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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버스 이물질이 되어버렸다-106화 (106/137)

106화.

“제가 가깝게 지내는 에스퍼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한테는 미리 어느 정도 말을 해 뒀어요. 이건 에스퍼님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고요. 제가 에스퍼님의 가이드라는 걸 알면서도 저를 여기에 가둔 게 무슨 의미이겠어요?”

윤이재는 미친 게 틀림없는 것 같았다.

차윤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런 기분까지 느끼게 해 주는 것을 보면 윤이재도 정말 대단한 인간이기는 했다.

“결단만 하시면 돼요. 차라리 잘된 걸 수도 있어요. 이번 일을 보면서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요? 백화점에서 서은우 에스퍼를 봐서 부른 것뿐이에요. 그게 잘못인가요? 그게 죄예요? 처음에 불렀을 때 대답을 했으면 됐지!”

“이제 그만 닥치고.”

차윤의 말에 그가 움찔했다.

“나는 센터장의 처분에 전혀 이의 없는데? 차라리 잘된 것 같기도 하고. 내 전속 가이드?”

차윤은 그 뒷말을 하지도 않았다.

윤이재는 가소롭다는 표정을 보며 몸이 떨렸지만 모르는 척하려고 했다.

그러나 차윤은 그가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게 했다.

“너는 놀라울 정도로 머리가 나쁘지. 그런데 왜 나하고 이렇게 매칭률이 높은 거지? 그것 때문에 내가 얼마나 짜증 나는지 모를걸? 그런데. 나는 그 사실이 소름 끼치게 싫은데 너는 그걸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녀? 뇌가 없는 것 같은 짓을 하고 거기에서 내 이름을 팔아?”

다가간 그가 윤이재의 머리를 감쌌다.

윤이재는 이제 차윤의 입술이 다가올 거라고 생각한 듯 그를 바라보았다.

한없이 유혹적인 표정이었다.

차윤은 무슨 일을 당할지도 모르면서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윤이재를 보며 치가 떨렸다.

윤이재는 제가 그런 얼굴로 바라보면 저의 에스퍼가 무너질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차윤은 그저, 지금까지도 능력을 극도로 사용했는데 이번에도 다시 한번 능력을 사용해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너는 나무다. 뿌리가 깊이 내려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 너는 말을 하지도 못하고 냄새를 맡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지. 칠흑 같은 밤에 쉬지 않고 폭설이 쏟아진다. 네 가지마다 감당하기 어려운 무게의 눈이 쌓여 있지. 저런. 가지가 부러졌군.”

소리가 되지 못한 비명이 윤이재의 목구멍에서 비틀려 쏟아졌다.

손 하나 대지 않았는데 윤이재의 어깨가 기이하게 뒤틀리고 피가 스몄다.

윤이재는 그 끔찍한 고통에 정신없이 고개를 저어 댔다.

“그런데도 눈은 조금도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지. 네 가지마다 전부 한계야. 언제 부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군.”

차윤은 저의 암시가 제대로 먹힌 것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바람은 점점 더 거세져. 바닥의 흙이 깎여 나가고 뿌리가 드러나 버렸군. 이러다가 뿌리가 뽑히는 게 아닌지 모르겠어.”

윤이재의 얼굴에는 이제 죽음에 대한 공포가 가득 깔려 있었다.

그제야 흡족해진 듯 제 상의를 벗은 차윤이 그에게 다가갔다.

윤이재는 허겁지겁 차윤의 몸을 어루만졌다.

차윤은 그의 머리카락을 억세게 움켜쥐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텅 빈 눈동자가 퍽 만족스럽다고 생각하며 차윤이 윤이재의 입술을 거칠게 삼켰다.

힘이 빠르게 차오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한낮의 햇볕이 나른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

센터는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았다.

데인 랭커스에게 납치된 후 센터의 분위기는 확실히 바뀌어 있었다.

에스퍼들도 이제 우리의 힘으로 센트럴을 지켜 나가는 것에 조금씩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 같았다.

토파즈가 전 세계 에스퍼들로부터 전방위적인 압박을 받게 되었다는 것은 더 좋은 변화였다.

그 때문에 더 이상 우리의 힘이 분산될 염려가 없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모두 좋은 방향의 변화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은우야. 내가 생각을 해 봤는데.”

이제 이하민이 그런 식으로 말을 꺼내면 또 무슨 이상한 소리를 하려고 그러는 건지 저절로 긴장이 됐다.

“나는 이게 그거 맞는 것 같아. 오메가버스.”

이 자식을 어떻게 해야 하지?

“너는 내 운명의 상대로 정해진 것 같아. 너도 그렇게 느끼지 않아? 우리는 처음부터 상대의 짝으로 정해진 거였어.”

“제발 작작 좀 해라, 이하민.”

녀석의 입을 아무리 틀어막아 봤자 놔주면 또 그런 소리를 지껄였다.

이하민에게 누나 얘기를 해 주는 게 아니었는데 잘못했다는 후회를 얼마나 하고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일단 병원에 먼저 가 보자, 은우야. 가서 네 체질에 대해서 알아보면 확실하지 않을까? 오메가버스 세계관이 섞여 있다면 의사가 얘기를 해 줄 거야. 네가 어떤 체질인지. 그리고 임신했다면 임신했다고도 말해 줄 거야.”

