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나를 데리고 이동한 거리를 생각하면 그는 지금 많은 능력을 소진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이하민의 공격을 피해 계속해서 공간 이동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하민을 피하고 싶으면 차라리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게 좋을 텐데 그래도 해명을 하고 여기에서 얘기를 끝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아주 다른 곳으로 가 버리지는 않았다.
이하민은 그럴수록 더 화가 나서 어떻게든 데인 랭커스를 붙잡으려고 했고 데인 랭커스는 점점 한계에 몰리는 것 같았다.
“내가 도움이 될 거라는 걸 알지 않습니까? 말을 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데인 랭커스는 이제 S급 에스퍼들에게 호소하기 시작했는데 S급 에스퍼들은 이하민을 말리지 않았다.
“본보기가 필요해. 죽여도 돼, 이하민.”
견인이 말하자 데인 랭커스는 놀랐지만 다른 S급 에스퍼들은 당연한 얘기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힘들면 말해, 이하민. 그러면 내가 나설게.”
“아니야. 내 손으로 목을 부러뜨릴 테니까 너는 그냥 쉬어, 은우야.”
나는 이하민과 데인 랭커스의 대결을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이하민. 조금 더 몰면 네가 잡을 것 같기는 한데 그러면 공정하지는 않은 것 같아. 빨리 끝내 버려. 그 안에 못 끝내면 너는 진 거야.”
이하민은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더 이상 데인 랭커스를 쫓지 않고 손을 허공에 휘저었다.
그러자 공간 이동을 펼치려고 하던 데인 랭커스가 바닥에 퍽 처박혔다.
“어어!”
S급 에스퍼들은 주먹으로 허공을 치며 통쾌해했다.
데인 랭커스는 무슨 일이 생긴 건가 하는 듯 급하게 일어섰고 그와 동시에 다시 공간 이동을 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하민의 손이 좀 더 빨리 움직였고 데인 랭커스의 몸이 천장까지 솟구쳤다.
그 속도로 멈추지 않았으면 그대로 목이 부러질 것 같았는데 S급 에스퍼들이 비명을 지른 순간 이하민이 극적으로 멈췄다.
그러나 죽이지는 않겠다는 것뿐이지 용서하겠다는 건 아니었는지 그대로 바닥에 처박고 다시 벽에 몸을 던졌다.
녀석의 염력이 그사이에 얼마나 정교해졌는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데인 랭커스는 곤죽이 된 채 온몸에서 피를 흘렸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능력을 사용하고 싶은데 집중이 되지 않는 듯했다.
이하민은 그때부터 연거푸 두 팔을 휘저었다.
그 모습을 견인이 유심히 지켜보았다.
나도 그랬지만 견인도 이하민이 자신을 능가한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것 같았다.
“으으으아아아악!!”
데인 랭커스의 입에서 끔찍한 비명이 터졌다.
그리고 그의 몸이 찢기며 옷이 핏물로 젖어 들었다.
겉으로는 어떤 공격도 보이지 않았는데 이하민의 염력이 데인 랭커스를 찢어발기려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눈에 점점 공포가 차올랐다.
“사, 살려…… 살려 줘. 살려 주세요!!”
“겨우 그것 가지고 그러면 안 되지. 네가 저지른 짓이 있는데 거기에 책임을 져야지. 그럴 생각도 아니었으면 애초에 그런 일을 저지르면 안 되는 거였고. 꽤나 자신만만했던 모양이야. 알량한 능력을 가지고 말이지. 그런데 사람을 잘못 건드렸어. 네가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는 치유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해도 나는 너를 용서할 생각이 없는데 어떻게 하지?”
견인이 말하자 이하민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
처분 권한이 자기에게 주어진 거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는 다른 S급 에스퍼들을 보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다른 S급 에스퍼들의 의견도 구하며 신중하게 굴었을 텐데 그때는 다른 사람들의 의견이 다를까 봐 걱정이 된 것 같았다.
“솔직히 네 능력이 탐이 나기도 하고 네가 우리 팀에 들어오면 편해질 것 같기는 한데 너를 받아들이면 다른 미등록 에스퍼들도 은우를 납치하겠지. 그래서 어쩔 수가 없군. 팔을 자르는 심정으로 너를 죽게 해야 할 것 같은데. 안타까워.”
심우진이 무심한 얼굴로 말하자 이하민은 완전히 힘을 얻은 것 같았다.
변태영은 별다른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데인 랭커스는 다급한 얼굴로 나를 보았다.
“은우! 살려 줘. 나를 구해 줘. 나는 처음부터 너를 죽이려는 생각이 없었어. 너를 무사히 데리고 돌아왔잖아!”
“나는 처음부터 무사히 잘 있었어. 무사히 잘 있는 나를 네가 데려가 놓고 나를 무사히 데려왔다고 공치사를 하면 안 되지.”
그러나 그 말의 대답을 들을 수도 없었다.
데인 랭커스가 입에서 폭포 같은 피를 토하고 그대로 쓰러져 버렸던 것이다.
그러는 동안 이하민은 그에게 손도 대지 않았고 순전히 염력을 변형시켜 그 일을 이루어 냈다.
“이하민은 아직 조절이 잘 안되는 것 같네. 견인이 했으면 바닥에 피를 안 쏟았을 텐데.”
