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그는 머리에 손을 얹고서 망연자실하게 서 있었다.
‘안 돼… 이러면 안 돼… 바꾸지 않으면. 내가 바꾸지 않으면….’
남아 있던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최면에 빠진 채로 잠들어 있을 은우의 모습이 떠오르자 그는 가만히 서 있을 수가 없었다.
‘내가 망쳤어. 내가….’
눈이 뜨거워졌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했다는 생각에 서러운 눈물이 북받쳤다.
‘왜 여기로 온 거지? 왜…? 뭐가 잘못된 거지?’
그러던 그의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다.
‘센터…! 서관!’
그가 있던 서관은 원래 있던 센터가 부족해지면서 새로운 부지에 만든 거라는 것이 떠올랐다.
‘안 쓰던 건물을 부수고 새로 지었다고 했어. 그러면….’
만약 그가 제대로 왔다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건물이 지어지고 있을 터였다.
아직은 사람들이 센터로 이주하기 전일 테니….
마음이 다급해진 그는 곧바로 달렸다.
‘여기가 아니야. 지금 우리 센터는 여기에 없어.’
정확히 방향을 잡아 그때부터 쉬지 않고 달렸다.
지금의 그라면 아직 능력이 발현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이드들은 심각한 대우를 받고 있을 터였다.
‘은우야. 기다려. 내가 가고 있으니까.’
S급 에스퍼들.
그들도 그곳에 있을 터였다.
그래야 했다.
그는 거세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지 못한 채 달렸다.
SS급 에스퍼로서의 능력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혹시나 과거의 상태로 돌아가면 어쩌나 해서 마지막 순간까지 불안했는데 잠깐이나마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오리진 센터로 이주한 이들에 의해 베타 센터로 불리던 곳.
처음 그들이 자리 잡았던 그곳으로 가는 동안 이하민은 잠시도 쉬지 않았다.
멀리서 센트럴의 모습이 보였을 때 그는 눈물을 흘릴 뻔했다.
‘센트럴이다…!!’
그 모습은 기억에 생생했다.
그는 센터로 향했다.
그가 달리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멈춰서서 이하민을 바라보았다.
그들은 절대 SS급 에스퍼의 능력을 본 적이 없었을 것이다.
‘내가 생각했던 곳으로 정확히 돌아온 건가? 은우를 만난 그때로? 은우와 식당에서 마주쳐 말을 걸었던 그때로 온 거야?’
마침내 센터에 도착했을 때 그는 던전에서 죽어 간 수많은 에스퍼들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을 보고 눈시울을 붉혔다.
참으려고 했는데 참아지질 않았다.
그들의 희생을 너무 잘 알고 있어서 눈물이 북받쳐 버렸던 것이다.
그런 이하민을 본 에스퍼들은 멍하니 서 있었다.
“이…하민 아니야? 가이드가 지금….”
그들은 분명히 이하민이 달려오는 것을 봤고 그 믿기지 않는 속도에 크게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식당. 식당…!!’
식당으로 가야 한다는 생각 말고는 어떤 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당장 은우를 만나야 했다.
식당을 향해 전력으로 달리는 모습이 다른 사람의 눈에 어떻게 보일지는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때 식당을 향해 달리는 사람이 또 있었다.
부딪치고 나서야 그는 그 자리에 멈췄다.
‘이하민….’
그였다.
그를 본 순간 이하민은 깨달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흐른 시간은 정말 얼마 되지도 않는다고.
부딪친 순간 비틀거리고 자세를 바로 한 ‘이하민’은 시간 이동을 해서 그 자리에 서 있는 이하민과 눈이 마주치자 서서히 형체가 사라졌다.
“아아…!”
그는 자신의 소멸을 눈앞에서 보았다.
그렇게 될 거라는 것을,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 이 일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면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하민….’
그에게 미안했고, 미친 듯이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렇게 멍하니 서 있을 때 식당으로 향하던 한 무리의 에스퍼들이 그 앞에 서 있는 이하민을 보고 성질을 부렸다.
“왜 한 가운데에서 길을 막고 난리야?”
그러면서 에스퍼 한 사람이 그의 뒤통수를 때리려 했다.
그러나 이하민은 다른 생각에 빠져있던 그 순간에도 그것을 어려움 없이 피했다.
“뭐야… 피해?”
고개를 들어 보니 그 녀석이었다.
식당에서 은우와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옆에 있다가 놀리던 녀석.
그 녀석이 거기에 있는 것을 보니 제대로 온 게 맞는 것 같았다.
생김새도 그날과 똑같았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녀석에 대해서는 그날 이후로도 너무 많이 생각을 해서 기억이 생생했다.
메뉴가 간장닭 오븐구이이면 확실해진다.
이하민은 빨리 그걸 확인해보겠다는 생각에, 그리고 은우를 봐야 한다는 마음에 급히 걸음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에스퍼들은 그가 그러도록 놔두지 않았다.
“야. 우리가 말하는 게 안 들려? 아니면 우리가 하는 말이 우스워서 이러는 거야?”
“아뇨. 제가 방해했다면 죄송합니다.”
