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이내 하민이 말했다.
“아직은 안 됩니다. 이제 오성입니다. 십성에는 이르셔야 제 도움이 없이 매화생공을 자유자재로 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무여야 합니다. 화산의 이 매화 말입니다.”
그 말을 할 때는 집념마저도 보였다. 내가 그 얘기를 더 하는 것이 싫은 듯, 듣지 않으려는 것처럼 자리를 뜨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꼭 해야 하는 말이어서 그의 손목을 붙잡고 말했다.
“내가 너를 망치게 될 것 같아 그런다. 나 때문에 신선이 되지 못하면 어찌하려 그러느냐. 내가 계속 여기에 있으면 나를 두고 신선이 될 수 있겠느냐.”
농인 것처럼 말했지만 실패했다. 조금도 웃지 않은 채 말을 해 놓고 뭘 기대했을까.
“너는 모든 것을 정화하는 바람 같은데 내게서는 지워지지 않는 악취가 나. 내가 너를 물들이고 더럽힐까 봐 싫다. 하지 않으련다. 나와 만난 그 시간을 네가 원망하고 후회하게 하고 싶지 않아.”
“제가 그 악취를 원한다면 어쩌시겠습니까? 더렵혀지고 싶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그리 말하며 웃는 모습은 치명적이며 선득하기까지 했다. 진심으로 하는 말인가 하며 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은 호수의 수면 같았다. 어떤 요동도 금세 잠잠해질 것 같고 그에게 잠기면 나도 모든 시름을 잊을 수 있을 듯했다. 그래서 자꾸만 그에게 잠기고 싶어졌다. 이리해서는 안 되는 것인데.
“너는 네 사문을 버릴 수 있느냐.”
“그래야 합니까.”
그의 입매에 너무나 아름다운 웃음이 지어졌다. 그 웃음을 보고 있는데 가슴께가 시큰하게 아파 왔다.
“대답해 보아라.”
“제가 그러려 해도 사문이 저를 버리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니 저는 거기에 답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결국 견인도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이 오만한 녀석을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그런데 그 말이 조금도 틀린 것 같지 않아서 할 말이 없었다. 그 말이 맞다는 것은 곧 증명이 되었다.
그것도, 은우가 만들어 놓은 기회에.
***
하민과 은우, 그리고 내가 함께 기거하던 그곳에 사람들이 찾아왔다. 들이닥쳤다고 하는 것이 맞으리라. 장문인과 장로들까지 함께 한 거창한 행차였다.
은우는 그들이 올 거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그들이 갑자기 그곳에 나타난 것과 은우의 표정에 어느 정도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은우가 나를 마뜩잖게 생각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이리해서 나를 치울 수 있을 거라고 여겨 사문 어른의 도움을 받으려 한 모양이었다. 어찌 됐건 상관은 없었다. 하민이 파문되지 않으면 좋겠다고 바랄 뿐이었다.
만약 상황이 좋지 않게 흐른다거나, 그들이 하민을 잡아다 벌을 내리려 하면 억지로라도 하민을 데리고 화산을 내려가야겠다고 생각했다. 파문이 정중한 이별이었던 적은 없었기에.
그러나 하민은 그곳에 들이닥친 제 사문의 어른들을 보고도 놀라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게 다 무엇이냐, 하민!”
장로의 다그침에 놀라지도 않고 하민이 말했다.
“강호에 나갔을 때 형님이 저를 구해 주었습니다. 형님이 아니었으면 죽었을 테지요.”
은우의 얼굴에 경악이 서렸다. 제 스승이 나를 위해서 그런 거짓말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나 역시 놀란 것은 마찬가지였다.
“사문을 떠나라 하시면 그리하겠습니다, 장로님.”
“너, 너는 장문사손이다! 어찌 그 말을 함부로 입에 올리는 것이냐!”
장로의 일갈에도 하민은 꿈쩍하지 않았다.
“은우는 방으로 들어가 있거라.”
하민의 냉랭한 목소리에 은우는 우물쭈물거렸다.
그러다가 하민의 언성이 높아지자 깜짝 놀란 듯 그의 말을 따랐다. 은우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하민은 작정을 한 듯이 말했다.
“말씀하신 것은 차차 완성이 될 것입니다. 이리 찾아 오시어 방해를 하신다면 그 일은 늦춰지거나 영영 실패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려고 저를 뺏은 것은 아니실 텐데 잘 생각하고 그러시는지요. 말씀하신 것은 내드리지요. 그런 후에는 원하시는 대로 해 드리겠습니다. 떠나라 하시면 떠날 것이고 머물라 하시면 머물 것입니다. 사조 행세만 하지 않으시면 됩니다.”
하민이 마지막 말을 했을 때야 나는 그가 장문인에게 말을 한 거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는 하민에 대해 제법 많은 것을 안다고 생각했기에 더욱 혼란스러웠다. 그 말은 확실히 효과가 있어서 장문인을 비롯한 장로들이 횡설수설하더니 더 이상 내 문제를 거론하지 않고 떠나 버렸다.
그들이 떠난 것을 알고 은우가 눈치를 보다 나왔다. 은우가 왜 그런 것인지 모르지 않았을 텐데 하민은 더 이상 은우를 다독이려 하지 않았다.
