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그런 남자와 그렇게 가까이 마주하게 된 것도 처음이었다.
외모로도 단연 최상위에 속할 것 같은 인간이었고 이 정도 능력이라면 의심 없이 S급 에스퍼일 것이다.
공간 이동 능력자에 대한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들려왔었다.
희소하기는 하지만 그런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고.
그러나 지금은 새로 나타나지도 않고 남아 있는 사람도 없어서 정말 그런 사람들이 있었던 것인지 의문을 품는 사람이 많았다.
나도 믿지 않는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 일을 겪으면서 내가 바로 그 공간 이동 능력자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 희귀하다는, 전설의 공간 이동 능력자가, 그것도 S급 에스퍼가 토파즈 소속이라고?
고작?
재능을 낭비해도 이렇게까지 낭비할 수 있는 건가?
그가 재미있다는 듯이 나를 보았다.
뭣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놀란 것 같기도 했다.
그 상태에서 나는 얼마간을 더 버텨야 했다.
그러나 그 시간이 그렇게 길지는 않았다.
불편함은 갑작스럽게 사라졌고 주위의 풍경이 다시 돌아왔다.
그렇다고 내가 처음에 있었던 백화점의 풍경이 나타났다는 것은 아니었다.
도대체 여기가 어디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낯설고 어마어마한 곳이 나타났다.
보통의 건물이었다면 이층으로 만들었을 것 같은 높은 천장, 연회를 열고 백 명쯤 초대해도 넉넉하게 남을 것 같은 공간.
개인 공간이라기보다는 공공시설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는데 갖춰진 가구는 또 그렇지 않았다.
우리가 있는 자리만 해도 안락한 소파가 있고 그 밑에 푹신해 보이는 러그가 깔려 있었다.
“이렇게 무례하게 초대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습니다. 은우.”
은우?
누구 마음대로 이름을 그렇게 부르는 건가 했는데 그러고 보니 이 사람, 우리말로 말하고 있었다.
“데인 랭커스. 데인이라고 불러 주면 좋겠군요. 어쩐지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 같은데 그러면 이 말부터 해야 할 것 같군요. 나는 토파즈 에스퍼가 아닙니다. 토파즈 소속으로 이번 일을 맡기는 했지만 그건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그런 것뿐이었고 나를 토파즈 에스퍼라고 생각하지는 말아 줬으면 좋겠군요.”
그러면서 손짓으로 자리에 앉으라는 시늉을 해 보였다.
호락호락하게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았지만 마냥 그렇게 서 있을 것도 아니라 일단 의자에 앉았다.
“잠시 후에 차를 내오도록 하죠. 그 전에 간단한 변명이 필요할 것 같은데.”
푹신해 보이는 안락의자에 거만하게 앉은 채 그가 말을 이어갔다.
“만나 보고 싶었습니다. 이번 일을 흥미 있게 지켜보고 있었거든요.”
“이번 일요?”
“네. 던전이 개방되고 그곳에서 나온 괴수에 의해 센트럴이 사라지고 그렇게 함께 사라진 것 같은 괴수들이 다시 던전에 나타나 당신의 센트럴을 공격했죠. 그런데 당신과 당신의 에스퍼들은 그 괴수들을 전부 죽였고 말입니다.”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옆에서 누가 죽어가든 상관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자가 거기에 딱 어울리는 무심한 표정을 한 채 말을 이어 갔다.
“윤이재는 당신이 심어 놓은 겁니까?”
“누구요?”
“나에게 다가와서 소란을 피웠던 가이드 말입니다.”
“설마요. 나는 일을 그런 식으로 복잡하게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곳에 당신이 나타날 거라는 것도 몰랐어요. 아주 운이 좋았던 것뿐이죠. 애초에 내 계획은 거기에서 얼쩡거리다가 당신의 에스퍼들에게 잡혀서 센터로 가는 거였어요. 특임대가 나설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특임대에게 잡히면 그들이 나를 센터로 데려갈 거라고 생각했고 거기에서 당신이 있는 곳을 알아내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만약 특임대가 나섰다면 정말 그런 식으로 일이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았다.
그를 단단히 가뒀다고 생각하겠지만 누구도 이 자를 가둘 수 없을 테니까.
그의 계획이 어그러진 것은 그 자리에 특임대가 아닌 내가 나타나서였다.
얼마나 좋았을까.
귀찮은 여러 가지 과정이 한 번에 생략돼 버리지 않았는가.
“전에도 납치를 당한 적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때 S급 에스퍼들이 미친 듯이 날뛰었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정말 조용히 접근하려고 했는데.”
나를 데려온 것은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듯이 말하는 것을 보며 정말 기가 막혔다.
“그런데 내가 그곳에 나타날 거라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알려줄 수 있습니까?”
“그럴 생각 없습니다.”
“그렇군요. 화가 나신 것 같은데…… 그럴 만도 해요. 이해합니다. 그런데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살고 싶은 것뿐이에요. 아니. 살고 싶다는 말은 틀리고…… 만약 살려고만 한다면 나는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기는 하거든요. 그렇잖아요. 이리저리 잘 피해 다닐 자신이 있거든요. 그런데 이러는 게 이제 좀 귀찮아졌어요. 이렇게까지 해서 살아야 하는 건가 싶기도 하고요.”
