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그럼 이 아이는 언제 생긴 걸까? 진짜 그때의 나를 만나게 되면 꼭 고맙다고 말해 주고 싶어.”
이하민은 부끄러움 따위는 개에게 줘 버렸는지 그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었다.
“이하민. 좀 닥쳐라. 너는 내 생각은 안 하냐?”
“왜, 은우야? 너는 우리가 창피해?”
우리?
얼씨구.
우리란다.
저 콩알만 한 녀석을 벌써 자기편으로 삼고 같이 덤비려고 하고 있었다.
“이게 그렇다고 동네방네 떠들고 다닐 일은 아니지 않아?”
“왜 아니야? 떠들고 다녀야지. 은우야. 너 혹시 힘들어? 내가 업어 줄까? 조금만 빨리 가면 어떨까? S급 에스퍼님들한테 말해 주고 싶은데.”
“아. 됐어. 좋은 말은 못 들을걸? 그건 내가 장담한다.”
“아니야. 에스퍼님들이 얼마나 다정다감하신데. 아! 심우진 에스퍼님한테 말해서 바이올린 연주해 달라고 하자. 태교에 좋을 것 같아.”
“아직 귀도 안 만들어진 애가 그걸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은데?”
“너는 무슨 엄마가 그렇게 무정하냐?”
엄마?
얘가 혹시 미쳤나?
누가 엄마야, 엄마는?
…혹시 맞나?
누나가 만들어 놓은 괴작에 들어와 버린 탓에 나는 어느덧 그런 고민까지 하고 있었다.
“나는 있잖아. 이제 너희 누나 원망 안 할 것 같아. 사실 처음에 그 사실 알게 됐을 때는 화가 나기는 했었거든. 알잖아. 내가 여기서 힘들었던 거.”
그러다 그가 허공을 보더니 아아 하고 작은 탄성을 냈다.
“아니구나, 이제 모르는구나. 너는 그 일을 안 겪었네. 다행이다, 은우야. 그것도 다행이다.”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자기가 나를 힘들게 한 일이 있었고 그때 내가 엄청 박력 있게 자신의 고민을 해결해 주었다고 했다.
일단 힘든 구간을 패스한 것 같아서 개이득이라는 정도로만 생각을 했다.
그 말을 하면서 그는 공간 이동으로 나를 센터로 데려갔다.
더 이상 그가 공간 이동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며 화들짝 놀라는 사람은 없었다.
여전히 신기해하기는 했지만.
때마침 로비에 있던 견인이 우리가 그곳에 갑자기 나타난 것을 알아차리고 달려 나왔다.
“이하민! 나도 데리고 공간 이동해 봐. 능력 확인 좀 해 보자.”
이하민은 꼭 지금 해야 하냐는 듯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더니 지금 자기에게 엄청난 소식이 있다는 것을 깨달은 듯 견인을 바라보았다.
“에스퍼님. 이것 좀 보세요!”
그러면서 초음파 사진을 보여 주자 견인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했다.
“응. 봤으니까 이제 가 보자.”
“에스퍼님. 이거 저희 아기예요.”
“너희 아기 너희나 예쁘지. 빨리 가 보자니까?”
그쯤 되니 이하민이 조금 불쌍해졌다.
자랑을 해도 어떻게 견인에게 자랑을 하냐.
견인은 놀이기구를 타게 됐다고 설레서 밤잠을 못 자는 아이 같았고 이하민은 결국 견인을 데리고 사라졌다.
그 모습은 다시 봐도 신기했다.
그러는 동안 변태영과 심우진도 밖으로 나왔다.
“어디 갔다 와?”
변태영은 내가 외출하고 돌아온 걸 알아본 듯 말했고 나는 말을 해 줄까 말까 하다가 한번은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의사가 앞으로 아기를 낳을 때까지 너무 과격한 움직임은 삼가는 게 좋다고 했기에 S급 에스퍼들에게 양해는 구해 놔야 했다.
“저기. 제가… 그게… 병원에 갔는데… 제가 아기를….”
두 S급 에스퍼들은 무슨 말을 하는데 그렇게 뜸을 들이냐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더니 점점 표정이 바뀌어 갔다.
“아기를 뭐?”
“아기를 다치게 했어요, 은우 씨? 일부러 그런 건 아니죠? 어떻게 된 건데요?”
변태영과 심우진은 각자 자기들 멋대로 생각하며 물었다.
“아뇨!”
“이게 지금 숨길 일이야? 빨리 말해! 아기는 어떤데. 무사해? 도대체 어쩌다가! 조심 좀 하지!!”
두 사람은 이미 내가 사고를 낸 거라고 믿으면서 말했다.
“아뇨! 아기를 가졌대요!”
버럭 소리를 지르자 두 사람의 표정이 볼만하게 변했다.
“….”
“…네?”
변태영과 심우진은 서로를 보다가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이 나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서은우?”
“그렇다더라고요. 지금 병원에서 오는 길이에요.”
그들은 다른 말은 하지 않은 채 계속 나를 보았다.
충격이 그렇게 컸나?
“축하 안 해 주세요?”
“아….”
“어, 축하해요. 은우 씨. 그런데… 정말 뜻밖이네요.”
두 사람의 얼굴에는 정말 복잡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게. 축하해. 서은우. 정말 별걸 다 해.”
변태영도 마지못해 말하는 듯 축하의 말을 건넸다.
“당분간 과격하게 몸 쓰는 건 하면 안 된대요.”
“그 얘기는 이하민한테 해야지 왜 우리한테 해? 우리가 서은우에게 과격하게 힘쓰게 한 적 있었나?”