“이곳에 네가 있을 자리는 없다, 서은우. 네 세간을 가지고 떠나라.”
“스, 스스…, 스승님, 제발 그 말씀은 거두어 주십시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그 말이 맞다, 서은우. 네가 잘못 하였다. 나는 이미 너에게 기회를 주었고 너는 그 기회를 모두 썼다.”
“스승님!!”
은우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고 뜻을 돌려 주기를 간청했다.
사람의 눈에서 저렇게 많은 눈물이 나올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것을, 나는 그날 은우를 보며 알았다.
그런데도 하민은 자신의 뜻을 조금도 굽히려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이냐, 하민.”
나는 그가 들어앉은 방으로 따라가 물었다.
“너를 뺏었다는 건 뭐고 내주겠다는 것은 뭐냐.”
하민은 말하고 싶지 않은 듯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고 나는 이런 자리에 내가 끼어서 덩달아 안절부절못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일어섰다.
“어딜… 가려 하십니까.”
“내가 이곳에 더 있어 뭘 하겠느냐.”
“형님.”
“화가 난 것 아니다. 기분이 상해서 이러는 것도 아니다. 오래 전에 갔어야 했다. 너에게는 고마운 것이 많다. 너와의 약조는 잊지 않으마. 너와 네 사문에 일이 생기거든 내 몸을 태워서라도 도울 것이다.”
나를 붙잡아야한다고 생각했는지 하민이 일어나며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장문인은… 제 사조님이 아니었습니다. 제 무재를 탐내서 저를 뺏으려고 제 스승님을 죽음으로 내몰았습니다. 형님을 만났던 그 날, 그 일을 알아보기 위해 내려갔다가 그 사실을 알아내고 오던 중에 형님을 만난 것입니다. 그리고 매화생공은 축기의 속도가 느린 화산의 심법을 개선하고자 제가 창안한 것입니다. 장문인이 저에게 얻고자 한 것이고요.”
“하민아….”
그에게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믿기 힘든 것들 뿐이었다. 그런 일이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나는 그에게 다가갔다.
“하민아….”
나를 바라보는 그의 아름다운 두 눈에 투명하게 눈물이 고였다. 이럴 때 해야 할 말이 있을 텐데 나는 위로에 익숙하지 않았다.
“가지 마십시오.”
나는 그저 어깨를 다독이다가 안아 주었고 그는 내게 머리를 기대 왔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쓰다듬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던 하민이 내 목에 팔을 둘렀고 나는 그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입을 맞췄다. 아무 말도 나누지 않은 채 부술 듯이 그를 안았다.
우리의 위로 천둥이 치고 벼락이 떨어지는 듯했다. 남모르게 쌓아 온 정념의 둑이 터졌다. 그가 흘린 눈물이 내 몸으로 떨어져서 내내 가슴이 아팠다.
내게서 벗어난 그는 늘 단정하던 머리카락도, 의복도 느슨하게 흐트러졌다. 입술은 젖어 번들거렸고 내가 머금다 놓은 탓에 조금 부풀어 있기까지 했다. 붉어진 눈가는 내 가슴에 다시 불을 지폈다.
나는 처음부터 그럴 운명이었던 것인가. 그런 나에게 하민이 한껏 뿌듯한 표정을 하고 말했다.
“저는 이제 형님께 속했습니다.”
그의 하얗고 가는 손목을 다시 잡아끌어 그를 내 품에 가두었다. 잠시도 놔줄 수가 없을 듯했다.
***
은우는 하민의 거처를 떠나지 않았고 하민은 한동안 은우에게 가르침을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어떤 면에서 정말 무서울 정도로 닮아 있었다. 시간이 갈수록 그것을 더욱 자주 느꼈다.
은우는 하민이 저에게 한 번이라도 눈길을 주지 않을까 갈망하며 바라보는 것 같았지만 하민은 그에게 여지를 주지 않았다.
그러자 은우는 이제 나에게 다가왔다. 그가 관심을 가진 것은 매화생공이었다. 제 스승이 나에게 그것의 성취를 가지고 잘하셨다, 잘하셨다 하는 것을 보며 저도 그걸 잘하면 스승의 마음을 다시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했던 것 같았다.
나는 십이성 중 구성에 이른 상태였다.
“저에게…. 매화생공을 가르쳐주실 수 있습니까.”
그는 나를 바라보지도 않고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의 세상은 온통 하민으로 채워져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하민의 세상도 자신으로 채워졌을 거라고 믿은 것 같았다. 그에게 나는 침입자였으리라.
“네 스승이 허락해야 할 것 같다만.”
“스승님은 상관치 않으실 것입니다. 가르쳐 주십시오.”
매화생공은 확실히 뛰어난 심법이었다. 다른 내공심법으로 초절정의 경지에 이르렀던 나는 그것을 분명히 말할 수 있었다.
“내가 네 스승에게 미움을 받았으면 하는 모양이구나. 네 스승에게 배워라. 나는 잘 가르치지 못한다. 그리고 네 스승이 허락하기 전에는 가르쳐 줄 수도 없다.”
첫날은 화를 내면서 나가 버리더니 다시 돌아와 계속 내 주위를 맴돌았다. 하민은 가르쳐 줄 리가 없고 나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