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화.
“이리 방치할 상처가 아니었을 것 같은데.”
의당주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말씀드릴 수 없는 사정이 있으니 고칠 수 있는지 없는지만 말씀해 주시지요. 포기하고 있어서 고칠 수 없다고 해도 실망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서은우가 말하자 의당주가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나를 만나려고 찾아온 게 아니라 당문에 의술을 잘하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온 모양이구려. 이러면 이 노부를 무시하는 것이 되오.”
나는 서은우를 바라보았다.
그동안 원하는 것이 없는 것 같던 얼굴에 희미한 집념이 보였다.
소망해도 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든 듯했다.
의당주를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는 몰라도 이 기회는 놓칠 수가 없었다.
“준비할 것이 있소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오. 내일 이 시간까지는 준비를 마치도록 하겠소.”
“그게 정말입니까.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서은우의 얼굴에, 보기 드물게 적극적인 감정이 묻어났다.
“그럼 나는 대법을 준비하러 가겠소. 뒤틀린 기혈을 치료하고 혈맥을 강해지게 하려면 준비할 것이 제법 되어서 말이오.”
“필요한 비용은 말씀만 해 주십시오.”
서은우의 말에 의당주는 고개를 저었다.
“이 노부는 기대가 되오. 그러니 그런 말은 하지 않아도 되오.”
당문이 해결하기 벅찬 일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았다.
서은우를 고쳐 준 의당주에게 빚을 갚기 위해 그 일을 해결해 주고 싶었다.
나는 의당주가 이 일을 성공하기를 바랐다.
어떻게든.
***
서은우는 내원에 마련된 객당으로 안내되었다.
객당이 내원에 있다니 서은우로서는 바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제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팔이 불편해 그 아이가 함께 있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편함 없이 지내시도록 해 드릴 것입니다. 당문에 귀한 손님이 오셨는데 누추한 곳에서 머무시게 할 수야 없지요.”
소문주는 서은우의 말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며 말했다.
처음에 보이던 예의 바른 태도는 이제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대놓고 무례하게 구는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이제는 선을 함부로 넘는 것 같았다.
“그 아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곳에 와 본 적이 없어서 불안할 것입니다.”
“소협도 어지간합니다. 삼대 제자라고 하지만 나이로는 소협의 사제뻘 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리 치마폭에 싸고 부둥부둥하듯이 하는 것도 웃기지 않습니까.”
서은우는 이럴 것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 자리에 멈췄다.
“제가 당문의 의당주님에게 도움을 받고 싶은 욕심에 눈이 어두웠던 모양입니다.”
그러자 소문주의 눈이 가늘게 휘어졌다.
‘이렇게까지 나온다고?’
당문은 많은 곳에 귀를 두고 있었다.
하민이라는 전무후무한 무공천재의 등장은 당문 뿐만이 아니라 모든 무림이 관심을 가졌다고 해도 무방했다.
화산의 장문인이 그 하민을 시켜 특별한 내공심법을 연구하게 했다는 이야기는 비밀리에 당문에도 들어왔다.
그 하민의 제자다.
갑자기 하민이 사라지고 화산은 뚜렷한 전력의 변화가 없었다.
고수가 전보다 더 많이 나타난 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하민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하민의 제자인 서은우에게 특별한 관심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렇게 대단한 미인이라니.
서은우를 곁에 둘 수만 있다면.
소문주는 서은우를 본 순간부터 그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문주는 소문주에게 약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자신의 핏줄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를 소문주로 세우지는 않았을 것이다.
“명현 소협, 제자라고 하지만 실은 정인이 아닙니까. 제자를 아끼는 스승의 모습이 아니라 꼭 정인을 찾는 것 같습니다.”
소문주는 서은우를 희롱하듯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서은우는 꼭 그가 예상했던 반응을 보였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아무리 은혜를 베풀었다고 해도 말은 가려서 하십시오.”
“그러겠습니다. 알았으니 소협은 이제 침소에 들어 편히 쉬세요. 내일 중요한 대법이 있지 않습니까.”
서은우는 그 말을 무시한 채 걸음을 옮겼다.
처음에는 조금 빨리 걷는 정도였지만 다음에는 아예 달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소문주도 당황했다.
그도 서은우가 이렇게까지 할 거라고는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소협!”
그러나 서은우는 더 이상 소문주의 부름에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가 무슨 짓을 벌이려고 하는지는 몰라도 여기서 조금 더 시간을 지체했다가 견인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제 잘못으로, 제가 책임져야 할 때 이런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랬다가 나중에 스승님을 어떻게 보라고.
서은우는 그 생각으로 객당을 달려 나갔다.
그러려 했다.
그러나 무슨 일인지 갑자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달리려고 하는데 다리가 굳은 듯이 그 자리에 멈춰 버리는 바람에 서은우는 앞으로 쓰러졌다.