변태영의 말에 심우진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때마침 이하민이 돌아왔고 그는 S급 에스퍼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고는 내 손을 잡았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무엇보다 안정을 취해야 한대요.”
그러고는 그들에게 다시 붙잡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처럼 그대로 공간 이동을 해서 내 숙소로 와 버렸다.
“은우야.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네가 하고 싶은 건 전부 다 하게 해 줄게. 뭐든 시켜. 내가 뭐든 다 해 줄게.”
“정신 사나우니까 그냥 가만히 좀 있어 봐.”
“응, 은우야.”
가만히 있으라는 게 지금의 이하민에게 얼마나 수행하기 어려운 명령인지 알 것 같았다.
그의 얼굴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환해졌다.
행복해서 죽을 것 같은 표정.
지금의 이하민이 딱 그런 상태였다.
“작작 좀 웃지?”
“…응? 뭐라고 했어, 은우야?”
나는 종종 잠을 자다가 잠꼬대를 하면서 잠에서 깨곤 했는데 그때도 그랬다.
분명 이하민을 보면서 한 말이었는데 그 말을 실제로 하다가 잠에서 깨 버렸다.
그래서 나와 함께 잠을 자던 이하민은 그 말을 정통으로 들어 버렸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해도 그렇게 당황스럽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뭐라고 했어, 은우야?”
다행히 내가 한 말을 정확히 알아들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아니야, 이하민. 자, 더 자. 아직 더 자도 돼.”
그에게 말을 하며 그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가만히 내 배를 쓰다듬어 보았다.
꿈속에서도 초음파 사진에 간신히 나온 정도였기에 배를 만진다고 느낄 수 있는 정도는 아니었다.
‘꿈이었네.’
꿈이어서 다행인 건지, 서운한 건지 모르겠다.
‘은근히 바라고 있었나?’
***
어쩌다가 그렇게 모였다.
S급 에스퍼들끼리.
변태영과 견인, 그리고 심우진.
거기에 차윤이 끼어 있었다.
차윤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슬그머니 그 자리에 함께 했다.
특별한 용무를 가지고 모인 것은 아니었다.
견인은 센터장이 되어 있었고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하민이 원래 다른 두 사람은 직책을 갖지 않은 채 견인을 도와주었고 차윤은 정보팀장이었다고 했지만 그래서 뭐 어떻다는 거냐며 차윤은 보란 듯이 아무 자리도 맡지 않았다.
원래 정보팀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외부에 알려진 적이 없었기에 그가 정보팀장이 되지 않는다고 이상할 것은 없었다.
S급 에스퍼들은 종종 이렇게 앉아 있었다.
특별히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단지 좀 궁금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지.
다른 사람들도 서은우를 생각하면 가슴께가 간질간질거리고 좀 아픈 것 같기도 하고 그런지.
자기가 돌아온 거라고 주장하는 이하민의 말을 들으면서 S급 에스퍼들은 처음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나 그 황당함은 며칠도 가기 전에, 아니 사실은 몇 시간도 지나기 전에 사라져 버렸다.
그가 하는 말이 모두 사실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되면서 그들은 커다란 호기심을 느꼈다.
자기들이 서은우를 위해 목숨을 던졌다고 했다.
그를 좋아했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얘기가 아닌가.
그 말을 들었을 때부터 반감이 생겼다.
이하민이 갑자기 나타나 그 말을 할 때까지 그들은 서은우라는 하급 에스퍼의 존재를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예쁘장하게 잘생긴 것 같기는 했지만 뭐 그 정도 인물이야.
사실 서은우가 어디 가서 쉽게 볼 수 있는 흔한 미인은 아니었지만 애써 그렇게 평가절하하려는 마음도 있었다.
누군가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지게 될 거라는 예언을 들어 버린 것이다.
목숨을 아낌없이 줄 정도로 사랑하는 사람.
그러나 그 사랑에 보답을 받지 못한다는 것도 어렴풋이 짐작했다.
이번에는 달라질 수 있을까.
그 자리에 있는 이들은 모두 그 고민을 했다.
이하민이 돌아온 거라면 자기들에게도 다시 기회가 생긴 것은 아닌가.
S급 에스퍼들은 어느덧 똑같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 그들이 모이는 이유였다.
동류가 있다는 것을 느끼며 혼자서 망상을 해 나가기 위해서.
‘괜찮은 레스토랑이 있다는 것 같던데.’
‘염력 사용하는 걸 가르쳐 주겠다고 해 볼까?’
‘내가 연주하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어.’
‘잠자고 있을 때 몰래 가서 최면을 걸어 봐야지.’
그들의 머릿속에 서은우와 함께 하고 싶은 것들이 떠올랐다.
어쩌다 잘못 굴러 들어온 것처럼 불순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도 있었지만.
차윤은 아직 자기가 그런 비슷한 짓을 했다가 서은우에게 얼마나 처참하게 응징을 당하는지 모르고 있었다.
이하민이 순화해서 설명한 폐해였다.
S급 에스퍼들은 잠시 그렇게 모여 있다가 각자 일어서 저마다의 곳으로 가 버렸다.
상처받게 될 거라는 것을 알았고 호응받지 못할 거라는 것도 미리 깨달았으면서 어쩌자고 다시 또 서은우에게 젖어 버린 건지.
도대체 서은우가 구석구석 스며드는 동안 뭘 한 건지 짜증 섞인 자책이 그들을 괴롭혔다.
노을이 하늘을 불태우듯 물들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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