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웬만했다면 제자 놈을 그렇게까지 미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견인은 마치 저에게 일어난 일을 전부 알고 있는 듯했고 자기가 가장 견디기 어려울 이야기를 수시로 해 댔다.
그는 견인의 오해를 어렴풋이 이해하고 있었다.
견인이 정말 스승님의 정인이었던 그 견인일 리는 없을 것 같지만 만약.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한다면.
수도 없이 그 생각을 해 왔다.
말이 안 된다고 고집을 부려도 결국 일어나 버렸다면 그걸 어찌할 것인가 하고.
그러면서도 마음이 죽 끓듯이 변해서 견인이 그일 거라고 생각했다가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가 하루에도 수시로 변했다.
한 번 확실히 얘기를 나눠 보자고 생각을 했지만 그때마다 견인은 구렁이가 담을 넘어가는 것처럼 이리저리 피해 갔다.
견인이 만약 스승님의 정인이 맞다면 그가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자신이 나타나고 화산의 고수들이 나타나 스승님이 목숨을 잃었으니.
‘아니다, 저놈이 그 인간이 맞다고 해도 저놈은 나를 원망할 자격이 없다. 저놈이 나타나지만 않았으면 스승님이 그리 변하시지도 않았을 것이다.’
서은우는 하민이 갑자기 장문인과 화산의 어른들을 적대하기 시작한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다.
하민은 서은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정확히 하지 않았고 자신의 스승이 그들에게 당한 일도 말하지 않았다.
서은우가 그 일을 모른 채 조용하고 편안하게 화산에서 살기를 바란 욕심 때문이었다.
하필 그가 자신의 스승에게 일어난 일의 정황을 알게 된 날 견인을 만나 서은우에게는 모든 계기가 견인처럼 보였다.
견인이 아니었다면 스승님이 화산의 어른들에게 반감을 가질 일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서은우와 견인 사이의 오해는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네놈 면상을 보고 있어야 하는 내 처지도 생각을 좀 해 주면 어떻겠느냐. 할 이야기는 끝났으니 가 보거라.”
서은우의 말에 견인이 웃었다.
“스승님이 고우신 거야 무림에서도 모르는 이가 없습니다만 그렇다고 남의 얼굴을 그리 멸시하지는 마시지요. 이래 봬도 누구에게는 애모 받던 얼굴입니다.”
서늘하게 말하던 견인은 걸음을 돌렸다.
***
“명현 사제.”
경내를 걷고 있던 서은우는 저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대사형 심우진.
화산 제일 기재라는 말을 들으며 언젠가 장문인이 될 거라는 기대를 받고 있는 이였다.
준수한 외모에 성격도 좋아서 이대 제자들에게 경원의 대상이었다.
화산 어른들에게도 인정을 받고 무림에서도 그에 대한 소문이 자자해 후기지수 중에 가장 장래가 유망하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서은우의 마음에는 반감이 가득해졌다.
그 모든 것들이 제 스승의 것이었다는 생각을 할 때마다 그런 마음이 들었다.
“대사형을 뵙습니다.”
“뭘 그리 깍듯이 해. 거리감 느껴지게.”
그가 무해해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다가왔다.
심우진의 주위에 아무도 없는 것은 보기 드문 일이었다.
그의 스승은 하민과 같은 장문사손이었다.
똑같은 장문사손이라고 해도 처지가 같을 수는 없었다.
제 스승님이 누구셨던가.
그냥 가만히 계시기만 해도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의 찬탄을 자아내게 하는 분이 아니셨던가.
그런 스승님과 겨루는 것은 애초에 너무 버거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스승님이 떠난 후 장문 제자가 장문인이 되고 심우진의 스승은 장문 제자가 되었다.
그리고 제 세상을 만난 듯 활개를 치고 다녔고 심우진도 덩달아 활동이 활발해졌다.
심우진은 서은우를 보며 은근한 우월감을 느끼곤 했다.
하민이 살아 있었다면 서은우는 화산의 권력을 순탄하게 이어받았을 텐데 어느 날 갑자기 신세가 처량하게 되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정작 서은우에게 그런 권력은 아무것도 아닌데도.
“성취는 어때? 요즘도 열심히 하고 있지? 은우 사제의 성실함은 아무도 따라갈 자가 없지 않아?”
두 사람 모두 도호를 받았으나 도호와 이름을 오가며 불렀다.
서은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과찬이라는 둥 어떻다는 둥 그런 말을 하는 것도 귀찮았다.
“새로 들인 제자가 특이하다지?”
“새로 들인 제자요? 제자를 들인지가 몇 년인데 새로 들인 제자라 하십니까?”
“아아, 그런가? 나는 은우 사제가 너무 어려워. 무슨 말이라도 붙이고 싶어서 그러는 건데 은우 사제 앞에서는 유독 말실수를 하는 것 같아.”
“애쓰실 필요 없습니다.”
서은우는 그가 그냥 가 주었으면 했다.
