예요. 저는 정말 서은우 에스퍼님을 만나서 반가워서 그런 거라고요. 이하민이 오는 건가 해서 궁금해서 그런 것뿐이에요!! 저한테 이럴 수 없어요. 가이드한테 전처럼 함부로 대할 수는 없다고요!!”
에스퍼들이 나서 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면서 나도 돌아섰다.
이제 신체 강화자가 윤이재를 데리고 먼저 나갈 것이다.
이곳에서의 임무는 실패다.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며 막 돌아섰을 때였다.
‘……?’
말을 할 틈도 없었고 무슨 일이 생긴 건지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내 주위의 모습이 희한하게 일그러지는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대기가 짓눌리는 것 같고 정신이 아찔해면서 구토감이 느껴졌다.
몸이 휘청이는 바람에 뭐라도 잡으려고 했지만 손에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 하면서 주위를 둘러보려 했지만 서 있는 것만 해도 버거워서 그것이 쉽지 않았다.
처음에 느꼈던 기이한 감각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해 가기만 했다.
구토감은 더욱 강해졌고 이대로 가다가는 쓰러지겠다고 생각될 정도로 몸이 흔들렸다.
그러다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눈앞에 보인 사람은 조금 전까지 함께 있던 에스퍼들이나 윤이재가 아니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사실 고개를 들기 전부터 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수트 차림의 남자.
그가 신은, 반질반질하게 윤이 나는 구두.
날렵한 구두코.
그 모든 것들이 나에게 의문을 안겼다.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지.
그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이었다.
벽안의 금발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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