그는 혼자 잘도 떠들어 댔다.
그러다가 주위를 가리켰다.
“여기는 내가 있던 곳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대저택이었겠죠. 그런데 지금은 텅 비었습니다. 이 마을 전체가 그래요. 원래 이곳에서 살던 사람들은 던전이 나타나면서 괴수를 피해 도망친 것 같아요. 아마 다 죽었겠죠. 알아보는 거야 어렵지는 않은데 굳이 확인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마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기에 살던 사람들이 어떻게 됐는지 그런 무의미한 정보로 뇌를 채우고 싶지는 않았거든요.”
그러면서 갑자기 일어섰다.
“아무래도 얘기가 길어질 것 같은데 차를 먼저 내오라고 할까요?”
혼자 움직이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하긴. 나를 여기로 데려온 것을 보면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함께 이동하는 것이 어렵지 않은 것 같고 내 생각이 맞다면 그는 나를 데리고 정말 멀리 온 것 같았다.
S급 에스퍼에도 각각 그 급이 다른 법인데 이 정도면 우리 센터의 S급 에스퍼들에 비해서도 절대 실력이 뒤처진다고 하기가 어려웠다.
공간 이동 능력이라는 분야에 있어서 만큼은 이 사람을 능가하는 사람을 찾기가 어려울 듯했다.
“한 번에 몇 명까지 함께 이동할 수 있습니까?”
“거리에 따라 다르겠죠.”
“여기는 어디죠?”
“런던 근처의 작은 마을입니다.”
나를 런던에 데려와 버렸다.
체감상 5분도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여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걸린 겁니까?”
“글쎄요. 3분은 넘지 않았을 것 같은데. 장거리 공간 이동이 몸에 부담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빨리 끝내려고 조금 실력 발휘를 했습니다. 아까도 말했지만 그곳에서 은우를 만날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만약에 알았다면 준비를 더 잘했을 텐데. 설명도 해 주고 양해도 구했을 거예요. 내 생각에 은우는 나를 이해해 줄 것 같거든요.”
“그래요? 내 생각이랑은 다르네요.”
그러자 그가 피식 웃었다.
“나쁘게만 생각하지는 말아 주세요. 나는 답을 찾고 싶습니다. 그리고 은우에게 해를 끼치고 싶은 생각이 없어요. 은우의 적이 되고 싶은 마음도 없고 하민의 적은 더더군다나 되고 싶지 않습니다.”
이하민을 나보다 더 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미등록 에스퍼입니까?”
그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제대로 등록을 하고 활동을 해 왔다면 데인 랭커스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을 이유가 없었다.
유니콘이라고 불리는 능력, 게다가 S급 에스퍼라면 알려지지 않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그가 토파즈에서 공간 이동 능력자로 활동한 게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머리가 나쁜 사람이 아니었고 자기가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냥 질문을 받기 전에 말하는 게 낫다는 것을 아는 듯했다.
“그동안은 그냥 신체 강화자로 활동했습니다. 정확한 검사에 응해야 할 경우에는 아예 시도도 안 했죠. 토파즈에서 급히 에스퍼를 모집하면서 검사를 허술하게 한 적이 있었죠. 미등록 에스퍼들을 모아서 사람 수를 늘리는 데 목적을 두고 모집한 기간이 있었는데 그때 들어갔습니다. 그 사람들은 에스퍼에게 따로 돈을 주는 것도 아니고 그냥 소속 에스퍼만 늘려 놓은 거라 관리를 특별히 하지 않았죠. 만약 내가 누구인지 조금이라도 파고들려고 했으면 나왔을 겁니다.”
“신체 강화자라는 게 아무리 등급이 낮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아…….
말을 하려다가 그가 가진 능력으로 어느 정도 속임수를 쓸 수 있겠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공간 이동 능력자인 그가 단거리를 이동하면 빠르게 달린 것처럼 보일 수 있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어서 편하군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습니다. 우리 센터의 성과를 유심히 지켜봤다. 당신은 그동안 에스퍼로서 활동하거나 던전을 공략하는 일에는 가담하지 않고 당신이 가진 능력을 사용해 이리저리 피해 다녔는데 이제는 우리 도움을 받고 싶다. 그런 말인 것 같은데요.”
“그건 아닙니다. 그동안 도망친 건 맞지만 그건 답이 없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였습니다.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걸 숭고한 희생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그런데 은우의 센터는 다르다는 걸 깨달았고 그곳에서 같이 싸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 능력이 도움이 될 거예요.”
“그런 얘기를 하고 싶은 거였으면 그냥 센터에 찾아오면 되는 거였을 텐데 변명이 구질구질하군요. 센터로 찾아오면 나를 보기 어려웠을 거고 그랬으면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하게 시작해야 했을 거라 그게 싫었던 건가요? 나는 이런 사람이라고 대우받고 싶어서 나를 납치한 겁니까?”
S급의 공간 이동 능력자.
그런 자가 센터에 와 준다면 어떤 식으로 활용할 수 있을지 가늠조차 되지 않았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