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나는 아직도 좀 어리둥절하다.
이하민은 그날 이후 계속해서 호언장담을 했다.
내가 자기를 사랑하게 될 거라고.
우리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이라고.
가스라이팅인가?
그런데 정말 그렇게 됐다.
그 말은 맞는 것 같았다.
우리가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사이라는 거.
던전을 공략하면서 보이는 모습.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
센터의 일을 처리해 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조금씩 그에게 스며들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을 저절로 가져갔다.
멍하니 그를 바라보게 되는 일들이 많았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시선을 사로잡는 사람.
내가 그를 바라보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지만 그가 나를 보는 건 놀라웠다.
그가 나를 보면 나는 자주 놀랐다.
그가 나를 보는 게, 그가 나를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게 나는 아직 익숙하지 않았다.
그 근사한 얼굴을 하고 이하민은 가끔씩 헛소리를 했다.
“은우야, 전에는 너, 최면에 걸린 상태로 너희 누나를 만날 수 있었다.”
“그래? 그런데 왜? 내가 우리 누나를 만났으면 좋겠어?”
“응. 누나를 만나서 부탁 좀 해 봐.”
“아아…!! 그러면 되는 거구나!”
나는 내가 바보인가 생각했다.
정말 그러면 되는 건데.
그러면 모든 게 한 방에 끝나는 건데.
누나를 만나서 이하민의 눈에 나밖에 안 보이게 만들어 달라고 하면 되는 건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그러면서 그를 보았다.
혹시 이하민이 원하는 게 있으면 그것도 들어주려고.
“야, 이하민. 혹시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 봐. 들어줄게.”
“정말이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이하민이 갑자기 감격하는 표정을 지었다.
“왜 이래? 뭘 생각했기에?”
“은우야!”
그는 갑자기 내 손을 꽉 붙잡았다.
“왜… 이러냐? 무섭게?”
정말 누나를 만날 수 있기는 한 건가?
기회가 다 사라진 건 아닌가?
이하민이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면 꼭 돼야 할 텐데.
안 된다고 서운해하면 어쩌지?
그런 걱정을 하면서 일단은 물었다.
“너는 어떤 걸 바라는데?”
그러자 갑자기 얼굴을 붉히면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다.
“뭔데?”
“나는 그냥. 네가. 내 아이를 가지면 좋겠어.”
미친 거구나.
약도 없이 미친 거구나.
나는 화를 낼 기운도 없이 말했다.
“정신 차려, 이하민. 그런 건 안 돼. 알았어?”
“역시 안 되는 건가?”
“당연하지. 아니, 너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 거냐?”
“아니, 너희 누나는 모든 걸 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건 정말 좋은 기회고. 일단 말은 한번 해 보자. 안 된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거지만 그래도 그게 가능하다고 하면 좋은 거잖아. 안 그래?”
응, 안 그래.
절대로 안 그래.
“너, 우리 누나가 잡탕으로 쓴다고 무시하는 모양인데 우리 누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래도 나름대로 하나의 세계관을 창조해서 일관적으로 쓰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말을 하는 동안 조금도 동조가 일어나지 않았고 나조차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일단 입은 그렇게 놀렸다.
이하민은 알지, 알지 하면서 수긍했다.
그러다가 자신의 생각을 조곤조곤 말했다.
“그런데 은우야. 이건 가이드버스 속의 오메가버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우리가 사는 세계에는 에스퍼와 가이드가 존재하지만 우리 중에는 가이드가 존재하지 않잖아.”
“…응?”
이하민은 더 이상 가이드가 아니다.
그리고 나도 회복 능력을 가진 에스퍼였을 뿐 가이드인 적은 없었다고 했다.
내가 가이드라고 오인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었고 나를 가이드라고 생각했던 세계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가 죽거나 죽음을 코앞에 두었었다고 했다.
지금은 그곳의 모두가 죽었을 거라는 사실을 이하민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그래서 더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만약 그곳에서 내가 계속 살아가고 있었다면 그곳의 나를 포기할 수 없었을 거라고 말하면서.
그가 두고 온 세계는 완전히 멸망해 버렸고 그는 지금 다시 이 세계를 시작하고 있는 거였다.
이하민은 계속해서 나를 설득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너와 나 둘 중 누구도 가이드가 아니니까 이건 가이드버스 소설이 아니라고.
이건 처음부터 오메가버스고 내가 이 세계에서 최초로 발현하는 오메가인 거라고.
그러니까 나는 자기의 아기를 가질 수 있다고.
그렇게 되도록 누나에게 잘 말을 해 보라고.
그러더니 뭔가 대단한 것을 생각해 낸 듯 손뼉을 딱 치며 말했다.
“착각계인 거지! 네가 온 소설이 가이드버스 세계관이라고 착각하면서 사는 거야. 그런데 사실 너는.”
“닥쳐! 닥쳐, 좀!!”
미쳤나 봐, 이하민!!
***
누나를 만나기 위한 최면이 시도되었다.
어느날 갑자기 무협 게임에 들어간 후 누나를 만나는 건 처음이었다.
이하민은 내가 이미 누나를 만난 적이 있다고 했지만 나에게는 그 기억이 없으니 나에게는 그것이 처음처럼 느껴졌다.