무슨 일인가 하고 있을 때 그 기운이 차츰 위로 퍼져 갔다.
그는 왼손을 움직여 보았다.
처음에는 움직였는데 나중에는 그것마저 움직이지 않았다.
그래서 서은우의 손은 딱 검집을 잡는 것에서 멈췄다.
다가온 소문주가 밝게 웃었다.
“어차피 여기로 온 것은 화산에서 아무도 모를 것이고 그놈들은 무림맹 사천지부나 쑤셔 대겠지. 그동안 즐거운 시간을 가져 보자고, 예쁜 도사님.”
말을 하며 소문주가 서은우를 안아 들었다.
그는 서은우에게서 풍기는 체향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처음부터 그랬다.
자기가 어떻게 지금까지 참아 왔는지 그게 믿기지 않을 뿐이었다.
***
의당주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견인을 노려보았다.
“앞이 안 보인다더니 잘도 노려보네.”
견인은 그렇게 말하고 혈을 짚었다.
“의술을 익힌 사람이니 잘 알고 있겠지? 이 혈을 몇 시진이 지나도록 풀지 않으면 몸을 아주 못 쓰게 될 수도 있어. 그러니 내가 무사히 돌아오기를 바라야 할 거야. 그것도 빨리 말이야. 자, 그럼 내가 이제부터 어디로 가야 하는지 말해 봐.”
의당주는 할 말을 잃었다.
이렇게 멍청한 놈이 다 있나 싶었다.
이따위 놈이 혈을 짚는다고 해도 자신의 내공으로 충분히 점혈한 것을 풀 수 있었다.
일단 그의 생각은 그랬다.
그런데 그 생각이 훤히 들여다보인다는 듯이 견인이 말했다.
“당신이 혈을 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과연 그럴까? 내가 점혈한 건 아무도 못 풀어. 지금까지 누구도 못 했거든. 그 자랑을 할 시간은 없으니까 스승님이 어디에 계신지나 빨리 말해.”
“나를 잡아 두고 네놈이 무사할 줄 아느냐!”
“그럴 것 같은데? 당신이 여기에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 있을까?”
의당주는 한숨을 쉬었다.
화산의 제자라는 놈이 불문곡직하고 자신을 납치할 거라고 어찌 상상이나 했겠는가.
왜 자신을 가둔다는 것인가.
지금껏 그는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눈이 보이지 않는 척해 왔고 일단 그렇게 하면 모두 그에게 속았다.
그런데 이 자는 뭘 보고 알았다는 것인가.
견인이 그것을 알아낸 것은 우연이었다.
대법을 받을 때까지 준비할 게 있을지 물어보려고 돌아갔다가 의당주와 소문주가 같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 모습이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 그때부터 기척을 숨기고 다가가 그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다.
의당주는 의심스러운 약을 건네며 그것의 약효를 설명했고 소문주는 그것을 받아 들었다.
소문주를 바라보는 의당주의 눈은 맹인의 것이 아니었다.
견인은 서은우에게 잠시 구경 좀 하겠다고 말하고 의당주가 혼자 있을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그의 혈을 점해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들쳐 업은 채 신법을 펼쳤다.
의당주는 그 일을 당하고도 자기가 방심해서 당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화산의 삼대 제자 따위에게 당해 몸을 움직이지 못한 채 납치당했다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있을 때 견인이 그의 이마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아직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야? 내가 이 혈을 풀어 주지 않으면 당신은 어떻게 될까?”
의당주는 더 이상 시간이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 내원에… 객당이 있다. 소문주가 지내는 처소의 옆에 있는 전각이다. 내원에 들어가면 전각이 세 채가 나오는데 그곳을 지나서 좀 더 들어가면 다시 세 채가 나온다. 그중 가장 안쪽에 있는 곳이다. 경비가 삼엄해서 네놈이 간다고 해도 안으로 들어가지는 못할 것이다. 네놈이 손님으로 들어왔을 때는 모르지만 몰래 들어가려고 하면 기관진식에 몸이 찢어질 것이다.”
의당주는 견인을 말리고 싶었다.
이대로 견인이 서은우를 구하겠다고 간다면 자기는 영영 몸이 마비될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점혈을 풀어 보려고 시도를 하고 있지만 계속 실패하고 있었다.
“원하는 것을 주겠다. 금자 천 냥도 줄 수 있다. 그러니 나를 풀어 다오!!”
그러나 견인은 이미 그 말을 듣고 있지 않았다.
***
내원 무사 하나를 붙잡아 그의 목에 검을 밀어 넣고 기관진식을 피하며 들어오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와 마주치고 견인을 막으려 한 자들은 모두 불귀의 객이 되어 쓰러져 있었다.
그는 의당주가 말한 곳까지 쉬지 않고 경공을 펼쳤다.
그리고 서은우를 찾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마침내 서은우를 발견했을 때 견인은 우뚝 멈췄다.