입씨름을 할 필요도, 말 상대를 할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이하민을 그냥 놔줄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던 듯했다.
“죄송하다고 하고 그냥 가려고? 말하는 게 별로 죄송한 것 같지도 않은데? 귀찮게 구니까 적선하듯이 미안하다고 말하는 것 같은데. 건방지게 가이드 따위가 나를 뭐로 보고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거지? 죽고 싶냐?”
이하민은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피식 웃었다.
에스퍼들은 이하민이 그럴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듯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 자식이 지금 웃었냐? 처돈 거야? 도대체 뭘 처먹으면 이렇게 되는 건지 모르겠네? 응?”
한 놈이 이하민의 머리카락을 잡으려는 순간이었다.
이하민은 어차피 잡히지도 않았겠지만 멀리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애 그냥 가만히 놔두세요.”
이하민은 그게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은우야…!
이하민이 감격을 감추지 못한 채 돌아보자 서은우가 오히려 움찔하는 듯했다.
이하민은 그가 왜 그러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멀리서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그가 알은 척을 하며 환하게 웃음을 지었으니 놀랄 만도 했을 것이다.
그래도 원래라면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뿐 나서지는 않았을 텐데 이번에는 일이 생기는 것을 목격해서 그런 건지 먼저 나서 주었다.
이하민이 환하게 웃자 서은우의 표정은 더욱 복잡해졌다.
“와아. 이것들이 단체로 미쳤나? 왜 이러지, 진짜? 내가 그동안 너무 풀어줬나? 저건 또 뭐야?”
“저거 D급일 텐데?”
이하민은 그 말을 듣고 웃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서은우가 S급 에스퍼라는 것을 지금 단계에서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지만 지금은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었다.
지금 당장 은우와 둘이 있고 싶다는 생각밖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은우야!”
서은우에게 가려 하자 에스퍼들이 이하민을 붙잡으려 했다.
그러나 이하민도 이제는 계속 그들의 장단을 맞춰 줄 생각이 없었다.
“적당히들 해. 적당히. 내가 미안해서 미안하다고 한 게 아니라는 걸 잘 아는 놈들이 왜 끝까지 이러는 거지? 가이드한테 처맞았다는 소리 듣고 센터에서 얼마나 잘 버티는지 볼까? 가이드한테 맞고 다니는 에스퍼를 어떤 사람들이 팀에 들이고 공략을 하러 다니는지 어디 구경이나 한번 해 보자.”
이하민의 말에 그를 위협하려던 손길이 그대로 허공에 멈췄지만 이하민은 그만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껏 그런 놈들은 수도 없이 많았고 그냥 자기만 참으면 조용히 넘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넘겼다.
그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했으면서 지금도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이하민이 손목을 잡은 채 빠르게 잡아당기자 그를 붙잡으려 했던 에스퍼가 앞으로 휘청이다가 넘어졌다.
다른 에스퍼들이 놀라며 이하민에게 소리쳤고 모여들던 에스퍼들이 그 모습을 보았다.
식사 시간에 맞춰 식당으로 가려던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제는 모르는 척할 수도 없었다.
이하민이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는지 믿기지 않았겠지만 서은우가 급하게 그곳으로 왔다.
에스퍼들이 모여들면서 이하민이 위험해지겠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것은 단순한 걱정이 아니라 실제로 우려될 만한 상황이기는 했다.
만약 이하민이 원래의 ‘이하민’이었다면 이곳에서 무사히 빠져나가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뭐야. 에스퍼가 가이드한테 붙잡혀서 넘어진 거야? 에스퍼 망신은 다 시키고 있네. 도대체 어떻게 된 것들이…!”
그렇게 말한 사람은 B급 에스퍼였다.
B급 에스퍼만 해도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사실 그때는 B급이 아니라 D급만 돼도 대단해 보였고 그냥 에스퍼이기만 하면 다들 무섭고 위협적으로 보였었다.
B급 에스퍼가 나서면 은우라고 해도 별수 없겠다고 생각하며 이하민은 은우를 안심시켜 주려고 했다.
그러다가 자기가 왜 그런 생각을 했던 건가 하며 뒤늦게 고개를 저었다.
S급 에스퍼를 보고도 겁을 내지 않던 은우였는데.
S급 에스퍼들이 자기를 함부로 대한다고 생각해서 벌레 보듯이 바라보는 바람에 S급 에스퍼들이 오랫동안 번민에 빠지지 않았던가.
그 은우의 앞뒤 안 가리는 성질은 그 순간에도 튀어나왔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가이드라는 이유만으로 이러는 건 안 되지 않을까요? 가이드가 없으면 센터가 어떻게 돌아가나요? 가이드에게 이렇게 대우를 하시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하민은 은우의 얼굴을 보면서 그가 벌써 후회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나서기는 했지만, 지금 어쩌려고 나선 거냐고 생각하며 자책하고 있을 것 같았다.
지금의 은우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에 들어서 다 알고 있는 이하민은 그래서 은우가 더 고마웠다.
원작대로라면 자기가 S급 에스퍼들에게 죽을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이하민을 위해 나서 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에스퍼들을 더욱 자극했고 A급 에스퍼들마저 그곳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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