하, 이 미친 새끼!

확 다리로 걷어차려고 했더니 이하민이 피했다.

‘어쭈, 피해?’라고 생각한 순간 녀석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거 지금…… 속도가 빠른 게 아니었는데?

분명히…….

“은우야. 화났어? 알았어. 이제 안 피할게. 안 피하고 맞을 테니까 때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이하민. 너 좀 전에 공간 이동한 거 아니야? 데인 랭커스가 한 거. 복제한 거야?”

“……응?”

이하민은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건가 하는 것 같더니 자기가 좀 전에 했던 것을 다시 했다.

“……어!”

“뭐야? 너는 그런 걸 어떻게 하는 거야? 그 사람이 하는 걸 보면 할 수 있게 되는 거야?”

이하민이야말로 정말 사기 캐릭터라는 생각이 들어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이하민은 그때부터 내가 하는 말을 듣지도 못하는 것 같았고 데인 랭커스가 했던 것들을 이것저것 흉내 내기 시작했다.

점점 먼 거리로 공간 이동을 하는 것을 반복해 보더니 나중에 갑자기 내 앞으로 나타났다.

“와! 된다!!”

이하민은 정말 놀라며 환호성을 터뜨렸다.

그러고는 그 자리를 기준으로 해서 몇 번이나 다시 사라졌다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은우야. 나 좀 전에 그 백화점까지 갔다 왔거든!”

“정말? 거리가 상당히 멀잖아.”

“그렇지. 그런데 됐어.”

“나도 데리고 가 봐.”

“너를 데리고? 그것도 할 수 있을까?”

그건 좀 자신이 없는 것 같았지만 나는 어차피 데인 랭커스가 했으니 이하민도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냥 보기만 했다고 남의 능력을 그대로 카피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녀석이 너무 손쉽게 하자 나에게도 어느 순간 그게 당연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어…… 이건 잘 안되네. 이건 좀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아. 아쉽기는 하네. 내가 혼자서 알아내야 하는 거잖아.”

“그럼 염력을 사용할 때는 견인 에스퍼님이 알려 주셨어?”

“그럼. 정말 잘 알려 주셨지. 나라면 내 능력을 그렇게까지 전부 다 알려 주지는 못할 것 같다고 생각될 정도로.”

“그래? 그러셨어?”

견인이 그랬다니.

의외의 사실이었다.

“이거도 성공하면 좋겠는데. 금방 할 수 있기는 하겠지? 그런데 나. 그거 더 연습해 봐도 될까?”

이하민은 공간 이동이 가능해졌고 자기가 얼마나 먼 거리까지 공간 이동을 할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럼. 당연하지. 해 봐.”

“응.”

이하민이 사라졌다가 다시 나타나는 데 걸리는 시간이 점차 길어졌다.

처음에는 5분이 넘지 않았다.

어디까지 갔다 왔는지는 말을 하지 않았고 그때마다 자신에게 놀란 얼굴을 하곤 했다.

“어떻게 이런 게 다 되지? 진짜 신기하다.”

“나도 데리고 가 보라고.”

“그건 조금만 기다려 봐. 조금 있으면 그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아, 은우야.”

그런데 하는 짓이 점점 걱정되더라니.

신이 나서 지치는 줄 모르고 공간 이동을 마구 해 대더니 결국 쓰러졌다.

그래도 내 앞에 와서 쓰러졌으니 다행인 건가.

“은우야! 나 여기 못 돌아오는 줄 알았어. 나는 태국이 한계인가 봐. 거기도 아직 나한테 무리인가 봐. 거기까지는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해 봤는데.”

그러고는 더 이상 말도 하지 못하고 정말 기절을 해 버렸다.

그런 모습을 본 건 오랜만이었다.

이하민이 능력을 너무 많이 사용해서 쓰러진 건 정말 오랜만이다.

나에게 왔다고 마음 놓고 기절하는 걸 보니 그렇게 뿌듯할 수가 없었다.

그래. 너는 쓰러져도 돼.

내가 다 고쳐 줄 테니까 나만 믿고 푹 쉬어.

녀석을 일으키려는데 다른 곳에 있던 에스퍼들이 일제히 달려와 이하민을 부축했다.

결국 나는 손도 못 댔다.

그러나 옮긴 후에는 내가 가이딩을 할 수 있도록 모두 자리를 비켜 주었고 나는 행복한 식사 시간을 앞둔 곰처럼 흐뭇하게 녀석을 바라보았다.

집도 시간.

가만히 침대 위로 올라가 이하민의 손목을 잡았다.

그냥 건성으로 잡고 있는 건데도 미세하게나마 숨소리가 안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혈색에도 변화가 생겼다.

나는 내 가이딩에 따른 이하민의 변화를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얼마쯤은 손목을 쓰다듬기만 해도 지속적으로 안정이 되어 가는 듯했지만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자 그 이상은 변화가 없었다.

‘그러면 이제 입술이 출동하실 때인가?’

그러면서 녀석의 뺨을 손으로 어루만졌더니 멈추었던 몸이 다시 반응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하민의 솔직한 몸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을까?

이렇게 되리라는 걸 모르지도 않았을 텐데.

이렇게 될 걸 알고 이리저리 공간 이동을 하고 다녔을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내 손가락이 움직이는 것에 따라 서서히 생기가 감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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