“내 제자들은 성취가 남달라. 제자를 키우는 재미가 이런 건지 몰랐어. 다음에도 제자를 한 번 더 들일 생각이야. 그런데 은우 사제는 그 아이 말고 다른 제자를 전혀 들이지 않은 거야?”
“그놈도 내쫓을까 생각 중입니다.”
“그래? 진심으로 하는 말이면 내가 파문시켜 줄까?”
서은우는 멍한 눈으로 대사형을 보았다.
솔직한 심정으로, 아주 잠깐 동안 ‘그럼 그렇게 해 달라고 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대사형은 속을 알 수 없는 자였다.
견인이 떠나고 싶다고 하면 순탄하게 떠나게 하면 될 것이다.
아무래도 이런 자와는 엮이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되었습니다. 제 제자입니다. 농을 농으로 받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하하하하, 나도 당연히 농을 한 것이지.”
그러던 대사형이 서은우를 바라보았다.
“조용히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는데 반 시진 후에 처소로 갈게.”
“여기서 말씀하십시오.”
서은우는 제 처소에 다른 이가 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스승님과 지내던 처소였다.
지금은 어쩌다 보니 견인이 같이 있지만 그곳은 저에게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곳이었다.
다른 이가 그곳에 왔다가 좋은 일이 있었던 적은 없었다.
“지금은 내가 바빠.”
그러고는 정말 바쁘다고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걸음을 빠르게 옮겨 버렸다.
서은우는 서서히 짜증이 났다.
요즘에는 이놈이나 저놈이나 전부 자기가 하는 말을 무시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사형이 오기로 한 시간에 처소를 비울까 생각도 했지만 주인도 없는 처소를 대사형이 드나들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특히 신경 쓰이는 것은 뒷마당의 매화나무였다.
위아래 구분을 못 하는 견인은 스승님이 가르쳐 주신 매화생공만큼은 완벽하게 해내고 있었다.
서은우 자신보다도 더 잘했다.
견인이 매화나무 앞에서 운기조식을 하는 것을 보면 매화나무와 그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했다.
다른 매화나무 앞에서는 해 보지 않았으니 자세히는 모르지만 그 나무가 견인에게 중요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서은우는 서둘러 처소로 돌아갔다.
기다리고 있다가, 대사형이 오는 게 보이면 그를 데려가 다른 곳에서 얘기를 나눌 참이었다.
***
심우진은 서은우와의 만남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민은 화산 내에서 여러 이유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뛰어난 검술과, 무공을 이해하는 직관도 그랬지만 한 떨기 매화 같은 아름다운 용모는 보는 사람들의 심장을 덜컹거리게 만들곤 했다.
심우진에게는 사숙이 되었지만 하민이 이대 제자 중에서 어린 축에 속해 나이 차이는 그다지 많지 않았다.
하민을 볼 때마다 그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결국 그와는 끝내 그럴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런데 어렸던 서은우가 자라자 하민을 꼭 빼다 박아서 그를 보면 시도 때도 없이 음심이 동했다.
심우진만 그리 느끼는 게 아니고 하민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 이야기를 하곤 했다.
하민이 다시 살아 돌아온 것 같다고.
누군가는 하민의 마지막 모습보다 서은우가 더 화사하게 빛난다고 말하기도 했다.
스스로 빛을 뿜는 것처럼 찬란할 뿐만 아니라 희디흰 피부와 매끄러운 살결, 가늘고 고운 선을 보고 있노라면 가학심이 들곤 했다.
심우진은 견인이 삼대 제자들과 수련을 하는 시간을 골랐다.
지금이라면 서은우의 거처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아무도 알지 못할 터였다.
처소에 이르자 서은우가 나와 있었다.
그러다가 급한 걸음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하실 말씀이 있거든 다른 곳에서 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왜 그래, 은우 사제? 영약이라도 숨겨 뒀어?”
그는 서은우의 말을 간단히 무시했다.
서은우에게만큼은 언제나 상냥하고 자애롭게 굴었지만 지금만큼은 가면을 벗기로 마음을 먹었다.
서은우도 심우진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대사형!”
심우진은 대답 없이 안으로 들더니 방까지 성큼 들어가 버렸다.
서은우는 다급한 마음에 그를 따라갔다.
그 안은 저와 견인의 공간이었다.
못마땅한 견인이었지만 그래도 제 제자였다.
아무리 대사형이라고 해도 제 공간에 그리 함부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었다.
서은우가 안으로 들어가자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심우진이 그의 가느다란 손목을 잡아챘다.
그러고는 짐승처럼 손목에 코를 박고 체향을 맡으며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뭐, 뭘 하는 겁니까!!”
서은우가 손을 빼내려 했지만 심우진의 힘을 당해 낼 재간은 없었다.
“은우 사제, 내 것이 되어라. 오늘 너를 취할 것이다.”
서은우는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를 보는 심우진의 얼굴에 웃음이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