심우진이 말하자 변태영도 고개를 끄덕이며 그건 좀 아쉽다고 했다.
그 모습을 전부 지켜본 에스퍼들은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하민이 그렇게 강하다는 것에도 놀란 것 같았고 데인 랭커스를 처리한 방식에도 겁을 먹은 듯했다.
그들 중 일부는 분명 데인 랭커스의 능력을 탐냈을 것이다.
우리 중에 공간 이동 능력자가 있으면 나중에 던전이 나타나고 거기에서 괴수가 나올 때 얼마나 도움이 될지 생각했을 터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미련 없이 죽이는 것을 보면서 나를 건드리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았을 것 같았다.
“서은우 에스퍼. 이제 납치는 그만 좀 당해. 왜 혼자만 그래? 우리는 한 번도 안 당하는 일을 혼자만 벌써 두 번째잖아.”
변태영이 어느새 내 옆에 와서 잔소리를 해 댔다.
누구는 납치를 당하고 싶어서 당하는 건가 했지만 그 말이 전혀 싫지 않았다.
옆에서 잔소리를 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고맙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우선은 자리를 옮기지.”
그곳에는 다른 에스퍼들이 많아 말을 하는 게 신경 쓰이는 상황이었고 견인의 말에 우리는 다 같이 걸음을 옮겼다.
“다른 테러 시도는 없었어요?”
견인에게 묻자 차윤이 대답했다.
“그놈들도 당황했을 거예요. 테러를 하라고 시킨 에스퍼가 하급인 줄 알았더니 S급 에스퍼에 공간 이동 능력자라는 걸 알았으니 어쨌겠어요? 테러를 하라고 했더니 서은우 에스퍼를 납치해서 사라진 것도 황당했을 거고 차후에 계획된 테러도 점검이 필요했겠죠. 이번 일로 토파즈가 전 세계적으로 웃음거리가 됐어요. S급 공간 이동 능력자를 보유하고 있었으면서 그것도 몰랐다는 것 때문에요.”
“토파즈가 센트럴에서 테러를 계획하고 있었다는 건 공개한 상태예요?”
“했죠. 해야지 어떻게 합니까. 서은우 에스퍼를 찾는 게 가장 급했는데. 우리가 토파즈의 테러 사실을 미리 입수하고 테러를 막으려는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 서은우 에스퍼가 납치된 거라고 바로 발표했습니다. 그리고 서은우 에스퍼를 돌려보내지 않으면 토파즈 전체를 상대로 전면전을 불사하겠다고 선포해 놨죠. 기한은 사흘을 준다고 했는데 두 시간도 안 돼서 거기서 사람이 왔더라고요.”
흥미진진해지는 얘기에 견인을 보자 그도 고개를 끄덕였다.
토파즈와의 전면전이라.
거기에 소속된 에스퍼의 수가 많은 만큼 확실히 우리가 우세할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S급 에스퍼들이 많은 우리 센터가 우위를 점할 거라고 간단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처럼 알려지지 않은 S급 에스퍼나 특이 능력자들이 있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장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우리가 센트럴을 지키는 임무를 맡고 있다는 거였다.
전면전이 선포되고 던전이 나타나면 우리는 이중의 부담을 안은 채 백기를 들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동안 토파즈가 거슬려도 꾹 참아 온 데는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런데도.
이상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차윤이 그 사실을 밝혔다면 그는 그간 구축해 왔던 정보망을 다시 사용하기가 어려울 수도 있었다.
정보가 샜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토파즈 지휘부에서 그 일에 관련된 사람들을 배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차윤의 입장에서는 꽤나 귀찮아질 수 있는 일이고 아까웠을 텐데 그걸 포기했다는 건가 해서 조금 희한하기는 했다.
“그래서 뭐라고 하던가요?”
“자기들은 그 사람을 모른다고 잡아떼는 거지. 자기들이랑은 관련 없는 일이라고.”
견인이 말을 하면서 화를 못 참겠는 표정을 지었다.
그 자리에 있는 S급 에스퍼들의 얼굴을 보니 그 사람이 온전히 돌아가지는 못했을 것 같았다.
“은우 너를 당장 데려오라고 하는데도 자기들은 모른다고 하잖아. 그때 차윤 에스퍼님이 정신 공격을 했거든. 그런데 정말이더라고. 그자들은 데인 랭커스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어. 하급 신체 강화자라고만 알고 있었고.”
이하민이 말을 하면서 내가 사라진 동안 얼마나 초조했었는지 얘기를 해 주었다.
보지 않아도 이제는 어느 정도 그려졌다.
“만약에 그 작자가 자기 고용인들을 데리고 나타나지 않았으면 우리는 다 폭주해 버렸을지도 몰라. 초유의 일이 벌어지는 거지. S급 에스퍼들의 집단 폭주. 거기다 SS급 에스퍼는 그 누구보다 더 심각하게 폭주할 것 같았고.”
변태영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는 듯이 말했다.
그들의 폭주.
재미있었다.
던전의 공략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폭주할 것 같았었다는 게.
변태영의 말을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은우 씨. 잘 참았어요. 못 참고 거기에서 성질대로 했으면 난감했을 텐데. 정말 잘했어요.”
심우진은 나를 정말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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