이하민은 내가 어떻게 해야 누나를 만날 수 있는지 차윤에게 알려 주었고 눈에 불을 켠 채 차윤의 옆에 앉아 있었다.
차윤이 나에게 최면을 건 후 나를 건드리려고 한 적이 있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그 자리에는 다른 S급 에스퍼들도 같이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 일이 정말 흥미진진하게 느껴진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은 이하민이 하는 말을 모두 믿었다.
안정제로 B급 가이드가 삽입 가이딩을 통해 할 수 있는 수준의 가이딩이 가능해졌고 센트럴 내의 토파즈는 와해되었으며 미등록 에스퍼들은 정부의 강력한 규제에 의해 적극적으로 관리되었다.
상황이 그렇게 되다 보니 이하민이 하는 말을 믿지 않는 게 더 어려웠을 것 같았다.
그들 모두가 나를 좋아하게 된다는 말만큼은 인정하지 못하는 것 같더니 나한테 다 감겼네, 뭐.
어쨌든 그렇게 나는 최면에 걸렸고 누나를 만났다.
누나는 문을 잠그고 방에 들어가 있었다.
문 좀 열어 달라고 밖에서 정말 열심히 두드렸지만 누나는 마감을 해야 한다며 계속 시끄럽게 굴면 죽여 버리겠다고 했다.
정말 우리 누나 맞구나.
결국 나는 누나와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채 방문 앞에 앉아 있다가 돌아왔다.
“누나,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노력해 봐. 나는 행복하게 살 것 같아.”
그 말을 끝으로.
내가 정신을 찾자 내 앞에 있던 에스퍼들이 부담스러운 눈을 하고 나를 바라보았다.
이하민의 눈에서는 별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어떻게 됐어, 은우야? 누나를 만났어?”
“얼굴도 못 봤어. 문을 안 열어 주잖아.”
“그래? 시간을 잘못 맞춰서 갔나?”
이하민은 못내 아쉬워하는 것 같았다.
그때가 내가 누나를 만나 볼 수 있었던 마지막 기회였다.
이하민이 왜 그토록 내가 누나를 만나기를 바라는지 알게 된 차윤은, 다시는 나에게 최면을 걸어 주려 하지 않았다.
그도 웃기기는 했다.
그게 자기한테 무슨 상관이라고?
그리고 며칠 후에 꿈을 꾸었다.
정말 생생한 꿈이었다.
***
아, 진짜.
한 번만 더 누나를 만날 수 있었으면.
그럴 수만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
누나를 만나면 나는 누나의 멱살을 잡고 짤짤 흔들어 댈 것이며 도대체 뇌가 어떻게 된 거냐고, 엄마는 너를 가지셨을 때 뭘 드신 거냐고 물을 것이다.
도대체 세상의 어떤 누나가 자기 동생을 임신시킨단 말인가!!
…어? 말을 해 놓고 나니까 어감이 상당히 이상하기는 하네.
내 옆에는 나만큼이나 정신이 나가 있는 이하민이 있었다.
그놈은 손에 꼭 쥔 초음파 사진을 보느라고 옆에서 내가 붉으락푸르락 하고 있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이하민이 그러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지금까지 거의 언제나 나를 살피는 게 가장 우선이 되는 아이였으니까.
“은우야. 너는 이게 믿겨? 이게 우리 아기래.”
믿기겠냐?
너는 믿기냐?
나는 그 말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데 언제쯤 되면 형체를 알아볼 수 있게 되는 거지? 여기에서 팔이 생기는 건가? 여기에 머리가 생기나?”
“하….”
나는 이게 정말이냐고, 이게 정말 내 몸을 찍은 초음파 사진이 맞는 거냐고 스무 번 정도 의사에게 물었었다.
그는 지치지도 않고 정말 그렇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와 이하민의 기념사진을 찍어도 되겠냐고 조심스럽게 물었고 나는 말도 안 된다고 했었다.
이하민은 나보다 더 우렁찬 목소리로 당연히 된다고 했고 결국 의사와 함께 셋이서 사진을 엄청나게 찍고 왔다.
특별히 포즈를 취하지 않아도 되니 그냥 사진 찍는 걸 허락만 해 달라던 의사는 그 대가로 앞으로 진료는 모두 무료로 해 줄 거고 가장 편안하고 안락한 환경에서 출산을 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했다.
에스퍼 중에 오메가가 나타난 사례는 처음이고 우리 아이는 분명히 엄청날 거라며 기대가 대단했다.
내가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지만 내 아이가 엄청난 아이가 될 거라는 말에는 기분이 좋아졌다.
의사와 이하민도 그 사실을 알아차린 듯, 내가 충격에 빠져 정신이 나가 있을 때마다 그 말을 하곤 했다.
이하민은 의사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한 듯 그에게 계속 물었는데 가만 보니 의사는 그냥 덕담을 해 준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이하민의 눈을 보면서 차마 그렇게 말하지는 못한 채 자신의 권위를 담아 우리 아이가 훌륭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늘어놓았다.
가만히 생각하면 아무나 할 수 있는 말이기는 했는데 그게 또 의사 입에서 나오니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들렸다.
그래서 이하민은 지금 초음파 사진을 꼭 붙들고 어떻게든 제 새끼를 알아보려고 애쓰며 그 아이의 미래가 얼마나 찬란할지 알려 주고 싶어 안달이 났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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